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대왕모蚩尤對王母
장유소단丈有所短
장(1.7m)도 가끔 부족할 때가 있고
촌유소장寸有所長
촌(1.7cm)도 가끔 남을 때가 있다
치우의 은신술은 서왕모도 발견하지 못할 정도다. 두꺼비가 반도를 먹어 치운 줄 알고 화가 치밀어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도 있지만, 치우 역시 소소와 오작까지 숨겨주는 어려움이 있었다.
백초거도 발견한다고 장담 못 하는 치우의 은신술은 능소궁을 지키는 백 년 도행도 안 된 요괴들에겐 절대의 효과를 발휘했다.
치우는 코를 킁킁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소소의 체향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저기겠지?'
능소궁 안엔 순찰을 다니는 요괴와 길목을 지키는 요괴들이 있었다. 그러나 궁전 문을 지키는 요괴는 없었는데, 유독 한 궁전 앞에만 사슴이 분명한 요괴가 보초를 섰다.
'들어가 확인할까 아니면 형을 먼저 찾을까?'
치우는 잠깐 고민했다. 문만 지킨다는 건 다른 곳으로 출입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법술을 펼쳐 문틈으로 들어갈 순 있지만, 법력을 세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어려운 법술이어서 조금 주저되었다.
'해보자.'
소소가 안에 없다면 오작을 방해한 것밖에 안 된다. 치우는 소양궁을 탈출할 때 자주 써먹었던 귀접신鬼摺身을 펼쳤다.
다행히도 치우의 간절함이 먹혔는지 아주 세밀하게 기운을 움직여야 하는 귀접신 법술에 성공했다.
몸을 접어 보늬처럼 얇게 만든 치우는 아주 좁은 문틈으로 비집어 들어갔다. 다행히 예상대로 문에는 별다른 결계나 방비가 없었다.
"크. 도화주桃花酒는 언제 마셔도 맛있단 말이야."
치우의 예상과 달리 소소는 무릎 아래만 묶인 채로 편하게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상 위에 놓인 접시만 스무 개가 넘었다. 맛있는 냄새와 맛있는 냄새가 섞여 치우 입에 군침이 마구 돌았다.
치우는 귀접신 법술을 해제하고 조심스럽게 술상에 다가갔다. 소소는 젓가락이 있는데도 손으로 안주를 집었는지 양손 모두 기름 가득했다.
치우는 젓가락을 건드려 특별한 문양을 만들었다. 손으로 하는 대화에서 괜찮냐는 뜻이었다.
소소는 술을 마시고 안주를 씹는 데 정신이 팔려 젓가락의 변화를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다행히 뜨거운 국물에 담긴 안주는 손으로 잡기 싫었는지 젓가락을 이용하려다가 치우가 만든 문양을 발견했다.
"그냥 나와도 돼. 나 말고 없어."
치우는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법술로서의 은신술을 해제하는 동시에 오작한테서 배운 기척과 존재감을 숨기는 방법을 어설프게 펼쳤다.
다행히 춘소궁과 추명궁의 거리가 멀어 백초거한테 감지되지 않았다.
"너 손에 왜 기름 묻었어?"
"옷 빼앗겼어. 나 지금 몸에 법보고 부적이고 하나도 없어."
치우는 소소의 다리에 감긴 금속 밧줄을 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이거 풀어도 돼?"
"풀 능력은 있고?"
"잘하면 될 것도 같은데."
소소는 치우의 말에 속으로 엄청나게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풀면 바로 백제한테 들킬 거야. 역시 이번 일로 확실해졌어. 백초거는 나랑 원수야."
"네 아버지 아니었어?"
"아니야."
"근데 왜 내 질문을 부정하지 않았어?"
"긍정도 안 했잖아."
진일곡에서 치우가 백초거 딸 아니냐고 했던 적 있는데 소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형제나 자매들과 백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소소는 막내 오빠인 백초거를 아버지처럼 여기고 따랐다.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애매하여 대답을 회피했던 거였다.
