체제대붕궤體制大崩潰
선황무기選皇無期
황을 뽑는 건 기약하기 어렵고
각자칭제各自稱帝
다들 자신을 제라고 부른다
청제는 법술로 형천을 공격하는 동시에 바닥에 떨어진 팔을 주워 붙였다. 그러나 팔꿈치 근처에서 잘린 팔은 붙을 기미를 전혀 안 보였다.
하늘과 땅도 가른 반고의 개천부다. 비록 오작이 작은 흠을 냈다고는 하지만, 침암불괴신으로 엄청 단단한 즙무혼의 머리도 베었다.
청제의 팔을 베는 건 일도 아니고, 떨어진 팔은 영원히 붙일 수 없다.
그러나 형천의 도끼가 반고의 개천부라는 사실도 모르고, 이 도끼가 즙선기의 몸을 빼앗아 침암불괴신을 달성한 즙무혼의 머리를 벤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청제한텐 그저 청천벽력이었다.
"잔잔혈潺潺血 무무림茂茂林."
졸졸 흐르는 피에 무성한 숲. 시동어가 끝나자 병사들 몸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출혈로 얼굴이 창백해진 병사들은 오 장이나 되는 성벽을 사다리도 없이 손으로 잡고 기어 올라갔다.
청제는 다시 도끼를 들고 덤비는 형천을 불덩이를 폭발 시켜 날린 후 허공에 파란 불덩이 세 개를 쏘았다.
그러곤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다.
"허. 오작이 시킨 대로 하니까 대승이구나."
치우나 형천이 아무리 강하고 용맹해도 잘 무장한 병사와 방어력이 강한 장수 몇 명이면 묶어둘 수 있다. 정면으로 붙으면 꽤 선전하겠지만, 결국 지는 건 구려국이다.
그런 상황에서 지장술을 익힌 형천 하나로 전세를 뒤집었다. 하루 전에 형천이 모습을 드러내고 치우가 활약한 건 상대의 주의력을 치우한테 몰아가려는 계책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형천보다는 술사 백 명을 단칼에 죽이고 괴이한 법술로 병사들을 홀려 미치광이로 만든 치우를 훨씬 염두에 두게 만든 것이다.
"대승은 아닙니다. 병사 구천이 남았습니다."
말을 마친 형천은 몸을 돌려 성벽을 기어오르는 청제의 병사들을 덮쳤다. 구망 역시 법술로 구려국 병사들의 방어력과 회복력을 높여줬다.
'제길. 이번만큼은 내가 틀리길 바랐는데.'
뇌공은 다시 소환한 뇌호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이번에도 뇌룡이 아닌 뇌호가 소환되어 분한 마음도 있지만, 청제가 쏘아 올린 세 개의 푸른 불덩이를 본 탓이 더 컸다.
완패했으니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목숨을 보전하라는 신호다.
"가라. 구려국의 왕을 죽이는 자는 내가 책임지고 오장국 국왕이 되게 한다."
뇌공은 구려국의 왕이 아닌 성벽을 목표로 했다. 뇌호는 발톱을 강하게 휘둘러 성벽을 길게 무너뜨렸다.
미리 알았다면 치우가 달려가서 막았을 테지만, 왕을 보호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기에 뇌호의 목표가 성벽임을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
성벽이 태반이나 무너지자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렸다. 미친 듯이 달리는 병사들과 달리 뇌공은 조금씩 뒷걸음쳤다.
마찬가지로 동쪽 성벽을 맡은 풍백 역시 청제의 신호를 확인했다.
"돌격. 우리 편이 성벽을 넘었다고 한다."
풍백이 법술을 펼치자 나무 사다리들이 날아서 성벽에다 대였다. 그리고 조잡하게 만든 나무 방패 수천 개가 하늘에 떠서 화살을 막아줬다.
