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각파란출臀角破卵出
태극보인太極寶印
태극보인을 얻으니
대공소성大功小成
작은 성취는 이뤘구나
하늘은 옅은 푸른색, 바다는 짙은 푸른색. 두 푸른색이 멀리서 흐릿하게 만난다.
섬에서 사방을 아무리 살펴도 하늘과 맞닿은 바다만 보인다. 해도와 대조해도 의심 가는 곳이 몇 군데나 되어 지금 위치가 어딘지 확실치 않다.
[너 생각보다 대단하구나.]
섬에 머문 지 한 달이 되었다. 오작은 이미 일월동휘를 몸에 새겼다. 오작의 단전에서 느릿하게 돌아가는 태극 문양이 바로 그 증거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럼 어제 이야기를 이어볼까?]
"그러죠. 제가 열 살이 조금 넘었을 땝니다. 돈이 떨어져서 숙부가 의뢰를 맡았습니다."
태극구는 오작 주변을 휙휙 맴돌며 흥미진진하게 경청했다.
오작은 태극보인을 얻은 후 법력 수련을 멈췄다. 혹시나 내공이 늘지 않을까 기대하며 매일 수련했는데, 이젠 가만히 있어도 법력이 절로 모이니 굳이 수련으로 확인할 필요가 사라졌다.
게다가 인위적인 수련보다 태극보인으로 자연스럽게 쌓이는 기운이 훨씬 순도가 높고 성질도 순했다.
오작은 기존에 쌓인 기운을 조금씩 버리며 태극보인이 모은 기운으로 갈아치우는 작업에 열중했다.
그렇게 날이 조금씩 어둑해질 때.
"형, 좀 봐줘."
치우가 슬픈 목소리로 애원했다. 두 번 실패하고 세 번 만에 태극보인을 만든 오작과 달리 치우는 이미 백 번도 실패했다.
기운 다루는 솜씨가 훌륭하여 하루에 열 번도 더 시도하지만, 늘 실패했다.
[저놈은 단전에 이상한 기운이 있어. 그래서 너랑 다르게 삼태극參太極으로 해야 해.]
"삼태극?"
[삼태극을 모르는 건 아니지?]
"음양에 음양오행이 아닌 기운을 하나 섞은 태극을 말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도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정도가 아니긴. 삼태극이 원래 정도야. 세상이 안정되며 음양오행이 아닌 기운이 약해지고 사라져 삼태극 이루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태극구는 오작에게 삼태극을 자세히 가르쳤다. 머릿속으로 여러 번 되새기며 이해한 오작이 더 쉬운 말로 치우에게 풀이했다.
"아무래도 귀령성모의 기운이 특이한가 봐. 그래서 넌 삼태극을 이뤄야 해."
사실은 귀령성모가 아닌 귀갑어 내단의 기운이다. 한두 개면 단전이 알아서 천천히 없앴겠지만, 정기적으로 내단을 삼키는 바람에 단단히 뭉쳐 자리 잡았다.
"알았어. 열심히 할게."
켕기는 게 있는 치우는 평소와 달리 투정을 줄이고 고분고분 수련했다. 그러나 기운의 움직임은 훌륭해도 이해가 부족하여 마지막 순간에 어김없이 실패했다.
"괜찮아. 이해 안 되는 거 나한테 계속 물어봐. 넌 천재니까 배 만들기 전에 꼭 성공할 거야."
햇볕 잘 드는 바위 위에 굵기와 길이가 제각각인 나무가 몇 개 있었다. 모두 바다에 떠다니는 걸 오작이 건져온 거다.
치우는 귀갑어의 구애 때문에 함부로 바다로 내려가지 못했다.
그렇게 또 한 달이 흘렀다. 나무 몇 개 더 건져서 작은 뗏목은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폭풍우를 만나면 파도만으로도 박살 날 게 뻔하기에 오작과 치우는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또 보름이 흐르고, 치우가 드디어 삼태극을 완성했다.
