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일침법白虎壹針法
진일심곡眞壹深谷
깊고 깊은 진일곡에서
욕수조언蓐收助言
욕수가 조언을 건네다
만약 반고의 도끼가 땅에 자국을 남겼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오작은 진일곡을 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높은 산도 없이 평지가 대부분인 곳에 뜬금없이 푹 파여 들어간 진일곡은 누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러나 정작 바라보면 어디 하나 부자연스러운 곳이 없다.
"끝내 도착했구나."
치우의 등에 업힌 소소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내 소소를 업고 움직인 치우는 굶주림까지 겹쳐 말할 힘도 남지 않았다.
"혹시 우리 몰골 보고 쫓아내진 않겠지?"
오작이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며칠 전부터 법력이 몸에 쌓이지 않았다.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 매우 피로한 상태가 된 탓이다.
셋 모두 옷은 멀쩡했다. 그러나 제대로 먹지 못한데다 피로까지 쌓여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가자. 욕수는 아픈 사람이 찾아오면 외면하는 법이 없어."
소소의 말에 치우와 오작은 터벅거리며 조금씩 걸었다. 괜히 보폭을 크게 하면 넘어질 수도 있어 둘 다 조심했다.
"많이 지치셨군요. 일단 물부터 마시는 게 좋겠습니다."
진일곡 입구에서 흰색 옷에 푸른 모자를 쓴 남자가 셋에게 물을 권했다. 허겁지겁 물그릇을 깨끗이 비우니 어느새 의자 세 개가 마련되었다.
"안에 환자가 많습니다. 여기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십시오."
"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소소가 삿대질했다. 물을 마셔서 그런지 목소리가 힘 있었다.
"압니다. 그러나 죽을병이 아니라면 순서대로 치료하는 게 진일곡 원칙입니다."
남자는 느릿느릿한 말투로 대꾸하고 자리를 옮겼다.
"어디 식사할 수 있는 곳 없습니까?"
조금 지나 남자가 돌아오자 오작이 질문했다.
"방금 마신 물은 몸을 깨끗이 씻는 정화수입니다. 진단과 치료를 더 확실히 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러니 허기가 심하지 않으시면 욕수님의 치료를 받기 전까지는 참으십시오."
"우리 닷새 굶었어."
치우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거짓말이야. 사흘 굶었어."
소소가 정정했다.
"저랑 동생은 닷새 굶었습니다. 이 여자만 사흘입니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럼 과일 좀 가져오겠습니다. 많이는 못 드립니다."
일행은 사과 맛이 나는 복숭아를 닮은 과일을 한 개씩 먹었다. 다행히 양은 적어도 허기는 꽤 해소되었다.
셋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진일곡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병 보이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새벽같이 출발해서 날이 어둡기 전에 돌아간다. 그래서 늦은 오후의 진일곡은 꽤 한산했다.
욕수는 눈썹과 머리가 흰 데 반해 턱수염이 검었다. 얼굴 역시 불그스럼하고 눈도 정기가 넘쳐 나이를 짐작기 어려웠다.
"두 분의 병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소."
욕수는 인사도 없이 대뜸 오작과 치우를 치료하는 걸 거부했다. 오작은 영예주의 저주 때문에 몸에 문제가 있고, 치우는 귀기가 단전을 독차지하려고 날뛰는 게 문제다.
병이라기보단 기운을 다루는 문제기에 욕수가 어떻게 해줄 수 없다.
설사 욕수가 치료할 능력이 있다고 해도, 몸은 물론 단전까지 상대한테 무방비로 내줘야 치료를 진행할 수 있다. 아무리 대담한 사람이어도 자기 목숨을 처음 보는 상대한테 선뜻 맡기는 건 어렵다.
"우리는 그저 거동이 불편한 이분을 여기까지 호송한 겁니다."
오작의 말에 욕수는 소소를 한참 살폈다.
"어때? 치료할 수 있어?"
치우의 질문에 욕수의 제자로 추측되는 청년들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불쾌함은 순식간에 경악으로 바뀌었다.
"완치는 어렵소."
욕수의 말에 놀란 건 청년들뿐이 아니다. 소소 역시 욕수마저 완치가 어렵단 말에 겁을 먹었다.
"아저씨. 이거 별거 아니잖아."
"별거야. 저주에 걸린 다음 봉인계 법술에 당했는데, 저주가 먼저 깨졌어. 깨진 저주가 봉인에 갇혀 흩어지지 못하고 변형되어 몸에 남은 바람에 나로선 완치가 어려워."
소소 눈이 빨개졌다. 울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아 억지로 참는 거였다.
"뭘 걱정하고 그래. 일단 거동이 불편하지 않게 고쳐줄게. 뿌리는 집에 가서 뽑아달라고 해."
말을 마친 욕수는 기다란 침 하나 꺼냈다. 청년들이 하얀 침을 보고 크게 웅성거렸다.
"뭐야. 백호일침법을 써야 할 정도로 엄중한 거야?"