아군이 형양성 성벽을 넘었다는 말에 용기백배한 병사들이 사다리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구려국의 병사가 정예이고 연맹국들도 국가의 사활이 걸린 일이라 정예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수비군은 채 천 명도 안 되고 공격하는 자들은 삼천 명이나 된다.
게다가 상대는 법술의 보호로 아무런 걱정도 없이 질주하고 있고, 성벽에 댄 사다리는 뜯어내도 다시 붙었다.
더불어 동쪽에서 불어오는 강풍이 수비군들을 크게 방해했다. 몸을 쉽게 못 가눌 정도로 세찬 것도 있지만, 자욱한 먼지를 일으켜 시야마저 방해했다.
풍백은 병사들 대부분이 성벽을 넘은 후 승풍술을 펼쳐 도망쳤다.
얼마 안 지나 알묘조장의 법술로 높고 두껍게 키웠던 성벽도 무너졌다.
"괴물이다!"
구려국 병사들이 길목을 잘 지킨 덕분에 청제의 군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왕궁 앞으로 몰렸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동쪽과 서쪽과 남쪽의 세 부대가 비슷한 시기에 도착했다.
어림잡아 오천 명이 넘은 병사들 사이로 치우가 뛰어들었다.
다리 여덟에 머리 셋 그리고 팔 여섯인 치우는 손에 여섯 개 무기를 들었다. 동주철갑의 방어력은 웬만한 술사나 무인도 뚫기 힘들다.
그래서 치우 손에는 방패 따위가 없고 전부 크고 강한 무기뿐이었다.
"야, 그거 재밌다."
청제의 팔 하나 벤 형천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비록 영위앙의 목을 베진 못했으나, 연이어 흑제와 청제를 지장술로 공격했고 성공했다.
예전에는 평생 적표노를 직접 죽일 기회가 있을지 걱정이 컸는데 이젠 그저 때만 노리면 된다는 생각에 속이 든든했다.
"가르쳐 줄게."
치우 자신도 제대로 알고 펼친 게 아니다. 그러나 대충 말해도 잘 알아듣는 형천이라면 익힐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여섯 개의 팔로 여섯 무기를 휘두르며 종횡무진인 치우와 도끼 하나로 한꺼번에 십수 명씩 쓰러뜨리는 형천의 출현으로 청제의 병사들 사기가 엉망이 되었다.
더구나 네 개나 되는 법술을 받고 미쳐 날뛰던 자들이 법술이 끝나자마자 죽음을 앞둔 병자보다 더 허약해졌다.
"청제가 재상과 태사를 데리고 도망쳤다."
구려국 병사 중 하나가 외쳤다. 곧이어 다른 병사들도 외쳤고, 문을 꽁꽁 닫고 기도를 올리던 구려국 백성들도 목청이 터지라 외쳤다.
수만 명이 입을 맞춰 외치니 형양성이 흔들리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투항해라. 투항하는 자는 죽이지 않겠다."
기세가 완전히 기운 걸 확인한 치우는 무기를 거두고 주먹질했다. 치우의 주먹에 맞은 자는 기절하지 않더라도 바닥에 쓰러져 일어서지 못했다.
형천 역시 치우를 따라 도끼를 넣고 방패로 두드렸다.
끝까지 이를 악물고 반항하는 자들이 있어 전투는 반 시진 가까이 지속했다. 구려국 병사도 삼백 명 가까이 죽을 정도로 힘겨운 전쟁이었고, 형양성 백성도 천 명 이상 죽었다.
적은 이천 정도가 죽었고 포로로 잡힌 자가 오천은 되었다.
대승이었다.
"이젠 뭘 하면 되지?"
"급하게 청제를 죽이면 동부가 혼란이 올 거라고 했어."
청제가 구려국을 살려뒀던 것과 같은 이치다. 구려국이라는 구심점으로 반대파들을 최대한 뭉친 다음, 구려국을 통째로 삼켜 동부의 모든 힘을 자기 밑에 두려는 게 청제의 원래 계획이었다.
