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구탐준마毒丘貪駿馬
기혈마창嗜血魔槍
피를 즐기는 마창은
견혈방휴見血方休
피를 보아야 멈춘다
벽력혼원수의 구결을 곱씹다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늦잠에 들었던 오작은 바깥의 소란에 억지로 눈을 떴다.
"난 청제 연회상에 술을 공급하는 주보요. 청제의 신하한테 당신들 이렇게 함부로 할 건가?"
"함부로 하다니. 오장汚瘴국의 왕자인 내가 이렇게 친절하게 가격을 묻고 있지 않으냐."
썩은 나무를 두드릴 때 나는 소리를 방불케 하는 푹 가라앉은 음성은 키가 일 장(1.7m)이나 되는 거구의 사내 거였다.
겨울인데도 굵은 팔을 옷 밖으로 드러낸 남자는 여유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주막 주인을 압박했다.
그리고 곁엔 키는 팔 척(1.36m) 정도로 작지만, 몸매가 일반인보다 훨씬 다부진 사내가 여럿 있었다.
"이건 손님이 맡긴 말이어서 내가 팔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잖소."
"넌 공부도 했고 견문도 넓으니 합당한 가격을 제시하라니까. 손님이 돌아와서 불만 있으면 그때 오장국의 궁전으로 찾아오면 될 거 아니야!"
짧은 대화로 오작은 현재 벌어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장국의 왕자라는 놈이 말을 빼앗으려고 했는데 주인이 청제의 신하라는 신분을 내세우며 반발했다.
청제의 위엄이 먹혀서 왕자는 강제로 끌고 가는 대신 원하는 가격을 부르라고 주인을 압박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혹시 문제가 생기더라도 가격을 제시한 주인한테 모든 책임을 지울 수 있다. 거친 외관과 달리 오장국의 왕자는 힘만 믿고 날뛰는 무식한 놈이 아니었다.
둘의 대화가 전혀 진전 없이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을 때, 삐걱 소리와 함께 주막 문이 열리고 홍영창을 든 오작이 밖으로 나왔다. 태풍으로 한쪽 벽이 반쯤 뜯겨서 출입에 지장이 없지만, 예의 바른 오작은 굳이 삐걱대는 문을 이용했다.
"아이야."
주막 주인이 황급히 달려와서 낮은 소리로 당부했다.
"어제 받은 물건은 꺼내지 마. 사이가 안 좋아."
동부는 칠십여 개 국가의 연합이고 최고 지도자는 청제 영위앙이다. 북부는 흑제黑帝 즙선기汁先紀이고 서부는 백제白帝 백초거白招拒, 남부와 중부는 각각 적제赤帝 적표노赤熛怒와 황제黃帝 함추뉴含樞紐가 지도자로 있다.
그리고 이들 위에는 인황人皇으로 불리는 강석년姜石年이 있다. 일명 신농씨神農氏로 불리는 강석년은 복희와 여와의 뒤를 이어 대륙 전체를 영도하는, 제帝와 왕王보다 높은 황皇이다.
이들 중 영위앙만 출신이 특별하다. 남은 넷은 물론 신농 강석년까지 모두 한 국가의 왕 신분으로서 넓은 땅을 다스리는 걸 도울 현명한 신하와 용맹한 장수들이 있다. 유독 영위앙만 왕 출신이 아니다.
영위앙의 개인 무력과 곁에서 돕는 신하들 덕분에 역모를 꿈꾸는 왕은 현재 없지만, 다른 제帝들보다 위신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대부분 왕국은 영위앙한테 대놓고 반항하지 못하는 대신 그 신하들과 각을 세웠다.
이런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오작은 주인의 말을 이해했다. 지금 주인을 윽박지르는 저 왕자가 재상인 뇌공과 사이가 나쁘니 뇌공인을 꺼내면 오히려 안 좋을 거라는 충고를 받아들였다.
"왕자께 아룁니다. 충성심이 높은 말이어서 주인 외에 아무도 태우지 않습니다. 괜히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헛심을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공손히 말하는 오작을 위아래로 훑던 오장국 왕자가 코웃음을 쳤다.
"난 오장국의 독구毒丘 왕자다. 아무리 충성심이 높은 말이어도 나처럼 고귀한 분을 거부할 리 없다."
"그럼 당돌한 제안 하나 드리겠습니다. 말 위에서 반 각을 버틴다면 적절한 가격을 제시하겠습니다."
자신만만한 오작의 말투가 께름직했으나 독구는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록 먼지 하나 안 묻은 상대의 자색 옷이 거슬리고 배운 티가 역력한 말투도 내심 걸렸지만, 멋진 말에 대한 욕심이 판단을 흐렸다.
"못 버티면 이대로 떠나셔야 합니다."
독구가 고개를 끄덕여 제안을 받아들이자 오작은 조건 하나 추가했다. 오장국 왕자의 신분에 자부심을 느끼는 독구는 체면 때문에 순순히 수락했다.
허리에 찬 칠 척(1.19m)짜리 몽둥이를 수하한테 넘긴 독구는 도움닫기로 몇 걸음 달린 후 오행마 등으로 훌쩍 뛰었다.
