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뇌감대해風雷撼大海
폭풍뇌정暴風雷霆
폭풍신과 뇌정신이 만나
풍뇌현세風雷現世
풍뇌신이 되다
남쪽은 검은 바위 절벽, 서쪽과 동쪽은 넓은 백사장, 북쪽은 광활한 초지. 섬의 중심엔 소양궁이 있고, 소양궁 주변엔 온갖 꽃이 만발하다.
"할아버지랑 작별 인사 안 해도 되겠어?"
이미 물과 식량 그리고 둔각이 먹을 풀까지 배에 실었다. 바다에선 가벼운 것보다 무거운 것이 훨씬 안전하기에 오작과 치우는 배의 한계치까지 물건을 쌓았다.
"아니. 잠깐 다녀오는데 무슨 작별 인사야."
치우는 무심한 척하며 오작의 눈을 피했다. 치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오작은 먼저 둔각을 배에 태웠다. 그러곤 물건을 덮은 멍석과 묶은 밧줄을 점검했다.
"그만 가자."
치우는 멍하니 소양궁을 바라보며 할아버지와 인사를 하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 이대로 떠났다가 할아버지를 영영 못 보면 작별 인사를 못 한 게 후회로 남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작별 인사를 하는 자체가 할아버지를 버리고 가는 걸 인정하는 꼴 같아서 또 싫었다.
"치우야.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하고 둘 다 마음에 안 들 땐 결정을 빨리 내려야 해. 어차피 뭘 선택하든 후회는 남을 거고, 결정을 미루다간 더 큰 후회를 할 거야."
치우는 고개를 돌려 오작과 눈을 마주쳤다. 평소와 달리 마음에 꼭 드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형이 미웠다.
"형. 왜 마음에 꼭 드는 방법이 없을까?"
"우리가 약해서 그래."
치우의 어깨 근육이 단단하게 뭉쳤다. 화를 억지로 참는 표현이다. 마음의 동요를 잘 숨기는 오작과 달리 치우는 매우 솔직하다.
"어떻게 하면 강해져?"
"몸만 아니라 마음도 강해야 해. 아픔과 손해를 감수할 줄도 알아야 하고. 뭐든 원하는 대로 이루겠다는 건 애들이나 하는 생각이지."
심호흡 몇 번으로 갑갑한 속을 조금 푼 치우는 몸을 돌려 배에 훌쩍 뛰어올랐다.
"가자."
오작은 배에 실은 몇 개의 노 중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걸 치우한테 건넸다. 소년의 외형을 한 어른과 어른의 덩치를 한 소년은 입을 꾹 다문 채 양수도로 노를 열심히 저었다.
한편.
뇌공과 풍백은 오십 명 정도의 수하를 거느리고 천일도 남쪽으로 접근했다. 천일도의 남쪽을 지키는 요괴 대두사大頭鯊(머리 큰 상어)는 이미 둘에게 매수당했다.
"참 어렵게 구한 건데."
풍백이 툴툴거리며 주머니에서 난기석亂氣石 세 개를 꺼내 대두사한테 넘겼다. 머리가 몸 전체의 삼 할(30%)을 차지한 대두사가 그 머리의 반 이상을 차지한 커다란 입을 벌리고 즐겁게 웃었다.
"그럼 난 이만 물러간다."
난기석 세 개를 한꺼번에 삼킨 대두사는 깊은 바다로 잠수했다. 어서 안전한 소굴로 돌아가 난기석의 기운을 흡수해야 한다. 난기석의 기운으로 부족한 도행道行(수련의 깊이)을 보충하면 태변蜕變(허물을 벗다)하여 한 계급 높은 요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두르자. 대두사가 사라진 걸 알면 저들도 눈치챌 거야."
뇌공이 풍백을 재촉했다. 풍백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풍화석風華石을 하나 꺼냈다. 대두사를 매수하는 대가로 준 난기석 따위는 천 개를 줘도 안 바꾸는 귀한 물건이다.
"소환술, 폭풍신暴風神 강세降世."
