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법요수촌無法妖獸村
인요마수人妖魔獸
사람과 요괴와 마수는
피이본동皮異本同
껍질만 다르고 속은 같다
"그간 폐만 끼친 것 같아 미안합니다."
오작이 드물게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저승사자가 호시탐탐하는 위급한 상황에도 의연하던 것과 크게 대조되었다.
"아닙니다. 소가주께서 대단한 무공을 얻었다니 기쁠 따름입니다."
우마왕의 말에 오작은 더욱 부끄러웠다.
"펼치지도 못하는 무공을 얻느라 귀한 집을 날렸는데 기쁠 게 어딨습니까."
겨울 동안 치우는 수십 마리 황소와 매일 줄다리기를 하며 역법전이를 수련했다. 그 과정에 힘이 예전의 수십 배로 강해졌다.
그사이 오작도 마냥 놀지 않고 멸천칠절공의 구결을 연구했다. 전체적인 흐름을 알려면 구결 순서도 중요하기에 우마왕의 표기에 따라 비석들의 위치를 배열했다.
마음에 안 드는 비석 위치를 계속 조정하다 보니 갑자기 세상과 격리되었다. 멸천칠절공의 구결이 적힌 비석들이 정확한 위치로 가며 칠절진柒絶陣이 발동된 것이었다.
타고난 총명과 침착으로 칠절진의 비밀을 푸는 과정에 어마어마한 위력의 무공을 깨달았다.
칠절진을 깨고 나오려면 그 무공을 펼쳐야 하는데, 어렵게 성공한 무공에 칠절진은 물론 우마왕의 유년 추억이 서린 외양간마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누구도 안 다친 것이 하늘의 보살핌이라고 여길 정도로 강한 무공이었다.
"가면과 옷은 마음에 드십니까?"
"아저씨, 옷이 진짜 좋아."
줄다리기로 우애를 다진 황소들과 일일이 작별한 치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일월동휘와 역법전이 두 각인형 법술 덕분에 치우는 어마어마한 강함을 손에 넣었다.
이젠 풍백과 맞닥뜨려도 도망가지 않고 대등하게 싸울 자신이 있었다.
"작은 도련님, 큰 힘은 더 큰 위기를 불러옵니다. 아직 저한테 팔씨름 한 번도 못 이겼다는 걸 잊지 마시고, 겸손한 마음을 지키기를 바랍니다."
치우는 입을 삐쭉 내밀고 고개를 홱 돌렸다. 아이 같은 모습에 오작과 우마왕도 소리 내어 웃었다.
"만남은 아무리 짧아도 의미 있고, 이별은 아무리 길어도 의미 없습니다.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자기 영역에서 이십 리나 나와 배웅한 우마왕이 몸을 돌렸다.
"다음엔 숙부와 함께 방문하겠습니다."
"아저씨, 우리 둔각 잘 보살펴."
둔각이 변한 알은 우마왕에게 맡기기로 했다. 외양간이 다 부서지는 환란에도 알은 멀쩡했다. 그러나 어떤 위험을 겪을지 모르는 둘이 지름 삼 척이 넘은 커다란 알을 메고 다니는 건 누가 생각해도 아니었다.
우마왕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을 흔들어 알았다고 표현했다. 오작과 치우도 몸을 돌려 경공을 펼쳤다.
그렇게 헤어지는 사람들은 빠르게 멀어졌다.
그리고 한 달 후.
요수촌에 웃는 소 얼굴 가면을 쓴 인간 둘이 나타났다. 검은 가죽으로 만들고 소매나 옷깃을 비롯한 테두리는 흰 천으로 마감한 이상한 형태의 장포를 입은 덩치 큰 두 인간은 촌놈처럼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컹, 컹컹."
오작과 치우는 갑자기 다가와 컹컹거리는 개 요괴를 아니꼬운 눈으로 쏘아봤다. 큰 강이 흐르고 개울도 곳곳에 널린 요수촌인데 이놈의 개 요괴는 비린내가 너무 심했다.
