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제현빈씨暗帝玄牝氏
구천현녀玖天玄女
현빈씨는 구천현녀이며
백원지주白猿之主
흰 원숭이를 기른다
오작과 치우는 둔각을 타고 염환국 수도로 달렸다. 남부는 나라가 채 서른 개도 안 되어 면적이 하나같이 컸다. 게다가 염환국은 강제명 어머니의 나라와 합친 바람에 다른 국가보다 두 배 이상 크기를 자랑했다.
그래도 천리마를 우습게 여기는 둔각 덕분에 반나절도 안 걸렸다.
"시간이 없다. 서두르자."
오작과 치우는 염환국 수도에 들어서고도 말을 계속 달렸다. 다행히 둔각의 영민함에 사람을 다치게 하진 않았으나 작지 않은 소란이 불가피하게 일었다.
"머, 멈춰!"
염환국 왕궁 문지기들은 목을 잔뜩 움츠리고 눈을 찌푸린 채 다리를 떨었다. 다행히 둔각이 급정지하여 문지기들이 상상하던 불행한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너희 왕 만나러 왔다. 대별산을 함께 건넌 일행이라고 하면 누군지 알 거다."
황금색 비늘 옷을 입은 치우는 위엄이 가득했고 자색 장포를 입은 오작은 고귀함이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누가 봐도 멋진 둔각을 타고 있으니 문지기들 고개가 절로 숙어졌다.
"바로 안에 기별을 넣겠습니다."
오작과 치우가 말에서 내리자 둔각이 하나로 합쳤다. 문지기들은 놀란 나머지 손가락으로 둔각을 가리키며 턱만 덜덜 떨었다.
"요괴 아니고 정령수다. 인간을 안 해치니 겁먹지 마."
치우의 말에 문지기들 몸이 안정되었다. 치우의 믿고 따르고 싶은 위엄에 감화하여 두려움을 이겨낸 것이었다.
"들어오시랍니다."
무려 반 각이나 지나서야 안으로 기별하러 들어갔던 자가 돌아왔다. 염환국의 왕궁은 집은 열 채 정도밖에 없는데 면적은 엄청나게 컸다. 화원이 열 개가 넘고 심지어 숲도 하나 있었다.
마음이 급한 오작과 치우는 앞만 똑바로 보며 빠르게 걸었다. 안내하는 자는 둘의 압박을 못 이겨 달음박질을 쳐야 했다.
그때, 하얀 형체가 갑자기 나타나 오작을 향해 창을 찔렀다. 오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소매에서 창을 꺼내 상대 무기를 막았다.
생각보다 적은 반동에 놀라며 상대를 관찰하니 덩치가 오작만큼 큰 흰 원숭이였다. 창으로 여겼던 무기는 놀랍게도 그냥 삐뚤삐뚤한 나무 막대기였다.
그러나 멸천창과 부딪치고도 멀쩡한 걸 보면 절대 그냥 막대기는 아니었다.
"끼끼."
원숭이는 막대기를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첫 공격이 찌르기여서 창으로 오해했지만, 돌이켜보면 첫 공격도 창의 찌르기라기보단 몽둥이의 찍기에 더 가까웠다.
"뭐래?"
"자길 이겨야 들여보낸다는데."
오작은 원숭이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향해 관일회선창을 펼쳤다. 액체금을 흡수하여 엄청 단단하고 강한 멸천창과 부딪치고도 멀쩡한 몽둥이를 부수면 원숭이가 알아서 패배를 인정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멸천회선창에 맞은 막대기는 껍질 조금 벗겨졌을 뿐 멀쩡했다. 그마저도 시간이 조금 흐르자 처음 봤을 때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급해 하지 말자.'
오작은 원숭이가 쉬운 상대가 아님을 인정하고 조바심을 내려놨다. 빨리 끝내려고 서두르다간 오히려 시간을 더 지체할 판이다.