"그럼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이대로 날 데려가야지."
치우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소소는 치우의 반응에 의문을 느끼다가 함께 얼굴이 빨개졌다. 날 데려가라는 말이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음을 그제야 느낀 것이다.
"난 법술도 못 쓰고 법보도 없고 부적도 없어. 그러니까 네가 은신술로 날 감춘 채 문으로 나가야 한단 말이야."
"밖에 요괴 둘 있던데."
"문은 열 수 있어. 내가 술이랑 안주 더 달라고 하면 누군가는 문을 열고 들어올 거야. 문제는 들키지 않고 나가야 한다는 거지."
치우는 두리번거리다가 눈에 잘 안 띄는 구석에 놓인 걸상을 집어 들었다. 화장대 앞에 놓인 긴 걸상으로, 세 명이 너르게 앉을 수 있는 크기다.
치우는 허공에서 변신부 두 장을 꺼내 걸상에 붙인 후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끝나자 걸상이 소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손수건 같은 거 없어?"
"저기."
치우는 손수건에 변신부 하나 붙인 후 주문을 외워 소소의 다리를 묶은 금속 밧줄로 변하게 했다. 그리고 걸상이 변한 소소 다리에 칭칭 감았다.
"귀종술. 폭식아귀暴食餓鬼."
치우는 폭식아귀를 소소로 변한 걸상에 빙의케 한 후 음식을 먹게 했다. 폭식아귀는 소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술과 안주를 먹어 치웠다.
치우는 소소를 등에 업고 은신술을 펼쳤다. 모습이 감춰지자 소소는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배고프다. 술이랑 안주 더 갖고 와."
폭식아귀는 안주를 담은 접시를 혀로 싹싹 핥은 후 술병을 거꾸로 들고 술 방울이 떨어지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문을 살짝 열고 그 광경을 본 사슴 요괴는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술과 안주 가지러 선방膳房(왕궁의 주방)으로 달려갔다.
치우는 소소를 업고 문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안주와 술을 든 사슴 요괴가 들어오고 미처 문이 닫히기 전에 밖으로 나갔다.
- 얼음은?
치우의 등에 업힌 소소가 양팔을 내밀어 손으로 물었다.
- 우선 나가자.
치우의 등에 업혀 능소궁 밖으로 나온 소소는 깜짝 놀랐다. 능소궁 주변의 진법은 물론 등천봉에 설치된 수많은 진법이 모두 사라졌고, 등천봉의 모습을 숨기던 결계도 온데간데없었다.
치우는 등에 업은 소소가 들킬까 봐 감히 달리지 못했다. 그래도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성큼성큼 걷는 속도가 남들 달리는 만큼 빨랐다.
"형천."
치우의 목소리를 들은 형천이 나무를 타고 내려왔다.
"어딨어?"
치우는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형은 아직이지?"
"응. 안 나왔어."
"우선 여길 벗어나자. 성공했다고 표식을 남겨."
"형님 안 기다려?"
형천의 말에 치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전한 곳을 찾아 몸을 숨긴 다음, 내가 돌아와서 형을 기다릴 거야. 일단 가자."
형천은 모습을 드러낸 채로 달렸고, 치우는 소소를 업고 은신술을 펼쳐 달렸다.
"안전한 곳이 어디야?"
"진일곡. 욕수라면 우릴 지켜줄 거야."
형천의 질문에 치우 대신 소소가 대답했다.
"의선醫仙 욕수랑 친해?"
"응. 나한테 의술을 가르친 사부야."
그러나 셋의 계획은 어마어마한 방해를 받아야 했다.
"소소 이년. 또 어딜 도망가는 거야?"
셋은 불행하게도 소오와 현작을 놓치고 화가 잔뜩 난 서왕모와 마주쳤다. 도산과 등천봉의 결계를 회복하려고 움직이던 서왕모는 빠르게 달리는 치우의 은신술을 쉽게 간파했다.
