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산비고蒼寧山秘庫
요욕인군妖慾人君
요괴는 인간의 왕이 되고 싶으나
세인불납世人不納
사람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치우는 오작을 업고 공공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었다. 창녕궁을 발칵 뒤집었는데도 아무것도 안 나오자 요괴와 인간들이 치우를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공공의 위명이 있어 경거망동하는 놈은 아직 없지만, 참을성이 바닥나기 직전임은 남의 눈치를 잘 안 보는 치우도 알 정도였다.
그래서 은신술로 움직여 창녕궁을 벗어나는 중이다.
싸우면 공공과 치우가 무조건 이기지만, 아직도 혼절 상태인 오작은 장담하기 어렵다. 팔괘자수선의가 아무리 대단한 법보여도 주인이 기절한 상태에선 공격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다.
오행마가 북망산의 뼈다귀들에게 안 잡히고 몇 년이나 도망 다녔음을 생각하면 북망산이 얼마나 넓은지 쉽게 알 수 있다. 셋은 창녕궁이 주먹보다 작게 보일 정도로 먼 곳에서 동굴 하나 찾아내 몸을 숨겼다.
"다음 계획이 있어?"
공공의 질문에 치우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계획이라고 하면 형이 깰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치우의 계획은 반나절 뒤에 성공했다.
"어떻게 됐지?"
정신을 차린 오작은 무극보인을 느리게 돌리며 질문했다. 무극보인의 회전으로 외부 기운이 몸에 흘러듬에 따라 망치로 전신을 두들기는 고통이 느껴졌다.
치우와 공공은 자신들이 본 걸 최대한 자세하게 얘기했다. 다 들은 오작이 한숨을 쉬었다.
"허세를 부려서라도 창녕궁에 남았어야지. 놈들은 우리가 보물을 들고 도망친 거로 생각할 거야."
치우는 경험이 부족하다. 게다가 오작의 안위를 걱정해서 다른 생각은 떠올리지도 않았다. 공공 역시 흑제를 몰아낸 이후로 누구 눈치를 본 적이 없어서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이제 어떡하지?"
"결계로 가자. 즙무혼과 악불산이 나갔다는 건 출입할 방법이 있다는 뜻이야. 그게 뭔지 찾아야지."
치우가 오작을 업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공공께선 이제부터 냄새를 지워주십시오."
"이제부터?"
"우리가 동굴에 숨었다고 여기게 하려고요. 제가 짐이 안 될 정도로 회복할 때까지는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공공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법술을 익혔는지 모를 독종들이어서 조금 꺼려지긴 하지만, 무서워서 피할 정도로 강한 놈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즙무혼을 찾아 죽이는 데 오작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하자는 대로 따랐다.
과연, 오작 일행이 떠나고 반 시진 정도 흐르고 요괴와 인간들이 동굴에 몰려와 샅샅이 수색했다.
"냄새는 여기서 끝이다."
"발자국도 없어."
"멍청이들. 머리를 써."
입을 연 자는 놀랍게도 결계 변화를 경고하던 멧돼지 요괴였다.
"흔적을 지운 흔적이 있을 거 아니야. 그걸 찾아."
"그게 뭔데?"
"흔적을 지우는 방법을 떠올려. 그리고 지우면서 어떤 흔적이 생기는지 생각하라고. 그러다 대가리 썩겠다."
멧돼지의 말에 몇몇 요괴가 바닥에 엎드린 채 기어 다녔다.
"찾았다. 발자국을 법술로 지웠어."
지운 냄새는 못 찾았지만, 발자국을 지운 흔적은 용케 찾아냈다. 짧은 시간 전에 생긴 변화를 없애 원래 상태로 복구하는 복원술復原術을 펼친 흔적이었다.
"복원술이 확실하지?"
멧돼지 요괴의 질문에 너구리를 닮은 요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나서야지."
멧돼지 요괴가 뿔처럼 새긴 붉은 막대기를 들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종유시踪有始 적유종跡有終."