침착을 되찾은 오작은 수비와 공격을 적절히 조합하며 상대의 전투 방식을 관찰했다.
'똑똑한 놈이다. 내가 자신을 못 해치는 걸 알고 요해 방비를 아예 안 하고 있다.'
반각의 얼굴에 피를 냈던 오작이다. 원숭이가 이룬 경지를 봐선 오작의 강함을 모르지 않을 테니, 자신을 안 해칠 거라는 생각에 잔머리 굴리는 게 틀림없다.
'공심위상攻心爲上.'
오작은 원숭이의 마음을 흔들기로 하며 관일홍 초식을 펼쳤다. 원숭이는 방비를 소홀히 하던 목을 향해 창이 찔러오자 황급히 막대기를 회수하여 수비했다.
그때, 관일홍 초식의 궤도가 변했다. 예전처럼 위력과 속도를 희생하여 궤적을 살짝 바꿔 허점을 찌르는 방식이 아니라 원래 초식을 멈추고 새 초식을 펼친 것 같은 격렬한 변화였다.
목을 노리던 창이 심장을 찔렀다. 놀란 원숭이가 다급한 소리를 내며 막대기를 내리는 중, 창의 궤적이 또 변했다. 심장이 아니면 안 찌를 것 같던 멸천창이 순식간에 다시 목을 향했다.
"내가 이겼지?"
원숭이를 쏘아보며 오작은 초반의 실책을 반성했다.
'가장 강한 공격이 아니라 상대한테 가장 잘 먹히는 공격을 펼쳐야 했다. 난 아직 경지도 법력도 경험도 부족하여 자단 숙부처럼 상대 불문하고 자기 무공을 펼칠 주제가 못 된다.'
자단은 상대가 누구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복잡하게 상대를 분석하여 허점을 찾고 하지 않는다. 그저 싸우다 보면 절로 그런 게 느껴지고 머리로 깨우치기 전에 몸이 알아서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자란 오작은 자단을 닮으려는 마음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싹 텄다. 그러나 시간을 다퉈야 하는 상황에서 꽤 난적인 원숭이를 만나고서야 자신과 자단이 다름을 확실히 인지했고, 자단과 다른 길을 걸어야 함을 제대로 깨우쳤다.
이는 오작에게 마지막 남은 자단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겨내는 일이고, 오작을 어느 정도 속박하던 굴레가 사라지며 창법이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는 계기였다.
물론, 오작은 자신이 방금 깨우친 것이 이토록 중요한 것일 줄은 몰랐다. 원래부터 머리로 알고 있던 거여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끼끼."
"후에 시간 나면 한 번 더 싸워보고 싶다는데. 근데 이놈은 왜 나랑 싸우고 싶다고 하지 않을까?"
"끼."
"내가 무식해 보인다고?"
"시간이 없다."
오작은 원숭이를 상대로 버럭대는 치우를 타박했다. 예전은 철이 없고 장난이 심해도 화는 잘 내지 않는 치우였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지나쳐도 괜찮은 일에도 화를 쉽게 냈다. 오작이나 둔각을 비롯한 친근한 존재들에 한해서는 매우 친절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대한테는 쉽게 각을 세웠다.
초면에 지금은 칠봉으로 불리는 둘째 왕자 면전에 대놓고 마음에 안 든다고 했던 일. 왕궁 문지기가 불손하게 나오자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던 일 등.
"내가 왜 이러지?"
"정신 수양에 힘써. 넌 천품이 뛰어나니 자기 성질도 잘 다스릴 수 있을 거야."
예전엔 치우가 교만할까 봐 칭찬을 아끼고 핀잔을 많이 줬다. 그러나 치우의 반항기가 강해진 지금, 오작은 칭찬과 격려로 치우를 북돋웠다.
"헤헤."
금세 기분이 좋아진 치우는 손을 내밀어 원숭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원숭이 역시 막말을 했던 게 미안했는지 고분고분 치우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급한 사정이 있다. 빨리 강제명한테 안내해."