너울을 거칠게 치는 바다와 달리 동해의 하늘을 고요했다. 구름도 몇 점 없고 바람도 소리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그 고요한 허공에서 작은 요동이 생겨났다. 발단은 풍백이 높이 던진 풍화석이었다.
풍화석에서 쏟아진 바람의 기운은 풍백의 주문에 잡혔다. 일부 운 좋게 도망간 바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풍화석 주변에서 원을 그리며 맴돌아야 했다.
"오늘 소환술은 조금 마음에 안 들어."
주문을 마친 풍백은 풍화석을 중심으로 뭉친 바람의 거인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양쪽 팔의 길이가 다른 것도, 머리가 한쪽으로 삐뚠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속이 좁아터져서 그래. 풍화석이 귀한 물건이라곤 해도 폭풍신 부를 때 빼면 그냥 돌멩이나 다름없는데 뭘 그리 아까워해."
풍백을 한바탕 골려 준 뇌공은 품에서 뇌정석雷霆石을 하나 꺼냈다.
'너야 뇌정석이 가득하니 아까운 줄 모르지.'
뇌공의 핀잔에도 풍백은 속으로 툴툴대기만 했다. 풍백의 암유문䬓䬔門은 이미 몰락하여 풍백과 사부만 남았다. 제자가 수십 명이나 되는 벽력문과는 비교가 미안할 지경이다.
게다가 뇌공의 벽력문은 풍화석과 뇌정석이 많이 나는 서부에 있다. 풍백이 방금 소모한 풍화석도 뇌공에게 부탁하여 구한 것이다.
"소환술, 뇌정신雷霆神 강세降世."
'상급품을 저렇게 막 쓰다니.'
자신은 중급품의 풍화석도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상급품을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하는 뇌공에게 화가 났다.
형상을 갖추는 데 시간이 꽤 걸렸던 폭풍신과 달리 뇌정신의 강림은 순식간에 끝났다. 뇌공의 법술 능력이 더 뛰어난 것도 있지만, 뇌정석의 등급이 높은 게 컸다.
"혼합술混閤術. 풍뇌교가風雷交加."
풍화석과 뇌정석이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겼다. 둘이 접근함에 따라 폭풍신의 바람과 뇌정신의 벼락이 뒤섞였다.
단단한 돌멩이인 풍화석과 뇌정석 역시 무른 진흙처럼 서로 섞였다.
"후, 성공이다."
풍백이 땀을 훔치며 말했다. 대범한 성격인 뇌공 역시 이마에 땀방울이 가득 맺혔다. 혼합술이 실패하여 뇌정석을 날리는 건 괜찮으나, 혹시라도 폭발하면 풍백과 뇌공을 제외한 자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
풍백과 뇌공 역시 사지가 멀쩡하다고 장담하기 어렵고.
"목표 천일도. 목적 말살抹殺."
신神이란 존재는 목적이 분명하다. 비록 뇌정석과 풍화석의 힘으로 만들어진 임시 신이어도 그렇다.
인간의 힘으로 절대 제어할 수 없는 신성神性을 띤 존재지만, 소환술로 강림한 후 목적을 주입하면 고분고분 지시에 따른다.
약점은 중도에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후회하는 마음으로 제지하려고 해도 신은 처음 주입한 목적으로만 움직인다.
같은 시각.
양수도에 도착한 치우는 멍하니 앉아서 천일도를 바라봤다. 오작 역시 흐릿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더 나은 대처가 없는지 열심히 고민했다.
둔각은 천일도엔 없는 버드나무를 보며 한참 망설이다가 끝내 한 입 크게 물었다. 그러나 잎과 가지에서 오는 쓴맛을 못 버티고 퉤 뱉어버렸다.
그리고. 천일도에 가려져서 안 보이던 폭풍신과 뇌정신이 풍뇌신으로 합체하면서 덩치가 수십 배로 커져 오작과 치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오작과 치우는 서로 묵묵히 마주보기만 했다. 딱히 명확한 생각이 없었던 치우는 물론이고, 많은 생각으로 가득했던 오작의 머리 역시 깨끗해졌다.