흔적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멧돼지의 읊음이 끝나자 바닥에는 공공과 치우의 발자국이 생겨났다. 공공이 복원술로 없앤 흔적을 멧돼지가 다시 살린 것이다.
인간과 요괴들은 발자국을 따라 빠르게 달렸다. 발자국을 따라 달리다 보니 결계 앞에 도착했다.
"은신술로 숨었다."
멧돼지의 확신에 찬 말에 너무 작아 눈에 안 띄는 요괴가 나섰다.
"그럼 이 무낭舞娘이 나서야겠구나."
무낭은 나비 요괴였다. 그것도 보기 드문 금빛 날개의 마수였다.
일반 나비보다 조금 큰 무낭이 접었던 날개를 활짝 폈다. 무낭의 날개는 웬만한 다 자란 닭 부럽지 않은 크기였다. 몸통이 너무 작아 그저 날개 네 쌍이 허공에서 날아다니는 듯한 착각을 줬다.
"풍청양風淸揚 화만루花滿樓."
맑은 바람이 가볍게 부니 꽃잎이 집안에 가득하네.
커다란 날개에서 금빛 가루가 쏟아졌다. 어떤 가루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어떤 가루는 하늘로 올랐고 어떤 가루는 사방으로 퍼졌다.
멧돼지 일행과 멀지 않은 곳에 두 사람의 형체가 드러났다. 공공과 오작이었다.
"제길. 뭐 이런 이상한 법술이 다 있어."
유일하게 안 들킨 치우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무낭이 날개를 접고 핑글핑글 돌며 바닥에 떨어졌다. 멧돼지 요괴가 황급히 무낭을 들어 올렸다.
치우의 은신술을 간파하지 못한 탓에 무낭이라는 나비 요괴는 큰 충격을 받아 기절했다.
"원하는 게 뭐야?"
공공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요괴와 인간들은 공공의 기세에 놀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뒷걸음질 쳤다.
멧돼지 역시 뒷걸음질 쳤지만, 그건 공공의 기세에 눌려서가 아니라 무낭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각자 원하는 바가 다를 거요."
어느 정도 물러난 멧돼지가 말했다.
"여기 분들은 당신들이 찾은 보물이 뭔지 궁금해서 왔소. 그걸 알려주면 아마 포기할 사람은 포기할 거요."
"너는?"
"난 고로국高老國의 부마 인충印忠이라고 하오. 고로국 왕은 슬하에 공주 하나밖에 없고, 난 공주와 혼인했소. 왕국의 법대로면 사위인 내가 성을 고씨로 바꾸고 왕이 되어야 하오. 그런데 왕국에선 공주를 여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오. 공공께서 나서서 질서를 바로잡을 것을 간청하오."
"내게 그럴 만한 권한이 없다는 걸 알 텐데?"
"권한은 없지만, 힘이 있잖소. 고로국 변경에 삼천 정도 군대를 집결해 주시오. 그렇게 되면 나를 왕으로 추대할 수밖에 없을 거요."
치우는 들을수록 기가 막혔다.
"야. 너 요괴잖아. 그런데 왜 왕이 되고 싶은데?"
치우의 질문에 인충은 피식 웃었다.
"인간이 승천하는 건 되고 요괴는 왕이 못 된다? 네 말대로 하면 인간은 승천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야?"
대답이 궁한 치우는 오작을 바라봤다. 오작은 양손을 결계에 대고 절대감으로 나갈 방법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요괴는 혼자 살거나 동족끼리만 뭉쳐서 살잖아. 간혹 다른 종과 영지를 함께 쓰는 일은 있어도 그건 일부 요괴의 특성일 뿐이야. 근데 왜 인간의 왕이 되고 싶은데? 네가 요괴들을 데리고 나라를 만들어 왕 한다면야 나도 반대하지 않아."
공공의 말에 인충은 큼직한 코를 실룩였다.
