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조소오智慧鳥素烏
풍령역주風嶺易主
풍령의 주인이 바뀌어
소오당가素烏當家
소오가 차지하다
잘 익은 곡식을 먹고 포동포동 살찐 새가 은은한 모닥불의 열기에 노릇노릇 구워졌다. 그러나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하는 고소한 냄새에도 치우의 미간은 찌푸린 채였다.
"형, 우리 그냥 쳐들어가 죽이자."
치우는 똑같은 말을 네 번째 꺼냈다.
풍령의 주인은 화화사火花蛇(불꽃뱀)다. 불꽃에서 태어난 화화사는 실체가 없는 환수幻獸에 속하는 요괴다. 천 년에 한둘 승천하는 마수와 반대로 천계에 진입할 가능성이 무척 크다.
마수는 죽어가며 자신을 해친 자한테 저주를 뿌린다. 마수를 죽일 능력을 갖춘 자들한테도 두려운 저주다.
환수가 뿌리는 저주는 마수보다 훨씬 강하다. 법술과는 다른 형태여서 저주를 없애는 방법도 확실치 않다.
"죽일 능력이 있는지를 떠나서 성공해도 문제야. 자단 숙부를 찾는 일이 방해받을지도 모른다고."
치우는 매번 다른 이유를 대는 오작이 정말 미웠다. 반면, 그저 조르기만 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그럼 내단 하나만 내놓자."
치우가 이렇게 절박한 이유는, 마을 사람들이 진상한 제물을 거부한 화화사에게 그간 모은 내단을 바치기로 오작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대략 팔 년 전부터 화화사는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제물도 거부했다. 오작은 화화사가 승천을 앞뒀기에 섭식攝食을 멈췄다고 추측했다.
그런 화화사의 마음을 열려면 요괴의 내단밖에 없다. 마침 치우의 품엔 흑곰과 두 마리 개 요괴의 내단이 있었다.
"그러다 실패하면? 한번 아니라고 하면 쉽게 말을 안 바꾸는 거 몰라?"
인간 사이의 거래와 달리 요괴들은 흥정이 잘 안 먹힌다. 요괴도 인간처럼 다양한 군상이 존재하기에 예외는 늘 있는 편이지만, 한번 아니라고 하면 짧은 기간에 마음을 바꾸는 일이 드물다.
내단 하나를 제안해서 실패하면 요괴 마음이 바뀔 때까지 일정 기간을 기다려야 한다. 주머니가 텅 비어 반드시 법보를 얻어야 하는 오작과 치우기에 실패로 지체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짜증 나."
치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치우는 이미 마음속으로 오작의 계획을 따르기로 했으나 아쉬움이 너무 커서 계속 질척댔다. 필경, 누구나 오작처럼 쉽게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갖춘 건 아니다.
오작 역시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치우의 투정을 역정 내지 않고 받아줬다.
"세 개를 준다고 했는데도 우릴 방해하면 어쩔 거야?"
"그럼 싸워야지. 다시 요수촌으로 돌아가도 금맥을 찾는다는 보장이 없잖아."
지난번 영리귀를 불러 금의행진도를 뼈에 새길 때 대망사의 허물로 꼰 밧줄을 대가로 줬다. 이번에 또 영리귀를 부르면 치우가 입은 옷을 벗어줘야 할 판이다.
그렇게 똑같은 얘기를 잠들기 전까지 반복한 둘은 이내 곯아떨어졌다. 치우가 부른 잡귀들이 보초 서고, 치우와 오작 모두 강력한 수호계 법보의 보호를 받기에 큰 걱정 없이 잠에 빠졌다.
맑은 가을 날씨답지 않게 구름이 꽤 많아서 아침놀이 장관이었다. 감성적인 것과 꽤 거리가 먼 오작마저 붉게 타오르는 드넓은 동녘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형, 이거 형이 가져."
치우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내단 세 개를 건넸다. 수백 년 된 개 요괴의 두 내단은 오작의 주먹 크기였고, 백 년 정도로 추정하는 흑곰의 것은 치우의 주먹 크기였다.
