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혈조참사盜血造慘事
신불가침神不可侵
신의 권위는 침범할 수 없어
교도몰살敎徒歿殺
교도가 몰살당하다
- 침착해.
오작은 흥분으로 몸을 떠는 치우의 팔을 잡고 진정시켰다. 다행히 치우는 피를 보고 흥분한 게 아니라 혈곤과 싸워보고 싶은 거였다.
치우의 은신술이 순간 흔들렸고 투지도 발산되었지만, 광기에 취한 교주와 교도들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목을 물린 교도는 피를 빨려 죽으면서도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오작은 대량 실혈이 벌어질 때 당사자는 오히려 쾌감을 느낀다던 말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피를 다 빨린 교도의 몸이 쓰러지며 첨벙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새벽을 깨우는 닭의 울음소리라도 된 듯 교도들이 악을 쓰며 애타게 손을 뻗었다. 어서 자신의 피를 취하라고 갈구하는 모습에 오작과 치우는 소름이 돋았다.
혈곤은 돌아다니며 수십 명 교도의 피를 마셨다. 칙칙한 은색에 가깝던 혈곤의 비늘이 반짝이는 환한 은색으로 변했다.
유일하게 침착한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던 교주가 칼로 자기 손목을 베어 제단 꼭대기에 피를 쏟았다.
- 내가 갈게.
오작이 말릴 새도 없이 치우가 출발했다.
"자. 이젠 신이 휴식할 시간이다. 주문을 읊어라."
교주의 목소리는 벌 떼처럼 윙윙 울렸다. 아우성을 치던 교도들이 추운 겨울 오줌 싼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광기에서 깨어났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교도들은 아쉬운 마음으로 환송주歡送呪를 읊어 신의 귀환을 축하했다.
눈엔 보이지 않지만, 오작은 절대감으로 치우가 피 몇 방울을 훔쳐 병에 담은 걸 확인했다. 교주는 제단에서 멀찍이 물러나 교도들 틈에서 함께 환송주를 읊었고, 환송주에 저항하지 못한 혈곤은 고분고분 제단으로 가서 교주가 낸 피를 마셨다.
아무래도 교주의 피가 특별하여 혈곤을 제단을 통해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인매引媒인 듯하다.
피를 훔친 치우는 비행술로 몸을 띄워 느릿느릿 오작 곁으로 돌아왔다. 교주나 교도들은 처음부터 치우의 은신술을 간파할 능력 따위는 없는 것 같고, 내심 걱정했던 혈곤 역시 교주의 피에 취하여 비행술로 움직이는 치우를 발견하지 못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쉽다.'
원래는 한 번 정도 실패할 각오도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제사를 지내는지 확인하고 다음 기회를 확실하게 노릴 생각이 컸다.
그런데 너무 쉽게 성공하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 형, 찝찝해.
그건 직감이 뛰어난 치우도 마찬가지였다.
- 조금 더 지켜보자.
괜히 피를 얻었다고 바로 떠났다가 혈곤이 쫓아오기라도 하면 낭패다. 오작은 혈곤이 확실히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오작과 치우의 직감은 정확했다. 피를 깨끗이 마신 혈곤이 갑자기 난동을 부리며 교주를 노렸다.
'피가 적어선가?'
교주와 교도들이 계속 환송주를 읊고 있어 혈곤은 제단과 멀리 떨어지지 못했다. 가까이 있던 교도 몇이 혈곤의 공격에 머리나 몸이 터져 죽었지만, 교주는 멀쩡했다.
"환송주를 더 크게 읊어라."
교도들에게 지시한 교주는 소매에서 부적 하나 꺼내 주문을 중얼중얼 외웠다. 부적을 찢어 바로 사용하지 않는 걸 보니 평범한 법술은 아닌 듯했다.
- 소환 계열이야.
치우의 손가락을 확인한 오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는 돌아가길 거부하는 혈곤을 처리하려고 무언가를 소환하는 듯했다.
- 그만 갈까?
오작의 질문에 치우는 고개를 저었다.
- 뭔가 생각날 거 같아. 좀 더 있자.
정보가 적어 판단이 어려울 때 오작은 치우의 직감을 신임한다. 타고난 직감은 가끔 틀릴 때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일에는 직감만큼 믿음직한 것도 없다.
주문이 끝나자 부적이 절로 타올랐다. 그러더니 붉은 갑옷에 검은 투구를 쓴 병사 사백 명이 소환으로 나타났다.
- 인간이야.
소환으로 나타난 건 인간 병사였다. 그러나 평범한 병사는 아니었다. 무공을 익혔는지 법술을 익혔는지는 구분할 재주가 없지만, 전원 법력을 꽤 보유했다는 사실은 쉽게 알았다.
소환된 병사들은 교주를 덮치려는 혈곤을 향해 그물을 뿌렸다. 법보가 분명한 그물은 혈곤을 가두자마자 뿌연 안개를 연신 뱉어냈다.
혈곤의 거센 반항이 버거워 법보가 발악하는 거였다.
펑 소리와 함께 그물이 찢기자 새 그물이 던져졌다. 그렇게 병사들은 제단을 둘러싸고 혈곤이 지칠 때까지 그물을 던졌다.
