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령화요단血靈化妖丹
여기역탈與其力奪
힘으로 빼앗기보단
불여지취不如智取
꾀로 얻는 게 낫다
한 필의 말과 세 남자가 혈편복의 영역 북쪽에 나타났다. 혈편복의 소굴에 들어가서 북쪽으로 천천히 걸으니 어느새 밖이었다.
"형, 이거 너무 신기하다."
"원래 요괴들 법술이 신기하고 이상한 부분이 많아."
그때, 걷는 내내 우물쭈물하던 병사가 끝내 못 참고 질문했다.
"진짜 저는 대장이 혈편복의 영역을 가로질러 소식을 전하라고 했다는 말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럼요. 나머진 우리가 전부 알아서 할 거고, 그쪽에 피해도 없을 겁니다."
병사는 품에 간직한 재물을 쓰다듬으며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자신은 사실대로만 말하는데 왜 목숨을 살려주고도 재물까지 주는지 이해가 안 됐다.
"비밀을 지켜달라는 뜻입니다. 할 말만 하고 그 외의 것엔 입을 꾹 다물라고요."
병사는 오작과 치우가 혈편복의 영역에서 누군가를 죽였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늦게 깨어나서 누굴 죽였는지는 모른다.
병사는 아마 대단한 사람을 죽였겠거니 지레짐작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습니다."
병사의 걸음에 맞춰 걷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졌다. 치우나 오작은 밤눈이 밝아서 길을 재촉해도 되지만, 병사는 매우 놀라기도 했고 독에 몸이 상하기도 하여 더 걸을 힘이 남지 않았다.
"앞에 초참哨站이 있습니다. 관리가 안 되어 좀 허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람 정도는 막아줄 겁니다."
병사 말처럼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돌로 벽을 쌓은 작은 초참이 보였다. 원래는 병사 몇 명이 지키며 방문객을 미리 확인하는 전초기지 역할이었지만, 병사들이 자꾸 단체로 도망가서 비워둔 지 오래다.
지붕에 올린 마른 풀은 이미 바람에 날려서 없지만, 벽은 그나마 멀쩡하여 비만 안 내리면 밤을 새우기에는 괜찮았다.
둔각은 알에서 나온 이후로 풀도 안 뜯고 물도 안 마셨다. 아주 가끔 풀을 씹기는 하는데, 맛만 보고 뱉어버렸다. 아무래도 월광초나 일엽초와 같이 기운이 강한 약초가 아니면 먹을 가치를 못 느끼는 듯했다.
그래서 치우와 오작은 자신들이 먹을 들짐승만 잡으면 되었다. 오작은 물론 덩치가 커다란 치우도 경공으로 기척없이 움직일 수 있기에 사냥은 어렵지 않았다.
잘 구운 고기로 배를 채운 병사는 바로 코를 골며 잠들었고 치우와 오작은 손으로 하는 대화에 단어를 추가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늦게 잠들었다.
동녘 하늘이 푸르다가 희다가 붉어지며 어둠이 슬며시 물러났다. 아침놀의 옹위를 받으며 해가 동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함부로 나서지 말고 내 지시에 따라. 말보다는 손이 진짜니까 헷갈리지 말고."
"형, 나 어린애 아니야."
치우가 사고를 못 치게 단단히 일러둔 후, 오작은 둔각 등에 훌쩍 올라탔다. 보기 드문 자색 옷에 차분한 분위기가 어울려 무척 지위 높은 사람 같았다. 게다가 둔각도 보기 힘든 준마여서 산자락에서 만난 수비대 병사들은 매우 공손한 자세로 일행을 맞이했다.
"청제께서 보내셨다. 너희 대장을 빨리 만나야겠다."
"저기. 위임서를 보여줄 수 있습니까?"
병사들은 공손하게 오작을 상대하면서 말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온 병사한테 눈짓으로 물었다. 병사는 고개를 끄덕여 오작의 말을 긍정했다.
