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화명명소鬼火冥冥燒
귀곡무문鬼哭無門
귀신은 울고 싶으나 하소연할 데 없고
멸살무계滅殺無界
죽음은 공평하게 찾아간다
'찾았다.'
치우는 끝내 은신한 뱀을 발견했다.
'형 말대로 하니까 다 되네.'
은신술은 모습, 기척, 존재감, 냄새, 그림자 등을 모조리 숨겨야 한다. 은신술이란 같은 이름을 쓰는 법술이 최소 수십 가지인데, 각자 장점이 있다.
치우의 것은 존재감 빼고 다 잘 숨기는 은신술인데, 존재감을 제대로 못 숨기는 것도 치우의 타고난 강한 기질 때문이다.
오작의 은신술은 모습 빼고 다 잘 숨겨주는 은신술인데, 그러고도 백제한테 들켰다. 존재감을 숨기는 데 급급하여 주변과의 조화를 생각지 않은 탓에 이질감을 발생한 거다.
뱀의 은신술은 존재감도 잘 숨기고 주변과 조화도 잘 이뤘다. 그러나 단 하나. 냄새를 숨기지 못했다.
이틀이 넘은 기간 상대가 발견 못 할 정도로 잘 숨기긴 했으나, 치우는 어마어마한 후각으로 아주 짧은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진 독 냄새를 잡아냈다.
"귀곡멸살!"
치우의 귀곡멸살은 위력이 강한 편이다. 처음 펼칠 때 공손부보를 비롯하여 서른이 넘은 요괴를 일격에 죽일 정도로 강했다.
그러나 당시엔 봉천막으로 외부와 단절되어 위력이 증폭되었고, 끌어 쓴 귀기의 양도 어마어마하게 컸다.
지금은 그때보다 기운이 훨씬 적고 밀폐된 상황도 아니다. 그리고 공손부보나 그때 요괴들 따위와는 비교조차 미안하게 강한 봉래도의 스물이 넘은 요괴와 인간이 상대다.
치우가 이틀의 도주로 꽤 많은 법력을 소모한 상황이 아니어도 이들을 한꺼번에 죽이기엔 모든 면에서 부족했다.
그러나 치우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귀곡멸살의 초식을 펼쳤다.
"으악."
창백한 불이 치우를 포위한 자들 몸에 붙었다. 그저 보기엔 차가울 것 같은 귀화는 놈들의 몸을 야금야금 소멸했다.
"자결해."
상황을 일찍 파악한 요괴가 자결했다. 귀화가 잠식하기 전에 죽은 요괴의 삼혼은 훨훨 날아서 삼계윤회환으로 갔다.
그러나 미련이 남아 자결을 머뭇거린 자들은 귀화에 삼혼이 전부 타 사라지며 영원한 소멸을 맞이했다.
삼혼이 흩어지거나 부서지는 건 소멸이 아니다. 영혼 조각 하나라도 삼계윤회환에 들어가면 존재는 이어진다.
그러나 귀화에 탄 삼혼은 그대로 사라지기에 존재의 소멸로 이어졌다.
"어떻게 한 거지?"
치우의 은신을 발견해 도주를 방해하던 뱀 요괴가 질문했다. 몇 토막이 되어 귀화에 불타는 뱀은 자결할 기회마저 놓쳤다.
몸이 온전하기라도 하면 자결할 수 있었을 텐데, 강한 위력의 초식에 몸이 토막 나는 바람에 자신을 죽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칼 안에서 초식을 펼친 다음 밖으로 내보내면 돼."
말은 쉽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다. 치우는 기운을 마환도 안에 가두고 귀곡멸살을 펼쳤다. 마환도에 옹이 진 귀화의 기운이 거기에 반응했고, 마환도라는 작은 공간에서 펼쳤기에 위력도 강했다.
치우는 칼을 휘두르는 거로 강하게 증폭된 귀곡멸살의 기운을 스물이 넘은 봉래도 제자들한테 골고루 분배했다.