"가자. 예감이 좋아."
내단을 품에 넣은 오작은 경공을 펼쳐 풍령 방향으로 달렸다. 치우 역시 내단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따랐다.
일반인에겐 사흘거리지만, 경공을 펼친 둘에겐 고작 두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이 자주 다니며 생긴 길로 뛰었기에 실수로 요괴 영지를 침범해 시비 붙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둘은 점심이 오기도 전에 풍령의 영지 경계를 코앞에 뒀다.
"혈편복 못지않은 요괸데?"
요괴의 수준에 따라 결계結界가 다르다. 도행이 높은 요괴일수록 결계가 깔끔하다. 화화사의 영지 경계境界는 내외의 구분이 혈편복의 영지보다 더 확실했다.
"형. 들어가기 전에 식멸류랑 최소류를 조금 연습하자."
치우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꽤 긴장한 듯했다.
"이제 와서 뭘. 평소에 열심히 해야지."
오작은 어느 정도 숙련되면 게으름을 피우는 치우를 비꼬았다.
치우와 오작은 대화로 긴장을 조금 가라앉힌 후 동시에 발을 뻗어 요괴 영지로 들어갔다.
결계를 통과한 둘 앞에 펼쳐진 건 가을이라는 계절과 안 어울리게 파릇파릇한 영지였다. 언덕이라고 하기엔 크고 산이라고 하기엔 조금 작은 풍령은 풀로 무성했다.
파랗고 누런 풀이 무성하게 덮은 가운데, 아직은 나이테가 몇 없어 보이는 나무들이 뿌리로 탐스럽게 양분을 섭취하며 성장에 박차를 가했다.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예상과 너무 반대되는 광경이었다.
"뭐가 문제야?"
"화화사는 불을 품은 뱀이잖아. 아무리 경지가 높더라도 풀이 이 정도로 무성할 순 없어."
차라리 풍괴의 임시 영지처럼 윗부분이라도 민둥민둥했다면 의심이 덜했을 것이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풍경마다 푸름이 압도적이어서 화화사의 영지가 아니라는 확신마저 들 정도였다.
"형, 그리고 여기 바람도 없어."
치우는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오작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풍령이라는 이름과 달리 바람 한 점 없었다.
바람이 세찬 곳은 아닐 거라고 예상했지만, 바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우리가 속은 건가?"
풍령이 어딘지 알아내려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닐 때는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멧돼지 잡으려고 밭 주변을 서성거리다 우연히 만난 노인 입에서 풍령과 화화사의 정보를 알아냈다.
충분히 의심 가는 상황이다.
머뭇거림은 잠깐이었다. 어차피 오작과 치우는 무조건 풍괴의 영지를 찾으려는 마음으로 왔다. 대신, 둘이 흩어지지 않고 함께 움직였다.
"너희 뭐냐?"
치우와 오작은 소리를 낸 요괴보다 서로를 먼저 바라봤다. 눈빛으로 상대방도 요괴의 출현을 감지하지 못했음을 알고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렸다.
"이 영지의 주인입니까?"
오작은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하며 요괴의 외관을 살폈다. 요괴는 자기 종의 한계를 벗은 존재지만, 종의 특성까지 무시하진 못한다. 출신을 알면 승산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다.
"그래. 여긴 내 영지야. 그러니까 어서 질문에 대답이나 해."
외형은 까마귀였다. 머리와 부리 모양, 체형, 꽁지와 발톱까지 누가 봐도 까마귀다. 그런데 검거나 붉은 대부분의 까마귀와 달리 하얬다.
깃털이나 부리는 물론 눈동자마저 하얗다. 유일하게 하얗지 않은 건 부리를 벌려 말할 때 보이는 혓바닥밖에 없었다.
"이 영지에 며칠 머물며 물건을 찾아도 되겠습니까? 허락하시면 내단을 세 개 드리겠습니다."
오작은 소매에서 내단을 꺼내 까마귀한테 보여줬다.
"우마왕이 보냈어?"
