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력인흑제閤力引黑帝
낙화유의落花有意
떨어진 꽃잎은 정착하려는데
유수무정流水無情
흐르는 물은 그저 떠내려 보내누나
"도망쳐라!"
지름이 백 장 정도던 흑수해가 확장했다. 다행히 쌍익조가 노를 넉넉히 갖다줬고 나뭇잎도 그사이 꽤 회복하여 생기가 가득했다.
공공의 부하들은 늦지 않게 커진 흑수해의 품을 벗어났다.
"제길. 대왕이 알면 큰일인데."
객관적으로 따지면 이들이 잘못한 건 없다. 흑수해가 이들의 동의를 구하고 확장한 것도 아니기에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일은 매우 중요하다. 축융을 놓친 부하들도 욕 몇 마디 하고 용서한 공공이지만, 흑제를 꺼내는 일이 늦춰지면 다르게 반응할 게 분명하다.
"거기 머리 좋은 놈. 계산 좀 해봐."
"계산은 이미 끝났다. 최소 보름 늦춰질 거다."
흑제를 얼린 얼음은 흑수해 중심에 있다. 이들은 나뭇잎을 타고 흑수해 중심에 간 다음 밧줄로 강제명을 내린다.
강제명은 일정 기간 삼매화로 얼음을 녹인다. 그러다 다시 강제명을 끌어올린 다음 흑수해를 벗어나 나뭇잎을 회복케 한다.
흑수해가 커지면 중심까지 가는 시간이 길어진다. 흑수해는 그냥 바다가 아니어서 노를 저어 배를 움직이는 데 시간이 무척 걸린다.
게다가 노의 소모가 훨씬 많아질 것이니 모든 요소를 고려했을 때 원계획보다 보름이 늦어진다는 계산이 나왔다.
"아니야. 오히려 사흘 정도 빨리 끝낼 수 있어."
공공의 부하들은 입을 연 자의 눈길을 따라 멀리 바라봤다. 먼바다에 얼음배의 모습이 흐릿하게 맺혔다.
"빙령도의 얼음배일까?"
"확실해.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법력이 느껴지잖아."
"배에 탄 놈들의 법력일 수도 있지."
"이 먼 거리에서 법력이 느껴질 정도로 강하면 왜 우리한테 들켜."
나뭇잎과 얼음배의 거리는 최소 삼천 장이 넘었다. 그렇게 먼 거리에서 법력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자라면 자기 기운을 통제하지 못할 리 없다.
"그럼 빨리 가서 배를 뺏자."
"멍청한 소리. 괜히 싸우다가 배가 부서지면 어떡해. 저들은 아마 흑수해가 확장한 걸 알고 빙령도에서 보낸 조사관일 거야. 대왕의 명호를 대고 돈 좀 쥐여 주면 배를 빌려주겠지."
다행히 얼음배를 탄 두 남자는 나뭇잎을 탄 공공의 부하들을 보고 도망가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무리는 흑수해랑 멀지 않은 곳에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여긴 빙령도의 관할하에 있는 바답니다. 허락을 받지 않고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됩니다."
자색 옷을 입은 남자가 시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곁에 황금색 비늘갑옷을 입은 사내는 어딘가 불편한지 자꾸 눈을 끔뻑거렸다.
"우린 공공의 부하요. 북부의 모든 땅과 바다에 허락 없이 출입할 수 있소."
"여긴 흑수해입니다. 위험하니 어서 떠나기 바랍니다."
그때. 덩치 큰 사내가 바다를 밟고 달렸다. 개울이나 작은 강을 밟고 달리는 건 법력이 충만한 술사면 가능하다. 그러나 힘이 강한 바다나 큰 강을 밟고 달리는 건 법력뿐 아니라 경지도 높아야 하고 깨달음도 깊어야 한다.
상대가 예상외로 강해 보이자 공공의 부하들은 황급히 무기를 꺼냈다. 나뭇잎이 쇠로 된 물건을 싫어하여 흑수해 근처로 온 이후 한 번도 잡아본 적 없는 무기였다.
