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십삼기風雲什參騎
홍분가인紅粉佳人
연지와 분은 가인에게
준마호걸駿馬豪傑
준마는 호걸에게
갈우는 풍운십삼기의 열여섯째다. 그 이유는 원래 풍운십삼기가 풍운이십이기였기 때문이다. 일곱이 죽고 둘은 팔다리가 잘려 폐인이 되다 보니 십삼기로 변했다. 죽거나 떠난 자들을 잊지 않으려고 갈우는 여전히 자신을 열여섯째라고 호칭했다.
풍운이십이기는 영위앙이 청제가 아닐 때부터 따른 자들로, 전원 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심성도 잔혹하다. 오장국을 얻은 영위앙이 몸을 사리기 시작하며 이들을 북쪽으로 보내기 전까지는 말 그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며 살았다.
"제길. 너무한 거 아니야?"
갈우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맞은편에 앉은 녹구한테 불평을 늘어놓았다. 몇 년째 술로 세월을 보내다 보니 고작 몇 대접 마셨는데 겁이 사라질 정도로 취했다.
"언젠간 우릴 불러서 요직에 앉힌다더니. 벌써 십 년이야."
사실은 구 년여지만, 누구도 고쳐주지 않았다. 어차피 술에 취해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으니까.
"제길. 구망도 죽였다며. 그럼 이제 된 거 아니야? 왜 우릴 계속 여기 처박아 두는 건데?"
갈우는 젓가락을 버리고 손으로 안주를 집었다. 젓가락이 자꾸 두 쌍으로 보이며 안주가 집히지 않았다.
"근데 말이지. 내가 듣기론 구망이 안 죽었다던데."
녹구가 입을 열었다. 술상에 앉은 사람은 여섯인데 녹구와 갈우만 풍운십삽기고 남은 넷은 어중이떠중이다. 둘에게 잘 보여 한 자리 꿰찰 생각뿐인 시골 뜨내기들이다.
"맞습니다요. 저도 들었는데 구망은 큰 상처를 입고 숨었답디다."
갈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술을 단지째 벌컥벌컥 들이켰다. 숨도 안 고르고 술 단지 하나 비운 갈우는 손을 바지에 싹싹 닦은 후 한쪽에 아무렇게나 팽개쳤던 몽둥이를 들어 허리춤에 꽂았다.
"갈우야. 또 어딜 가니?"
"가서 구망 찾아내 대가리 베고 영위앙 찾아간다."
한 잔만 더 하고 가라며 만류하는 뜨내기를 뿌리치고 갈우는 밖으로 나가 말을 찾았다. 갈우가 술에 취하면 혼자 뛰쳐나가는 게 한두 번이 아니어서 다들 시늉만 하다 말았지 진심으로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밖에 나오니 해가 중천을 향해 아득바득 달리고 있었다. 아직 점심도 되지 않은 시각인데 벌써 취한 거였다.
'젠장. 나도 늙었어.'
예전엔 며칠 밤낮으로 술을 마셔도 잘 취하지 않았다.
숨을 세게 들이키고 길게 뱉으니 어지럽던 머리가 좀 나아졌다. 갑자기 취해 있는 자신이 마음에 안 든 갈우는 우물로 향했다.
두레박으로 찬물을 퍼서 머리에 쏟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시원한 것도 잠시, 곧 머리가 빠개질 것처럼 아팠다.
취기로 오는 두통과 찬물을 부으면서 오는 두통이 겹친 것이다.
그래도 머리가 꽤 맑아진 데 만족하며 우물 안을 들여다봤다. 우물에 비친 얼굴에서 갈색 구레나룻 사이로 가끔 보이는 흰색이 눈에 거슬렸다.
'영위앙은 우릴 대체 언제까지 여기 처박아 둘 생각이지?'
고개를 돌리니 느릅나무에 묶은 자신의 말이 보였다. 윤기를 잃은 갈기와 듬성듬성 빠진 털 그리고 축 처진 귀가 눈에 아프게 들어왔다.