"요괴 말을 몰라?"
"인간이 요괴보다 훨씬 많잖아. 그럼 당연히 요괴가 인간 말을 배워야지."
치우의 대답에 개 요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야. 먼저 내 소개부터 하지. 난 구구방玖狗幇의 앞잡이야."
앞잡이는 치우와 오작의 반응으로 구구방의 명성을 들은 적 있는지 판단하려 했지만, 눈·코·입만 드러낸 가면 뒤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우리 구구방은 정보 수집과 인물 찾기부터 시작해 추격·암살·방화·복수 등 뭐든 다 해줘. 돈도 다른 놈들보다 덜 받고."
"못 찾으면?"
치우가 관심을 보이자 앞잡이는 신났다.
"그럼 당연히 선수금 돌려주지. 우리 구구방은 신용이 일품이거든."
신용信用. 믿을만하고 쓸모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요수촌까지 오는 내내 만나는 요괴들한테 소문을 들은 치우와 오작은 앞잡이의 말에 콧방귀도 안 나왔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을 찾으면 두 배로 줄게. 대신 선수금은 없다."
구구방 입장에선 밑져야 본전이다. 어차피 의뢰를 받는다고 털이 빠지는 것도 아니고 변비가 오는 것도 아니다.
"그래. 계약할 오쟁꾼한테 데려다주마."
오작과 치우는 거리를 벌리고 앞잡이 뒤를 따랐다. 큰 거리와 작은 골목을 여럿 지나니 꽤 으리으리한 집 한 채 나왔다.
"오쟁꾼, 나 앞잡이야."
오쟁꾼은 오쟁이를 나르는 사람을 말한다. 오작은 의뢰를 받아 상부에 전달하는 중계 역할로 추측했다.
문이 절로 열렸다. 오작과 치우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앞잡이는 오작과 치우가 초짜 아니면 엄청 강한 놈들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딱 봐도 개 요괴인 게 티 나는 앞잡이와 달리 오쟁꾼은 요괴 티가 덜 났다. 물론, 티가 덜 난 것일 뿐 누가 봐도 요괴다.
"그래. 무슨 의뢰인가?"
"사람 하나 찾는다. 선수금은 없고, 찾아내면 보수를 통상 두 배로 지급하지."
오쟁꾼은 둘을 한참 훑어보다가 앞잡이한테 눈짓했다. 앞잡이는 고개를 저어 자기도 둘의 정체를 모른다고 대답했다.
"누굴 찾는지 들어나 보자."
"흉신악살 자단."
오쟁꾼은 놀란 나머지 축 늘어진 귀를 펄럭댔다.
"왜 찾는지 물어도 될까?"
"굳이 물을 필요 있나? 중부와 남부 그리고 북부에 자단을 찾는 자가 한둘인가?"
복수 혹은 오행마와 홍영창이 욕심 나서 자단의 행방을 캐는 자가 드물지 않다.
"복수면 자단을 찾아야겠고, 보물 욕심이라면 얘기가 달라. 지금 홍영창과 오행마 모두 자단 곁을 떠났다는 소문이 있어."
뜻밖의 말에 오작은 이마를 크게 찌푸렸다. 다행히 가면 덕분에 상대에게 들키지 않았다.
'멍청한 놈이군. 이것도 나름 정본데 이리 쉽게 누설하다니.'
"자단의 정보가 우선이지만, 남은 둘의 정보도 싫지는 않아."
오작의 말에 오쟁꾼은 짧은 손가락을 접었다 펴면서 계산했다.
"자단은 황금 열 근에 해당하는 재물, 홍영창은 황금 여덟 근, 오행마는 황금 일곱 근."
"두 배로 친 건가?"
"아니. 이게 평소 가격이야. 넌 두 배로 내야겠지."
오는 길에 가끔 시비를 거는 요괴를 만나 혼내줬다. 그 과정에 정보도 얻고 부수적으로 재물도 조금 얻었다. 그러나 황금 열 근은 고사하고 다섯 근 어치의 재물도 안 된다.
