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로견일멸晨露見日滅
가우진시假遇眞時
가짜가 진짜를 만나면
환여포말幻如泡沫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말을 꺼낸 자는 놀랍게도 청제의 지낭 풍백이었다. 오작도 치우도 풍백과 만난 적은 없지만, 소문으로 행색을 익히 들어 단숨에 알아봤다.
'무공 수련도 그렇고. 난 기교를 부리면 늘 탈이 나는구나.'
오작은 저주의 영향으로 운기가 어려워 무공도 단순한 방식을 선호한다. 이번 일 역시 실패를 대비한 계책까지 준비하여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고 여겼는데, 일이 끝나는 마당에 풍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힘을 제대로 못 쓰게 저주를 걸어놓고 머리도 쓰지 말라고? 하늘은 내게 왜 이리도 박한 걸까?'
풍백은 오작의 자색 옷보다 더 눈에 띄는 붉은 장포를 입었고 발은 발등에 털이 보이는 가죽신을 신었다. 오른손에는 불진拂塵을 들었고 왼손은 허리 뒤로 뒷짐을 지었다.
"풍백께 인사 올립니다. 벽력문의 제자 오운烏雲입니다."
오작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풍백에게 공손히 포권했다.
"그래. 어린 나이에 훌륭한 솜씨더구나. 그런데 벽력문 제자가 왜 청제의 수하로 가장하는 것이냐?"
"뇌공 사숙의 개인 부탁으로 북부로 가는 길입니다. 오는 길에 모르고 요괴 영지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저 병사를 만났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여기 대장이 요괴와 결탁하여 병사들을 제물로 바치고 있었습니다. 의분義憤에 휩싸여 벌하고 싶으나 뇌공 사숙께 폐가 될까 봐 일부러 청제의 수하라고 거짓을 꾸몄습니다. 선처를 바랍니다."
세상엔 뇌공과 풍백이 둘도 없는 친구로 알려졌다. 사실상 풍백은 재상 자리를 차지한 뇌공을 싫어하고 질투한다.
몰락하여 자신과 사부만 남은 암유문과 달리, 입문조차 어려운 벽력혼원수를 가르치는 벽력문이 제자 수십 명이나 되는 대문파인 것도 질투의 대상이고,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는 주제에 늘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뇌공의 운도 질투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잘하면 벽력문의 미래 오십 년을 책임질 것 같은 소년을 보자 질투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참을 수 없었다.
"네 사부가 누구냐?"
"제가 공식적으로 출문出門한 게 아니라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청제의 수하를 자처한 점에 관하여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일 마치고 돌아가면 사문에 아뢰고 풍백의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대부분 문파는 제자가 하산下山하기 전에는 문파를 떠나지 못한다. 단, 부득이한 상황엔 출문이라는 방식으로 허락을 얻어 문파를 떠날 수 있다. 그러나 하산한 제자와 달리 출문한 제자는 문파에 관한 얘기를 함부로 떠벌리면 엄벌을 받는다.
게다가 오작은 비공식 출문이라는 말로 비밀 임무를 띠고 나온 것임을 암시했다. 여기서 더 캐묻는 건 벽력문과 적대하자는 뜻이나 진배없다.
"지금까지 모든 건 네 일인지사壹人之辭(일방적인 주장)뿐이다. 네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 하나 하겠다. 뇌공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뇌공은 아주 특별한 이유로 이름을 모든 사람에게 비밀로 했다. 풍백은 물론 청제까지 뇌공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풍백은 뇌공이 이름을 숨기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고, 그 짐작으로 뇌공에 대한 질투가 더 심해졌다. 자기 이름을 절대 알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오작이 뇌공의 이름을 말해버리면 좋고, 말하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좋다. 정정당당하게 벽력문의 제자를 죽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오작은 머리가 복잡했다.
'모른다고 하면 벽력문 제자가 아니라는 게 들통날 거고. 틀린 이름을 대면 풍백에게 들킬 거고. 말할 수 없다는 건 너무 억지고.'
그때 치우가 오작을 툭툭 두드렸다. 오작은 고개를 살짝 돌려 치우의 손가락을 확인했다.
- 살기가 너무 세.
그제야 오작은 풍백 몸에서 발산되는 살기를 느꼈다.
'눈앞의 위기에 붙잡혀 멀리 생각지 못했구나. 반성해야겠다.'
함선의 시야를 좁히고 사고를 제한한 계책을 오작 본인이 그대로 당했다. 풍백이라는 강자를 만나니 그저 거짓으로 당장 위기를 벗어날 궁리로 가득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저놈은 우릴 죽일 생각이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오작은 은밀하게 사방에서 압박하는 기세를 그제야 느꼈다. 지금까지 풍백은 오작이 거짓말을 못 하도록 강하게 압박했다.
그럼에도 거짓말을 술술 꾸며 낸 오작도 대단하긴 하지만, 압박에 굴해 풍백의 진짜 속셈을 눈치채지 못했다.
"여긴 듣는 귀가 너무 많습니다."
"그럼 따라오거라."
