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면홍지주人面紅蜘蛛
백요백기佰妖佰技
백 명의 요괴는 백 가지 재주를 지녔으니
방불승방防不勝防
막아도 막은 게 아니다
북쪽으로 방향을 튼 게 의외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일행은 어둠이 깊어 말들이 달리기를 거부할 때까지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다.
"멸광진滅光陣을 칠게."
소소가 소매에서 부적을 몇 개 꺼내 나무에 붙였다. 빛이 밖으로 새지 않게 하는 멸광진이었다.
치우는 장작을 모아 모닥불을 피운 다음 진법 범위 밖으로 나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안에서는 잘 보이는 모닥불이 밖에선 전혀 티가 안 났다.
"사냥 다녀올게."
오작은 치우가 멸광진에 빠져 사냥을 나갈 생각을 안 하자 자원했다. 그간 창법에 푹 빠져 모든 잡일을 치우한테 미뤘기에 보상하는 마음도 좀 있었다.
소소는 멸광진을 펼치곤 할 일이 끝났다는 듯이 모닥불 곁에 드러누웠고, 치우는 소소한테 멸광진 펼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희운은 마차의 상자를 일일이 열어 점검한 후 다시 잘 쌓고 밧줄로 단단히 묶었다.
오작은 경지가 오르며 움직임이 훨씬 은밀해졌다. 치우의 은신술보다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한 번도 안 들키고 사냥을 순식간에 끝냈다. 복귀한 오작은 털을 뽑고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한 후 모닥불 위에 사냥감을 올려놓았다. 식탐이 도진 치우가 멸광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모닥불에 구워지는 사냥감들에 집중했다.
"누굴 찾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식사를 끝내고 소소가 가장 먼저 잠들었다. 치우는 배가 덜 불렀다며 밖으로 사냥을 나갔고, 모닥불 곁에는 오작과 희운만 남았다.
"당신 부친이 굳이 언급하지 않은 걸 보면, 당신한테 알리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절교, 천교, 인도, 서방교가 언급되는 걸 보니 대단한 인물이다 싶어서 물은 겁니다.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죠."
오작은 가타부타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희운도 괜한 호기심으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알아서 물러났다.
오작은 치우가 돌아오길 기다려서 잠들었다. 치우는 사냥감들을 다 구워 먹고 밤늦게 잠들었다.
"대협.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작은 의지에 비해 수면욕이 강한 편이다. 그래서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희운이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먼저 깬 소소와 치우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가득한 걸 확인하고 재빨리 잠기를 쫓아버렸다.
"추적자들이 나타났습니까?"
"그보다 더 큰 일입니다. 상자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희운이 밧줄로 잘 묶은 상자 중 하나가 사라졌다. 아무리 잠이 들었다고 해도 치우의 직감이나 오작의 절대감을 속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희운이 아무 조치도 안 했을 리 없으니 누군가가 도둑질한 거라면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다.
"몸에 귀중품이 있습니까?"
희운은 오작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야. 호기면귀를 불러."
치우는 시동어도 생략하고 호기면귀를 불러냈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호귀면귀는 평소보다 훨씬 얌전하게 굴었다.
"여기 상자가 하나 사라졌어. 누구 짓인지 흔적을 찾아."
호귀면귀는 하나밖에 없는 눈알을 데굴데굴 커다랗게 굴리며 상자 주변을 살폈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뭐야?"
"거미줄."
치우는 희운의 손에서 청옥靑玉(푸른 옥)을 받아 호기귀한테 넘겼다. 청옥을 꿀꺽 삼킨 호기귀는 눈알을 한참 굴리더니 한 마디 더 뱉고 사라졌다.
"인면홍지주."
"이렇게 합시다."
오작은 순식간에 계획을 세웠다.
"나랑 소소가 인면홍지주의 뒤를 쫓겠습니다. 당신은 치우와 함께 북부로 넘어가면 됩니다. 길은 치우가 안내할 겁니다."
희운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소소는 상자를 훔쳐내는 걸 우선으로 할 겁니다. 상자를 훔쳐내면 소소가 그걸 들고 당신들 뒤를 쫓을 겁니다. 잘 풀리면 나도 소소랑 함께 갈 거고, 문제가 생기면 혼자 남아서 뒤처리를 하겠습니다."
치우는 법력이 적은 오작이 뒤처리한다고 하니 살짝 걱정되긴 했지만, 최근 경지가 오른 걸 떠올리고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너흰 참 대단해."
소소는 마차를 탄 치우와 희운의 모습이 멀어지는 걸 지켜보며 감탄했다.
"뭐가 말입니까?"
"네 말을 믿고 바로 떠나는 희운이나, 요괴 영지로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겠다는 너나. 그리고 내가 거절 안 할 걸 알고 묻지도 않은 거랑. 하여튼 다 대단해."
"칭찬이라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럼 우리도 움직이죠."
말을 마친 오작은 허공에 투명하게 늘어진 거미줄을 따라 움직였다.
"근데 왜 이쪽이라고 확신해? 거미줄이 통하는 건 세 방향이잖아."