"불을 지켜."
아까 시간을 계산했던 머리 좋은 자가 외쳤다. 불은 강제명이다.
"제길."
치우는 뒷걸음질로 얼음배에 돌아갔다. 강제명이 치우의 손길을 피하는 바람에 구출에 실패했다.
"거래합시다."
오작이 협상을 제안했다. 강제명이 저쪽 편이면 싸워 이겨봤자 소용없다. 협상으로 공공의 부하들은 물론 강제명까지 만족케 해야 한다.
"좋아. 우린 얼음배를 원한다."
머리 좋은 놈이 나섰다.
"우린 의뢰를 받고 저 남자 찾으러 왔습니다."
서로 원하는 바가 명확해졌다. 오작도 공공의 수하도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난 여기 일 끝내기 전에 당신들과 돌아가지 않겠소."
가장 뜻밖인 건 구출 대상인 강제명이었다.
"이유가 궁금합니다. 우린 당신 조모의 의뢰를 받고 왔습니다."
"우선 내 법보인 화룡패火龍貝가 공공의 손에 있소. 난 그걸 돌려받아야 하오. 다음으론 난 여기 일을 완성해야 하오. 당신들이 무력으로 구출해도 이들은 다시 날 잡아다가 같은 일을 시킬 거요."
말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예하면 흑제를 얼린 얼음을 녹이면서 삼매화의 경지가 빠르게 상승했고, 해저빙을 녹인 심해수를 마시며 법력도 많이 늘었다.
그리고 흑수해에 몸을 담그면서부터 힘도 강해진 느낌이다.
"그럼 우리 목표는 일치하는군요."
오작의 말에 공공의 부하들이 반색했다.
"내가 알기론 흑수해에 오래 뜨는 배는 얼음배밖에 없습니다. 얼음배의 약점이라면 넷밖에 못 태운다는 거겠군요. 다행인 점은 여기 제 동생이 중부의 거인족을 팔씨름으로 이길 정도로 힘이 셉니다."
"우릴 돕겠다는 뜻이오?"
"서로 원하는 바를 취하자는 겁니다. 이 배에 내 동생하고 저기 강제명하고 당신들 사람 둘을 싣습니다. 노와 밧줄을 넉넉히 갖고 흑수해에 가서 하던 작업을 완성합니다. 작업이 끝나면 당신들은 화룡패를 돌려주고 강제명을 놔주면 됩니다. 우린 화룡패를 얻은 강제명을 데리고 떠나면 되고요."
협상은 원만하게 끝났다. 곧 오작이 나뭇잎으로 넘어가고 강제명과 힘이 가장 센 둘이 얼음배에 탔다. 노를 저어 흑수해로 간 후 강제명한테 법보를 입히고 물에서 숨 쉬게 하는 약을 먹인 후 밧줄을 단단히 묶었다.
몸을 살짝 담가 문제없음을 확인한 강제명은 바로 밑으로 내려갔다. 보통은 깊은 바다로 가는 게 엄청 힘든 일인데, 흑수해는 당기는 힘이 강해 오히려 치우 등이 밧줄을 잡고 잠수하는 속도를 조절해야 했다.
강제명은 꽤 빠른 속도로 바닥에 닿았다.
흑수해는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 세상에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 없는 고독이 몰려와 강제명을 괴롭히려 했다.
'난 원래 고독한 사람이었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왕이 되었다. 어차피 신농 때부터 왕국의 일은 물론 남부의 일까지 다 할머니가 처리했다. 왕이 되었다고 나아진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같이 놀던 아이들과 멀어져서 외로움만 더해갔다.
덕분에 웬만한 사람은 미쳐버릴지도 모를 환경에서 강제명은 집중할 수 있었다.
'삼매진화參昧眞火.'
원래 이름은 삼매화였다. 불을 익히는 술사 중 일 할 정도는 배우는 법술이다. 강제명의 삼매화는 개중에서도 특별했는데 순수함만 따지면 축융도 안 부러울 정도였다.