'우린 진짜 끝인 건가?'
과거에 영위앙의 선봉장으로 동부 칠십여 개 나라를 자기 집 안방처럼 드나들었던 시절이 그리웠다. 그간 약탈과 영위앙의 하사로 꽤 많은 재산을 모았는데,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깡그리 내줄 의향도 있다.
"형, 뭐 좀 먹고 가자니까. 배고파."
우렁찬 소리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러나 갈우의 눈에 들어온 건 키가 십이 척이나 되는 남루한 옷차림의 청년이 아닌 난생처음 보는 빼어난 준마였다.
온몸이 까매서 이마의 흰점이 유난히 눈에 띄는 말은 갈우가 이제껏 본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웠다.
더 놀라운 건, 바로 옆에 얼굴이 분칠한 것처럼 하얀 소년 곁에도 똑같은 말이 하나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마에 난 점까지 똑같아서 두 말이 쌍둥이가 분명하다고 생각되었다.
"우리 돈 없어. 그냥 길이나 물어본 다음 어서 떠나자. 운 좋으면 고기 좀 있는 들짐승을 잡을지도 모르잖아."
갈우는 급히 우물에서 찬물을 한 두레박 퍼서 머리에 부었다. 또 한 번 어마어마한 두통이 갈우를 괴롭히고 사라졌다.
술이 거의 깼다고 생각이 들자 갈우는 말을 끌고 걷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덩치가 큰 청년은 옷이 찢기고 해져서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하얀 얼굴의 소년은 귀해 보이는 자색 옷을 입었다.
신발 없이 맨발인 건 조금 의아했지만, 곁의 준마에 어울리는 고귀한 출신이 분명했다.
"잠깐 실례하겠소."
"무슨 일입니까?"
하얀 얼굴의 소년이 듣기 좋은 서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디에 사는 뉘시오?"
갈우는 최대한 예의를 차리려고 했지만, 평생 살인과 약탈 그리고 방화로 살아온 놈이 제대로 된 대화 방식을 알 리 만무했다. 그래서 말투만 점잖고 내용은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초면에 이렇게 캐물으니 당황스럽군요. 우리는 북부 출신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입니다."
오작은 상대가 계속 캐묻는 것을 차단했다. 물에 흠뻑 젖어 외양이 볼품없기는 해도 상대의 옷차림을 보면 일반 신분이 아니었다. 괜히 동부 출신이라고 하면 어느 나라인지 꼬치꼬치 캐물을 거고, 대부분 시간을 천일도에서 산 둘은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크다.
"하하. 그대들이 무사하게 태산을 넘어 북부로 갈 수 있게 도울 수 있는데."
갈우는 두 필의 말을 연신 흘끔거리며 말했다. 이 정도 눈치를 줬으면 보통 말 한 필은 내놓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둘은 갈우의 뜻을 모르는지 눈만 끔뻑였다.
"태산 주변엔 요괴가 가득하고 마수도 심심찮게 나타나오. 말 한 필을 양보하면 내가 안전한 길을 알려주고 옷과 재물도 좀 드릴 수 있소."
"그러자."
치우가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치우의 말투가 조금 거슬렸으나 갈우는 참기로 했다. 저 준마만 얻으면 영위앙도 자신을 더는 얕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없던 인내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어서 날 따라오시오."
갈우는 오작이 보통 신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괜히 녹구까지 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면 거래가 깨질까 봐 노심초사했다. 괜히 둘 다 얻으려다가 하나도 못 건질 것 같다는 생각에 다급히 주점을 떠났다.
다행히 녹구는 네 아첨쟁이와 즐겁게 술을 마시느라 밖의 상황에 무관심했다.
갈우는 치우가 끌고 가던 말을 받기로 하고 둘이 입을 옷과 재물을 내줬다. 궁벽한 시골인 이곳은 옷 만드는 솜씨가 서툴러 크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너무 커서 그저 모셔두던 옷 중 일부는 치우가 억지로나마 입을 수 있었다.