"제길."
대답을 들은 뱀은 눈도 못 감고 죽어버렸다. 치우의 대답은 그저 '나 잘났소' 자랑하는 것밖에 더 되지 않는다.
'마환도 아니면 그저 평범한 초식이구나.'
예상대로 귀찮게 구는 자들을 전부 해치웠지만, 치우의 속도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귀곡멸살은 멸천칠절공에 기반을 둔 무공이다. 그러나 치우가 처음부터 귀기로 발동했기에 평범한 기운으론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지 않는다.
치우의 몸에서 귀기를 다 없앴고, 태극보인을 제거하며 다시는 귀기를 몸에 쌓을 수 없기에 마환도에 잠든 귀화의 기운을 깨워야만 살상력을 보장할 수 있다.
신중하게 요괴와 인간들의 죽음을 확인한 치우는 오작이 평소 하던 걸 회상하여 흔적을 지웠다. 단순히 흔적을 없애는 게 아니라 의미 없는 흔적을 추가하기도 하여 있을지 모를 추적자한테 혼란을 줬다.
흔적을 대충 만진 다음 은신술로 몸을 숨기고 근처의 강으로 갔다. 몸에 묻은 피도 씻을 겸, 물을 따라 움직이며 흔적을 안 남기려는 속셈이었다.
반나절 강물을 타고 달리니 꽤 큰 마을 하나 나왔다. 대부분 마을이 큰물 혹은 큰 산을 끼고 있기에 당연한 일이다.
뭍에 오른 치우는 강제명이 보여줬던 방식을 흉내 내 몸의 물기를 말렸다.
"치우야."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란 치우는 마환도를 꺼내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눔아. 나다."
"할아버지도 참. 귀신인 줄 알고 놀랐잖아."
치우가 숨으면 구망이 못 찾지만, 구망이 숨어도 치우가 못 찾는다. 구망의 은신술은 오작보다도 뛰어난 수준이다. 법력의 순수함은 오작이 훨씬 나으나, 경지나 기운을 다루는 솜씨는 구망이 한 수 위다.
"어서 나를 따라 구려국으로 가야겠다."
"왜? 형은 어쩌고?"
"궁지에 몰린 청제가 모든 세력을 모아서 형양으로 진격하고 있다. 그 수가 무려 일만이나 된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왔어?"
치우는 구망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오작이 편익조를 보냈다. 네가 놈들을 유인하기로 했는데 혹시 모르니 보호해 달라고. 반고의 도끼가 뽑혀 오행의 기운이 서로 통하였으니 다른 지역으로 가도 괜찮다고 하더라."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금계산부터 시작해 네 흔적을 쫓았지. 네 뒤를 따르면서 흔적을 다 지웠으니 누구도 추적하지 못할 거다."
"형이 다른 말은 없었어?"
"응. 다시 편익조를 보냈는데 받는 사람이 없었다."
오작은 편익조 법술의 경지가 치우보다도 못하다. 오작의 편익조가 바로 전달된 건 최근 수련으로 경지를 많이 올린 구망이 자신을 찾는 편익조를 감지하고 바로 소환한 덕분이다.
"공공이 우리랑 연합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청제 쪽이 난리 났다."
청제랑 친분을 유지하던 공공은 구려국과 손을 잡기로 했다.
공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성공한 산적이다. 털어야 할 상대와 털지 말아야 할 상대를 정확히 구분하여 재물을 안전하게 모았다.
공공 역시 그러한 눈치 혹은 직감으로 불릴 만한 감각을 타고났다. 오작과 치우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공공은 과감히 청제를 버리고 구려국과 연합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간 친분을 유지하긴 했지만, 신농을 죽이고 적제를 황으로 추대하려던 때에 청제가 모르쇠를 놓은 적 있어 미운털이 이미 박혔다.