처음 보는 작자가 등에 타려고 하자 오행마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피했다. 유명한 고수의 발놀림 못지않게 신속하고 오묘하여 독구는 오행마의 등 대신 모랫바닥에 엉덩이를 처박았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애지중지 보듬고 신하들이 하늘 같이 떠받드는 삶을 살아 온 독구는 자신을 거부하는 오행마한테 살심이 일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살면서 처음 보는 멋진 말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더 강하여 심호흡으로 살기를 꾹 눌렀다.
욕심으로 살심을 다스려 마음의 평정을 찾은 독구는 방금처럼 무턱대고 뛰지 않고 천천히 접근했다. 오행마에 가까이 간 독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제자리에서 높이 뛰어올랐다.
높이 뛰어오른 독구는 바로 밑에 보이는 오행마의 넓은 등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방금은 공격하듯 달려들어서 말이 놀라 피한 거라는 착각을 했다.
그런 독구가 꼭 알아야 했는데 모르는 게 하나 있다. 독구는 대륙의 이백 개가 넘은 왕국 중 하나인 오장국의 왕자라는 데 커다란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대륙의 백만 필이 넘은 말 중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오행마의 자부심은 독구가 느끼는 것보다 절대 낮지 않다.
오행마는 자단을 주인으로 인정한 후 사십 년 가까이 인간 세상에 살며 참을성을 꽤 키웠다. 그러나 비릿한 냄새를 피우는 작자가 자꾸 등에 타려고 하자 오랫동안 눌렸던 야생의 광기가 불쑥 차고 올라왔다.
자단과 멀리 떨어져서 가뜩이나 기분이 별로였던 오행마는 의도치 않게 불타오른 야생의 광기를 억누르지 않았다.
반격을 결심한 오행마는 가늘고 긴 네 다리를 교묘하게 교차하며 북두칠성의 방위를 밟았다. 순식간에 독구의 시야에 있던 검은 갈기가 사라지고 대신 하얀 꼬리가 나타났다.
미처 독구가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노을처럼 붉은 말발굽 두 개가 차고 올라왔다. 화나면 단단한 바위도 부수는 오행마의 발굽이 독구의 배와 가슴을 세게 때렸다.
'괜히 나섰다.'
오행마 때문에 고초를 겪으면서도 자신에게 미루지 않고 혼자 부담하려는 주인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여 나섰다. 훌륭한 해결책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도행道行이 백 년 미만인 요괴를 입으로 물어 죽이는 오행마지만, 사람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방심했다. 절대라는 말은 어디에서도 성립되지 않는데, 오행마를 친근하게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오판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던 도중,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쿨럭.
독구가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분노 혹은 수치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만 빼면 멀쩡해 보였다. 따라서 답답하던 오작의 마음도 조금 풀렸다.
"송구하오나 이만 물러나심이 어떻습니까. 한낱 미물의 충성심을 더 시험하는 건 고귀한 분의 품위에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채인 가슴 때문에 숨 쉬는 것도 버거워 발작을 미뤘던 독구는 오작의 말에 울혈이 생길 것 같았다. 순진하고 정직하게 생긴 저 얄미운 소년은 오행마의 만행을 주인을 향한 충성심으로 포장包藏(감싸서 숨김)하고, 그에 대해 죄를 물으면 독구만 품위 없는 사람이 되게 세 치 혀로 농간을 부렸다.
"아이야. 약속과 다르지 않으냐."
그때 독구의 부하 중 하나가 나섰다.
"원래 약속은 저 말의 등에서 반 각 버티는 거다. 지금은 등에 오르지도 못하게 막고 있으니 네가 먼저 약속을 어긴 셈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등에 올려준다는 약속도 없었습니다. 언제까지라도 자력으로 등에 올라서 반 각을 버티면 전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부하의 훌륭한 대응에 좋은 결과를 기대했던 독구는 오작의 빈틈없는 대처에 겨우 억눌렀던 분노가 확 타올랐다.
'내가 못 얻을 바엔 없애고 만다.'
갑주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지만, 오행마의 발굽은 천근도 넘은 거력을 품었다. 그래서 꼬박 일각이 흘러서야 독구는 숨을 편하게 쉬고 자기 힘으로 거동할 수 있었다.
"말 등에 올라타는 건 알아서 하라고 했지? 그 말 후회하게 해주지."
부하 손에서 검은 막대기를 뺏다시피 가져간 독구가 오작을 보며 음험하게 웃었다.
"말에게 위해를 가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가만있지 않으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오작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당신은 일국의 왕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럼 어느 정도 견식은 있을 거 아닙니까. 저런 보물을 갖고 천하를 수십 년 횡행橫行한 사람이 만만하겠습니까?"
오작의 말에 독구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말의 주인은 저 귀한 보물을 나한테 맡기고 갔습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오작 손에 들린 홍영창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싸움을 앞두고, 정확히는 피를 앞두고 흥분한 것이다. 자단의 손에 들렸다면 이렇게까지 흥분하진 않았을 테지만, 오작은 힘이나 의지 모두 자단에 견줄 수준이 아니다.
