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논중죄烏鵲論衆罪
범오위자犯吾威者
내 위엄을 범한 자는
수원필주雖遠必誅
아무리 멀어도 반드시 벤다
구망과 자단이 움의 수십 단지나 되는 술을 다 마셔버린 탓에 주보는 새벽 일찍 일어나 꽁꽁 언 겨울의 땅에서 보드라운 흙을 찾아 술 단지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이미 술을 담갔던 단지를 재사용하면 술맛이 이상해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래서 일행이 떠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술을 잔뜩 마신 구망과 자단은 당연히 늦잠을 잤고, 오작과 치우는 즐거운 대화로 새벽에야 잠든 바람에 구망과 자단이 깨울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말린 과일로 끼니를 대충 때운 일행은 말 두 필을 나눠 타고 오장국이 있는 서남쪽으로 출발했다. 덩치가 큰 오행마는 당연히 구망과 자단 둘을 태우고도 끄떡없었고, 둔각 역시 오작과 치우를 등에 싣고 씩씩하게 잘 달렸다.
"근데 어찌하여 하루나 지체하셨습니까?"
자단이 예상대로 일찍 돌아왔다면 독구가 죽고 일행이 오장국까지 올 일이 없다.
"내가 족참도에서 소리를 질렀는데 사람이 안 오고 삼수녹이라는 요괴가 왔다.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잡아먹으려고 해서 반격했는데."
"손속이 과하셨군요."
이십 년 동안 자단이 벌인 천 번이 넘은 싸움을 목격한 오작이기에 쉽게 유추했다.
"태워 줄 요괴가 삼수녹밖에 없어서 늦은 거였군요. 숙부 성격에 좋은 말로 타이르진 않았을 테니, 아무래도 치료하는 데 걸린 시간이겠죠."
자단과 등지고 앉아 떠난 풍경을 의미심장하게 감상하던 구망이 낄낄 웃었다.
"직접 본 것처럼 정확하구나. 우리 치우도 글공부 열심히 해서 오작 너처럼 똑똑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할아버지. 치우 똑똑해."
오작의 어깨를 짚고 망아지 등에 서서 처음 보는 경치를 열심히 두리번거리던 치우가 발끈하여 반박했다.
"내가 원하는 똑똑함은 그런 똑똑함이 아니야."
치우가 뭐라고 항변하려는 순간, 오행마와 망아지가 동시에 멈췄다.
"알고 마중 나온 건가? 아니면 우연히 마주친 건가?"
혈변을 제거하여 통증이 사라진 연고로 둔각은 말썽을 전혀 부리지 않았다. 덕분에 채 한 시진도 안 되어 일행은 오장국의 국경을 넘었다.
궁전의 방향을 물어 곧장 달려가는 중인데, 독毒자를 새긴 깃발을 들고 오는 백 명 규모의 큰 무리와 마주쳤다.
면적도 작고 인구도 적은 오장국에서 깃발을 들고 다닐 수 있는 건 왕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오장국의 왕이냐? 썩 나와서 네 죄를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자단이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외쳤다. 오행마의 준수한 모습에 주눅이 들었던 오장국 무리는 자단의 쩌렁쩌렁한 목청에 몸을 움츠렸다.
"내가 왕이다. 넌 누군데 감히 내 나라에서 내 죄를 묻는 것이냐?"
키가 구 척은 넘고 일 장에 못 미치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나섰다. 가난한 나라여서 그런지 아니면 독물이 많아서 말이나 노새처럼 타고 다닐 가축을 못 기르는 건지, 왕이라는 작자가 걸어 다녔다.
"벽유궁 통천교주의 제자이자 북부 최강의 칭호를 받은 흉신악살 자단이 바로 나다."
구망은 어느새 모습을 감췄다. 오작은 구망이 어디로 숨었는지 찾으려고 애썼으나 치우의 기척도 못 느꼈던 재주로는 구망의 옷자락조차 밟을 수 없었다.
