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익혈편복靑翼血蝙蝠
천년도행仟年道行
천년의 수련이
훼어일념毁於壹念
작은 실수로 무너지다
아직 데워지지 않은 시원한 오전 바람이 오작과 치우의 목을 간질였다. 맑은 햇살이 밝게 비추고 작은 동물들이 즐겁게 뛰놀았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로 귀가 즐겁고 나무와 풀이 내는 향에 마음이 편하다.
평화로운 숲이었다.
"요괴 서식지 맞아?"
"요괴라고 뭐 닥치는 대로 죽이는 줄 알아?"
말을 달리기 어려울 정도로 짙은 숲이어서 오작과 치우가 앞장서고 둔각이 뒤에서 따랐다. 몸집이 커서 숲을 빠르게 달릴 수 없는 둔각의 속도에 맞춰 치우와 오작은 다소 느리게 움직였다.
"이상해."
오작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뭐가?"
"숲은 보통 중심으로 갈수록 빼곡하고 바깥으로 갈수록 성기거든. 지도대로라면 우린 아직 숲의 중심에 못 이르렀어. 그런데 벌써 나무 간격이 넓어지고 있어."
"난 또 뭐라고. 모든 숲이 상식에 부합한다는 법도 없잖아."
오작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코로 들어오는 냄새는 갓 숲에 진입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 내가 좀 민감했어."
나무 사이가 넓어져서 둔각이 좀 더 빠르게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치우와 오작도 속도를 조금 올렸다.
그렇게 숲의 절반을 지나고도 아무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형. 요괴가 잠자나 봐. 아니면 다른 데로 이사 갔든지."
"상황을 유리하게 해석하지 말라니까. 숲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엔 경각심을 늦추지 마."
치우도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심심해서 아무 말이나 주워섬긴 거였다. 그리고 예상했던 잔소리가 나오자 속으로 몰래 자축했다. 일월동휘의 법술을 익히는 과정에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한다며 수많은 잔소리를 들어서 이젠 오작이 어떤 말을 할지 대충 짐작이 갔다.
"형. 물소리야."
귀가 밝은 치우가 물소리를 들었다.
"조심하자."
치우와 오작은 속도를 늦추고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갔다. 개울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도랑 수준의 물이 있었다. 물고기는 안 보이지만, 벌레도 있고 개구리도 있는 걸 보니 마셔도 괜찮은 것 같았다.
"조금 씻을까?"
"응. 어차피 이쯤에서 쉬어야 해."
치우는 몸에 꽉 끼는 옷을 어렵게 벗고 손으로 물을 떠서 몸을 닦았다. 꽤 오랜만에 씻는 거여서 때가 쭉쭉 일었다.
오작은 다 씻은 치우가 물기를 닦고 옷을 입은 다음에야 도랑에 몸을 담갔다. 옷이 오작의 마음을 읽고 물을 통과시켰다.
차가운 물이 몸을 적시자 기분이 좋아졌다. 여름엔 더위를 막아주고 겨울엔 추위를 막아주는 옷 때문에 오작은 덥거나 춥다는 감각을 잘 몰랐다. 그래서 차가우면서도 시원한 생소한 느낌에 살짝 마음이 들떴다.
"형, 그만 가자."
"응. 미안."
기분에 취한 오작은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오래 몸을 담갔다. 지금까지 늘 고민하며 계획적으로 살아온 오작에겐 작은 일탈이었다.
'정신 차리자. 요괴의 술수일지도 모르니까.'
작게 반성하며 오작은 주변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의심의 눈길로 바라봐도 특이점은 없었다.
그때. 뭔가 나무를 두드리는 툭툭 소리가 들렸다. 딱따구리와 같은 새의 짓이라고 하기엔 너무 둔탁한 소리였다.
"형도 들었어?"
"응. 우리가 가는 방향에서 나는 소리 같아."
"내가 앞장설게."
오작의 자색 옷도 방어력이 강한 법보다. 그러나 천으로 되어 쉽게 믿음을 주기 힘든 외관을 갖췄다. 그래서 치우는 늘 자신이 앞장서려 했다.
