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왕대봉각蟬王大封殼
선본사익蟬本肆翼
매미는 본래 날개가 네 쌍이고
의본유각蟻本有殼
개미 배엔 껍질이 있었다
대모왕의 영지는 아주 큰 듯했으나, 사실 그렇게 크지도 않았다. 오작과 설영은 정확한 목적지를 모르기에 무작정 많이 다닌 굴을 선택했다.
결국엔 목적을 이뤘지만, 그 과정에 중복하여 걸어온 길이 무척 길었다.
대모왕을 찾아내기까지 사흘이나 걸렸던 것과 달리, 황금 개미의 안내를 받은 둘은 하루도 안 걸려 대모왕의 영지를 벗어났다.
'대모왕의 영지여서가 아니라 깊은 땅속이어서 절대감이 발휘되지 않는 거다.'
오작은 영지를 벗어나고도 여전히 절대감이 돌아오지 않자 전에 했던 판단을 수정했다.
'만약 내 가설이 맞는다면, 깊은 동굴이나 깊은 바다에서도 절대감은 효과를 잃는다.'
오작의 추측은 정확했다. 산이라는 존재, 땅이라는 존재, 바다라는 존재에 완전히 둘러싸이면 절대감도 소용이 없다.
이겨내는 방법은 단 하나. 오작의 존재감이 산이나 땅 그리고 바다에 먹히지 않을 만큼 크고 확고해지는 수밖에 없다.
"근데 넌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자를 어떻게 생각해?"
오작은 갑자기 던져온 이상한 질문에 눈만 껌뻑였다. 차라리 어려운 질문이면 고민하여 그럴듯하게 대답할 수 있지만, 설영의 질문은 너무 뜬금없었다.
"질문 의도가 모호하여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남자들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자를 싫어한다고 들었어. 실제로 그런지 궁금해서 말이야."
"서부와 남부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습니다. 당연히 어리고 건강한 여자가 환영받겠죠. 그러나 북부나 동부는 남자가 훨씬 많습니다. 굳이 나이를 따지는 사람은 없을 텐데요."
"그럼 중부는?"
"중부는 동부 다음으로 땅이 비옥하고, 서부 다음으로 광산이 많으며, 남부 다음으로 숲에 과일과 사냥감이 많습니다."
"북부는 뭐 잘난 거 없어?"
"북부는 싸움을 잘하죠. 그리고 귀한 약초와 따뜻한 가죽이 많습니다."
"미안. 일단 중부 얘기부터 하자."
"중부 여자는 북부와 동부 남자들이 귀하게 모셔가고, 중부 남자는 서부와 남부 여자들이 받들어 모십니다. 그래서 중부는 남자든 여자든 다 콧대가 높습니다."
"결국 지역과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거네? 그럼 넌 어떤데?"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마뜩잖을 것 같습니다."
오작은 소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스무 살 차이가 난다며 넌 절대 아니라고 외치던 단호한 외침이 귓가에 맴돌았다.
'치우랑 둘이 잘돼야 하는데.'
설영은 약간 원망을 담아 오작을 흘긴 후 입을 다물었다. 오작은 최근 얻은 깨달음들을 되새기느라 설영의 표정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땅굴이 드디어 끝나고 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바위뿐인 대모왕의 공동과 달리, 이번 공동은 높이가 낮은 대신 엄청 넓었다.
그리고 나무뿌리로 보이는 것들이 무수히 드리워 있었다.
"저기 싸우는 거 맞지?"
빨간 무리와 갈색 무리가 밀고 밀리며 싸우고 있었다. 빨간 무리는 대모왕의 명령을 받은 불개미들이고, 갈색 무리는 매미와 매미 유충들로 보였다.
그때, 황금 개미가 다리로 바닥에 글을 적었다.
"매미왕은 공동의 중심부에 혼자 있다."
설영이 삐뚤삐뚤한 글자를 용케 읽었다.
"매미왕의 울음을 들으면 귀가 며칠 먼다."
"손으로 하는 대화를 알려드리죠."
오작은 귀가 안 들릴 걸 대비하여 손으로 하는 대화를 가르쳤다. 설영은 어렵지 않게 익혀내고 연습 삼아 나눈 대화도 실수 없이 잘 해냈다.
"당신은 여기서 기다릴 겁니까?"
오작의 질문에 황금 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작과 설영은 은신술을 펼치고 공동 안에 들어갔다. 대왕모도 그렇고 매미왕도 그렇고, 지상의 요괴들처럼 명확한 결계가 없었다. 덕분에 오작과 설영은 들키지 않고 매미왕이 있는 곳까지 무사히 접근했다.
- 어떻게 할까?
- 일단 기온을 낮춰. 추우면 매미는 울지 못해.
설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법술을 펼쳤다. 그러나 채 주문을 두 구절도 못 외웠는데 매미왕이 거대한 몸집을 돌려 둘이 있는 곳을 정확히 바라보았다.
"들켰습니다. 제가 당분간 버티고 있을 테니 법술을 성공시키세요."
오작은 신속히 창을 꺼내 매미왕을 향해 달렸다.