누구냐는 질문에 오작이 대답을 회피하자 까마귀는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우마왕과 아는 사이는 맞지만, 우마왕이 보낸 건 아닙니다."
"뭘 찾는지 얘기하면 생각해볼게."
오작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상대는 아마 옷이나 가면을 보고 우마왕을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마왕은 북부에서도 동부와 가까운 태산 근처에 영지를 뒀고, 풍령은 중부에서도 남부에 가까운 쪽에 있다는 점으로 유추하면 둘은 서로 알 가능성이 희박하다.
'북부에 있다가 우마왕한테 영지를 뺏긴 요괴인가?'
우마왕은 주변 요괴를 하나씩 쫓아내며 영지를 넓혔다. 무작정 넓히면 다른 요괴들이 연합하여 반발할 수 있기에 명분을 만드느라고 영지 확장이 조금 느렸다.
'아니면 우리처럼 홍영창을 노리는 건가?'
노인이 거짓을 말한 게 아니라면 이 영지 주인은 화화사다. 아무래도 흰 까마귀 요괴가 화화사를 죽이거나 쫓아내고 영지를 빼앗았다. 그렇다면 흰 까마귀 역시 풍괴의 영지를 노린다고 여길 수 있다.
'아니면 풍괴가 훔친 다른 법보거나.'
가능성은 많고 추리할 근거는 너무 부족하다.
"당신이 찾는 게 뭔지 알려주시면 저희가 돕겠습니다."
오작은 홍영창을 꼭 찾을 필요가 없다. 까마귀가 원하는 게 홍영창이라면 내주고 남은 법보를 챙기면 된다. 홍영창을 얻는 것보다 도하주를 의뢰할 돈이 더 시급하다.
"우마왕이 홍영창을 가져오라고 시켰어?"
까마귀의 하얀 눈동자에 흉악한 빛이 스쳤다. 동시에 조그마한 몸에서 어마어마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치우는 황급히 소매에서 칼을 꺼내 양손으로 꽉 잡았다. 오작 역시 월영인으로 창을 만들어 요괴를 견줬다.
차가운 눈으로 둘을 내려다보던 까마귀는 부리를 크게 벌려 불덩이를 토했다. 치우는 최소류로 불덩이를 없애려 했고, 오작은 저홍패로 불덩이를 감싸 꺼뜨리려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불과 다른지 최소류도 저홍패도 효과가 없었다. 저홍패로 감싼 오작은 그나마 괜찮지만, 치우는 불덩이에 맞아 우마왕이 준 옷에 구멍이 뚫렸다. 다행히 대망사의 허물로 만든 옷은 무사했지만, 불덩이가 품은 힘이 어마어마하여 맞은 가슴이 아렸다.
"막아. 그냥 불이 아니다."
오작은 저홍패를 하나 더 소환했다. 거의 동시에 불덩이를 감쌌던 원래 저홍패가 박살 났다.
"멸천공을 익힌 걸 보니 우마왕의 졸개가 분명하구나."
말을 마친 까마귀는 부리에서 불덩이 두 개를 더 토해냈다. 치우도 저홍패를 만들어 불덩이를 막으려 했지만, 이번 불덩이는 곧게 오지 않고 좌우로 흔들거리며 오는 바람에 실패했다.
오작 역시 저홍패를 하나 더 만들었지만, 이미 만든 저홍패가 박살 나며 첫 불덩이에 적중당했다.
치우 때와 달리 불덩이가 화르르 타오르며 오작의 옷을 태워버렸다. 치우한테 별 효과를 못 보고 까마귀가 전략을 바꾼 듯했다.
오작 역시 팔괘자수선의의 보호로 상해를 입지 않았으나 우마왕이 준 옷은 불타 사라졌고 법력도 뭉텅이로 빠졌다.
치우 역시 두 번째 불덩이에 머리를 맞았다. 다행히 가면은 다 불타 사라졌어도 동주의 보호를 뚫지 못해 머리는 멀쩡했다. 그러나 역시 충격이 만만치 않아 치우는 연신 휘청였다.