"형. 저거 풍뇌신 맞지? 괴력신怪力神에 속하는 풍뇌신."
폭풍신이나 뇌정신은 솔직히 두려운 상대가 아니다. 풍화석과 뇌정석의 기운이 어느 정도 소모되면 결집력을 잃고 흩어진다.
능력이 뛰어난 자는 풍화석과 뇌정석을 노려 더 빨리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둘이 결합한 풍뇌신은 다르다. 그냥 소환신과 괴력신의 차이는 개미와 코끼리의 차이보다 크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중 하나는 덩치가 커져서 풍화석과 뇌정석을 노리기 힘들다는 거다. 괴력신의 강한 육체를 뚫는 건 웬만한 고수도 힘든 일이고, 뚫고 들어가도 어지간해선 흠집도 안 난다. 매우 강한 힘으로 공격해봤자 풍화석과 뇌정석을 분리하는 데 그친다.
이때 소환자의 능력에 따라 둘이 다시 합쳐서 풍뇌신을 유지할 수도 있고, 그대로 갈라져서 폭풍신과 뇌정신으로 분리될 수도 있다.
소환신과 괴력신의 두 번째 중요한 차이는 힘의 원천이다. 풍화석이나 뇌정석을 비롯한 소환석의 기운이 절반 이상 소모되면 사라지는 소환신과 달리 괴력신은 외부의 기운을 끌어온다.
바람이 강하고 벼락이 많은 곳이라면 풍뇌신은 몇 년씩 사라지지 않고 버틸지도 모른다.
"저건 할아버지도 힘들어."
치우의 음성엔 절망이 가득 배었다. 이십 년 동안 주작란을 찾아다니며 실패할 때마다 오작이 느꼈던 절망감보다 훨씬 짙고 음습한 기운이었다.
오작은 실패해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지만, 치우에겐 아니었다.
'천재는 시련이 적다. 그래서 장성한 후 작은 시련에도 쉽게 꺾이고, 큰 시련에 꺾이면 재기가 어렵다.'
마음을 굳힌 오작은 감정이 거의 섞이지 않은 말투로 질문했다.
"치우야. 결정할 때다. 네 할아버지와 너 그리고 나까지 셋의 운명이 걸렸다. 둔각까지 넷이라고 해야 할까?"
치우가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봤지만, 오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 꺾여. 내가 널 다시 일으켜줄게.'
치우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그때, 치우의 결정을 돕겠다는 듯 풍뇌신이 움직였다. 풍뇌신의 움직임에 따라 바다가 뒤집히고 천일도가 흔들거렸다.
다행히 천일도 북쪽에서 삼 리 정도 떨어진 양수도까진 여파가 미치지 않았다.
"형. 만약에. 만약에 말이지."
오작은 치우의 이글이글 불타는 눈을 겨울 호수처럼 고요하고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할아버지를 다시 못 보게 된다면, 내 복수를 도울 거지?"
"왜 네 복수야. 어르신은 내게도 친인이야."
"가자. 도망치자."
치우는 미련을 못 버리고 버드나무 숲에서 서성이는 둔각을 번쩍 들어 배에 태웠다. 오작까지 타기를 기다려 긴 작대기로 바닥을 밀며 양수도를 떠났다.
작대기가 바닥에 안 닿을 정도로 깊은 바다로 간 후 천일도를 등지고 노를 저었다. 북쪽으로 흐르는 해류에 배가 몸을 실었음에도 쉬지 않고 계속 저었다.
"형, 어떻게 됐어?"
"풍뇌신이 천일도로 올라갔어."
풍뇌신이 주입받은 목적은 천일도를 말살하는 거다. 그래서 남쪽 바위 절벽부터 차근차근 무너뜨리며 천천히 전진했다.
만약 구망의 죽음을 목적으로 주입했다면 풍뇌신은 곧장 소양궁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망을 죽이는 데 모든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엔 문제가 하나 있다.