거기에 운사와 우사가 크게 다쳐 동부 국가들에 비를 내려주지 못하는 바람에 꽤 많은 왕국이 청제와 등을 돌리거나 거리를 벌렸다.
신농이 죽은 이후 줄곧 공석인 황의 자리에 앉으려는 욕심으로 최대한 전력을 보전하며 동부를 통일하려던 청제는 궁지에 몰려 모든 세력을 모아 구려국으로 진격했다.
그 푸른 서슬에 놀라 굴복한 국가도 있지만, 일부는 구망의 지지를 받는 구려국이 청제와 한 판 해볼 만하다는 생각으로 중립의 태도를 표명했다.
구망과 구려국의 왕은 치우와 오작이 얼른 돌아와서 도와주기를 바랐지만, 행방을 몰라 애만 태웠다.
그러다가 오작의 편익조를 받고 구망이 수호룡 청배를 소환해 단숨에 금계산까지 날아온 것이다.
"서두르자. 청제를 물리친다고 끝이 아니라고 하더구나."
치우는 오작이 조금 걱정되었지만, 구려국의 할아버지는 물론 백성들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망설이지 않았다.
"경공이 형편없구나."
청배는 형양에서 금계산까지 하루 만에 도착하느라 힘을 다 소진했기에 지금은 소환에 응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구망과 치우는 경공을 펼쳐 형양까지 돌아가야 한다.
"일단 내가 하는 걸 똑같이 해 봐."
구망은 치우가 어떤 아이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경공 구결을 읊어주고 외우게 하고 뜻을 해석해 알려주는 거로는 며칠도 더 걸린다.
그냥 보고 따라 하라고 하면 곧잘 해내고, 얼마 안 지나 아주 높은 수준으로 펼쳐낸다.
예전엔 그런 방식으로 성장하면 재능이 동나는 순간 큰 벽에 막혀 좌절할 것을 걱정해 엄하게 가르치려 했으나, 이젠 포기했다.
말한다고 들은 놈도 아니고, 짧은 기간 엄청나게 발전한 모습을 보니 그저 헛걱정이구나 싶었다.
오작의 경공은 멸천칠절공을 기반으로 했다. 멸천칠절공의 경지가 낮은 치우는 보고도 따라 할 수 없었다.
구망의 경공은 어디에서 배운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다. 오작의 경공처럼 운기가 빡빡하지 않아 치우도 쉽게 따라 했다.
"뭐야. 이 경공은 빠르기만 하잖아."
오작의 경공은 은밀하고 정확하기까지 하다. 달리다 멈추는 것도 쉽게 하고 방향 전환도 부드럽다.
"경공이 빠르면 되지 뭘 더 바라."
구망의 핀잔을 들은 치우는 깨닫는 바가 있어 편한 미소를 지었다. 구망은 그냥 던진 말에 치우가 뭔가 깨우친 듯하여 보이자 감개가 무량했다.
예전엔 좋은 말을 들려줘도 오작만 깨닫고 치우는 멀뚱했다. 늘 치우도 오작처럼 똑똑하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했는데, 이젠 아쉬움이 하나도 없다.
둘이 열심히 달려 구려국에 도착하여 청제와 싸울 준비를 할 때, 오작과 형천은 금계동에 계속 머물렀다.
봉래도의 제자들이 금계산을 빗질하듯 수색하는 상황이다. 오작뿐이면 은신술도 뛰어나고 경공도 뛰어나서 괜찮을 테지만, 형천은 둘 다 별로였다.
"넌 처음에 빠른데 일정 수준이 되면 느리구나."
형천과 소소는 금계산에서 오작과 치우를 찾으려다가 조공명한테 잡혔다. 자단의 믿음을 얻으려고 데려온 오행마는 오히려 조공명이 둘을 잡는 빌미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백오와 현작이 와서 구했지만, 봉래도의 제자들 앞에서 형천의 힘도 소소의 은신술도 먹히지 않았다.