풍백은 몸을 돌려 위로 걸었다. 바람을 타고 걸어서 그런지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 같은데 벌써 두세 걸음에 십 장의 거리를 넘었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치우와 오작이 따라오는 걸 확인한 풍백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로 가득했다.
'잘하면 뇌공의 이름까지 알아내겠구나.'
풍백은 오작이 뇌공의 이름을 모른다고 추측했다. 뇌공의 이름을 모른다는 걸 구실로 오작을 죽일 생각뿐이었는데, 상대는 알고 있다는 느낌을 풍겼다.
보는 눈이 없는 곳으로 가서 뇌공의 이름을 알아낸 다음 둘을 죽이면 말 그대로 일거양득壹擧兩得이 따로 없다.
그러나 오작과 치우도 풍백의 속셈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풍백의 뒤를 따르면서 손으로 대책을 끊임없이 상의했다.
- 죽이는 건 불가능해. 묶어두고 도망쳐야 해.
- 형, 안 들킬 수 있어?
안타깝게도 손으로 하는 대화는 단어의 제한으로 정확한 의사 표현이 힘들다. 상대 손동작을 보고 의미를 유추하고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기에 대화가 원활하지 않았다.
- 반드시 해내야지.
풍백 자신은 모르지만, 등에서 발산되는 살기가 점점 노골적이었다.
"여기가 바로 천하에서 가장 크다는 태산의 꼭대기다. 일람중산소壹覽衆山小의 기세가 느껴지지 않느냐?"
정상에 이르기까지 아무 대화도 없이 등산에 열중했다. 그렇게 도착한 태산 꼭대기에서 주변을 살피니 올망졸망 작은 산밖에 없었다.
'허영심이 센 놈이구나.'
주변의 고만고만한 자들을 보며 자신이 강하다고 자위하는 성격이 틀림없다. 오작은 주변의 산들이 작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는데, 풍백은 태산이 크다고 여겼다.
태산보다 큰 산은 오작도 다섯을 꼽을 수 있다. 풍백이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태산을 천하에서 가장 크다고 말하는 것에서 성격의 일각을 엿볼 수 있었다.
"몰래 엿듣는 자가 있는지 주문으로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풍백은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굳이 그래야겠느냐? 내 이목을 속일 수 있는 자가 천하에 몇이나 있다고."
바람을 다루는 풍백이어서 당연히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풍백보다 법력이 적은 구망마저도 풍백의 이목을 쉽게 속일 수 있다.
풍백보다 높은 경지에 섬세한 기운 제어 능력만 있으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함부로 입 밖에 꺼낼 얘기가 아니라는 걸 알잖습니까."
뇌공이 자기 이름을 쉽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며 오작은 도박을 걸었다. 다행히 오작의 수작은 제대로 먹혔다.
"그래. 직접 확인해 보아라. 나도 못 찾은 기척을 발견할 수 있는지 궁금하구나."
오작은 입술만 바르르 떨며 주문을 외웠다. 오작이 무성영창無聲詠唱을 선보이자 풍백은 살심이 더 커졌다.
'이대로 성장하면 뇌공을 능가할지도 모르겠구나. 반드시 오늘 싹을 잘라야겠다.'
암유문과 벽력문이 서로 원수지간도 아니고 경쟁하는 사이도 아니건만, 풍백은 질투에 마음이 사로잡혀 오작과 치우를 죽일 생각만 떠올렸다.
"결승법."
오작이 외운 주문은 주변의 기척을 찾는 탐색주가 아닌 결승법의 주문이었다. 오래전의 법술이어서 그런지 주문이 단순하고, 몰래 상대를 포박하는 법술의 특성에 어울리게 운기도 은밀했다.
오작이 탐색주를 외우는 줄 알고 미세한 기운의 흐름을 무시했던 풍백은 꼼짝없이 당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풍백은 의외의 상황에 조금 놀랐을 뿐 당혹을 느끼진 않았다. 어차피 오작과 치우의 힘으론 결승법에 묶인 풍백에게 해를 전혀 끼치지 못한다.
"본인이 더 잘 알 거로 생각합니다. 그럼 이만 떠나겠습니다."
"이쪽 관문에서 도장을 못 찍으면 북부 수비대에서 통과를 안 해주는 걸 모르냐?"
풍백은 당황한 나머지 어떻게든 오작과 치우를 잡아두려고 애썼다. 오작이 살아서 벽력문으로 돌아가 오늘 일을 얘기하면, 벽력문과 뇌공이 풍백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압니다. 다 대책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작은 풍백이 당황한 사실을 알아챘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걸 다 이용하자는 마음으로 풍백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바로 떠났다.
풍백은 법력을 운용하여 결승법에 대항했지만, 결승법이 원래부터 자신보다 훨씬 강한 자를 묶는 법술이다. 수인씨와 태산노도 외엔 익힌 사람도 없는 생소한 법술이어서 풍백과 오작의 경지 차이에도 쉽게 풀지 못했다.
"형, 어디로 갈까?"
"풍백이 못 찾도록 요괴 영지로 들어가야지."