법술 지식 및 이해가 월등히 높은 구망이 눈치채고 도망가면 큰일이다. 풍뇌신은 구망의 뒤를 쫓으며 가는 곳마다 쑥대밭으로 만들 거고, 혹여나 구망이 오장국으로 가면 구 년 동안 힘들게 키워 삼묘국이나 청고국과 맞먹는 힘을 갖춘 오장국의 기반이 산산이 박살이 날 것이다.
"그만 돌아봐도 돼. 거리가 멀어서 천일도가 안 보여."
그제야 노를 멈춘 치우는 몸을 돌려 천일도 방향으로 큰절을 올렸다. 엎드린 채 한참 흐느낀 치우는 몸을 일으켜 소매로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형. 내가 적에게 뒤통수 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야. 이제부터 세상 누구도 날 도망가게 할 수 없어."
오작은 다가가서 자기보다 훨씬 큰 덩치의 치우를 꼭 안아줬다. 치우는 겨우 멈췄던 눈물이 다시 터졌지만, 울음소리를 안 내려고 이를 꽉 악물었다.
그때. 세찬 해류가 주는 진동과 다른 울림이 느껴졌다. 오작은 황급히 주변을 살폈고 치우 역시 눈물을 닦고 남쪽을 주시했다.
"청제의 수하는 아닌 것 같다. 살기가 없어."
둘의 눈에 안 보인다는 것은 바다에서 오는 울림이라는 뜻이다.
"형. 이거 귀갑어 같은데."
코를 킁킁대던 치우가 오작에게 말했다.
조심성이 심한 귀갑어는 해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요괴도 해류를 싫어한다. 요괴는 자기 영역에서 더 강한 힘을 발휘하기에 해류처럼 강제로 영역을 떠나게 하는 외력에 태생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귀갑어도 늘 조심하는 게 아니다. 이빨을 뽑은 귀갑어는 두려움을 잊고 물불을 안 가린다. 그리고 또 하나. 발정기에 이른 귀갑어 역시 눈에 뵈는 게 없다.
치우는 단전에 수십 개가 되는 귀갑어의 내단을 품었다. 내단의 기운은 음양과 오행에 속하지 않기에 늘 가까이 붙어 다니는 오작도 눈치를 못 챘다.
마침 해류 근처에 있던 발정기의 귀갑어는 처음 느끼는 강대한 힘에 이성을 완전히 잃었다. 강한 귀갑어와 교배하려는 본능이 조심성이고 뭐고를 다 지웠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오작도 치우도 전혀 몰랐다. 알았다고 해도 대처할 방법이 없었겠지만.
오작은 귀갑어의 접근을 느끼고 부들부들 떠는 둔각을 다독였다. 치우는 가장 크고 무거운 노를 들고 미지의 적의 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정작 공격받았을 땐 아무 대처도 할 수 없었다. 상대에게 자기 힘을 증명하는 데 급급했던 발정 난 귀갑어가 단단한 등딱지로 배 밑을 강하게 때렸다.
귀갑어끼리는 힘을 보여 상대의 흥미를 유발하는 놀이지만, 오작과 치우가 불과 몇 시진 전에 만든 배엔 훼멸적인 타격이었다.
강한 충격에 배가 동강 나고 치우와 오작 그리고 둔각은 바다에 빠졌다. 오작은 치우가 고집부릴 때를 대비하여 제압하려고 준비한 밧줄을 던져 치우의 팔에 감았다.
말로는 치우 뜻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최악의 경우 치우를 묶어서 데려가려고 준비한 부적을 붙인 밧줄이었다. 힘이 장사인 치우를 확실히 묶으려고 준비한 밧줄은 매우 질겼다.
밧줄을 자기 허리에 묶은 후 둔각의 목에까지 두른 오작은 그제야 시름을 놓고 습격한 적의 정체를 확인했다.
길이 십칠 장(29m)이나 되는 커다란 귀갑어가 원흉이었다.
- 작가의말
풍뇌감대해 - 풍뇌신이 바다를 흔들다.
합체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로망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호작 100명 돌파 기념으로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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