치우가 뜬금없이 나타나 둘째 왕자를 물리치고 왕세손이 되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성공했으면 동부의 힘이 절반 정도가 청제의 손짓에 움직이게 된다.
이젠 반대로 구려국이 청제를 살려두며 반대파들을 뭉치게 하며 주변부터 정리할 차례다.
"저들이 오제회의伍帝會議를 열어 새로운 황을 선출하면 어떡하지?"
새로 재상이 된 마협이 말했다. 무예도 출중하지만, 시야가 넓어 장군보다는 재상 자리가 훨씬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이제부터 왕은 창제蒼帝입니다."
형천의 말에 마협이 무릎을 탁 쳤다. 그러나 왕과 구망과 마준은 물론이고, 치우 역시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끔뻑였다.
"청제한테 남은 가장 큰 무기는 정통성입니다. 그걸 이용하여 다른 제들한테 동부의 일에 개입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북부야 자기 코도 닦기 바쁜 상황이니 걱정이 없지만, 중부와 남부는 다릅니다."
적표노는 구천현녀를 따르는 자들을 회유해야 하는데 줄 게 아무것도 없다.
신농이 농사짓는 법을 연구하여 널리 알린 덕분에 염환국은 식량이 풍족하다. 게다가 온갖 약초를 연구하여 크고 작은 병을 치료하는 처방을 만들어 염환국 사람들은 건강하고 장수한다.
신농이 죽어 사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국가와 세력이 염환국과 친분을 다지고 있다.
그걸 이기려면 적제도 뭔가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가진 재주라곤 창술밖에 없는 적표노다. 적제가 된 것도 원래 적제던 신농이 황이 되면서 얼떨결에 얻은 자리다.
그런 적제라면 청제의 요청에 반드시 응한다. 청제한테서 직접 얻는 재물도 어마어마하겠지만, 동부에서 청제를 도와 싸우며 약탈하여 얻는 재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창제라는 이름을 달아도 세상이 인정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을 텐데."
"강제명한테 제를 칭하라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공공한테도 말했죠."
형천은 흑제의 머리를 들고 쉬지 않고 구려국까지 달렸다. 다행히 그간 수련이 헛되지 않아 전보다 몇 배 빠른 속도로 움직여 전투가 일기 전에 도착했다.
왕은 오작의 당부대로 흑제의 머리를 공공한테 보냈다. 그 답례로 공공은 귀한 해저빙을 선물했다.
비록 이길 가능성이 채 일 할도 안 되지만, 형천은 오작의 계책을 충실히 따랐다. 강제명한테 칭제하라고 얘기했고 공공한테도 똑같이 말했다.
이렇게 되면 세상사에 큰 관심이 없는 백제와 분쟁을 싫어하는 황제, 남부에는 적제와 강제명, 동부에는 청제와 구려국의 왕이 제로 불리게 된다.
북부는 공공이 가장 먼저 제를 칭하겠지만, 야심이 큰 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공공이 흑제를 칭하진 않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공공은 현재 일황오제의 체제가 깨지길 바랍니다. 북부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품고도 지금껏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흑제가 되었다면 일황오제의 체제에 갇혀 손발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차라리 다른 이름으로 해서 현재 체제를 깨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게 낫습니다."
마협은 거듭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오작이 생각한 거라고 하지만, 형천도 이해 못 하고 그저 읊는 게 아니었다.
"그럼 바로 동부에 공표하고 각국에 편익조를 날리도록 하겠습니다."
마협은 여전히 이해가 덜 된 얼굴인 왕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술사가 많지 않아 어느 나라부터 편익조를 날릴지 순서를 정해야 한다.
그때. 편익조 한 마리가 날아서 치우의 귀에 앉았다.
"공공이 자신을 현제玄帝라고 칭했대. 그리고 강제명 역시 염제炎帝로 칭하고 남부를 통일할 것을 공표했어."