자단의 악명이 이곳도 빠뜨리지 않고 들렀는지, 왕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난 오장국의 왕 경석慶夕이라고 하오. 협명이 자자한 자단 협객께서 이 보잘것없는 왕국에 무슨 볼일이 계시는지?"
"너희는 어디로 가는 길이냐?"
왕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중죄다. 대답은커녕 되려 질문을 던진 자단의 행동은 백 번 찢어 죽여도 마땅한 게 상식이다.
그러나 상식도 통할 때나 상식이다.
"왕위 계승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위를 밝히러 가는 길이오."
"마침 잘 됐구나. 어제 어떤 극악무도한 놈이 내 말을 빼앗으려다가 내 창에 죽었다. 지금 그 죄를 물으려고 찾아가던 길이었는데 이렇게 만났구나."
"왕이 부덕하니 왕자가 이런 실수나 하지."
"이참에 왕 바꿉시다."
왕의 뒤를 따르던 신하들이 불만을 쏟아냈다.
'주보의 평가하고 한 치 차이도 없구나.'
오장국 사람은 천성이 그런지 환경 탓인지는 몰라도 아주 모순적인 성격을 갖췄다. 원한을 잊지 않고 속에 담아두다가 기회만 되면 꼭 복수하는 독심도 있지만, 죽음 앞에서 한없이 비겁하다.
우위를 점했을 때 상대를 철저하게 밟기에 웬만하면 오장국 사람과 척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십 년 전 원한으로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죽어갈 수 있으니까.
그러나 외인인 자단이 왕의 죄를 묻는 상황에 신하라는 작자들이 현왕現王(현재 왕)을 폐위廢位하고 신왕新王(새로운 왕)을 옹립擁立하여 화를 피할 생각부터 떠올렸다.
자단과 함께 이십 년 동안 대륙을 떠돌면서 많은 사건과 인물을 겪은 오작은 그저 평온한 마음으로 대책을 고민했다.
그러나 아직 순수한 치우는 신하들의 행동에 분개했다.
"형, 저런 불충한 놈들은 다 죽여야 해."
치우의 말에 좋은 생각이 떠오른 오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마찬가지로 오장국 신하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단은 호통을 치려다가 오작의 눈짓을 받고 뱉으려던 욕을 억지로 삼켰다.
"자단 협객의 위엄을 범한 자는 아무리 멀어도 반드시 찾아가 벤다. 그러나 상대에게 죄가 없다면 협객은 벌하지 않을 것이고, 죄가 가볍다면 벌도 가벼울 것이다."
내공을 듬뿍 실은 오작의 호통에 약삭빠르게 나섰던 신하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숙부. 소질이 각자의 죄를 판단해 보겠습니다."
자단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허락을 얻은 오작은 위엄 가득한 눈으로 오장국의 군신君臣을 바라봤다.
오작의 눈길을 받은 왕과 그 신하들은 발가벗은 채로 차가운 겨울 바다에 던져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선, 독구의 죄부터 말하겠습니다."
"탐욕貪慾의 죄가 있습니다. 주인이 있는 보물을 탐냈습니다."
"무지無知의 죄가 있습니다. 보물을 품은 자가 범부일 수 없는데, 왕자라는 신분을 내세워 감당이 어려운 보물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도주逃走의 죄가 있습니다. 잘못을 알고도 반성하지 않았고 죄를 인정하는 대신 도주를 선택했습니다. 참회하고 벌을 청했다면 목숨을 부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하면 되었다. 셋 중 어느 하나라도 죽어 마땅할 죄목이구나."
"왕의 죄를 논하겠습니다."
왕이 억지로 허리를 꼿꼿이 펴며 오작을 쏘아봤다.