욕수는 백팔금침법으로 유명하지만, 가장 대단한 치료법은 백호의 수염을 이용해 죽은 자도 혼백만 흩어지지 않으면 살려낸다는 백호일침법이다.
"저주가 오장육부와 골수에 스며들었어. 일찍 왔으면 이걸 안 꺼내도 되는데. 그래도 이제라도 온 게 다행이야. 며칠만 늦었으면 이것도 소용없을 뻔했다."
소소는 힘들 때마다 쉬자고 투정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온몸이 오스스 떨렸다. 성정이 냉정한 오작이 단칼로 자르며 느리지만 꾸준히 걷지 않았다면 평생 거동이 힘든 상태로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잘 봐둬라. 침을 꽂는 부위와 속도와 각도, 그 외에도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걸 가슴에 새겨라."
청년들에게 당부한 욕수는 백호의 수염을 소소의 목덜미에 꽂았다. 수염은 마치 무른 진흙에 꽂히듯이 별 저항 없이 쑥 들어갔다.
'고수다.'
오작은 화접검을 상대하며 점과 선과 면 그리고 공간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덕분에 욕수의 침을 꽂는 수법에 감탄했다. 치료의 목적으로 펼쳤으니 망정이지, 만약 수염이 무기고 공격받는 사람이 오작 자신이라면 반드시 피한다고 장담하기 힘들다.
침을 소소의 몸에 들여보낸 욕수는 주문을 중얼중얼 외웠다. 주문이 진행됨에 따라 소소의 몸이 사시나무 떨 듯했다.
"금자金者, 확고야確固也, 배불정혜排不淨兮."
금은 강하게 뭉치며 잡스러운 기운을 배제한다. 욕수의 노래와 같은 읊음에 따라 소소의 몸에서 환한 빛이 생겼다 사라졌다.
"아저씨. 다 나은 것 같은데?"
"뿌리가 남으면 언제든 줄기를 뻗고 꽃을 피워 열매까지 맺을 수 있다. 그러니 고집부리지 말고 꼭 집에 돌아가 뿌리 뽑아라."
"마지막 손님까지 치료가 끝났으니 너희도 이만 돌아가거라."
"이분들은?"
"오늘 하루 여기서 쉬고 내일 떠날 것이다."
청년들은 욕수한테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떠났다.
"편히 앉으시오. 저녁은 금방 차리리다."
예의 차리느라 허리에 힘주고 있던 치우와 오작은 그제야 의자에 몸을 기댔다. 소소는 거동을 회복한 게 기쁜지 이것 저곳 기웃거렸다.
화려하진 않지만 정갈한 밥상이 곧 차려졌다. 오작과 치우는 걸신들린 듯 자기 앞에 차려진 음식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소소 역시 둘보다는 늦어도 엄청난 속도로 밥을 소멸했다.
"어, 이상하네?"
치우가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양은 얼마 안 되는데 허기가 깨끗이 사라졌다.
"인간은 입으로 음식을 먹어 기운을 섭취하오. 잘 요리한 음식은 기운이 풍부하고 쉽게 흡수되어 적은 양으로도 그 쓸모를 다하지."
"그럼 왜 기운을 모으는 것으로 식사를 대체하지 못합니까?"
"인간의 몸은 음양오행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기운을 품고 있소. 자기 몸에 어떤 기운이 있고 뭐가 필요한지 모르니까 음식을 계속 먹어야 하는 것이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욕수는 대견해하는 눈으로 오작을 바라봤다.
"아저씨. 그럼 인간의 몸엔 어떤 기운이 필요한데?"
반주로 내놓은 술을 홀짝이던 소소가 질문했다.
"네 총명은 깊이가 여전히 부족하구나."
욕수의 한탄에 소소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소협. 대신 설명 부탁드리오."
오작은 흠흠 목을 가다듬고 소소에게 말했다.
"인간의 몸에 담긴 기운을 다 알려면 세상에 어떤 기운이 있는지 살피면 됩니다. 전부 파악하면 홍균노조랑 비슷한 경지가 되겠죠. 그러니 굳이 어떻게 밥을 안 먹을까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인간의 몸에 세상의 기운이 다 있다는 거야?"
"그렇지 않겠습니까?"
훌륭한 음식을 먹어서인지 오작과 치우는 빠르게 기운을 차렸다.
"소협은 나랑 잠깐 산책하러 갑시다."
욕수의 말에 오작은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나섰다. 소소는 진일곡이 처음이 아닌지 재밌는 데를 보여준다며 치우를 끌고 반대 방향으로 갔다.
"조언 하나 해도 되겠소?"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가면을 버리시오."
오작은 몇 번 벗은 적 없는 가면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불민하여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는 게 없는데도 가리고 다니면 상대는 소협이 뭔가 알아낸 게 아닌지 궁금해할 거요. 차라리 드러내고 다니는 편이 낫소. 그 가면은 나 정도 수준이면 뚫어볼 수 있으니까 말이오."
오작은 잠깐 고민하다 가면을 벗어 찢었다.
"어머니를 참 많이 닮으셨소."
오작은 이마를 크게 찡그리다 바로 폈다. 꽤 오랜 기간 가면을 쓰고 생활하다 보니 표정을 숨기는 일이 어색했다.