"위임서는 없고, 이거면 증명이 될까?"
오작은 구 년도 더 전에 뇌공한테서 받은 뇌공인을 꺼내 병사한테 던졌다. 그러나 급이 낮은 병사들이어선지 뇌공인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거 뇌공 재상의 뇌공인이다. 못 알아본다고 치고, 이건 어때?"
오작의 오른손에서 벼락 다섯 줄기가 생겼다. 다섯 손가락에서 나온 다섯 색의 벼락은 서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치기도 하면서 현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태산은 길이 험하여 말이 오르기 힘들다. 그래서 병사들은 둔각을 마구간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괜찮다. 어차피 일을 보고 북부로 가야 하니 말도 데려가겠다."
"말이 다니는 길은 따로 있습니다."
"괜찮다니까."
오작의 단호한 거부에 병사들도 어쩔 수 없이 둔각을 함께 올려보냈다. 웬만한 말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험한 길을 사람 하나 태운 채 껑충껑충 잘 가는 둔각을 보며 병사들은 할 말을 잊었다.
그렇게 산자락에서부터 존재감을 과시한 오작과 치우가 산 중턱에 있는 수비대 본부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수많은 사람이 구경하러 나왔다.
"태산 수비대의 대장 함선이오. 그대는 누구인가?"
오작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뇌공인을 꺼내 훌쩍 던졌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함선 얼굴이 크게 찌푸려졌지만, 오작은 시종 함선에게 제대로 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재상의 뇌공인이 맞소. 그러나 우린 청제 직속 부대요. 관직을 밝히지 못하고 위임서가 없다면 원칙대로 대응할 뿐이오."
"암수대라고 들어봤어?"
오작의 깔보는 듯한 말투에 함선의 인내심은 바닥나기 직전까지 갔다.
"금시초문이오."
"몰래 나쁜 짓을 꾸미는 놈들을 벌하는 조직이지. 저기 저 병사 얼굴은 기억나지?"
오작은 건들건들한 말투로 함선의 속을 팍팍 긁으며 함께 온 병사를 손가락질했다.
함선은 하루 전에 혈편복에게 제물로 보낸 병사를 알아보지 못했다. 비위를 거스른 괘씸한 병사가 아니라 그냥 지나가다 눈에 띈 아무나 고른 것이기에 돌아서고 바로 뇌리에서 지웠다.
"자네 내 부하인가?"
병사는 원래 증언하는 게 몹시 두려웠다. 오작과 치우가 죽일까 봐, 그리고 가슴에 숨긴 재물이 욕심나서 마지못해 시키는 대로 한다고 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평소 눈여겨봐서 특별히 맡기는 거라던 대장이 모르쇠를 놓자 화가 솟으며 겁이 사라졌다.
"어제 아침에 저한테 북부에 큰 전쟁이 터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더러 혈편복의 영역을 통해 남쪽으로 가서 천성泉城에 계신 장군께 급보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평소 눈여겨봤다면서, 이런 중요한 일을 할 사람은 저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벌써 잊으셨습니까?"
함선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론 의구심이 무럭무럭 자랐다.
'혈편복은 태산노도도 두려워하고 풍백도 함부로 얕보지 못하는 강한 요괴다. 그런데 저놈이 어떻게 살아서 돌아왔지? 아무래도 혈편복의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 저놈들과 만난 게 틀림없다.'
구경하던 자들도 크게 술렁였다. 대장이 싫어하는 병사나 군관을 몰래 혈편복의 영역으로 보내 죽인다는 소문이 은밀히 돌았다. 수비대는 원래 도망치는 놈이 많아서 소문으로만 그쳤지만, 오래 근무한 자들은 대부분 아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나도 급한 일로 혈편복의 영역에 들어간 바람에 이 병사를 구할 수 있었다. 청제께선 자신에게 충성하는 병사 한 명 한 명을 아낀다. 이미 편익조를 날려 사건을 보고했고, 면밀히 조사하여 엄중히 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오작의 말에 함선은 겁을 더럭 먹었다. 이미 청제한테 보고가 들어갔으면 저 둘을 죽여도 자신은 무사하기 힘들다.