"요괴는 인간이랑 어울리면 안 되나? 요괴는 인간 좋아하면 안 돼? 서로 해치지 않고 사이좋게 살 수도 있는 거잖아. 넌 흑제 되겠다는 놈이 왜 그렇게 편협해?"
만약 흑제를 흑수해에서 끌어내기 전이라면 공공은 인충의 뜻을 따랐을 것이다. 요괴가 인간 왕국의 왕이 되는 건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공공은 흑제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며 새로운 흑제를 추대해야 한다고 우겼을 것이다.
절대적 동지인 적표노는 당연히 동의할 거고, 영위앙도 적당한 대가를 치르면 공공의 편을 들 것이다.
오작의 가문 참사를 공공이 벌인 줄로 아는 백제 역시 공공을 도울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공공은 흑제가 되는 꿈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흑제가 있다. 알맹이는 즙무혼이지만, 겉은 누가 봐도 즙선기다. 만약 지금 요괴가 왕이 되면 즙무혼이 나타나 처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힘의 논리도 소용없다.
명분이 확실한 즙무혼이 흑제 노릇을 할 것이고, 공공의 세력은 서서히 와해할 것이다.
'그때 못 죽인 게 패착이다.'
흑제가 오작의 가문을 공격하다가 정무의 멸천칠절공에 당했을 때 못 죽인 게 한이다. 그때 격대전이의 약점을 알았다면 심장 대신 오른쪽 가슴을 공격했을 텐데.
생각할수록 아쉬웠다.
"인간의 편협함은 어쩔 수 없군."
인충이 이를 갈며 펄릭이는 귀에서 무기를 꺼냈다. 적무혈의 주망창과 비슷한 장도인데 특이하게 칼날이 둘 달렸다.
악불산의 창처럼 양쪽에 하나씩 달린 게 아니고 한쪽에 둘 달린 장도는 인충이 자신의 꼬리와 뻐드렁니를 단련하여 만든 법보다.
"넌 공격이 편해 수비가 편해?"
공공이 치우한테 질문했다.
"공격이 편하지만, 지금은 수비."
치우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공이 뛰쳐나갔다. 공공의 기세에 놀란 인간과 요괴들이 황급히 피했다.
그러나 공공 역시 즙무혼을 쫓으며 속에 쌓인 게 많은 상태였다. 잔뜩 치민 화를 주먹으로 쏟아낸 바람에 첫 공격에 인간 둘과 요괴 하나가 곤죽이 되어 바닥에서 꿈틀댔다.
"여긴 내가 맡지. 너흰 저 둘을 잡아라."
인충이 쌍인희아도雙刃豨牙刀를 들고 공공과 맞섰다. 남은 자들은 우르르 몰려 오작을 지키는 치우를 공격했다.
"너희 얼굴 다 기억했다. 오늘 내 칼에 귀신이 안 되더라도 이후 살펴 다녀. 보이는 족족 죽인 다음 삼계윤회환에 못 들어가게 잡아둘 테니까."
오작의 안위가 걱정된 치우가 씨근덕거리며 독한 말을 뱉었다.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삼계윤회환조차 못 가게 한다는 치우의 말에 몇몇 요괴가 슬그머니 물러났다.
안타깝게도 아예 마음을 접은 게 아니라 확실한 기회를 노리려는 것이기에 치우가 느끼는 압박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
멧돼지 요괴 인충은 놀랍게도 공공과 비슷한 수준으로 싸웠다. 공공이 싸움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결국 뿌리는 술사다.
특히 소환술에 자신 있는데, 결계 때문에 가장 친밀한 흑빙사도 겨우 소환했다. 그것도 결계의 방해를 받아 약한 상태로 소환된 바람에 채 한 호흡도 못 버티고 사라졌다.
소환술이 묶인 바람에 공공은 인충과 대등한 싸움을 벌였다. 강한 법술이 없는 건 아닌데, 대규모 법술이어서 오작과 치우까지 말려들 것이다.
'돼지 주제에 날쌔기는.'