"불교不敎의 죄입니다. 타인의 것을 함부로 탐하는 건 죽을지도 모르는 죄라는 걸 자식에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무능無能의 죄가 있습니다. 도망친 자들에게서 전후 사정을 들었다면 잘잘못을 판단하여 자중하며 참회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신하를 거느리고 복수를 다짐하는 게 아니라 말이죠."
"어찌 처리해야 하느냐?"
"첫 죄는 자식의 죽음으로 갚았고 두 번째 죄는 신하들의 배신으로 갚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냐?"
"우선 신하들의 죄를 묻고 대답해도 되겠습니까?"
"그리하거라."
치우는 자단과 오작의 대화를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지켜봤다. 주고받는 호흡이 기막히기도 하지만, 내용이 외워두고 싶을 정도로 멋있었다.
"불충不忠의 죄가 있습니다. 무릇 군주를 섬기는 신하라면 군주를 부父(아버지)나 사師(스승)처럼 모셔야 하며 자신의 안위보다 군주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위기 상황이라고 군주를 초개처럼 버리는 건 부덕한 일입니다."
"무능無能의 죄가 있습니다. 왕이 잘못된 판단을 하면 따르는 게 아니라 극력 설득해야 합니다. 사건의 연유를 몰랐다면 그저 무능한 거고, 알면서도 왕을 따라나섰다면 무치無恥의 죄도 물어야 합니다."
"저들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느냐?"
오작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금의 기운을 실어 친 맑은 손뼉 소리는 긴 여운을 남겼다.
"여긴 오장국의 땅입니다. 죄를 물으려던 왕과는 이미 얘기가 끝났기에 우린 이제 그저 손님입니다. 손님 된 자로서 행사를 함에 있어 주인의 허락을 구해야 하지요."
오작의 말을 이해 못 한 왕과 신하들은 눈알만 팽글팽글 굴렸다.
"오장국의 왕께 묻습니다. 천하에 협명이 자자한 유협遊俠 자단이 오장국을 지나다 신하들의 불충과 무능과 무치의 한심한 작태를 목격했습니다. 불의를 보고 못 참는 자단이 왕의 허락을 구해 신하들에게 불충과 무능의 죄를 물으려고 하는데,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오."
고함을 지른 왕은 신하들이 반응할 겨를도 없이 앞으로 달렸다. 오작과 왕의 대화를 뒤늦게 이해한 신하들이 변명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느새 오행마를 몰아 한가운데로 들이닥친 자단이 창을 휘둘러 신하들을 주살했다. 한 번 찌르면 한둘이 쓰러졌고 휘두르기라도 하면 서넛씩 피를 뿌렸다.
왕은 심장을 부여잡고 무력한 눈으로, 치우는 콧김을 씩씩거리며 흥분한 눈으로 자단의 학살을 지켜봤다.
대부분 신하가 사막에서 만났던 마적보다도 약해서 백이 넘은 숫자에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살육이 끝난 현장에선 심장의 피를 탐하는 홍영창만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협객의 도움에 감사드리오."
왕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단과 오작에게 감사를 표했다. 지금 광경을 보고 억지로라도 꼿꼿이 서 있는 걸 보면 마냥 심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거래가 하나 남았습니다."
오작의 평온한 말투에 왕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일국의 주인인 자신도 방금 겪은 일에 치가 떨리는데 저 소년은 매일 있는 일인 듯 태연한 기색이다.
"독구가 입었던 갑주. 투구랑 한 쌍이라죠? 독구가 죽은 다음 사라졌더군요. 소유권을 넘기면 오장국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을 해드리겠습니다."
동주철갑銅胄鐵鉀은 오장국의 보물이다. 동주는 머리에 쓰는 투구이고 철갑은 몸에 두르는 갑옷인데 주종 관계가 있다. 철갑이 동주에 귀속한다.
독구가 죽자 주인을 잃은 철갑은 동주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덕분에 독구의 부하들이 돌아가기도 전에 독구의 죽음은 왕에게 알려졌고, 궁전에서 만날 거라던 예측과 달리 국경을 넘어 얼마 안 되는 지점에서 맞닥뜨린 것이다.