홍영창까지 막았던 동주철갑의 방어력을 아는 오작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둘은 아까보다 훨씬 느리게 걸었다. 그리고 끝내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읍읍."
소리를 낸 자는 입에 재갈을 물고 나무에 묶인 서른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둔탁한 소리는 뒤통수와 발꿈치로 나무를 두드려 낸 것이었다.
"요괴는 대부분이 피가 푸른색이야. 먼저 피를 조금 내봐."
오작의 말에 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묶인 남자한테 접근한 치우는 법력을 송곳처럼 만들어서 남자 손등을 찔렀다.
빨간 핏방울이 작게 솟아났다.
"꼭 요괴가 아니라는 법은 없는데, 그래도 아닐 가능성이 꽤 커. 재갈을 풀어 줘."
치우가 재갈을 풀자 나무에 묶인 사내는 헉헉거리며 숨을 가쁘게 쉬었다.
"당신들은 사람이요 요괴요?"
오히려 묶인 사내가 자신들을 의심하자 치우는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사람인지 요괸지 당신한테 중요한 건 아닐 텐데요. 사람이든 요괴든 당신은 반항할 힘이 없잖습니까."
오작의 말에 사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 난 청제 휘하의 태산 수비대 소속이요. 가, 감히 날 죽이겠다고? 당신들은 청제가 두렵지도 않소?"
"청제가 당신 같은 병사의 복수까지 해줄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지금 칼자루는 우리 손에 있으니 묻는 말에나 대답하세요. 당신을 묶은 건 사람입니까 요괴입니까."
"요괴요. 여기 주인인 청익혈편복이오."
"당신은 잡혀 온 겁니까 여기 들어와서 잡힌 겁니까?"
"들어와서 잡혔소. 혈편복이 낮에 자고 밤에만 활동하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낮에 나왔소."
"요괴는 왜 당신을 묶어만 둔 겁니까?"
"당신들 외지 사람이군. 혈편복은 피를 뽑아 마시는 요괴요. 인간 피는 더럽다고 이렇게 칠 일 동안 묶어두고 햇빛과 달빛으로 피를 맑게 한다고 들었소."
오작은 잠시 고민하다가 질문을 이어갔다.
"당신은 왜 이곳을 들어온 겁니까?"
"말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당신을 구할지 말지 결정하려는 겁니다. 우린 이대로 떠나도 손해 볼 거 없습니다."
사내는 다급한 나머지 시뻘건 얼굴로 침을 튀기며 말했다.
"당신들 여길 나가는 방법 모르지? 그냥 걸으면 숲이 끝날 거 같아? 난 나가는 방법 알아. 그러니까 여길 벗어나고 싶으면 날 빨리 풀어."
"먼저 대답을 듣고 결정하겠습니다. 우린 길도 잘 찾거든요."
사내는 우물쭈물하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
"북부에서 큰 전쟁이 났소. 난 이 소식을 빨리 전해야 해서 여기 들어온 거요. 숲에 들어온 다음 출구만 찾으면 순식간에 반대편으로 갈 수 있거든. 근데 대낮이라고 너무 조심하지 않은 바람에 요괴한테 잡힌 거요."
"수비대에 편익조는 없는 겁니까?"
"없소. 편익조를 부릴 수준의 술사가 없거든."
오작은 마지막으로 사내를 시험하기로 했다.
"그럼 이게 뭔지는 알겠습니까?"
"갈우의 인장이 찍힌 지도요. 갈색 구레나룻에 맨날 술을 퍼마시는 참장이잖소."
오작은 지도를 다시 품에 넣고 치우에게 눈짓했다. 치우는 밧줄을 끌러 사내를 풀어줬다.
"우린 태산을 통해 북부로 가야 합니다. 나가는 방법을 알려주시죠."
"출구를 찾으면 되오. 출구는 동굴인데 위치가 매번 바뀌오. 동굴에 들어간 다음 북쪽으로 걸으면 태산이 나올 거요. 난 남쪽으로 가야하고."