"이건 내 관인을 찍은 태산 지도요. 이걸 보여주면 트집 거는 사람이 없을 거요. 내가 태산을 지키는 수비대의 참장參將이요."
"이렇게 돌봐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아니요. 거래에 응해줘서 내가 더 고맙소."
"홍분은 가인에게 주고 준마는 호걸에게 가는 법이죠. 호걸의 풍채가 늠름하여 오늘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부디 준마를 얻은 후 보검도 얻어 천하를 호령하기를 바랍니다."
오작의 말에 감동한 갈우는 둘을 마을 밖까지 바래고 돌아왔다.
"야, 이 거지새끼들아."
집에 돌아온 갈우는 바로 머슴들을 모조리 불렀다.
"너희 넷은 좋은 나무를 구해 저 말에 어울리는 마구간을 지어라. 너희 둘은 옆 동네 술 빚는 놈한테 가서 좋은 술로 한 수레 가져오거라. 그리고 넌 내 형제들한테 저녁에 잔치를 연다고 일러라. 잔치 이름은 준마연駿馬宴이다."
머슴들에게 일을 시킨 갈우는 말을 창고에 숨겼다. 잔치 도중에 창고 문을 열어 형제들을 깜짝 놀래줄 생각이었다.
갈우의 간절한 마음과 달리 해는 느릿느릿 서산으로 넘어갔다. 형제들은 잔치라는 말에 하나도 빠짐없이 달려왔다. 심지어 주점에서 저녁까지 술을 마신 녹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오늘 이놈이 귀인을 만나 좋은 말을 얻었소. 어서 창고를 열어 형제들한테 준마의 풍채를 보여라."
약삭빠른 머슴이 달려가 창고 문을 열었다. 둔각의 늘씬한 자태를 본 갈우의 형제들은 술이 깰 정도로 놀랐다. 청제를 따라 동부는 물론 중부와 북부도 일부 돌아다닌 적 있지만, 저 정도로 멋진 말은 난생처음이었다.
부러움과 시기와 질투. 수많은 감정이 섞여서 풍운십삼기를 흥분케 했다. 술이 여느 때보다도 빨리 동나서 가까운 주점에 있는 술까지 다 끌어왔다. 그렇게 새벽까지 마시고 모두 기진맥진했다.
"갈우야. 네게 복이 들어왔어. 청제께서 우릴 다시 중용할 거라는 길조인지도 몰라."
"청제가 우릴 계속 외면하면 딴 데로 갑시다. 북부나 중부에 가도 우리 풍운십삼기의 명성이 먹힐 거요."
몇 년 동안 의기소침해 지냈던 풍운십삼기는 다시 호기를 되찾았다.
"이 거지새끼야. 어서 창고에 가서 말을 꺼내."
갈우는 꾸벅꾸벅 조는 머슴들에게 호통쳤다. 그리고 곧 고개를 돌려 대형한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까워서 아직 나도 타지 않았소. 형님께서 먼저 한 번 타보시오."
창고 문이 열렸다. 그러나 기대했던 준마의 늘씬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뭐냐.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사라진 말은 당연히 치우와 오작 곁으로 갔다.
"하하. 그 멍청한 놈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꼭 봤어야 했는데."
"나쁜 대처는 아니었어. 그런데 그놈이 하필 태산을 지키는 수비대였다니. 재수가 좀 없구나."
치우는 갈우를 골탕 먹일 목적으로, 오작은 괜한 잡음을 만들기 싫어서 거래에 응했다.
둔각은 자정이 지난 후 다시 하나로 합쳤다. 문제라면, 분리와 합체를 자주 할 수 없기에 당분간은 치우와 오작은 말 한 필을 번갈아 타야 한다.
"그놈이 수비대에 소식을 전하면 우릴 못 가게 막을 텐데."
"그럼 안전한 길 말고 여기로 쭉 곧게 가면 되잖아."