"그럼 난 이만 형한테 가볼게."
말을 마친 형천은 왕과 마준한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경공을 펼쳐 떠났다.
구려국의 병사와 백성들은 주검을 수습하고 포로들을 가두느라 며칠 분주했다. 치우는 적군의 시신을 천도시환술로 집에 보내야 하기에 부적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고, 왕은 마준 마협 부자와 함께 차후 계획을 짜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빙령도의 왕이 빙제氷帝를 칭하며 북해를 자신의 영토로 발표했다. 그리고 북해는 북부의 관할에 있지 않음을 선포했고, 현제를 칭한 공공이 동조의 발언으로 힘을 실어줬다.
멧돼지 요괴 인충은 성을 고씨로 바꿔 왕이 되어 묵제墨帝를 칭했다. 그 밖에도 몇몇 국가가 제를 칭하긴 했으나 형세에 별 영향을 주진 못했다.
희운이 용초국을 공격하여 함추뉴를 죽이고 황제를 칭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형천이 축융봉과 하루 걸리는 거리를 둔 때였다.
'세상이 형 말대로 흐르고 있어.'
북부의 상황은 조금 예측이 빗나갔지만, 강제명과 희운의 움직임은 오작의 말대로였다.
'근데 형은 정말 축융봉에 있을까?'
오작의 선견지명에 거듭 감탄하면서도 일말의 의심은 남았다. 오작은 청제를 물리친 후 축융봉에 와서 자신을 찾으라고 했다.
"천문天門의 형씨刑氏 가문의 적자嫡子 천이 뵙기를 청합니다."
형천의 가문은 축융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 염씨炎氏도 꽤 큰 가문이었다. 큰 가문끼리 혼인으로 사이를 돈독히 하는 게 드문 일도 아니어서 아예 남은 아니다.
"답이 없으시니 부득이하게 결례를 범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형천은 옷매무시를 단정히 한 다음 축융봉을 올랐다.
"생각보다 조금 늦었구나."
"청제가 며칠 늦게 왔습니다."
머리 빼고 온몸이 새까만 오작이 편한 웃음을 지으며 노양궁 대문 앞의 계단에 앉아있었다.
"먼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들려다오."
형천은 조리정연하게 청제와 싸웠던 것부터 시작하여 염제와 현제 그리고 빙제와 묵제의 출현을 알렸다.
"백제에 관한 소식은 아예 없어?"
"희운이 백제의 딸과 혼인한다고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런데 소소는 지금 금계동에 있잖습니까."
"칠선녀 중 다른 사람이겠지."
"아닙니다. 의선녀醫仙女로 불리는 소의선녀라고 소문이 퍼졌습니다."
오작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백제나 서왕모가 뭔가 꿍꿍이를 꾸미는 것 같구나."
"그리고 이상한 소문이 하나 있습니다. 염제가 된 강제명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상대가 적표노 아니고 황제랍니다."
"함추뉴 말고 희운 말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흑수해의 기운 때문인가?'
오작은 팔괘자수선의 덕분에 흑수해의 기운에 침습 당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하루에 몇 번씩 가슴이 답답하고 조급증이 일곤 했다.
아무래도 법보가 흑수해의 기운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해 강제명의 성정이 크게 변한 듯했다.
"네겐 좋은 일이구나."
"죽이지는 말아야겠지요?"
"모든 일엔 때가 있는 법이다."
밤새 오작과 대화한 형천은 축융봉을 떠나 염환국으로 향했다. 강제명한테서 병력을 조금 빌려 적표노를 노릴 계획이다.
- 작가의말
명분을 없애려면 기존 질서를 깨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해야 합니다. 항우가 패배한 건, 진시황이 하나로 합친 중원을 다시 쪼개서 나눠 통치하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시대에 역행했기에 결국 유방한테 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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