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법사무혼武法士無魂
무법쌍수武法雙修
무공과 법술을 함께 수련해도
계선분명界線分明
둘의 경계는 분명했다
도망치기만 하면 기세가 쪼그라든다. 그렇게 되면 몸을 확실히 회복하고 흑수해의 힘까지 다스린 후에도 오작과 치우 그리고 공공을 상대할 때 위축된다.
어려서부터 맞으며 자란 맹수가 키운 주인한테 꼼짝도 못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즙무혼 정도의 고수가 멍청한 짐승처럼 어릴 때 맞았다고 끝까지 고개를 숙이진 않는다. 그러나 자신을 위협하던 상대를 기억하고 자연스럽게 몸이나 기운이 위축되는 건 막을 수 없는 본능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싸우는 내내 집중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는데, 실력이 비등한 고수의 싸움 대부분이 정신력 겨룸에서 승부가 가려지는 걸 생각하면 절대 피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도망가기 바쁜 와중에도 가끔 싸워주며 기세를 살리는 걸 잊지 않았다.
공공의 손가락에서 쏘아진 물줄기가 즙무혼의 머리를 노렸다. 즙무혼은 수정 몽둥이로 물줄기를 툭 쳤다.
끓는 물에 넣은 미역처럼 물줄기가 축 늘어졌다.
오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창을 찔렀다. 몸이 단단한 상대여서 회선창이 가장 효과가 좋다. 그러나 바다 안에서 펼치기엔 회선창은 너무 느렸다. 그냥 찌르기는 아무 효과도 없기에 절충하여 관일홍 초식을 펼쳤다.
즙무선은 몽둥이로 오작의 창끝을 맞춰 공격을 제지했다. 오작은 양발로 힘껏 물을 차며 밀려나는 몸을 제지했다.
'저들은 어떻게 하지?'
즙무혼과 공공은 마치 땅을 밟고 싸우는 사람처럼 강하게 부딪치고도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어떻게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의 기운이 강한 둘이 바다 안에서 재주를 펼치다 보니 법력 흐름이 선명하지 않은 탓이고, 즙무혼이 품은 흑수해의 기운이 감각을 방해한 탓이다.
몽둥이 하나로 오작과 공공을 잘 막아내던 즙무혼이 갑자기 몸을 돌려 도망쳤다.
'또 들켰구나.'
은신술을 펼치고 접근하던 치우가 들켰다. 이유는 모르지만, 즙무혼은 치우의 칼을 몹시 두려워했다.
안타깝게도 치우는 수영이 서투르다. 법력을 소모하여 바다를 밟고 달리는 게 더 빠른데, 법력 회복이 느려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오작과 공공만으론 즙무혼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무의미한 추격과 충돌만 반복했다.
"곧 육지구나."
공공이 허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물 안에서 말하는 재주가 없는 오작은 눈을 끔뻑이는 거로 의문을 표했다.
"땅에 가면 격차가 더 커져."
공공의 말대로 뭍에 오른 즙무혼은 기세등등해서 일행을 기다렸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게 있습니까?"
"저놈은 무법사다. 원래는 무공만 강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법술도 대단해졌다."
오작은 어렵지 않게 이유를 알아챘다.
"무공의 재능은 칠백에서 오고 법술 재능은 삼혼에서 옵니다. 아무래도 즙선기가 몸을 빼앗기면서 그렇게 된 것 같군요."
"이유야 어찌 됐든 상관없고. 보통 싸우면서 무공과 법술을 번갈아 펼치는 자들이 있지. 저놈은 무공과 법술을 섞어서 펼친다."
오작이 익힌 멸천칠절공과 비슷한 거다. 그러나 오작은 무공과 법술을 결합한 멸천칠절공을 익힌 거고, 즙무혼은 자신이 익힌 무공과 법술을 자유롭게 조합한다.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걱정하지 마. 우리도 만만치 않아."