"와. 가만히 있는데도 세상의 기운이 막 몰려들어. 나 곧 엄청나게 강해질 거야."
[속도는 너보다 느리지만, 안정성은 훨씬 낫지. 머리가 둔한 저놈한텐 오히려 삼태극이 어울려.]
"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전혀 느낌이 없습니다."
오작의 말에 태극구가 껄껄 웃었다.
[네놈은 운 좋은 줄도 모르는구나.]
"제가 운이 좋다고요? 그럼 세상에 운 나쁜 사람이 없겠습니다."
[영예주로 수련하는 독한 놈아. 백 중 하나가 성공하는 걸 해내고도 운이 나쁘다고?]
"치우야, 조용히 해."
오작은 둔각이 변한 알을 안고 기쁨에 차 환호하는 치우를 침묵시켰다. 치우는 오작의 굳은 얼굴을 확인하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자세히 말해 주십시오. 저는 누군가의 흉계로 영예주에 당한 겁니다. 수련이라니 무슨 말씀인지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사실 영예주는 수련 용도로 만든 법술이다. 그러나 인간은 심성이 악독하여 어떤 좋은 것도 나쁜 용도로 잘 써먹지.]
"중언부언은 삼가지요."
[알았어. 너 인간의 수련 적정기는 잘 알겠지?]
"몸의 기운이 안정된 순간부터 몸의 기운이 쇠락하기 전까집니다."
[그래. 그런데 영예주로 몸의 성장을 제어할 수 있다면?]
벼락이 뇌리를 스쳤다.
[기운이 안정된 순간 영예주를 거는 거야. 그 상태에서 기초를 닦아. 그리고 저주를 조금 풀고 몸이 성장해. 그때 초식을 익히는 거지. 그리고 또 성장해서 그 단계에 가장 알맞은 수련을 하는 거야. 그렇게 네 단계의 수련을 거치고 마지막에 저주를 완전히 푸는 순간.]
오작은 태극구의 말에 빠져 덩달아 숨을 멈췄다.
[어마어마한 고수가 되는 거지. 그게 법술이든 무공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제때 저주를 못 풀면요?"
[뭐, 그냥 죽는 거지. 그런데 영예주는 푸는 게 어렵지 않아. 거는 사람보다 경지가 두 개만 높으면 되거든.]
오작은 잠깐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저는 태어나자마자 영예주에 걸렸고, 네 살에 현무루를 마시고 저주를 한 번 풀었고 스물넷에 주작란을 먹고 저주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스물넷에 청룡주를 먹었는데 스물여섯에 몸이 성장했습니다."
이번엔 태극구가 놀랄 차례가 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영예주에 걸리고도 사 년이나 살았다고? 게다가 두 번째 저주는 이십 년이나 걸려서 풀었다고?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구나. 진짜 수련 목적으로 건 게 아니었네. 현무루나 주작란을 먹어야 풀릴 정도면 어마어마한 술사가 걸었다는 뜻인데.]
"짐작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아는 사람이 적어서 말이지. 대봉래가 될 때마다 들리는 대화로 세상 돌아가는 건 대충 알지만, 아는 사람은 얼마 없어. 내가 아는 범위에서 그 정도 능력이 되는 건 셋뿐이야.]
"말씀해 주세요.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고 싶을 뿐이니깐요."
[통천교주, 다보도인 그리고 무당성모. 다보도인은 통천교주의 첫 제자고 무당성모는 셋째 제자야. 너희 손에 죽은 귀령성모가 넷째 제자고.]
"그렇게 대단한 여자였어요?"
[대단치 않아. 통천교주가 네 번째로 받은 제자여서 그나마 대접받은 거야. 머리가 멍청하고 천성이 게으르며 싸우는 법도 잘 몰라. 싸울 때 법력 낭비가 엄청 심한 거 너도 알지? 방어력을 타고난 데다가 내 덕분에 기운이 마르지 않아서 그렇지. 쉽게 지지 않을 뿐, 잘 이기지도 못하는 멍청이야.]