"인면홍지주는 더운 곳에 삽니다. 더운 곳은 거미줄이 늘어지죠. 그래서 좀 더 굵게 줄을 칩니다."
"그 차이가 느껴져?"
오작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근데 자기 영지로 안 갔을 수도 있잖아."
"요괴는 떠돌이가 아닌 이상 영지를 오래 비우면 불안에 떱니다. 특히 거미는 그 성향이 심합니다."
풍괴처럼 도둑질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하고 영지의 은폐가 잘된 놈들은 괜찮다. 그러나 대부분 요괴는 영지를 비우면 불안하고, 특히 거미나 달팽이를 비롯한 요괴들은 그게 훨씬 심하다.
"은신술을 펼치세요. 요 앞부터 요괴 영집니다."
절대감 덕분에 오작은 인면홍지주의 영지 결계를 쉽게 감지했다. 소소는 오작의 말대로 은신술을 펼쳤다.
"혹시 거미줄에 걸리더라도 가만히 있으십시오."
당부를 마친 오작이 영지 결계를 통과했다. 소소 역시 흥분한 마음으로 오작의 뒤를 따랐다.
"말해도 괜찮습니다. 단, 당신의 소리가 큰 진동을 내서 거미줄을 흔들지 않게 조심하면 됩니다."
거미는 눈이 어둡고 청각은 아예 없다. 대신 다리로 진동을 느끼는 능력이 출중한데, 그것도 거미줄을 통해 느낀다.
인면홍지주의 영지는 거미줄로 뒤덮였다. 다행히 절대감을 얻은 오작이 앞에서 길을 잘 찾아내고, 소소의 경공 역시 오작 못지않아 안 들키고 중심부로 진입했다.
"희운의 상자를 기억합니까?"
"응."
"혹시 눈에 띄면 나한테 알려주세요."
"알았어."
소소는 중심부에 득실대는 수백 마리 거미 때문에 말을 길게 못 했다. 딱히 두려워서가 아니라, 시뻘건 몸통에 사람 머리 하나씩 얹은 놈들의 기괴한 모습이 징그러운 거였다.
"밖으로 나간 다음에도 은신술을 펼치는 걸 잊지 말고요. 지금쯤 추적자들이 따라붙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리고 상자를 소매에 넣지 마세요. 희운이 굳이 마차에 싣고 다니는 건 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당부를 마친 오작은 중심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소소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오작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질문 있습니까?"
오작은 뒤에서 우물쭈물하는 소소가 느껴져 발걸음을 멈췄다.
"넌 은신술 몰라?"
"눈엔 보여도 감각에 안 느껴지는 은신술입니다. 거미처럼 눈과 귀가 무딘 요괴한텐 효과가 훨씬 좋습니다."
의문이 풀린 소소는 다시 정신을 집중해 오작의 뒤를 쫓았다. 중심부에는 거미줄이 별로 없었다. 거미가 수백 마리나 있긴 하지만, 주로 고치가 가득한 곳에 몰려 있어서 둘을 방해하지 않았다.
둘은 어렵지 않게 소전의 신체 일부를 담은 상자를 발견했다. 특별한 의도를 갖고 훔친 게 아닌지 상자는 온갖 잡동사니를 쌓은 곳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오작은 성큼성큼 걸어서 잡동사니가 쌓인 곳으로 갔다. 소소는 손에 땀을 쥐고 오작이 거미들 곁을 스쳐 잡동사니를 쌓은 곳까지 가고, 거기에서 상자를 주워 돌아오는 걸 지켜봤다.
"밖에 나가서 열어 보고, 안이 비었으면 다시 들어오세요. 반 시진 안에 안 돌아오면 저도 떠나겠습니다."
소소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 후 상자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갔다. 며칠 사이에 오작과 치우가 손으로 하는 대화를 파악할 정도로 총명한 소소다. 오던 길 그대로 되짚어 나가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채 반 각도 안 되어 소소는 밖으로 나갔다. 상자를 열어 안에 든 신체 일부를 확인한 소소는 은신술을 펼친 채로 경공으로 희운과 치우의 흔적을 쫓았다.
한편.
홀로 남은 오작은 사실 다른 속셈이 있었다.
'인면홍지주의 내단으로 결승법을 강화할 수 있다고 했어.'
결승법 주문이 적힌 가죽엔 누군지 모를 주석注釋이 적혀 있었다. 주문을 적은 글자랑 글씨체가 다른 걸 보면 수인씨가 단 건 아니다. 주석엔 인면홍지주의 내단으로 결승법 법술의 효과를 강화하는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반 시진을 기다려도 소소가 돌아오지 않자 오작은 잡동사니가 쌓인 곳으로 향했다. 오작은 양손으로 적당한 물건 하나씩 든 다음, 최대한 조용하게 밖으로 던졌다.
거미줄에 걸린 잡동사니가 진동을 내자 고치 주변을 서성이던 거미들이 바로 반응했다. 오작은 작은 오두막 크기로 쌓인 잡동사니를 사방으로 던지며 인면홍지주들을 밖으로 유인했다.