말을 마친 치우가 몸을 날려 즙무혼을 공격했다. 상대는 치우의 칼을 피하며 반격했다. 반격하느라 드러난 틈은 오작이 천지일선 초식으로 찔렀다.
즙무혼은 치우를 공격하는 몽둥이를 멈추지 않았다. 대신 노는 손을 뻗어 오작의 창을 막았다.
'이런 건가?'
상대 기운을 분산하는 무공 기술에 몸을 보호하는 수호계 법술이 섞였다. 기운을 분산하는 무공을 파하려면 힘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수호계 법술을 깨려면 힘을 넓게 퍼뜨려 울리게 해야 한다.
물론, 즙무혼의 수법이라고 완벽한 건 아니다. 법술의 기운과 무공의 기운을 가늠하여 적절한 범위에 적당한 힘을 집중해 둘 다 깨면 된다.
문제는 즙무혼의 기운을 확실히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과 오작의 힘이 상대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최강의 초식인 천지일선이 너무 쉽게 막혔지만, 오작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자만하지 않고 자기 실력을 꽤 객관적으로 평가해 온 덕분이었다.
그리고 오작이 물러난 자리를 공공이 차지했다. 공격력 하나는 정말 어마어마한 홍도공의 공격에 즙무혼은 치우를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런 거구나."
오작은 창을 소매에 넣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멸천칠절공의 수법으로 즙무혼을 공격했다.
공공의 홍도공에 냉정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멸천칠절공도 두려워할 거로 추측했는데 오작의 예상대로였다. 멸천공과 홍도공에 큰 상처를 입은 기억이 흑제의 육체에 단단히 새겨져 공포를 느끼게 했다.
멸천창의 관일홍 초식보다 약한 오작의 공격에 즙무혼은 막기보다 피하는 선택을 했다.
"너 똥 됐다."
공공도 바로 영문을 알아채고 즐겁게 웃었다. 치우의 칼도 피해야 하고, 공공의 홍도공도 피해야 하고, 오작의 멸천공도 피해야 하고. 즙무혼으로선 제약이 너무 많은 싸움이었다.
"흥. 두고 보자."
말을 마친 즙무혼이 바로 몸을 돌려 도망쳤다. 상대 기세가 한풀 꺾였을 때부터 대비했던 오작은 바로 뒤를 쫓았다. 공공과 치우는 조금 늦게 반응하여 오작과 몇 장 떨어져서 추격했다.
"여기 위치를 알 수 있습니까?"
오작의 외침에 공공이 허공에서 성판을 꺼내 던졌다. 오작은 성판을 잡고 위치와 방향을 가늠했다.
- 북망산으로 가는 거 같아.
성판을 돌려준 오작이 손가락으로 말했다. 오작의 손가락을 본 치우가 자기 손바닥에 글씨를 써서 공공한테 알렸다.
"이유는 알아?"
- 북망산에서 실제로 살던 놈이다. 거기에 뭔가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는 거겠지.
치우가 전한 말을 들은 공공은 잠깐 고민하다 다시 외쳤다.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편익조를 보내 수하들에게 미리 북망산 근처에 진을 치고 흑제를 막으라고 해도 된다. 그러나 공공은 오작에게 맡기기로 했다.
- 내가 창을 던지면 가장 강한 공격을 해.
계획이 선 셋은 조급해하지 않고 즙무혼 뒤를 쫓았다. 가끔 요괴 영지가 나오기도 했지만, 즙무혼도 오작 일행도 개의치 않고 곧게 질러갔다.
이들의 기세가 하도 흉흉하여 감히 멈춰 세우는 간 큰 요괴는 없었다.
- 조금 빨리 간다.
이틀 내내 달려 북망산이 눈에 들어왔다. 환혼노조가 죽는 바람에 북망산의 바깥 결계가 약해졌다. 그래서 굳이 도하주 없이도 웬만큼 경지에 이른 자들은 자유롭게 출입했다.