삼천 년이 넘은 기간 자신의 부름을 무시한 귀령성모를 태극구는 몹시 박하게 평가했다.
일월주 덕분에 법력이 마르지 않기에 강한 공격형 법보만 있으면 귀령성모도 큰 몫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천교주는 귀령성모의 멍청함을 잘 알기에 귀중한 법보를 내주지 않았다.
심지어 일월주가 잘못된 이름이라는 사실과 저장계 법보가 아니라는 사실도 말해주지 않았다. 많은 재물을 받고 법보의 등급이 선천영보라는 것만 살짝 흘렸다.
오작은 통천교주의 강함을 자단에게 들어서 잘 안다. 그러나 자단은 사형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언급한 적 없다. 그저 성격이 어떻고 무슨 무기를 쓰는지 정도만 간단히 얘기했다.
"다보도인이나 무당성모는 귀령성모보다 얼마나 강합니까?"
[법보를 안 쓰고 법술로만 죽일 수 있을 정도? 귀령성모처럼 방어력이 강한 술사는 매우 강력한 공격 하나면 끝장이야. 방어력을 믿고 피하는 걸 잘 못 하거든. 넌 강한 수호계 법보를 얻었다고 회피 수련을 게을리하지 마. 새로운 법술과 변형 법술이 계속 생겨나는데, 법보나 방어력 따위를 믿고 공격을 맞아주는 놈이 멍청한 거야.]
"그럼 접인보다 더 강하겠군요."
[응. 접인은 도행이 높은데 싸움은 잘 못 해. 사실 술사 중에서 싸울 줄 아는 자가 몇 없지. 목숨 걸고 싸운 적이 별로 없을 테니까.]
오작은 자신의 원수가 엄청 강하다는 사실에 작은 좌절감을 느꼈다. 자단과 함께 돌아다니며 온갖 고생을 다 겪었기에 고난을 극복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그래도 해야겠지. 내게 저주를 건 자가 부모의 원수일 가능성이 크니까.'
그러나 진정한 사내는 지난이진知難而進(어려움을 알면서도 나아감)해야 한다. 모르고 무작정 덤비는 건 무모하고 멍청한 거고, 알면서도 도전하는 거야말로 사내의 품격이다.
"형, 괜찮아?"
치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내 적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더 강해져야겠지."
"나도 도울 테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 둘이면 세상 누구도 이길 수 있어."
"고맙다."
얕은 바다에서 조개나 굴 따위를 채집해 배를 채운 둘은 음양과 태극에 관해 대화를 나누다 잠들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 오작은 치우의 호들갑에 계획보다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형. 둔각이 사라졌어."
오작의 상식으론 알이 절로 사라질 리 없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치우가 헛소리할 아이는 아니지만, 분명히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사실이 있을 것이다.
몸을 일으킨 오작은 기지개를 쭉 켜면서 알을 보관한 곳으로 갔다. 헤쳐진 이불엔 반으로 쪼개진 껍데기만 있었다.
"부화했구나. 잘 찾아봐. 말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변했을지도 모르니까. 지렁이나 쥐 혹은 더 작은 거로 태어났을지도 모르니 함부로 밟지 말고."
치우와 오작은 매우 신중하게 움직이며 둔각을 찾으려고 했다.
[큭. 두 멍청이야. 태변 한 번으로 그렇게 큰 변화가 생기지 않아.]
"혹시 둔각의 행방을 아는 겁니까?"
[저기, 저쪽으로 갔다. 큰 소리로 부르면 달려올지도 모르지.]
오작과 치우는 눈을 마주친 후 함께 외쳤다. 둘 다 목소리에 내공을 듬뿍 실어서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둔각! 둔각!"
그때. 먼바다에서 하얀 물보라가 일었다. 그 물보라를 타고 둔각이 발굽을 놓아 달려왔다.
섬에 발을 딛자마자 크게 도약한 둔각은 오작과 치우 사이에 머리를 끼우고 거칠게 비벼댔다.
"얼굴이 길어지고 발굽이 커지고 다리가 가늘어졌어. 그리고 이마에 흰점이 생겼네?"