셋은 힘을 합쳐 출구를 찾기로 했다.
"어디로 가고 싶소?"
사내의 질문에 치우는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럼 왼쪽이오."
사내가 앞장서고 치우와 오작은 뒤를 따랐다.
"왜 반대로 하는 겁니까?"
"이 숲은 미로요. 청익혈편복의 날개에서 나는 미혼산迷渾散 때문에 방향을 헷갈리거든. 북쪽이라고 생각한 곳은 남쪽일 수도 있고 서쪽일 수도 있소. 미혼산은 출구를 못 찾게 방해하는 게 목적이기에 일부러 반대 방향으로 가게 유도하오."
과연, 사내의 말대로 매번 끌리는 방향과 반대로 가자 커다란 동굴이 나타났다.
"명심하시오. 빨리 벗어나겠다고 달리면 안 되오. 천천히 북쪽으로 걸으면 어느 순간 태산이 나타날 거요. 그럼 난 이만. 소식을 늦게 전하면 목이 잘리고 내 가족도 노예가 될 거요."
말을 마친 사내는 바로 동굴로 뛰어들었다. 오작과 치우는 잠깐 망설이다가 음침하게 아가리를 벌린 동굴로 발길을 옮겼다.
"거짓말은 아니네."
동굴에 들어서자 방향 감각이 돌아왔다. 밖에 있을 때는 줄곧 북쪽으로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원을 빙빙 그리며 돌았던 거였다.
그때, 쿵 소리와 함께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 동굴 입구를 막아버렸다.
몸을 오스스 떨리게 하는 차갑고 불쾌한 기운이 동굴을 잠식했다. 귀에는 멀리서 속삭이는 의미 모를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크크. 멍청한 놈들. 데리고 노는 재미가 있네."
태산 수비대 소속이라고 주장하던 병사가 나타났다. 아까와 달리 얼굴이 시커멓고 송곳니가 날카롭다. 그리고 등에 검푸른색의 피막 날개가 있었다.
"아까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데?"
오작이 작게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난 피만 마시는 게 아니라 뇌수도 마셔. 그래서 이놈의 기억을 전부 읽었지."
요괴가 득의양양한 말투로 으스댔다.
"근데 왜 이리 복잡하게 하지? 그냥 우릴 공격하면 되는 거잖아."
"생명을 함부로 해치면 악행이 쌓여 하늘로 올라갈 수 없어. 그래서 이렇게 어렵게 영지까지 끌어오는 거지. 내 영지에선 뭘 해도 상관없거든."
요괴가 승천이 어려운 이유다. 맹수보다 더 상위의 포식자인 요괴는 생명을 안 해치고 사는 게 사람더러 숨을 참고 살라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 어려운 걸 해내서 승천하는 요괴가 가끔 있다. 그러나 대부분 요괴는 승천을 포기하고 타고난 대로 산다. 그리고 일부는 청익혈편복처럼 몰래 악행을 벌인다.
"근데 말이지. 네가 청익혈편복이라고 한 것도 진짜잖아."
"그럼. 인간이든 요괴든 거짓보단 진실에 더 잘 속으니까."
"늦었지만, 자기소개 좀 할게."
오작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난 자단의 조카야. 자단이 누구냐고? 홍영창의 주인이지."
시커멓던 혈편복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홍영창을 오래 봤던 사람으로서 판단하건대, 넌 천 년 이상 수련했구나."
피를 탐하는 요괴들 사이에서 홍영창은 전설이다.
"아까워서 어쩌나. 오늘 천년 도행이 물거품이 될 테니."
"흥. 그런다고 내가 겁먹을 거 같아?"
"안 먹어도 돼. 결과에는 영향이 없으니까."
"혈박술血縛術!"
치우가 시동어만으로 혈박술을 펼쳤다. 타고난 주문이 아니어서 쉬운 일이 아닌데, 삼태극을 만드는 과정에 많은 깨달음을 얻은 덕에 어렵게나마 해냈다.