"어, 저거 흑제 아니야?"
법보나 재물 혹은 고대 법술을 찾으려고 북망산을 들쑤시고 다니던 자들이 꽁지에 불붙은 것처럼 달리는 흑제를 발견했다.
옷이나 신발이나 모자는 물론 장신구까지 검은색을 고집하는 흑제를 쉽게 알아봤다.
"뒤에 쫓는 거 공공 같은데?"
"어. 설마 견우 대협객인가?"
"제길. 나만 무시해."
경공이 약해 셋과 꽤 멀리 떨어진 치우는 밝은 귀로 수군거리는 소리를 다 듣고 자신을 궁금해하지 않는 북부 놈들에게 실망했다.
'제길. 왜 이렇게 됐지?'
즙무혼이 즙선기의 몸을 빼앗았을 땐 북망산이 남부에 있어 직접 방문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냈다. 그때 모두 건재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흑수해에 몸을 담근 기간에 뭔가 어마어마한 일이 터진 듯했다. 바깥 결계는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 되었고 안쪽 결계는 아예 사라졌다.
'그놈이 죽으면 큰일이야.'
창녕산에 큰 재앙이 떨어질 때, 높은 경지에 이른 자들은 삼혼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창녕산을 버릴 수도 없어서 칠백을 법술로 뼈에 묶고 귀옥으로 잡귀들을 모아 삼혼을 대신했다. 덕분에 두 겹의 결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정기적으로 창녕산 전체를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느껴지는 기운을 따라 다시 찾은 창녕산은 결계도 엉망이고 온갖 어중이떠중이가 활개 쳤다.
즙무혼도 대단한 법사지만, 결계나 공간이동에는 재능이 부족하다. 게다가 혼자 힘으로 창녕산의 옛 영화를 되찾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니다.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른다며 세상에 잘 안 나오는 태상노군의 인도人道도 창녕산과 연관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제발 내 몸은 멀쩡해라.'
아무리 찾아도 적무혈이나 미무골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부활했다고 여기기엔 창녕산의 상황이 너무 엉망이다. 특히 미무골이 부활했다면 절대 창녕산을 이 지경으로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몸을 수습하고 저 세 놈을 죽인 다음 남부에 가서 무골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봐야겠다.'
이미 오작 일행 셋 상대로는 기세를 다시 살리기 힘들다.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여 모두 죽여버리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다.
"쫓기만 할 건가?"
어느새 오작을 따라잡은 공공이 질문했다.
"제게 맡기십시오."
오작의 자신만만한 말투에 공공은 코를 살짝 찡그렸다.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오작의 아버지 견우가 생각 난 탓이다.
즙무혼은 뒤를 쫓는 오작 등을 아예 뇌리에서 지웠다. 머릿속에는 그저 자기 원래 육신을 수습할 생각뿐이었다.
적무혈이나 미무골은 불가능한 재주로, 즙무혼은 자신의 칠백으로 현재 육신을 강화할 수 있다.
어느새 푸석푸석 돌가루를 날리는 계단을 밟으며 창녕궁에 들어갔다. 창녕궁 역시 반쯤 허물어졌고 안에 돌아다니는 자들이 꽤 많았다.
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거슬렸지만, 일단 육신을 강화하여 귀찮게 구는 셋을 해치우는 게 급선무여서 이를 악물고 억지로 참았다.
"비켜."
그러나 창녕궁의 왕좌에 앉아 이것저것 만지는 놈 상대로도 참을성을 보이기 힘들었다. 즙무혼은 수정 몽둥이를 휘둘러 의자에 앉은 놈의 머리를 지웠다.
같은 패거리로 보이는 놈들은 의리 따윈 없는지 바로 고함을 지르며 흩어져 도망쳤다. 즙무혼은 머리가 사라진 놈의 시체를 집어 던지고 의자에 앉아 주문을 외웠다.