드디어 혈곤이 제압되자 교주가 앞으로 나섰다. 조심스럽게 제단에 다가간 교주는 손가락을 칼끝으로 찔러 피를 냈다. 피 몇 방울 마신 혈곤은 얌전히 제단으로 기어들어 가 사라졌다.
"신께서 우리 성의가 부족하다고 노하셨다. 반 시진 더 기도하고 돌아간다. 제단 가까이 오너라."
교주의 명령에 교도들이 허겁지겁 제단을 향해 달려갔다. 소환술로 온 병사들은 교도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바깥으로 물러났다.
"기도하라. 다음엔 내 피를 마셔달라고 소망하라. 간절하면 이뤄질 것이다."
특별히 정해진 기도문이 없는지 교도들은 절을 연신 올리며 제멋대로 중얼거렸다. 모든 일이 끝난 듯하여 오작과 치우가 그만 돌아갈까 고민하는 중에, 비명이 터졌다.
외곽으로 물러났던 병사들이 칼을 뽑아 교도들 등에 꽂았다. 그러나 제단과 가까운 곳에 있는 교도들은 다른 자들의 비명을 듣지 못한 듯 여전히 절하며 웅얼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제단이 사람의 정신을 홀리는 사이한 기운을 풍기는 듯했다.
그렇게 채 반 각도 안 되어 삼천에 가까운 교도가 모조리 죽었다. 오작은 죽는 순간에도 제단을 향해 손을 뻗으며 중얼거리는 교도의 모습을 보며 마음 어딘가 불편했다.
앎이 부족하여 맹신에 빠진 자가 가엽기도 하고, 누가 봐도 사이한 요물을 신이라고 떠받드는 게 한심하기도 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그때, 놀랍게도 병사 중 하나가 투구를 벗으며 교주한테 호통쳤다. 교도와 일반 주민 앞에서 당당한 모습만 보여주던 교주가 목을 움츠리고 허리를 굽신거렸다.
"죄송합니다. 저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제사랑 똑같은 양의 피를 냈는데 혈곤이 불만인 듯합니다."
"피의 양을 늘린 지 채 반년도 안 되었는데. 분명히 네놈이 실수한 게 틀림없다."
"아닙니다. 이 칼에 물으십시오."
교주는 쩔쩔매면서 손목을 그었던 칼을 꺼냈다. 투구를 벗은 자가 칼을 받아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이상하구나. 분명히 정확한 양의 피를 줬는데 혈곤이 왜 저럴까?"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늘 하던 대로 하고 다음 제사 때 혈신血神을 모시고 지내야지. 피의 양을 늘릴지 원래대로 할지는 혈신께서 정하실 거다."
교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병사는 대답도 하지 않고 턱짓으로 교주를 쫓아냈다. 교주는 엉금엉금 기어 오던 길로 돌아갔고 남은 병사들은 죽은 교도들 시체를 모았다.
시체를 한데 모은 후 병사들이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끝나자 지렁인지 뱀인지 구분이 어려운 흉측한 것들이 가득 소환되었다.
시체를 삼킨다는 시식사屍蝕蛇였다. 특이하게 몸통 양쪽에 머리 하나씩 달린 이놈은 시체를 머리와 발 양쪽에서부터 삼키다 두 머리가 맞닿으면 이빨로 토막 낸다.
"저놈의 피도 점점 효과를 잃는 것 같지?"
교주가 떠나자 추가로 몇 명이 투구를 벗었다.
"그런데 저놈 혈통이 끊겨서 말이야. 이대로는 혈곤이 혈붕으로 변하기 힘들겠는데."
"끊기긴 왜 끊겨. 강제명이 있잖아. 저놈이야 아무리 여자를 줘도 자식을 못 낳지만, 강제명은 아니잖아."
강제명의 모계 혈통이 조금 특별한 듯했다.
"그런데 강제명 자식이라고 다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그 망할 갈보는 또 어쩌고."
이들이 이를 가는 망할 갈보는 강제명의 할머니인 구천현녀였다.
"그러니까 내가 그때 말했잖아. 너무 다급하지 말자고. 우리가 서두르는 바람에 미씨芈氏들이 다 죽고 둘만 남았잖아. 그것도 여자는 나라까지 바치면서 염환국에 숨어들었고."
"이미 지난 일 자꾸 들춰서 뭐 해. 이제부터라도 신중하게 잘하면 되지."
이들은 시식사가 주검을 다 처리하기를 기다려 떠났다. 어느새 삼천 교도가 흘린 피는 제단에 흡수되어 사라졌고 주검도 사라져 공동은 처음 왔을 때처럼 깨끗해졌다.
"큰일이다. 저놈들이 피를 잘 다루는 거 같은데. 강제명을 우리보다 먼저 찾아낼 거 같아."
오작은 고개를 끄덕여 치우의 말에 동의했다.
"근데 너 뭔가 생각날 것 같다고 했잖아."
"조금 더 기다려. 곧 생각날 거야."