순수하기만 할 뿐 강하지 않던 법술이 흑수해에서 계속 펼치다 보니 진화했다. 특별한 제물을 바쳐 법술을 진화하는 방법이 있긴 해도 수련으로 삼매화가 진화한 전례는 없었다.
삼매진화의 불빛으로 강제명은 쉽게 흑제를 찾아냈다.
흑제를 가둔 건 검은 얼음이었다. 처음 발견했을 땐 일 장도 넘은 두께였다. 그러나 지금은 흑제의 몸에서 일 척 정도밖에 안 남았다.
'칠 촌이라고 했지.'
얼음은 흑제를 가둔 게 아니라 보호하고 있다. 얼음 덕분에 흑제의 몸이 흑수해에 녹지 않고 멀쩡하게 버티는 거다.
너무 얇게 하면 흑수해가 침범하여 흑제의 몸을 망가뜨릴 수도 있기에 강제명은 삼매진화를 섬세하게 다뤘다.
삼매화는 환경의 영향을 잘 받지 않는다. 그냥 허공에 피우나 물 속에서 피우나 소모되는 법력은 비슷하다.
그러나 큰 강이나 깊은 바다 혹은 깊은 동굴에서 펼치는 건 다르다. 산이나 바다나 강처럼 이름을 얻은 중에서도 강한 것들은 삼매화처럼 불을 초월한 불도 방해한다.
흑수해는 훨씬 심했다. 강제명이 소환한 삼매진화는 법력이 빠르게 소모됨에 따라 강풍 앞에 놓인 등불처럼 꺼질 듯 말 듯 깜빡였다.
'됐다.'
다행히 입에 한가득 문 해저빙이 녹기 시작했다. 해저빙이 녹은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며 법력으로 변해 단전에 들어갔다.
'물의 법력인데 불의 기운을 북돋워 준단 말이지.'
이제부턴 법력만 안정적으로 공급하면 된다. 강제명은 가끔 얼음의 두께를 측정하며 사색에 빠졌다. 해저빙은 분명히 물의 기운이 뭉친 물건인데 불의 아이이고 불의 기운을 다루는 강제명의 법력도 회복해 준다.
그렇게 시간 흐르는 줄도 모르고 얼음을 녹였다.
'어, 살았구나.'
얼음이 얇아지며 안에 든 흑제가 느껴졌다. 놀랍게도 삼십여 년 전에 다치고 도망친 흑제는 죽지 않았다.
미약하지만, 법력이 흐르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그때, 강한 힘이 강제명을 위로 끌어당겼다.
'얘기해야 하나?'
공공이 없으므로 거짓말을 해도 들킬 염려가 없다.
감각이 무뎌진 강제명은 몰랐지만, 평소보다 올라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반 각도 안 걸려 강제명은 얼음배 위로 건져졌다.
"이거 마셔."
강제명은 공공의 부하가 건네는 심해수를 마셨다. 법력이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또 내려갈 수 있어?"
둘은 강제명 몸에 묶었던 밧줄을 끌러서 바다에 버렸다. 그리고 강제명의 몸에 입은 수호계 법보도 벗겨서 버리고 새 법보로 갈아입혔다.
"별로 힘들지 않소."
"좋아. 잘 부탁한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정말 너한테 크게 보답할 거야. 끝까지 힘내고 조심하자."
밧줄을 단단히 묶은 강제명은 다시 흑수해로 들어갔다.
'잘생겼네.'
얼음이 얇아지며 얼굴이 더 똑똑히 보였다. 흑제는 위에 있는 오작과 비견할 정도의 미남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오작은 윤곽이 남성적이지만 오관이 부드럽고, 흑제는 윤곽이 부드러운데 오관이 남성적이고 또렷했다.
'기세가 대단하다. 나도 이 남자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
가출한 뒤 납치당하고 흑수해에서 흑제를 얼린 얼음을 녹이는 경험은 강제명의 짧은 인생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한 나라의 왕이라곤 하지만, 허수아비여서 별 책임감도 없었다. 결단이 빨랐던 건 오작과 반대로 포기가 빨랐기 때문이었다.