바람을 부리는 풍백이라면 둘의 종적을 쉽게 찾는다. 그러나 영지는 요괴의 사유지이기에 풍백의 바람도 함부로 탐문하지 못한다.
'아침이슬은 태양을 보면 사라져야 하는구나.'
하찮은 꾀는 풍백이라는 커다란 힘을 만나 속절없었다. 아무리 강한 거짓도 진실을 이기기 힘든 법인데, 하물며 약한 거짓이 강한 진실을 만났으니 저항할 여지도 없었다.
질투에 이지가 흐린 풍백이 오판하지 않았다면 오작과 치우는 풍백에게 잡혀 청제 앞으로 끌려갔을 운명이었다.
'거짓과 계책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는 가장 좋은 수단은 힘이다.'
기운의 제어를 방해하는 저주를 떠올리니 가슴이 갑갑했지만, 오작은 애써 잡념을 쫓아냈다.
'아까는 시야가 좁아서 실수할 뻔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야를 좁혀 풍백을 떨궈낼 생각만 해야 한다. 후회와 반성 그리고 신세 한탄은 살아남으면 할 시간이 넉넉하다.'
한편. 태산 꼭대기에 혼자 남겨진 풍백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연신 나왔다.
'저 어린놈한테 농락당했구나.'
오작이 살아서 돌아가면 뇌공과 벽력문이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차분하게 밧줄을 풀어야 함을 머리로 알지만, 마음에서 치는 파도는 점점 더 세졌다.
'힘으로 풀어보자.'
풍백은 결승법의 방해로 움직일 수 있는 기운이 제한되었다. 결승법은 시전자의 법력의 열 배까지 묶어둔다. 오작의 법력이 넉넉했으면 풍백의 기운을 아예 묶어버렸을 테지만, 둘의 차이가 너무 컸다.
어마어마한 힘을 동원하여 자신을 묶은 밧줄을 공격한 풍백은 이마를 크게 찌푸렸다.
'뭐지? 아무리 대단한 법술이어도 이 정도 힘의 차이는 못 버틸 텐데.'
풍백은 애써 진정하고 자신을 묶은 밧줄의 기운을 분석했다. 뱀을 닮은 밧줄을 구성한 기운을 자세히 살핀 풍백은 놀란 나머지 잠깐 사고가 멈췄다.
'이게 바로 벽력문이 말하는 혼원인가?'
벽력혼원수가 찾는 혼원은 오작이 깨달은 무극과 비슷했다. 무극은 극을 없애 음을 음으로 양을 양으로 여기는 개념이고, 혼원은 벼락과 우레의 인과因果 관계를 무시하여 벼락과 우레는 선후나 주종이 없다는 개념이다.
큰 틀은 같지만, 세부적인 부분은 달랐다. 완전히 동떨어진 개념은 아니지만, 같은 개념도 아니다.
그러나 오작이 무극을 깨달은 사실을 모르고 벽력문에서 말하는 혼원이 뭔지도 모르는 풍백이기에 깊이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저놈은 벽력문의 미래가 아니라 전부구나.'
오작과 치우가 목적을 갖고 꾸민 거짓으로 시작한 일이 오해가 오해를 낳으며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번졌다.
풍백은 질투와 살기를 비롯한 온갖 부정적인 감정까지 모두 끌어올려 결승법의 밧줄을 공격했다. 힘의 격차가 크고 오작의 지속적인 법력 주입을 받지 못하여 밧줄은 끝내 끊어졌다.
풍백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소매로 쓱 닦았다. 제어할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힘을 쓰다가 작은 내상을 입고 말았다. 그러나 부글부글 끓는 질투와 주체할 수 없는 살심으로 오히려 멀쩡할 때보다 더 힘이 넘쳤다.
"너를 반드시 죽일 테다."
소매에 묻은 피를 바람으로 털어버린 풍백은 짐짓 평소처럼 태연한 기색을 꾸민 후 밑으로 내려갔다.
"누가 임시 대장인가?"
"접니다. 풍백 태사太師."
"벽력문의 제자가 확실하여 놔줬다. 그런데 뇌공이 오운이라는 자가 벽력문의 배신자이며 문파의 보물을 훔쳐 도망갔다고 방금 연락이 왔다. 혹시 두 놈이 다시 이곳으로 오면 내색하지 말고 잡아둔 다음 봉화를 올리도록 해라."
임시 대장이 된 군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봉화는 북부에서 천 명 이상의 규모로 침입했을 때에만 올리도록 군법으로 명확히 규정되었다. 이미 봉화가 안 올라간 지 삼십 년이 넘은 상황에, 고작 둘 때문에 봉화를 올리라고 하니 몹시 당황했다.
"태사의 명이다. 천성의 장군한테는 내가 직접 해명할 테니 너는 명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할 일을 마친 풍백은 다시 바람을 타고 태산을 넘었다. 북부의 수비대한테도 치우와 오작의 인상착의를 알려준 후, 바람을 타고 둘의 종적을 찾아 나섰다.
- 작가의말
신로견일멸 - 아침 이슬은 해가 뜨면 사라진다.
뇌공이 이름을 안 알려주는 이유는 87화에서 밝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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