둘은 오던 길을 되짚어 위로 올라갔다. 병사들이 사라진 굴로 따라가 이들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괜한 일을 안 만들기로 했다.
- 잠깐. 앞에 교주 있다.
교주의 기척을 발견한 둘은 은신술을 펼치고 천천히 따랐다. 교주는 헉헉거리며 걷다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 생각났다.
교주의 드러누운 모습을 본 치우가 말했다.
- 귀골이야.
귀골이라는 단어는 만들지 않았기에 치우는 허공에 글자를 적었다.
- 환혼노조?
엉망으로 쓴 글자를 용케 알아본 오작도 허공에 글자를 썼다. 치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긍정했다.
치우는 교주의 하얀 수염을 어디에서 본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다 교주가 드러누운 모습을 보자 환혼노조와 수염 모양이 비슷하고 체형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랑 싸운 자 이름이 적무혈이었지. 적표노의 무기가 화첨창火尖槍이고.'
우연일 수도 있지만, 강제명의 외가가 환혼노조의 후손으로 보인다는 치우의 말에 적무혈과 적표노의 연관성도 의심되었다.
미나 적이나 남부에만 있는 성이고 흔하지도 않다. 어쩌면 북망산의 핏줄이 남부에서 이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설마 격대전이隔代傳移?'
한 개 종의 조상이 되는 마수는 해당 종에서 마수가 끊이지만 않으면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다. 이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법술이 있는데, 자신과 비슷한 피가 흐르는 자의 몸에 이미 사라진 자의 영혼을 부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술은 조건이 까다롭다.
먼저 부활하려는 자의 영혼이 멀쩡해야 한다. 삼혼이 흩어지지 말아야 하고 삼계윤회환에 한 번도 다녀간 적 없어야 한다.
다음으론 혈족의 피가 부활하려는 자와 아주 비슷해야 한다. 근친으로만 결혼한 게 아니면 다른 피가 섞이기 마련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가 계속 섞이기에 필요한 몸을 찾아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혈족의 몸이 강해야 한다. 평범한 자를 부활하려고 이 어려운 일을 시도하진 않을 테니, 부활하려는 자의 삼혼은 매우 강하다고 봐야 한다. 그런 삼혼을 감당하려면 칠백이 웬만큼 든든해선 어림도 없다.
'환혼노조를 부활하려는 건가?'
치우가 자세히 얘기하지 않아 북망산이 창녕산이라는 사실까지는 모르지만, 진명이 귀골인 환혼노조가 혼을 잃은 칠백이라는 건 오작도 들어서 안다.
어쩌면 아까 병사들이 환혼노조를 부활하려는 세력이고, 혈곤이 혈붕이 되어 환혼노조의 몸으로 쓰일지도 모른다.
교주가 다시 몸을 일으켜 위로 걷자 오작도 생각을 멈췄다. 아직 아는 게 적어 가설만 떠오를 뿐 유의미한 추리를 할 정도는 아니다.
오작은 일단 자단을 구하고 나서 다시 남화교의 일을 고민하기로 했다.
교주를 따라 동굴을 나왔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이른 점심이었다.
"다들 기뻐하거라. 신께서 너희 정성에 만족하여 삼천 교도 전부를 영생수永生樹로 보냈다. 이들은 영생수의 한 열매가 되어 영생할 것이다."
교주의 말에 일반 주민들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제자리에서 펄쩍거리며 환호했다. 교도들이 영생수로 간 것보다는 빈자리가 많이 생겼다는 게 더 기뻤다.
교주를 필두로 하여 십만이 넘은 일반 주민이 혈지로 돌아갔다. 오작과 치우는 볼일이 끝났기에 다른 길로 둔각이 숨은 곳을 향해 곧게 뛰었다.
"형. 강제명보다는 형천이랑 소소를 먼저 찾아야 하는 거 아니야?"
"강제명은 단서라도 있지. 형천이랑 소소는 단서조차 없잖아."
치우는 풍령비를 꺼내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품에 넣었다. 치우의 영지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오행마는 어디 갔지?"
치우가 갑자기 떠올린 의문에 오작도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작이 오행마를 풍령까지 무사히 데려갔어. 소소랑 형천이 금계산으로 갔다면 오행마도 데려갔을 거야. 오행마가 없으면 숙부를 만나더라도 둘을 믿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는 것은!"
오작은 치우의 결론을 기다렸지만, 한참 동안 치우는 말이 없었다.
"뭐야?"
"난 운을 뗐을 뿐이야. 추리는 형 몫이잖아."
오작은 헛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웬만한 정보를 다루는 곳에 가서 오행마의 행적을 물으면 소소와 형천의 행방에 대한 단서가 생긴다는 거지."
"그럼 둘 먼저 찾는 거야?"
"아니. 그냥 알아보는 거야. 쉽게 찾을 것 같으면 시도해 보고, 아니면 숙부를 먼저 찾는다. 숙부를 찾아야 우리 마음의 짐이 사라져. 그럼 법술도 무공도 어느 정도 발전할 수 있고, 근심과 걱정 없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어."
- 작가의말
희야, 날 좀 바라봐.
부활을 꿈꾸는 환혼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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