지도에 표시된 대로 안 가고 곧게 가면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태산을 넘을 수 있다. 그러나 안전한 길로 가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소식을 전하는 편익조보다 빠를 수 없다.
"요괴의 법술은 상리常理를 벗어난 게 많아. 재수 없으면 우리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
안전한 길로 가면 정예 부대인 태산 수비대와 부딪쳐야 하고, 빠른 길로 가면 무슨 능력을 갖췄는지 모를 요괴와 엮여야 한다.
"치우야.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게 이런 거야. 그놈이 태산 수비대랑 연관이 없다면 참 좋은 거랜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알았어. 쉬운 길만 찾지 말고, 상황을 자신한테 유리하게만 해석하지 말라는 말이잖아. 너무 들어서 귀가 아파."
"너도 내 나이가 되면 잔걱정이 늘 거다."
오작의 말에 치우는 배를 그러안고 웃었다. 외모만 보면 치우는 스물 넘은 청년이고 오작은 열여섯 정도로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다.
치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얼굴로 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니 안 웃고 배길 수 없었다.
"형. 어차피 둘 다 좋은 결정이 아니니까 빨리 정하자. 어떻게 할 거야?"
"곧게 가면 요괴 하나만 상대하면 돼. 그런데 돌아가면 태산 수비대를 상대해야 하고, 정체를 들키면 청제가 파견한 자들도 상대해야 할 거야. 그러고도 태산을 넘지 못하면 결국 요괴들의 영역을 통과해 북부로 넘어가야 하고."
"그럼 빠른 길이 답이네. 뭘 고민해?"
"이렇게 빠른 길이 있는데도 멀리 돌아가는 안전한 길을 만든 걸 보면 느끼는 게 없어? 엄청 상대하기 힘든 요괴라는 거잖아. 그리고 강한 적보다는 모르는 적이 더 위험하다고 내가 몇 번 말했어."
"태산 수비대도 모르는 적이고, 청제가 어떤 놈들을 파견할지도 모르고, 태산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데 거기서 어떤 요괴를 만날지도 모르고. 차라리 셋 모르는 것보다 하나 모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 빠른 길로 가자. 근데 말이야. 괜히 날 이기려고 이런 결정 내린 거라면 반성해야 할 거야. 네 직감 혹은 추론으로 이 길이 낫다고 판단한 게 아니라 그저 나랑 다른 주장을 하고 싶은 거라면 이후 자제해."
치우는 입을 삐쭉이며 불만을 표했다. 삼태극을 이룬 후 법력이 빠르게 늘며 자신감이 붙고 있는데, 오작은 늘 말로 자신을 눌렀다.
갑자기 강해지며 교만할까 봐 걱정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섭섭했다.
"형은 내가 애로 보이지?"
"너 지금 열세 살이야. 당연히 애지."
"내가 열넷 돼도 애처럼 볼걸?"
"그럼. 네가 열넷이면 난 서른넷인데."
엉뚱한 생각을 떠올린 치우가 킥킥거렸다.
"어른 되자마자 결혼했으면 지금쯤 할아버지 됐겠네."
할아버지란 말에 구망의 노쇠한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이 구망처럼 된다는 생각에 오작도 헛웃음이 나왔다. 총명한 오작이지만, 대부분 사람처럼 자신이 늙는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이 길이 위험하다는 걸 명심하고. 태극구도 없으니 늘 경각심을 늦추지 말자."
태극구는 육지를 밟고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수면에 들겠다고 통보했다. 통보하자마자 잠들어서 왜 자는지 이유도 모르고 언제 깰지도 모른다.
"나 어린애 아니라니까. 잔소리 좀."
- 작가의말
자신이 늙을 걸 생각 못 하는 오작. 자신이 어린애 아니라는 치우.
이래서 회귀물이 대세인가 봅니다. 어른 흉내 내며 했던 멍청한 짓들, 아깝게 흘려보낸 청춘. 언젠간 한 번 도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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