"뭘 해주겠다는지 듣고 싶소."
죽음 앞에서 비굴한 성격이 발휘되었는지 왕은 오작한테도 말을 함부로 낮추지 못했다.
"독을 없애 드리죠. 긴 세월 오장국 곳곳에 쌓여 없애도 없애도 사라지지 않는 독을 철저하게 제거하겠습니다."
왕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오장국의 독은 못에도 쌓이고 나무 위에도 쌓였다. 심지어 뭉쳐서 둥둥 떠다니기도 한다. 그래서 물도 식량도 넉넉한데 인구가 늘지 않는다. 열 낳으면 최소 일곱이 죽고, 남은 셋도 결혼할 나이까지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다.
독만 해결하면 인구를 늘려 강국이 될 수 있다. 이십 년 시간만 주면 인구를 열 배 이상으로 불릴 자신이 있다.
이런 대단한 일을 해주는 대가가 고작 동주철갑이라니.
철갑이 홍영창을 막은 사실을 모르는 왕이기에 오작의 제안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기 이 아이는 자단 협객께서 새로 들인 양자입니다. 입양의 선물로 동주철갑을 주려는 것이니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의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요. 너무 뜻밖의 제안이어서 놀랐던 것뿐이오. 절대 협객의 능력이나 의도를 의심한 적이 없소."
"그럼 동의한 거로 알겠습니다. 동주철갑의 소유권을 넘기시지요."
왕은 머리에 쓴 동주를 벗어서 치우 머리에 씌워주고 짧게 주문을 외웠다. 동주가 치우 머리 크기에 맞춰 작아진 후, 곧 철갑이 저절로 몸에 입혀졌다.
'목숨값이라고 생각하자.'
왕은 애초에 자단이 오장국의 독을 다 없애준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다른 국가보다는 작은 면적이지만, 독은 땅 밑에도 있고 허공에도 있다.
게다가 자단은 무공과 용맹으로 유명하지 법술로는 이름을 떨친 적 없다.
"이거 든든해?"
투구와 갑옷을 툭툭 두드리던 치우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둔각아, 내 가슴을 힘껏 차 봐."
미처 오작이 말릴 새도 없이 둔각이 뒷다리로 힘껏 걷어찼다. 둔각의 뒷다리에 맞은 치우가 약 삼 장 정도 허공을 날고 바닥에 떨어졌다.
"안 아파. 하나도 안 아파."
법술 재능이 평범한 독구가 입었을 때도 오행마의 발길질을 막아내고 홍영창의 찌르기도 막았다.
고작 네 살인데도 법술을 자유롭게 펼치는 치우가 입으니 법보의 진짜 위력이 드러났다.
물론, 여전히 동주철갑의 진정한 위력을 모르는 왕은 목숨 구하는 대가로는 헐값이라며 속으로 몰래 기뻐했다.
"대가를 받았으니 약속을 지켜야겠군."
어느새 자단의 손으로 돌아온 홍영창이 주인의 명령에 따라 하늘로 떠올랐다. 꽤 높은 곳까지 간 홍영창이 창날을 중심으로 회전을 시작했다.
은색 창대가 회전하며 달을 방불케 하는 원을 그렸다. 그리고 중심은 붉은 수술과 붉은 창날이 조그마한 원을 그렸다.
달을 연상케 하는 쪽이 더 밝아서 안 어울리긴 하지만, 마치 붉은 해를 품은 은색 달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홍, 홍, 홍.
회전하는 홍영창을 중심으로 바람이 일었다.
- 작가의말
홍영창이 랩을 한다 홍홍홍.
오작논중죄는 오작이 여럿의 죄를 논한다는 뜻입니다. 드디어 소제목 해석이 필요한 회차가 되었군요. 중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관중, 대중 등 단어에 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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