다행히 백오가 커다란 불덩이를 폭발시키는 걸 보고 형천이 삼매진화를 얻었고, 덕분에 문을 열고 금계동에 들어왔다.
"형님은 쉬십시오.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소소의 기지 덕분에 둘은 탁일계와 만났다. 솔직하게 얘기한 덕분에 목숨은 부지했지만, 대부분 시간은 지각을 잃은 채 멍하니 있어야 했다.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뭐가 뭔지 알고 해야 한다."
오작은 어려서부터 많은 걸 접하며 사물을 쉽게 이해했다. 치우는 타고난 재능으로 쉽게 이해했다.
형천의 재능 역시 녹록지 않지만, 치우와 비교하면 재능이 부족하고 오작과 비교하면 경험이 형편없이 적다.
"형님 말은 이해했습니다. 똑같이 따라 하는 건 흉내에 불과하다는 거잖아요. 지금 나한테 맞게 여러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시도를 하고 있어. 시도마다 나아지거나 나빠지거나 그대로일 거야. 거기에서 뭔가 느끼고 다음엔 뭘 시도할지 생각해야 한다고. 무작정 하다가 얻어걸리길 바라는 건 좋은 수련 방식이 아니야."
"말씀 감사합니다."
형천은 곧바로 오작의 말대로 했다. 처음부터 말해줘도 되지만, 그랬다간 지금처럼 새겨듣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시간을 허비한 것 같지만, 형천이 오작의 말을 깊이 새긴 덕분에 은신술과 경공이 원하는 수준까지 되기에 걸리는 기간은 짧아진다.
형천은 휴식도 잊고 은신술과 경공 수련에 매진했다. 가끔은 머리를 비우려고 오작과 대련했다. 그렇게 몸과 머리를 덥혔다 식히기를 반복하며 은신술과 경공에 대한 이해를 조금씩 쌓아갔다.
"형천아. 네 복수는 잠시 미뤄야 할 것 같구나."
형천은 힘이 강하지만, 지구력은 조금 아쉬웠다. 치우한테는 당연히 안 되고 오작과 비교해도 조금 부족하다.
며칠의 수련으로 오작이 정확한 수련과 휴식 계획을 짰고, 형천은 그대로 따랐다.
"어차피 지금 수준으론 적표노를 이기지도 못합니다."
느린 호흡으로 숨을 고르며 체력을 회복하던 형천이 대답했다.
"넌 완벽하게 이기려고 하는구나. 지장술을 익혀 기습하면 적표노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형천은 법술 재능도 뛰어나다. 원래부터 그랬는지 영생과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경지도 힘도 수준도 높아진 오작의 눈엔 형천의 어마어마한 법술 재능이 보였다.
"형님 말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그놈을 능가한 후 실력으로 죽여야겠습니다."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냐?"
"제가 알아도 괜찮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오작은 당장 강제명이 적제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형천한테 설명했다. 치우와 달리 이런 면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형천은 바로 알아들었다.
"적표노가 죽으면 강제명이 적제가 될 것이고, 그럼 희운이라는 자가 황제 자리를 노릴 거라는 말씀이군요."
"지금 북부는 대혼란 직전이다. 그런 상황에서 남부와 중부가 손잡으면 형세가 어떻게 흐를지 짐작이 가지 않는구나."
오작은 희운이 황제가 되는 데 큰 의심을 하지 않았다. 공손부보는 물론 소전까지 야망에 불타 오랜 기간 준비했다.
그 성과가 고스란히 희운의 손에 들어갔다. 거기에 남부의 지지까지 얹히면 함추뉴를 몰아내는 건 문제 없다.
함추뉴는 백성들이 보내는 선망에 비해 보유한 힘은 약하다. 함추뉴가 왕으로 있는 용초국龍肖國은 중부의 백 개 국가 중에서 중간에도 못 미치는 실력이다.
"그럼 당분간 형님을 따라다니며 실력을 더 키우겠습니다."
- 작가의말
치우가 귀곡멸살도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다 뒤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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