홍도공이라는 강한 무공이 있지만, 화려한 초식이 없이 힘을 강하게 방출하는 단순한 방식이다. 쉽게 말해 피하면 그만이다.
기습 혹은 궁지에 몰린 적을 처리할 땐 참 유용하지만, 일대일로 싸우는 상황에 상대가 대비까지 하면 쓸 일이 거의 없다.
'시간이 촉박하다.'
이대로 즙무혼을 놓치면 흑제가 살았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다. 거짓 소문이어도 명분이 부족한 공공한테는 타격인데 실제로 즙무혼이 즙선기 행세를 하고 다니면 공공의 세력은 태반이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결계로 공공을 가둔 즙무혼이 즙선기 행세를 하며 어렵게 일군 세력을 통째로 삼킬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음의 압박이 심하여 공공은 인충 상대로 어떤 우위도 보이지 못했다.
"으악."
치우의 칼에 베인 요괴가 바닥을 뒹굴었다. 귀화를 가득 담은 삼태극보인을 품은 천강마환도는 요괴 혹은 비슷한 존재에게 강하다.
즙무혼도 격대전이로 몸을 빼앗은 부정한 존재기에 마환도를 두려워했다.
마환도에 팔을 잘릴 때 기지를 발휘하여 멸천칠절공과 홍도공 그리고 마환도에 대한 두려움을 잘린 팔과 함께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칠백을 흡수하고 연혼단백으로 단련하는 과정에 흑수해의 기운을 흡수하며 마환도를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태상노군이 어떻게든 죽여 없애려고 이를 가는 존재 중 하나인 즙무혼조차 두려워했던 마환도를 강하다고는 해도 일개 요괴가 버틸 만한 게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서 공격해."
요괴들은 치우가 오작 곁을 못 떠나는 약점을 이용해 거리를 두고 법보를 던지거나 법술로 공격했다.
치우는 강한 공격은 칼로 쳐 내고 약한 공격은 몸으로 막으며 버텼다.
"죽여도 좋다. 숨긴 보물은 내가 찾아낸다."
구망처럼 수리건곤으로 보관한 물건을 훔치는 재루를 갖춘 요괴가 있는 듯했다. 속수무책으로 수비만 하는 치우 상대로 요괴들은 더 강한 공격을 쉬지 않고 퍼부었다.
"간다!"
뒤로 물러나서 기회를 노리던 요괴 중 하나가 커다란 불덩이를 소환했다. 붉고 푸르고 하얀 세 가지 색이 섞인 불덩이는 치우와 오작을 함께 노렸다.
"제길."
치우는 막지도 피하지도 못하는 상황이 원통하기만 했다. 딱히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몸을 돌려 오작을 그러안았다.
일단 엄청 위험해 보이는 이 공격을 막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불덩이가 치우의 등에 작렬했다. 수천 마리 게가 집게발로 꼬집는 듯한 통증에 난생처음 느끼는 뜨거움이 연이어 덮쳤다.
"형!"
그러나 치우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은 통증보다는 갑자기 사라진 오작의 행방이 더 걱정이었다.
"여긴 어디지?"
오작은 절대감으로 결계를 살피느라 창녕궁에서 쫓아온 요괴들과 싸운 일조차 몰랐다. 그저 무아지경에 빠져 결계를 탐색하다가 갑자기 강한 힘에 떠밀려 정신을 차려보니 생소한 공간이었다.
"지하궁전인가?"
오작은 멸천창을 소환해 지팡이처럼 짚고 움직이며 자세히 살폈다. 횃불 하나 없지만, 오작에겐 큰 장애가 아니었다.
'귀곡자는 도대체 어디까지 예상한 거지?'
벽과 천장과 바닥은 물론이고, 수백 개 관에도 글자가 가득했다.
모두 귀곡자가 어린 오작한테 가르친 적 있는 글자였다.
- 작가의말
다음 편 제목 : 奇緣多內去기연다내거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