"아닙니다. 난 저 병사를 모릅니다. 오늘 초면입니다."
차분하게 생각하면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을 것이고, 침착하게 대응했으면 말이 안 되는 부분도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안하무인인 오작에게 열 받으면서 흥분한 상태에 갑작스럽게 겁먹는 바람에 머리가 평소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오작과 치우를 죽여서 무마하는 길은 막혔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우겨서 발뺌하기로 마음먹었다.
"혈편복이 그러던데. 수비대 대장이 정기적으로 자신한테 제물을 보낸다고."
"혈편복은 악랄한 요괴입니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선량한 사람을 중상하는 걸 일삼는 악질이죠."
"그렇다면 혈편복을 불러서 대질해봐도 괜찮을까?"
함선은 머리가 하얘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제물이 살아 돌아온 걸 보고 혈편복이 죽었으려니 지레짐작했는데, 오작의 말을 들어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이대로 우겨서 혐의를 벗더라도 혈편복이 험담을 한 자신한테 보복할 게 뻔하니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함선은 오작과 치우를 죽이고 북부로 도망가기로 했다. 사고할 여유가 넉넉했다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은 떠올리지 않았으련만, 오작이 처음부터 화를 살살 돋우며 분위기를 몰아간 탓에 다른 생각은 미처 떠올리지도 못했다.
"혹시 네가 혈편복이냐?"
마음을 정하자 함선의 머리도 평소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점은, 똑똑해진 머리를 문제의 근본을 고민하는 데 쓰는 게 아니라 당장의 위기를 해결하는 쪽으로 굴렸다.
원래는 몰아붙이는 데 실패할 걸 대비하여 치우와 두 번째 계책도 짜 둔 상태였다. 그러나 상대가 이리 쉽게 걸려들자 오작은 저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요괴의 피는 푸른색이지. 내게서 피를 내라."
오작이 왼손을 내밀자 치우는 법력을 송곳처럼 뭉쳐 오작을 찔렀다. 오작이 자색 옷에 막지 말라고 했기에 송곳은 오작의 손등을 찔러 피를 냈다.
치우의 경지가 낮아 기운은 투명하게 뭉쳤다. 그래서 대부분 병사의 눈엔 치우의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오작 손등에서 피가 나오는 것으로 비쳤다.
그나마 무공 경지가 조금 높은 군관들만 치우가 기운을 뭉친 걸 느꼈다.
"너도 피를 내 봐. 만약 붉은 피가 나온다면 혈편복한테 다시 확인해 보겠다."
함선은 혈편복이 준 혈령단血靈丹을 정기적으로 복용했다. 그러나 피 흘릴 일이 없어서 자신의 피가 붉은색인지 푸른색인지 모른다.
게다가 붉은 피가 나와봤자 혈편복을 불러다 대질하면 자신의 죄는 여지없이 드러나게 된다.
퇴로가 막혔다는 생각에 함선은 모든 걸 내려놨다. 혈령단으로부터 얻은 기운을 잔뜩 끌어올리며 이십 년 동안 모은 재물의 구 할을 주고 구한 칼을 치켜들고 말 위에서 건들거리는 오작을 덮쳤다.
수비대의 군관과 병사들 모두 옆 사람을 바라보며 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함선의 행동은 오작의 주장을 솔직하게 인정한 거나 다름없었다.
"나쁜 새끼."
치우가 욕을 뱉으며 함선에게 달려갔다.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이 많기에 오작은 술사 흉내를 내고 치우는 무인 흉내를 내기로 사전에 약속했다.
실질적으론 반대지만.