'강적이다. 홍황개벽공밖에 답이 없다.'
흰 까마귀가 소환한 불덩이는 성질이 오행의 화火보다는 음양의 양에 가까웠다. 법력이 부족한 것과 까마귀의 기운이 강한 것이 겹쳐 오작은 '격원공擊遠空 기충청양氣衝淸陽'의 구결을 펼칠 엄두도 못 냈다.
홍황개벽공은 특이하게 단전이 아닌 백회와 용천에서 기운이 출발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날 칠절진에서 펼쳤던 느낌을 떠올리며 기운을 움직였으나,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다행히 까마귀도 공격을 멈췄다.
"너 누구냐니까? 왜 묻는 말에 대답 안 하지?"
"내가 누군지 나도 모릅니다. 이름을 묻는 거라면, 오작이라고 합니다."
더는 감추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오작은 솔직히 말했다.
"그럼 저 멍청이가 치우라는 놈인가?"
머리가 어지러워 무릎을 꿇고 헐떡이던 치우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나 똑똑해."
"그러니까 누군지 물을 때 고분고분 대답했어야지. 하마터면 너흴 죽일 뻔했잖아."
말을 마친 까마귀는 날개를 거두고 둘과 멀지 않은 나뭇가지에 앉았다.
"난 지혜조 소오라고 한다. 이가주의 가신이야."
소오의 말에 오작은 가면을 벗었다. 오작의 얼굴을 본 소오가 부리를 커다랗게 벌리고 감탄했다.
"대가주를 똑 닮았구나. 그 가면을 안 썼으면 이렇게 오해할 일도 없었을 텐데."
"근데 우마왕과는 사이가 안 좋습니까?"
"그래. 그놈은 욕심이 너무 많아. 출신이 비천해서 그런지 자제력도 약한 편이야."
오작이 우마왕한테서 받은 인상과는 정반대 평가였다.
"여기 원래 주인은 어떻게 됐습니까?"
"내가 먹었지. 피의 요괴가 홍영창 앞에서 꼼짝 못 하는 것처럼, 불의 요괴는 내 밥이야."
치우가 혈박술로 혈편복을 잡아뒀을 때, 혈편복은 아주 쉽게 포기했다.
꽤 높은 도행을 쌓았기에 다시 태어나는 게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홍영창이 만든 혈박술을 풀어낼 자신이 없었을뿐더러, 풀어내도 문제다.
홍영창과 깊은 인연이 있는 게 분명한 두 인간을 해치면 언제든 홍영창이 복수하러 찾아온다.
홍영창에게 걸리면 다시 태어날 여지가 없다. 죽는 게 아니라 먹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혈편복은 별다른 저항도 안 하고 치우와 오작 손에 곱게 죽어줬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소오에게 잡아먹힌 화화사는 몹시 불행하다. 같은 계열의 상위 포식자한테 먹혔기에 그대로 끝장났다.
"그럼 당신도 홍영창을 찾아온 겁니까?"
"그래. 삼가주가 나랑 현작玄鵲한테 홍영창과 오행마가 너한테 전해지게 해달라고 부탁했거든. 우마왕이 욕심 많은 건 삼가주도 잘 아니까."
"현작이요?"
"응. 나랑 마찬가지로 이가주 가신이야. 지금 오행마가 있는 곳에 있을 거야. 네 아명인 오작이 바로 나랑 현작 이름에서 딴 거야. 대가주는 늘 밖을 돌아서 우리랑 이가주가 널 키웠어. 뭐, 기저귀 갈 필요도 없어서 무척 편했지."
"그럼 제 이름은 무엇입니까?"
"거기까지 알려고 하지 마. 네 진짜 이름을 아는 건 나랑 삼가주뿐이야. 이유는 차차 알려주마."
- 작가의말
청익혈편복이 쉽게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둘입니다.
하나는 수련을 착실하게 했기에 다음에도 꽤 괜찮은 요괴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안 죽으면 언젠간 홍영창이 찾아와서 영원한 소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같은 계열의 상위 포식자한테 잡아먹히면 다시 태어나지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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