"선익봉인술蟬翼封印術."
매미왕은 법술을 펼쳐 오작을 잡아두려 했다. 예전이었다면 꼼짝없이 잡혔겠지만, 최근 무극을 더 깊이 깨달으며 보이지 않던 걸 보게 되었다.
오작은 창으로 자신을 감싸려는 그물 비슷한 투명 물체를 연신 찔렀다. 비록 오작의 법력이 부족하여 봉인술에 당했지만, 움직임은 크게 제한받지 않았다.
오작은 몸에 붙은 투명하고 끈끈한 그물을 벗으며 천천히 걸었다. 매미왕은 법술을 준비하는 설영을 무시하고 오작과 눈을 맞췄다.
"약속의 아이야, 대화할 생각은 없느냐?"
오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저기에서 주문을 외우는 아이를 믿는 것이냐?"
말을 마친 매미왕은 선익봉인술을 또 한 번 펼쳐 설영을 노렸다. 동시에 뽀죡한 주둥이로 오작한테 끈적한 액체를 연신 쏘아 돕지 못하게 방해했다.
결국, 설영은 주문을 중단하고 빙령도를 휘둘러 자신을 덮치는 그물을 찢었다.
오작은 신법으로 끈적하게 날리는 액체를 피한 후 매미왕에게 접근하려 했다. 절대적으로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보통 원거리 공격을 선호하는 술사는 근접전에 약하다.
그러나 자기 발치에서 솟아오르는 용암 때문에 오작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누가 보냈느냐?"
매미왕은 공격을 늦추지 않으며 질문했다. 오작은 끈적거리며 바닥을 기어 접근하는 액체를 창으로 쳐내고 솔직하게 대답할지 고민했다.
"난 법보도 없고 모은 재물도 없는 빈털터리다. 이 깊은 곳까지 찾아온 걸 보면 분명히 누가 시킨 거 같은데."
불개미들이 매미 유충을 습격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매미왕은 대왕모한테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매미들도 자주 먹이를 들고 가는 일개미를 습격하기에 개미와 매미 사이의 다툼은 일상이나 다름없다.
"누군지 밝히는 건 그렇고. 혹시 원하는 게 있습니까?"
오작은 천리추흉을 펼칠 기회만 노리며 대화했다. 설영의 법술로 매미왕을 굼뜨게 한 다음 날개를 뜯어낼 계획이었는데, 매미왕의 감각이 이토록 뛰어날 줄은 몰랐다.
"그래. 약속의 아이 냄새가 나니까 넌 분명히 해낼 수 있을 거야. 의뢰를 성사하면 목진액木眞液을 주겠다."
오작은 마음이 크게 끌렸다. 오작한테는 별 쓸모가 없지만, 나무의 기운이 강한 치우한테는 엄청난 보약이다. 불의 아이인 형천이 먹은 불사과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어떤 일인지 들어보고 추가로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오작이 협상 의도를 비치자 매미왕은 공격을 멈췄다. 그러나 경계심이 남았는지 소환한 용암이 여전히 뜨겁게 흐르고, 끈적한 액체도 거둬들이지 않았다.
"예전에 천계에 큰 싸움이 있었고, 진 쪽은 대부분이 천계에서 쫓겨나고 이긴 쪽도 일부 쫓겨났다."
매미왕이 날개를 비벼 말했다.
"난 재수 없게도 이긴 쪽에서 쫓겨난 놈이다. 그래서 매미 주제에 땅 밑에 숨어 살아야 했다. 삼계에선 진 놈들이 더 강세니까."
"내 이름은 대봉각이다. 원래는 물과 불도 두렵지 않고 암만 강한 공격도 막아내는 단단한 껍질이 있었지. 천계에서 쫓겨날 때 뺏겼다."
매미왕은 고개를 살짝 돌려 치열하게 다투는 불개미와 매미들을 바라봤다.
"저기 유충들 좀 봐라. 살이 야들야들하여 개미는 물론 온갖 벌레의 먹이로 전락했다. 이대로 숫자가 늘지 않으면 마수가 태어나지 못하고 난 소멸한다."
마수한테는 혈육에 대한 애틋함 따위가 없다. 후손이 번성하기 바라는 건 존재의 소멸이 두렵기 때문이다.
"단단한 껍질이 필요하다. 유충을 단단한 껍질로 보호할 수 있다면 매미의 숫자는 수천 배로 많아질 거다."
"어디에 가면 얻을 수 있습니까?"
"대모왕을 죽이면 속에 품은 껍질을 얻을 수 있다."
대봉각과 대모왕은 천계에 있을 때 서로 반대 진영이었다. 그래서 대모왕은 대봉각의 날개를 노리고 대봉각은 대모왕의 목숨과 껍질을 노렸다.
"좋습니다. 껍질 얻으러 가겠습니다."
"너만 가라. 저 아이는 인질로 남아야 한다."
오작은 잠깐 고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작은 손으로 설영에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자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한 후 황금 개미와 헤어졌던 곳으로 갔다.
"대모왕과 대화할 수 있습니까?"