서왕모가 결계 두 개를 깨면서 법력을 회복하며 훨씬 강해진 것도 있고, 치우가 빨리 달리느라 기척을 제대로 숨기지 못한 것도 있어 들키고 말았다.
서왕모의 호통에 치우의 은신술이 깨졌다. 다행히 법술 자체가 깨진 게 아니라 법력이 흔들리면서 효력을 잃은 것이기에 바로 다시 펼칠 수 있었다.
"당장 남자 등에서 내려오지 못할까?"
그러나 이어진 호통에 또 은신술이 흔들려 효력을 잃었다.
"응? 감히 내 딸을 묶어서 납치해?"
뒤늦게 소소의 다리가 묶인 걸 확인한 서왕모는 도주를 납치로 바꿨다.
서왕모는 부모로서의 사랑 같은 건 눈곱만치도 없고, 자식은 그저 소유물로 생각한다. 지금 화난 것도 딸이 납치당해서가 아니라, 귀중한 재산을 도둑맞아 느끼는 기분이었다.
"납치는 무슨. 나 얘한테 시집갈 거야.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소소의 반항에 화가 치민 서왕모는 허공에서 채찍을 꺼내 치우와 소소를 한꺼번에 후려쳤다. 치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소소를 형천한테 던졌다.
짝 소리와 함께 치우가 몸을 휘청였다. 동주철갑의 보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채찍은 치우의 육체에 거센 충격을 전달했다.
'형은 내 갑옷이 둔기에 조금 취약하다고 했는데, 채찍도 둔긴가?'
채찍은 둔기가 아니지만, 서왕모가 휘두른 힘이 하도 세서 둔기로 때린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보였다.
"형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여긴 내가 막을게."
형천은 두말없이 소소를 업고 남쪽으로 달렸다. 욕수의 진일곡으로 가는 건 너무 뻔하기에 풍령으로 가야 한다. 형천은 일단 자신이 익숙한 남부로 간 다음 중부로 넘어가기로 했다. 익숙지도 않은 길에서 헤매는 것보단 돌아가더라도 확실한 게 낫다.
서왕모는 치우를 무시하고 형천을 쫓으려 했다. 그러나 치우의 강한 공격을 감히 무시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너야? 무극인지 뭔지 이상한 걸 깨달았다는 놈이?"
서왕모는 경지도 높고 무력도 강하다. 그러나 비슷한 경지의 다른 술사들보다 지식은 부족하다.
특별한 사정으로 서부를 벗어날 수 없어 경험이 적은 것도 있고, 성격이 광오하여 남의 말을 새겨듣지 않는 이유도 있다.
아마 치우가 오작 없이 경지를 높여 강해진다면 딱 서왕모의 모습일 것이다.
"무극이 뭔지도 몰라?"
치우가 무심결에 던진 한마디가 서왕모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렸다. 안 그래도 홍균노조나 원시천존 그리고 태상노군에게 자격지심을 품은 서왕모다.
"어차피 서부는 내 손바닥 안이다. 먼저 네놈을 윤회환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버린 다음 내 딸을 훔쳐 도망친 네 일당도 죽이겠다."
서왕모는 채찍에 법력을 가득 담아 치우를 공격했다. 법술은 법력의 위력을 증폭한다. 그러나 서왕모 정도가 되면 대부분 법술은 기교일 뿐이다. 그냥 채찍에 법력을 담아 하는 공격이나 법술이나 큰 차이가 없다.
게다가 법력을 세밀하게 움직여 펼치는 법술보단 단순히 채찍을 휘두르는 공격이 훨씬 편하다.
치우는 채찍에 호되게 당했던 기억이 있어 칼로 막으려 했다. 칼에 맞은 채찍이 휘면서 공격할 수 있음을 충분히 고려하며 막았는데, 채찍 길이가 쭉 늘어나며 치우의 뺨을 강하게 때렸다.