뭘 취할지 고민하는 오작과 반대로 강제명은 뭘 포기할지 먼저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고난을 겪으면서 심적으로 큰 변화가 생겼다. 아버지를 해친 흉수인 적제의 자리를 빼앗고 심지어는 황이 되고픈 욕망까지 생겼다.
그 뒤로 몇 번 더 잠수하여 끝내 얼음을 목표한 만큼 녹였다. 처음에 하루에 손톱만큼도 못 녹이고 버벅거렸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들었다.
얼음이 얇아지며 삼매진화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그간 강제명이 놀라울 정도로 강해진 덕분이었다.
"칠 촌이오. 더 안 내려가도 될 것 같소."
"확실해?"
강제명의 말에 공공의 부하가 다그쳤다.
"믿기 어려우면 직접 내려가 보든가."
강제명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 삼매화 아니면 아무것도 안 보인단 말이야."
"부적 재료 있으면 내가 만들어 주겠소."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삼매화를 부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뜻밖의 말에 치우가 끼어들었다.
"당연한 거 아니오?"
심사가 주밀한 오작도 미처 떠올리지 못한 부분이었다. 삼매화처럼 특별한 법술은 부적으로 제작하는 게 매우 어렵다. 강제명은 삼매화를 타고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능숙하게 익혔기에 부적으로 제작할 수 있다.
"해봐."
치우는 허공에서 부적에 필요한 재료들을 꺼내 강제명한테 건넸다. 강제명은 삼매진화를 부르는 부적을 여럿 만들어 치우한테 돌려줬다.
치우는 손가락에 피를 내어 부적 하나를 태웠다. 다른 기운이 일절 없는 순수한 불이 허공에 피어났다. 치우가 공급하는 법력을 끊을 때까지 불은 꺼지지 않고 고요히 타올랐다.
"세 개는 내 거야."
치우는 부적 세 개를 소매에 넣고 하나만 공공의 부하한테 넘겼다.
"그런데 흑수해에선 피를 못 내잖아."
바다에 들어가 확인하려던 공공의 부하가 뒤늦게 문제점을 발견했다. 흑수해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법보로 몸을 꼭꼭 감싸야 한다.
그러면 부적에 피를 묻힐 방법이 없다. 미리 붙이고 들어가면 흑제를 찾기도 전에 삼매진화가 꺼질 것이다.
"그럼 어쩌자는 거요?"
"일단 밖으로 나가자."
노를 저어 흑수해를 벗어났다.
"어떻게 됐지? 다 끝난 거야?"
나뭇잎에 타 있던 자들이 득달같이 질문했다.
"칠 촌만 남겼다고 하는데 확인할 방법이 없어."
"그런 부분은 서로 믿고 가야지. 어차피 강제명 빼고는 흑수해에서 뭘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냥 끌어올려 보면 될 거 아닙니까?"
오작의 말에 공공의 부하들이 손사래 쳤다.
"흑제가 안 죽었으면 어쩌려고. 대왕 없으면 절대 끌어올릴 수 없어."
- 형. 부적 얻었어.
치우의 은밀한 손짓에 오작이 질문했다.
- 무슨 부적?
- 불 부르는 부적. 세 개.
오작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 그래도 강제명 구한다. 안 그럼 축융이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게다가 삼매화로 금계동 문을 어떻게 여는지도 모른다. 순수한 삼매화를 얻은 자면 가능하다고 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셋 모두 쓰고도 못 열면 큰일이다.
혹시나 강제명이 이대로 죽어버리거나 하면 평생 자단을 못 찾을지도 모른다.
- 알았어.
"거리를 재는 법보를 갖고 확인하면 되지."
오작과 치우가 대화하는 사이 공공의 부하들도 나름대로 방법을 찾았다.
- 작가의말
납치범한테서 구출하려 했는데 인질이 거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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