황금 개미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품은 껍질을 내놓으면 매미왕의 날개와 교환할 수 있게 협상하겠습니다. 온전한 날개를 얻으려면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합니다."
황금 개미가 촉수를 비벼 대모왕과 대화했다. 한참 대화한 황금 개미가 바닥에 삐뚤삐뚤 글을 적었다.
"껍질 절반만 내놓겠다. 그쪽 날개도 절반만 원한다."
바닥의 글자를 힘겹게 해석한 오작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매미왕한테 갔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당신의 날개 두 쌍을 대모왕한테 주면, 대모왕이 품은 껍질 절반을 당신한테 주겠답니다. 아무 손상도 없고, 서로 의기도 상하지 않는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잠깐 고민하던 매미왕은 조건을 추가했다.
"이후 개미들이 매미 유충을 건드리지 않는다고 약속해야 해."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신도 모든 매미를 통제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대봉각은 요괴 매미를 통해 일부 매미만 지배할 수 있다. 대왕모 역시 요괴 개미를 통해 금의와 불개미를 비롯한 일부만 관할에 두고 있다.
"네가 해결해. 난 빨리 매미 숫자를 늘려야 한단 말이야."
대봉각이 막무가내로 떼를 쓰자 오작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천하에 그 많은 개미와 매미가 있는데, 개미가 매미 유충을 못 해치게 하는 건 어림도 없다.
"둘이 따로 살게 하면 되잖아."
설영의 말에 오작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우리 빙령도에선 그래. 두 사람이 큰 원수를 지면 다른 섬에서 살게 해. 빙각氷脚(얼음 다리)이 생길 때가 아니면 서로 왕래할 수 없으니 싸우지도 못해."
"좋습니다. 금방 다녀오죠."
오작은 몇 번이나 오가면서 협상을 이뤄냈다.
대봉각은 네 쌍의 날개 중 세 번째와 네 번째 날개 두 쌍을 대모왕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대신 대모왕은 품은 껍질 중 개미의 배에 해당하는 부분을 대봉각에게 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개미도 날개가 달리기 시작했고, 매미 유충들은 둥그런 껍질로 자신을 보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미는 땅과 가까운 곳에서만 살기로 하고 매미 유충은 땅 깊은 곳에만 살기로 하여 서로 공격하는 일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그러나 둘의 의뢰 모두 원만하게 마친 오작과 설영은 바로 떠나지 못했다. 대봉각의 목진액은 받아서 품에 간직했지만, 액체금은 아니었다.
"근데 넌 어디 출신이야?"
오작과 설영은 액체금에 담긴 화첨창과 빙령도를 지켜보며 대화로 심심함을 달랬다.
"나도 정확히 모릅니다."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갈 건데?"
"일단 적호를 찾아야겠습니다."
아마 요수촌의 싸움은 희운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고, 요수촌에서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만한 존재는 적호가 가장 유력하다.
"내가 계속 같이 다녀도 괜찮아?"
"도움이 되는 전력이 왜 싫겠습니까. 근데 그래도 괜찮습니까?"
"괜찮아. 어차피 난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이거든."
오작은 설영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당신 정도 실력이면 어떤 가문에서도 반길 텐데요."
"난 막낸데 큰오빠보다 더 강해. 내 존재는 오빠가 왕이 되는 걸림돌일 뿐이야."
꼭 가장 강한 자가 왕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요괴와 마수는 물론, 이웃 나라도 위협이 되는 세상에서 백성은 강한 왕을 원한다.
"아버지가 그랬어. 무력으로 다투기보단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됐다고. 그런 면에선 큰오빠가 왕이 되는 게 맞는다고."
흑제가 있다면 맞는 말이다. 제의 조율로 대규모 전쟁이나 국가 간의 합병은 거의 없으니까. 강제명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혼인을 통해 두 국가가 합치는 방식이면 몰라도,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굴복시키는 일은 어렵게 됐다.
그러나 흑제의 부재와 공공의 통제력 부족으로 북부는 석 달이 멀다하게 큰 전쟁이 터지고 있다. 육지와 거리가 멀어 전화에 휩싸이지 않는 빙령도라고 해도 강한 왕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다른 나라로부터 대가를 받고 함께 전장에 나서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가족인데 걱정하지 않을까요?"
"빙령도에서 기련산까지 칠천 리는 돼. 그런 곳까지 보내버릴 땐 돌아오지 말라는 뜻이잖아. 나도 그런 걸 알 만한 나이라고."
설영은 나이 얘기를 하며 오작의 눈치를 살폈다. 오작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안도하면서도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럼 당분간 동행하는 거로 하죠. 그러나 위험한 상황에 억지로 버티지 마십시오. 당신을 위험에서 구해낼 자신이 없다면 저도 냉정하게 도망칠 겁니다."
오작의 말에 설영은 입술을 쭉 내밀었다.
"너 혹시 빙령도 출신이야?"
오작은 어색한 얼굴로 설영과 눈을 맞췄다.
"설마, 방금 그걸 농담이라고 한 겁니까?"
- 작가의말
매미와 개미의 미미동맹은 이렇게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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