"소환, 이동문移動門."
의자 뒤에 검붉은 빛이 일렁이는 문이 하나 생겼다. 즙무혼은 황급히 몸을 돌려 문에 손을 댔다. 그때, 가슴 어림에 시원하면서도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은신술로 기척을 죽인 오작이 천리추흉 법술로 공격한 거였다. 모든 법력과 정신력을 쏟은 오작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헐떡였다.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창을 뽑아 던지는데 어마어마한 기운이 덮쳐왔다. 다름 아닌 공공의 홍도공이었다. 인간이 펼치는 무공 중 가장 자연과 닮았다고 평가받는 홍도공의 위력은 만만치 않았다.
즙무혼은 사라진 심장을 재생하며 홍도공의 기운을 막고 흘렸다.
그때, 은신술을 펼친 치우가 접근하여 칼을 휘둘렀다. 문을 소환하여 방심하던 차에 강한 공격을 연신 당하는 바람에 미처 치우의 접근을 간파하지 못했다.
"가만두지 않겠다."
즙무혼은 팔 하나 들어 치우의 칼을 막았다. 오작의 멸천창에도 끄떡없던 흑제의 육신에 처음으로 상처가 생겼다.
팔 하나가 떨어져서 단순히 상처라고 부르기엔 좀 모자란 감이 있지만.
"흑천망黑天罔."
시커먼 장막이 생겨 시야와 감각을 전부 차단했다. 치우는 바닥에서 퍼덕거리는 흑제의 팔을 발로 꾹 밟은 채 검은 장막을 향해 칼을 연신 휘둘렀다.
그러나 칼에 걸리는 게 없었다.
"팔을 없애자."
오작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치우한테 말한 건 공공이었다.
"어떻게?"
"독으로 녹이면 돼."
공공은 허공에서 큼직한 호리병 몇 개를 꺼내 안에 담은 독을 흑제의 잘린 팔에 쏟았다. 역겨운 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연신 피어올랐다.
약 일각 시간이 흘러 흑제의 팔이 녹아 한 줌 물이 되어 사라졌고 흑천망 법술로 소환한 검은 장막도 사라졌다. 당연히 의자 뒤에 있던 문도 없었다.
"즙무혼은 왜 여길 왔을까요?"
"상황을 반전할 만한 뭔가가 있겠지."
공공은 걱정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팔 하나 버릴 정도로 절실한 게 뭘까?"
치우는 손으로 마환도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겨우 흑제의 팔 하나만 잘라낸 것에 마환도가 자존심이 엄청 상해서 달래는 중이었다.
한편.
팔 하나 잃은 즙무혼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젠 영원히 외팔이로 살아야 한다. 뭐든 완벽을 추구하는 즙무혼으로선 엔간히 애석한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꼭 저놈들을 죽여야 한다. 일단 결계를 조금 손봐서 도망 못 가게 막고.'
겨우 기분을 수습한 즙무혼은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관 뚜껑을 열었다. 안엔 하얀 뼈만 남은 즙무혼의 옛 육신이 있었다.
칠백이 그대로인 걸 확인한 즙무혼은 주문을 외웠다. 뼈와 익숙한 즙무혼의 삼혼 사이에서 갈등하던 칠백은 결국 흑제의 몸으로 들어왔다.
'연혼단백煉魂鍛魄.'
혼과 백을 단련하고 서로의 연결을 강화하는 법술이다. 즙무혼은 흑수해에서 탈출할 때 즙선기한테 몸을 뺏기는 바람에 느슨해진 연결을 다시 단단히 하고 자신의 원래 칠백과 흑제의 칠백을 결합했다.
혼백이 강해지며 흑수해의 기운이 고분고분해졌다. 즙무혼은 무아지경에 빠져 흑수해의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는 동시에 법술과 무공의 결합도 더 긴밀히 했다.
- 작가의말
즙무혼은 마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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