"사실 우린 너 몰래 손으로 대화했어. 피가 붉으니까 요괴는 아니라고 생각했지. 기껏해야 요괴의 하수인이 아닐까 의심했다. 근데 여기 주인이 청익혈편복이라는 말을 듣고 피 색깔을 바꾸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혈편복은 아무리 힘써도 안 움직여지는 몸에 질겁했다.
"어떻게 나보다 피에 대한 지배력이 강할 수 있지?"
"이 혈박술은 홍영창이 만든 거야. 당연히 급이 낮은 요괴들에겐 절대적으로 먹히지."
오작은 치우의 재능에 감탄했다. 어느 정도 움직임을 방해하면 된다고 여겼는데, 치우는 상대를 옴짝달싹 못 하게 잡아뒀다.
"날 어떻게 할 생각이야?"
"당연히 죽여야지. 넌 요괴잖아."
혈편복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애걸을 포기했다.
요괴는 집착이 심하다. 약한 요괴는 그나마 아닌 놈이 많지만, 실력이 강하면 예외가 드물다. 이미 오작과 치우를 해칠 마음을 품은 혈편복을 살려두면 두고두고 후환이 된다.
더구나 혈편복이나 홍영창과 같은 피와 관련한 족속은 그 집착이 다른 요괴들보다 훨씬 심하다. 오작이 홍영창과 잘 아는 사이고, 직접 만든 법술을 전수할 정도면 혈편복의 성향도 훤하게 꿰고 있다고 보면 된다.
"승천하겠다고 천삼백 년 수련했는데, 결국 작은 실수로 허망하게 끝나는구나."
"절실하지 않아서야. 네가 절실했다면 자기 영지에서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겠지."
"개소리 말고 빨리 끝내라. 다음엔 여우로 태어났으면 좋겠구나."
여우는 악행을 저질러도 승천할 수 있는 유일한 요괴다.
"미안. 내가 아직 미숙해서 준비에 시간이 오래 걸려."
약 일각이 더 지나고서야 오작은 겨우 성공했다.
"천타오뢰굉天打伍雷轟!"
오작이 벽력혼원수와 멸천칠절공의 구결을 결합하여 만든 무공이다. 법술을 펼치는 데 어려움을 느낀 오작이 최대한 법술과 관련한 요소를 배제하여 만들었다.
아예 법술을 배제하는 건 어렵지만, 법술 재능이 평범한 자도 열심히 수련하면 펼칠 수 있는 무공이다.
검고 희고 붉고 푸르고 누런 다섯 갈래의 벼락이 청익혈편복을 때렸다. 징벌뇌懲罰雷를 흉내 낸 오뢰굉은 요괴한테 효과가 매우 출중했다. 다섯 벼락에 맞은 혈편복은 시커먼 재 한 줌만 남기고 사라졌다.
"형, 나 가르쳐 줘."
"글공부 많이 해야 익힐 수 있어."
글공부라는 말에 치우는 오뢰굉을 익히는 걸 보류하기로 했다.
"형, 내단 나 줄 거지?"
"그래. 네가 다 먹어라."
치우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잿더미를 뒤졌다. 누런 엄지손가락 크기의 내단을 발견한 치우는 소매로 쓱쓱 닦은 다음 품에 넣었다.
귀령성모의 내단도 아직 소화하지 못했기에 혈편복의 내단은 이후 기회를 봐서 복용할 작정이었다.
"운이 좋았어."
천삼백 년 도행의 다른 요괴였다면 치우와 오작은 틀림없이 죽었다.
"다음부턴 더 신중해야겠어."
"형, 차라리 우리 여기서 수련 좀 하자."
오작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지금 실력으로 돌아다니다간 죽기 딱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가의말
다들 아시는 어떤 이유로 청익혈편복을 빠르게 응징했습니다. 혈편복을 쉽게 처리한 이유는 뒤에 43화와 46화에서 명확히 나옵니다. 천 년이 넘은 요괴가 너무 쉽게 죽은 거 아니냐고 생각할 분들이 계실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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