"제가 물어도 얘기해줄 수 없는 거겠죠?"
"소협을 아끼는 사람들이 비밀로 했다면 다 이유가 있는 거요. 외인에 불과한 내가 함부로 누설할 일은 아닌 것 같소."
둘은 말없이 한참 걸었다.
"조언 하나만 더 해도 되겠소?"
"부탁드립니다."
"소소와 함께 능소궁凌霄宮에 한 번 다녀가면 큰 수확이 있을 거요."
오작은 조용히 고민하다 질문했다.
"예언입니까?"
"아니오. 그저 소협보다 상황을 좀 더 아는 사람으로서 분석하여 얻은 결론이오. 난 치료술에만 전념하며 수련을 게을리했기에 점괘술도 못 펼치고 천기도 읽을 줄 모르오."
겸손한 말이긴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욕수는 무공과 치료에 능한 대신 법술에는 무지한 편이다. 법력이 부족하고 경지만 높은 구망과는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은혜는 후일 반드시 갚겠습니다."
"안 그래도 되오. 선대한테서 받은 은혜를 소협한테 갚는 거라고 편히 생각하시오."
둘은 그 뒤로 말없이 산책만 하다 돌아갔다.
"형. 가면은?"
치우는 욕수가 오작의 가면을 강제로 뜯어낸 게 아닌지 의심하는 눈치였다.
"생각해보니 내가 얼굴을 가려야 할 이유가 없더라."
이마를 찌푸리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치우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맞다. 우리 왜 얼굴을 가렸지?"
'우마왕은 내 존재가 북부에 알려지지 않기를 원한다. 그게 나를 위함인지 자신을 위함인지는 차차 두고 봐야겠다.'
"빈방이 많으니 마음에 드는 곳에 누우시오. 난 먼저 자러 가겠소."
오작은 욕수에게 포권으로 공손히 인사했다.
"내일이면 양부 찾으러 떠나는 건가?"
"아니야. 능소궁에 들러야겠어."
오작의 대답에 소소가 깜짝 놀랐다.
"아니. 능소궁은 왜? 나 집에 안 돌아간다니까."
"변형된 저주 때문에 당신이 나비 될지도 모릅니다."
오작의 으름장에 소소는 양팔로 자신을 부둥켜안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나비 된다고?"
"깨진 저주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변화를 시도합니다. 그 시도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아무리 대단한 술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꼭 지금 뿌리 뽑아야 합니다."
오작은 말을 하며 자신의 영예주를 떠올렸다. 영예주 역시 빨리 뿌리를 뽑지 않으면 어떤 해악을 끼칠지 모른다.
"근데 넌 왜 능소궁으로 가려고 하는데?"
"형천한테 천년 반도를 먹여야 합니다. 서왕모의 반도원이 능소궁 옆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가를 치르고 얻어내든지 훔치든지 해야겠습니다."
"우리 셋이 함께 훔치자."
소소는 어느새 신났다. 딱 천일도를 떠나기 전에 치우가 보여주던 모습이다. 물론, 그새 치우가 많이 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반짝이는 눈이나 거친 숨을 씩씩 뱉어내는 콧구멍만 봐도 치우 역시 많이 흥분했음을 알 수 있다.
"훔치는 건 우리 둘이 하겠습니다. 당신은 저주부터 해결하세요."
소소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능소궁에 먼저 모습을 드러내면 감시를 받을 거야. 그럼 반도를 훔치는 일은 어림도 없어. 그러니 먼저 반도를 훔친 다음 능소궁에 가서 내 저주를 뽑자."
사실 천년 반도를 훔친다는 건 핑계에 불과했다. 그냥 욕수가 가보라고 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것 같아 형천을 들먹였다.
천년 반도가 몇 개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많아도 귀한 물건이 틀림없다. 그런 물건을 서부의 실질적 지배자인 서왕모한테서 훔쳐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반도원은 문이 하나밖에 없다고 알려졌어. 근데 사실 쪽문이 하나 있거든. 내가 거기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아."
그런데 의외로 소소가 몰래 들어가는 방법을 안다고 말했다. 치우 역시 흥분으로 눈에 불을 켜는 걸 보니, 핑계로 삼으려던 일을 진짜로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형천은 반도가 꼭 필요한 게 아니지만, 당신의 저주는 빨리 뽑아야 합니다. 그러니 일단 능소궁부터 가죠."
"아니야. 솔직히 예전부터 반도 도둑질해 먹고 싶었어."
치우와 소소는 잠도 잊고 바닥에 지형도를 그리며 반도를 훔칠 계획을 짰다. 오작은 말려도 들을 기세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그냥 내버려 뒀다.
"근데 소소 너 집에 가서 저주 뽑아야 한다고 했잖아. 왜 능소궁으로 가는데?"
"능소궁이 내 집이야."
치우는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설마. 너 백제 백초거의 딸이야?"
- 작가의말
오작과 치우는 의사가 치료 거부했습니다. 불치병은 주인공의 특권이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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