다행히 갑옷보다는 둔기에 강한 투구여서 아까보다 충격이 덜했다. 그러나 상상도 못 한 채찍의 변화에 받은 정신적인 충격까지 합치면 아까보다 더했다.
"이거 주둥이만 산 놈이구나."
자신의 공격을 제대로 막지도 피하지도 못하는 치우를 보며 서왕모의 화는 더 커졌다. 하찮은 자에게 얕보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뭐가 문제지?'
치우는 얼마 전에 경지가 크게 오르며 열오름을 경험했다. 훌륭하게 타고난 육체가 더 나아졌고 무공과 법력에 대한 이해도 훨씬 깊어졌다.
그럼에도 서왕모의 공격을 피하기는커녕 제대로 막지도 못했다.
치우는 멍청하지 않지만, 경험이 너무 부족했다. 채찍은 대부분 무기와 달리 공격 범위가 넓고 변화가 다양하며 상대에게 타격을 주는 부위도 특정하기 어렵다.
점과 선과 면의 깨달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무기다.
물론, 대부분 채찍은 영활한 대신 큰 힘을 싣지 못한다. 원래대로라면 약한 위력 때문에 상대의 공격에 대한 예측이 다소 빗나가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왕모처럼 강한 상대가 채찍을 드니 무기의 장점만 부각되고 단점은 완전히 덮여 사라졌다.
'이대로는 죽는다.'
몸에 닿는 공격이 늘수록 치우의 위기감은 고조되었다. 고조된 위기감에 자극받아 날카롭게 벼려진 치우의 직감은 끝내 어려운 결론을 내렸다.
'내가 죽으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너도 도와.'
단전의 귀기에 진심을 담아 간절히 애원한 치우는 태극구의 기운을 눌렀다. 첨예하게 대립하던 상대의 기세가 한풀 꺾이자 귀기는 빠르게 단전을 점령했다.
태극구는 치우의 방해로 단전에서 일 할도 안 되는 작은 부분만 겨우 지켜냈다.
치우의 단전을 점령한 귀기는 사지백해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그냥 퍼지는 데 그치지 않고 순환을 통해 외부로부터 귀기를 빨아들였다.
치우는 진영을 바꿔 태극구와 한편이 되었다. 단전의 남은 일 할은 태극구한테 맡기고, 치우 자신의 기운은 광명대를 지키는 데 치중했다.
"흐아아."
치우의 목소리를 들은 서왕모는 오싹한 기운에 몸이 떨렸다. 소오와 현작이 합체자폭기로 같이 죽자고 할 때도 겁은 조금 먹었어도 몸이 떨리진 않았다.
'무극이다. 일찍 알았으면 그냥 보내줄걸.'
서왕모도 귀기를 안다. 그러나 귀기가 저 정도로 뭉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소위 귀왕으로 불리는 자가 열이 모여도 저만큼의 귀기를 뿜어낼 수 없다.
그래서 무극이 분명하다고 여겼고, 무극을 얻은 놈과 인연을 쌓을 기회를 놓친 걸 후회했다.
검은자가 완전히 사라진 치우는 칼을 휘둘러 서왕모의 채찍을 때렸다. 아까와 달리 서왕모의 채찍은 휘지 못하고 튕겼다.
치우의 힘이 더 강하여 상대의 변화까지 눌러버린 거였다.
귀기에 침식하여 파괴의 욕구가 폭발한 치우와 호승심에 제대로 불붙은 서왕모는 서로에게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집을 만한 공격을 퍼부었다.
다행히 경지도 무공도 부족한 치우건만 동주철갑과 귀기의 보호로 치명적인 타격은 입지 않았다.
- 작가의말
소오강호만 봐도 이렇게 내부에 적대적인 기운을 품을 수 있는 건 주인공뿐입니다. 그러나 오작을 너무 똑똑하게 설정하는 바람에 2주인공인 치우한테 그 기회가 넘어갔습니다. 심각히 반성하고, 다음부턴 주인공 하나만 내세우고 몰빵하겠습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