"좋아. 당분간 여기 있을 테니 정보를 찾으면 불러."
"걱정하지 마. 너희 냄새는 이미 기억했으니까. 조금 멀리 가도 바로 찾을 거야."
오작은 중요한 정보를 술술 부는 앞잡이 탓에 말문이 막혔다.
'잠깐. 오는 길에 만난 요괴들도 입이 참 가벼웠어.'
"형, 뭘 고민해?"
오쟁꾼의 집에서 나온 후 앞잡이는 손님 받으러 간다며 바로 작별했다. 오작과 치우는 온갖 기괴한 형태의 건물이 넘치는 요수촌의 길을 걸으며 객잔을 찾았다.
"요괴들 입이 너무 가벼워서. 우연은 아닐 텐데."
"내가 강해져서 그런 거 아닐까?"
치우는 범접하기 힘든 위엄을 타고났다. 치우 본신의 위엄인지 귀왕 구묘의 위엄인지는 모르지만, 귀신이나 약한 요괴들이 치우를 어려워한다.
비록 아직 풍백을 이길 정도는 아니지만, 태산 주변을 제멋대로 들쑤시고 다니던 풍백과 정당하게 붙을 정도는 되었다. 덕분인지 도행이 얕은 요괴들은 치우 앞에서 쉽게 솔직해졌다.
'이게 화인가 복인가?'
법력이 부족하여 점괘술을 못 펼치는 오작은 치우의 운명이 뭔지 알아낼 방법이 전혀 없다. 그래서 치우가 갑자기 강해진 것이 운명이 작용한 건지 판단할 근거가 부족했다.
'하늘의 끝을 볼 수 없으면 하늘을 부숴라. 운명이 날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면 운명의 끈을 자르면 된다. 숙부 찾는 것, 하나만 생각하자.'
오작은 어지러워 오는 마음을 빠르게 정리했다. 자단을 찾는 게 급선무이기에 확실치도 않은 일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형, 그냥 아무나 잡고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우릴 이상한 곳으로 끌어가 잡아먹으려 할지도 몰라."
승천을 염두에 둔 요괴들은 악행을 자제한다. 그러나 혈편복의 예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제 발로 영지에 굴러들어온 먹잇감을 곱게 내보내는 요괴도 드물다. 영지에서 벌인 짓은 악행으로 치지 않기에 억눌렀던 본성을 마음껏 드러낼 기회다.
객잔이 어디냐고 물으면 요괴 소굴로 안내할 놈이 아마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오작은 굳이 발품을 팔면서라도 직접 객잔을 찾으려고 했다.
요수촌도 사람 사는 곳이니 '정직'하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술과 음식을 팔아 장사하는 객잔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가 물으면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까?"
치우의 말에 오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한테까지 거짓말할 수 있는 놈한테 걸리면 얼마나 귀찮을지 생각해 봐. 갑자기 강해져서 자꾸 싸우고 싶은 건 알겠는데, 이럴 때일수록 자제해야 정신 수양이 는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오작의 꾸중에 화가 난 치우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살짝 돌렸다. 소극적인 외면으로 불만을 표하는 치우의 새 방식이었다. 이제 생일이 지나면 열네 살 성인이 되는 치우기에 지금부터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단, 어른스럽게 행동하기보단 덜 아이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형, 저기 싸움 났어."
오작과 반대편을 바라보던 치우는 수십 명이 둥글게 모여서 싸움을 구경하는 걸 보고 흥분했다. 오작 역시 당분간 지내야 할 요수촌에 관해 아는 게 많아서 낭패 볼 일이 없다는 생각에 싸움터로 갔다.
"나보다 큰 인간은 처음 보는데?"
둥글게 에워싼 싸움터 가운데 인간과 요괴가 대치하고 있었다. 인간은 키가 치우랑 비슷한데 몸 두께와 어깨너비가 치우보다 확연하게 컸다.
담담한 표정과 조금 가라앉은 눈엔 싸움을 앞둔 긴장과 흥분 따위는 전혀 없었다.