영지의 주인으로 보이는 가장 큰 인면홍지주를 제외한 다른 거미들은 모조리 거미줄의 진동을 확인하러 나갔다. 방해물들을 치운 오작은 그제야 소매에서 화첨창을 꺼냈다.
오른손으로 창 자루 끝을 잡은 오작은 보폭을 크게 하여 가만히 있는 인면홍지주의 정면을 향해 달렸다.
측면엔 진동을 감지하는 다리가 있고 뒷면으론 거미줄을 뿜어낼 수 있다. 정면에도 독을 한껏 품은 독이빨이 있지만, 오작에겐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
거미 요괴는 오작이 오른팔을 앞으로 힘껏 뻗어 자신을 찌를 때에야 비로소 상대를 발견했다. 인면홍지주는 다급히 입에 난 독이빨을 오작을 향해 쏘아냈다.
그리고 몸통 위에 얹은 사람을 닮은 머리로 뾰족한 함성을 질러 새끼들을 불러들였다.
'늦었어.'
오작은 적무혈의 목숨을 거둔 천지일선 초식을 펼쳤다. 그간 수많은 고민을 거치며 초식을 다듬었고, 경지도 적무혈을 상대할 때보다 훨씬 높아졌다. 게다가 화첨창도 법보가 되어 공격력이 엄청나게 올랐기에 인면홍지주의 목숨을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오작은 창으로 인면홍지주의 몸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변형한 벽암권을 펼쳐 인면홍지주의 내단을 끄집어냈다. 주먹보다 큰 내단을 보니 인면홍지주는 기껏해야 삼백 년 되는 요괴다.
'치우보다 약한 요괸데도 도둑질하는 걸 누구도 몰랐구나.'
풍백 상대로 고생하면서 오작은 강한 힘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그러나 인면홍지주를 상대하면서 아는 게 많은 것도 강한 힘 못지않다는 걸 다시 깨우쳤다.
만약 거미의 특성을 몰랐다면 수백 마리 요괴와 정면대결을 펼쳤을 테고, 이들이 쏜 거미줄에 묶여 어떤 처지가 되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내단을 소매에 넣은 오작은 기척을 죽이고 고치가 가득한 곳으로 갔다. 덩치가 작은 거미들은 인면홍지주 주변을 서성이다가 하나둘 이빨을 사체에 박고 체액을 빨아들였다.
오작은 화첨창으로 수백 개 고치를 일일이 찢었다. 대부분은 이미 사체지만, 가끔 산 짐승 혹은 요괴가 나왔다.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
고치에서 풀려난 요괴는 셋이었다. 그중 둘은 숨만 간당간당하게 붙었고, 원숭이 요괴만 멀쩡했다.
"불덩이를 소환할 수 있습니까?"
"거미줄을 태우려고?"
"영지의 주인은 이미 죽었습니다. 거미줄이 불에 잘 탈 겁니다."
눈이 세 개인 원숭이는 작은 거미들에게 빨려 껍데기만 남은 인면홍지주를 보며 이를 갈았다.
"손가락 하나로 해치울 수 있는 놈인데, 방심하고 거미줄에 걸리는 바람에 이 모양이 됐다. 저놈이 살았어도 다 태울 수 있었어."
말을 마친 원숭이는 두 손을 높이 들고 꼬리를 빳빳이 세웠다.
"소환술, 흑린염룡黑鱗炎龍."
시커먼 비늘로 덮인 작은 용 한 마리가 소환되었다.
"저 거미랑 거미줄을 다 태워."
지시를 받은 용이 꿈틀대며 체액을 다 빨려 껍데기만 남은 어미 주변에서 서성대는 새끼 거미들에게 접근했다.
"저기, 내친김에 저 두 요괴도 내게 주면 안 될까?"
"그러세요."
오작의 동의를 얻은 원숭이 요괴는 발톱을 세워 두 요괴의 배를 갈라 내단을 꺼냈다. 내단을 털에 쓱쓱 닦은 후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켜버렸다.
"당신이 혹시 염환원炎幻猿입니까?"
내단을 삼키고 트림을 하던 원숭이는 눈 세 개를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날 어떻게 알지? 내가 그렇게 유명하진 않을 텐데."
"불사과를 아홉 개 산 인간이 내 동생입니다."
"그래. 그놈 어떻게 됐지? 몸에 불길이 어찌나 센지 영주가 그놈을 밖으로 쫓아냈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 궁금했는데 잘됐구나."
"구엽금련을 얻었습니다."
오작의 말에 원숭이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그사이 흑린염룡은 어느새 새끼 거미들을 다 태우고 거미줄에 불을 붙였다.
"거기에서 영생과가 생기면 당신한테도 큰 도움이 되겠죠?"
"그럼, 그렇고말고."
환수인 염환원은 천계로 올라가는 게 목적이다. 불사과 아홉이 모여 영생과가 된다면 일부 염환원의 공으로 인정받아 승천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도움 좀 주시죠."
"서왕모가 심은 반도蟠桃가 있어. 그중 천 년이 넘은 놈으로 먹이면 큰 도움이 될 거야."
- 작가의말
인면홍지주는 거미의 특성을 최대한 반영했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어린이가 있다면 과학 지식도 조금 얻어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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