털은 여전히 빛을 탐스럽게 삼키는 짙은 검은색이다. 체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덩치만 조금 커졌다.
"근데 방금 둔각이 바다 위를 달렸잖아."
그제야 오작도 말이 바다를 밟고 달리는 게 정상이 아니란 생각을 떠올렸다. 걱정이 깊던 차에 둔각이 나타나자 반가운 나머지 그 놀라운 일을 간과했다.
"태극구. 혹시 둔각의 정체를 알아?"
[아니. 내가 하늘의 일은 꽤 아는데, 모르는 놈이야. 근데 나쁜 놈은 아닌 거 같아. 기운이 순하거든.]
"치우야. 둔각한테 계속 바다 위에서 달릴 수 있는지 물어봐."
그때, 오작의 말을 들은 둔각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예전엔 치우의 말만 알아들었는데, 이젠 오작의 말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럼 저 뗏목을 끌고 계속 달릴 수 있어?"
"밤에 안 자고 달릴 수 있지?"
"물 안 마셔도 괜찮고?"
거듭된 오작과 치우의 질문에 둔각은 모두 긍정적인 대답을 내놨다.
"됐어. 둔각이 뗏목을 끌고 달리면 돼."
치우의 덩치 때문에 둘이 함께 둔각을 타는 건 어렵다. 육지면 몰라도 높낮이 변화가 심한 바다에선 무리다.
게다가 얼마나 달려야 육지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둔각 등에 타면 잠을 자기도 어렵다.
그때, 둔각이 즐거운 울음소리를 냈다. 오작과 치우가 자신을 바라보자 네 다리를 교차하며 복잡하게 밟더니 둘이 되었다.
"뭐야!"
치우가 얼빠진 얼굴로 외쳤다.
"어떻게 한 거지?"
오작 역시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와. 궁금하다. 누가 저 말 모습을 한 놈한테 말 좀 가르쳐.]
태극구 역시 처음 보는 일이었다.
"이마의 점이 달라."
한참 두 말을 관찰한 오작이 둘을 구분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마 중간에 있던 흰점이 반으로 갈라졌다.
하나는 반원형 점이 왼쪽에 있고 하나는 오른쪽에 있었다.
"이렇게 하자. 치우 네 말은 좌백左白둔각이라고 부르고 내 말은 우백右白둔각이라고 부르자."
둘은 이불을 말 등에 올리고 밧줄로 잘 묶었다. 그간 모은 빗물은 밑동을 잘 막은 소라에 최대한 많이 담은 후 남은 건 모조리 마셔버렸다.
배가 똥똥하게 부르도록 물을 마신 후, 두 둔각 등에 각자 올랐다.
"이 섬도 정이 들었는데."
치우가 작은 바위섬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넌 남아. 난 간다. 둔각아, 달리자."
오작의 외침에 두 둔각 모두 발굽으로 땅을 찼다. 그리곤 곧 바다를 밟으며 서쪽으로 달렸다.
오작과 치우는 말이 바다를 달린다는 게 믿기지 않아 계속 밑을 내려봤다. 그렇게 한참 조심하다 둔각이 갑자기 바다에 풍덩 빠지는 일이 없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 후에야 겨우 안심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바다는 작은 바람에도 넘실대고 큰바람에도 넘실댔다. 그러나 바람이 어떻게 흔들어도 바다는 바다였다. 아무리 센 바람도 바다를 넘실거리게 할 뿐 흔들지 못했다.
'바다 같은 사람이 되자.'
- 작가의말
둔각파란출 - 둔각이 알을 깨고 나오다.
보통 사람이 알을 깨고 나오면 왕 되고 그러던데 둔각은 왕이 될 상이 아니라 말상이어서 실망입니다.
주인공이 걸린 영예주. 저주라기보단 수련용 법술입니다. 채 이십 년도 안 되는 수련기를 길게 늘이는 훌륭한 법술인데, 늘 그렇듯 악용하는 자들이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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