"싸움을 앞두고 흥분도 긴장도 안 하잖아. 백전노장이 틀림없어. 잘 보고 배워."
오작의 말에 치우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풍백에게 한동안 시달린 후 치우 역시 강해지려는 욕심이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큰 덩치의 인간 맞은편엔 표범 요괴가 있었다. 인간처럼 직립했지만, 가슴부터 그 위는 표범 모습이었다.
다리가 짧고 허리가 길며 양팔도 땅에 닿을 정도로 길다. 덩치에 비해 가슴과 어깨가 과하게 넓고 머리는 주둥이가 조금 들어간 걸 빼면 딱 표범이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길이가 일 척(17cm) 정도 되는 날카로운 발톱이 있었다.
"누가 이길지 얼른 돈을 거시오. 승률 팔 할의 표두豹頭(표범 머리)는 하나 걸면 일 할 삼 푼을 더 주고, 새내기 인간은 하나 걸면 오 할을 더 준다네."
치우는 팔꿈치로 오작을 툭툭 쳤다. 오작은 잠깐 고민하다가 덩치 큰 인간에게 진주 세 알을 걸었다.
너무 큰 금액이 아닐까 걱정했던 게 무안하게, 다른 요괴나 인간들은 황금빛 조개껍데기나 순금을 걸었다. 오작이 건 금액은 소액에 속했다.
"자, 그럼 내기는 이만 마감하고 경기를 시작하겠소. 법보 사용은 불가하고 독도 사용할 수 없소. 그리고 싸움터 밖으로 쫓겨나면 진 거로 하오."
딱히 구령은 없었다. 내기를 주선하던 사내의 말이 끝나자 인간과 요괴가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형도 저럴 수 있어?"
덩치 큰 인간은 표범의 공격을 아주 근소한 차이로 피했다. 표범에게 돈을 건 자들은 애석한 마음에 탄식을 거듭하고, 인간에게 건 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연신 내쉬었다.
"사람마다 싸움에 임하는 자세와 방식이 다르다. 괜히 비교하지 말고 자기 길을 꿋꿋이 걸어. 넌 누구를 따라 해야 할 정도로 재능이 부족하지 않아."
오작의 드문 칭찬에 치우는 아까 삐졌던 걸 깨끗이 잊을 정도로 기뻤다.
표범은 공격만 하고 인간은 회피만 했다. 점점 싸움 양상이 지루해지자 구경꾼들이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다.
인간들만 사는 마을의 내기판과 달리 죽여버린다느니, 창자를 꺼내 토막 낸다느니, 눈깔을 뽑는다느니, 해골바가지를 요강으로 쓴다느니 등 욕설이 조금 과격했다.
"형, 왜 저럴까?"
"표범은 맹수 중에서 지구력이 약한 편이야. 오래 싸우지 못해. 그러나 요괴가 되면 얘기가 다르지."
"그래서?"
"그러나 요괴가 된다고 태생적인 약점이 사라지는 게 아니야. 다만 완화될 뿐이지. 처음부터 맞불을 놓으면 인간이 먼저 지칠 거야. 그래서 회피만 하며 표범의 힘과 체력을 소모하는 거다."
구경꾼들의 욕설과 야유에 흔들린 표범은 공격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인간은 귀가 먹은 사람처럼 여전히 회피만 일관했다.
"정신 수양이 중요한 이유야. 싸움에 임할 땐 승리만 생각해야 해. 여러 생각으로 머리와 마음이 어지러우면 반응이 느려지고, 그럼 이기더라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그렇게 일방적인 싸움은 일각보다 좀 더 지속했다. 구경꾼들조차 욕할 의욕을 잃을 즈음, 갑자기 상체를 앞으로 숙인 인간이 반격했다.
지친 나머지 반응이 느려진 표범은 묵직하게 휘둘러오는 주먹을 머리로 맞이했다. 날렵하게 움직이던 육중한 몸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 작가의말
강하고 악한 인간을 신격화한 게 요괴나 악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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