함선의 태산 수비대는 청제의 직속 부대다. 즙선기가 실종된 지 삼십 년 가까이 된 북부는 상황이 어지러워 동부를 침입할 힘이 전혀 없다.
그러나 태산 주변에 수많은 요괴가 살기에 어중이떠중이가 지킬 만한 곳은 절대 아니었다. 비록 태산 수비대는 지원이 줄어 예전처럼 강하지 않지만, 함선은 진짜였다.
치우가 갑자기 앞을 가로막았지만, 함선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눈으로 오작을 견제하며 길이가 일 장에 가까운 커다란 칼을 버드나무 가지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비틀었다.
맹렬한 기세로 오작을 덮치던 칼날이 부드럽게 선회하며 치우의 머리를 노렸다.
깡 소리와 함께 함선의 칼이 하늘로 높이 들렸다. 치우의 머리를 때린 반탄력으로 공격할 때와 비슷한 속도로 튕긴 것이다.
치우가 피하지 않고 칼을 그대로 맞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함선은 공격 실패와 더불어 얼굴과 몸을 치우에게 노출했다.
진작 칼을 놓았으면 두 손을 수비에 쓸 수 있겠지만, 반탄력이 그렇게 강할 걸 예상 못 한 바람에 두 팔도 칼과 함께 뒤로 젖혀진 상태였다.
치우는 월영인으로 칼을 만들어 함선의 목을 베었다. 송곳과 마찬가지로 투명하게 뭉쳐 강한 기운이 아니지만, 상대는 미처 갑옷도 안 차려입어 목의 맨살을 드러낸 인간이었다.
"푸른 피다!"
치우의 월영인에 목을 베인 함선은 푸른 피를 질질 흘렸다.
"대장이 요괴가 됐다!"
나이를 먹으며 점점 약해지는 육체에 실망을 느끼던 함선은 안타깝게도 혈편복의 꼬드김을 거부하지 못했다. 혈령단을 정기적으로 복용하며 조금씩 요괴로 변했다.
"비켜."
오작의 말에 치우는 잽싸게 옆으로 피했다. 사람이면 목의 핏줄을 베인 즉시 반항할 힘을 잃었고, 호흡 몇 번 할 사이에 목숨까지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함선은 피를 잔뜩 흘리면서도 전혀 아프거나 힘든 표정이 아니었다.
"천타오뢰굉."
혈편복의 기세에 눌려 거듭 실패했던 오뢰굉이다. 그러나 그간 무극을 깨우치며 기운을 제어하는 게 조금 쉬워졌고, 상대가 기세를 다룰 줄도 모르는 함선이기에 단박에 성공했다.
다섯 가닥의 벼락을 맞은 함선은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한 줌 재가 되었다. 강한 바람에 재가 날린 자리엔 붉고 작은 돌이 몇 개 남았다.
함선이 삼킨 혈령단들이었다.
"이건 오물이구나."
치우는 잡스러운 기운을 억지로 뭉친 혈령단을 발로 꾹 밟아 부숴버렸다. 혈령단이 부서지자 안에 잡혀 있던 기운들도 자유를 얻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임시 대장을 뽑고 천성의 장군한테 오늘 일을 보고하거라. 우리는 중요한 임무가 있어 바로 떠나야겠다."
군관과 병사들이 한껏 움츠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너희 둘의 정체를 밝히기 전엔 떠날 생각을 말아라."
분명히 한 사람의 목소리지만, 사방에서 들려왔다. 치우는 누가 말했는지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다가 오작의 눈길을 따라 붉은 옷의 중년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 작가의말
계책을 꾸며 태산을 쉽게 넘으려 했는데 방해꾼이 등장.
혈령화요단 - 화요는 요괴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재료를 소화하기 쉽게 조리하여 먹는 게 최고의 보양식입니다. 괜히 삼이니 녹용이니 하면서 양 조절을 못 하면 오히려 그게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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