"당신 따위는 나도 쉽게 해치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이라도 물러나면 오늘 일을 다신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계속 억지를 부린다면 살려서 보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제야 독구도 오작 손에서 부르르 떠는 창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기 손에 들린 법보 흑척黑尺이 흐느끼는 소리도 들었다.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모르지만, 상대의 창이 오장국의 보물인 흑척보다 상위의 법보인 건 틀림없다.
"아, 알았어. 알았습니다. 바로 갑니다."
오장국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더러운 늪지대에 있다. 온갖 독물이 넘치고 곳곳에 독이 고여 생존이 어렵다.
아이를 열 낳으면 일곱이 죽는다. 다섯 번째 왕자인 독구가 다음 왕위 계승자가 된 것도 형들이 전부 세 살을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사는 오장국 사람들은 생존에 집착한다. 생존 앞에서 체면이나 자존심 그리고 품위 따윈 모두 허상이다.
오장국 왕자라는 자부심도 생명의 위협 앞에선 물거품보다 못했다.
'다행이다.'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는 독구 일행을 보며 오작은 여전히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달랬다. 비록 자단과 함께 다니며 수많은 살인을 목격했고 필요하다면 손에 피를 묻힐 각오도 있으나 정작 실전에 임하니 부쩍 긴장했다.
'숙부가 곁에 있다면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을 거야.'
수없이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다른 자신의 반응에 살짝 실망한 오작은 애써 구실을 찾으려 했다.
그때, 오작이 상상도 못 한 돌발상황이 터졌다.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독구 일행을 오작이 전혀 추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홍영창이 제멋대로 오작의 손을 떨쳐냈다.
"앗, 조심."
오작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독구는 흉흉한 기세로 날아오는 홍영창을 보고 혼비백산했다. 목욕할 때도 갖고 다니며 애지중지하던 흑척을 홍영창에 휙 던지고 도망치는 다리에 힘을 더했다.
홍영창은 자신에게 맞서는 흑척을 제대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저 스치다가 창 꼬리로 가볍게 툭 쳤다. 그 가벼운 접촉에 독구가 자랑스럽게 여기던 오장국의 국보인 흑척이 토막 났다.
"살려줘."
도망가면서도 가끔 고개를 돌리는 걸 잊지 않았던 독구는 광기가 넘치는 홍영창의 기세에 다리가 풀렸다. 전력으로 달리느라 다리에 힘이 빠질 때가 된 것도 있지만, 피를 탐하는 홍영창의 사이한 기운에 도망의 의지가 꺾인 게 더 컸다.
"홍영창, 그만해. 죽이지 마."
그러나 오작의 외침은 부질없었다. 홍영창은 몸에 독기가 충만한 독구를 살려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깡 소리와 함께 홍영창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아까 오행마의 발굽을 막았던 갑주가 홍영창의 공격도 막아냈다.
천하 마병의 수좌인 홍영창의 공격을 막을 정도면 평범한 법보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기뻐할 겨를도 없이, 홍영창이 두 번째 공격을 발동했다. 심장을 직접 노리다가 갑주의 방해를 받은 홍영창은 미처 보호받지 못한 머리를 공격했다.
팔만 허우적대고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한 독구는 홍영창에게 정수리를 속절없이 내줬다. 단단한 정수리뼈를 가볍게 뚫고 들어간 홍영창은 독구의 심장에 박혀 피와 독을 꿀꺽꿀꺽 탐스럽게 삼켰다. 체내의 혈액과 독수를 홍영창에게 빨린 독구는 순식간에 볼품없이 쪼그라들었다.
'작은 탐욕은 큰 탐욕에 삼켜지고.'
오작은 문득 언젠가 읽었던 문구가 떠올랐다. 독구가 욕심을 일찍 버리고 물러났다면 목숨을 잃지 않았다.
'정신 수양에 시간을 더 할애해야겠다.'
비록 사고를 친 건 홍영창이지만, 홍영창의 마성魔性에 불을 붙인 건 오작이다. 독구를 설득하면서 투지와 함께 살심도 일으킨 바람에 홍영창이 깨어난 것이다.
자단의 손에 들렸을 땐 늘 싸움이 끝난 후에야 피를 탐했다. 싸우는 도중에 주인의 의지를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한 적이 없었다.
"이거, 이젠 어떡하지?"
게다가 아무 잘못도 없이 이 일에 말려든 주막 주인까지.
- 작가의말
시골 이장 아들이 어린이만 있는 페라리를 한번 몰아보고 싶다고 억지를 부리다가 사고 크게 냈습니다. 집안을 말아먹을 후레자식입니다.
삼황과 오제의 설정은 몇 가지 됩니다. 이 글에선 복희·여와·신농을 삼황으로 하고 청제·적제·백제·흑제·황제를 오제로 하는 설정을 선택했습니다.
혹시 삼황오제 검색하면 설정과 다른 자료가 나올 수도 있어 미리 해명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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