원숭이는 삐뚤삐뚤한 막대기를 어깨에 얹은 후 우쭐거리며 앞장섰다. 어느새 길을 안내하던 문지기 대장은 돌아갔고 치우와 오작만 뒤를 따랐다.
"어서 오너라."
원숭이가 안내한 곳엔 강제명 대신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다. 외모로 나이를 짐작기 어려운 여자는 김이 몰몰 나는 차를 음미하는 중이었다.
"구천현녀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오작이라고 하고 여긴 구려국 왕세손 치우입니다. 염환국의 왕과는 일전에 동행한 적 있습니다."
"그래. 내가 제명이 그 아이한테 얘기 들었다. 능히 천하를 품을 영웅과 책사라고 하더구나."
강제명은 소소한테서 둘의 얘기를 듣고 크게 탄복했다. 결단이 빨라도 허투루 내리는 법은 없는 신중한 성격에도 오작과 치우를 높이 평가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남부에서 암제로 불리며 적제 위에 군림하는 구천현녀도 오작과 치우를 기억했다.
"근데 왕은 왕궁을 비웠습니까?"
"그래. 지금 염환국에 없구나.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
"금계산에 금계동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혹시 무슨 사연인지 알아보려고 온 것입니다."
"관일홍 초식을 쓰더구나. 위력과 속도는 부족하지만, 초식 이해가 뛰어나던데 자단과 무슨 관계냐?"
오작은 감에 따라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저는 조카이고 여기 치우는 양자입니다."
구천현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가운 얼굴로 외쳤다.
"얘기 들은 적 있다. 듬직한 아들과 현명한 조카가 있다고 하더니 바로 너희였구나. 어서 와서 여기 앉아라."
"현재 절교의 무리가 숙부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켰습니다. 계책으로 잠시 따돌리긴 했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금계동에 관해 아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는 언제든 열 배로 갚겠습니다."
"그래도 사정은 알고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느냐. 급하다고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가끔은 돌아가는 법도 알아야 한다."
오작은 자신을 또 한 번 질책했다. 원숭이와 겨룰 때 상대를 살피지 않고 서두르다가 뻔한 허점도 몰랐는데, 이번에도 또 마음이 앞섰다.
"훌륭한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오작과 치우는 구천현녀의 왼손 편에 앉았다.
"십일 년 전이었다. 갑자기 자단이 찾아와서 내 아들을 보호하겠다고 하더구나. 거짓을 입에 담는 사람이 아니어서 흔쾌히 승낙했다."
청제가 말한 목숨 하나는 취하는 게 아니라 보호하는 거였다.
"내 아들의 처사에 불만이 큰 자들이 힘을 합쳤다. 적표노와 공공 그리고 청제까지 셋이었지. 거기에 남부 최대 문파인 남화교南華敎까지 왕궁을 습격했다."
'청제가 변심했구나.'
청제 영위왕은 동부를 통일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러나 세력이 약한 청제가 뭔가 해내려면 난세가 되어야 한다.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리는 신농은 청제한테 눈엣가시였다. 적표노는 인황이 된 신농과 암제로 불리는 구천현녀 때문에 기도 못 펴고 살았기에 당연히 죽이고 싶어 했고, 공공 역시 자신을 흑제 자리에 못 오르게 하는 신농에게 앙심을 품었다.
남화교 교주는 강제명 어머니와 먼 친척이다. 방계기는 하지만, 신농과 강제명 어머니가 혼인하면 나라를 물려받을 사람이었다.
강제명 어머니가 나라를 통째로 염환국에 바치자 앙심을 품었고, 적표노의 충동질을 못 이겨 가담했다.
이때 공교롭게도 청제가 오장국을 얻었다. 오장국을 키울 시간이 필요했던 청제는 입장을 바꿔 자단을 보내 신농을 보호케 했다. 뇌공한테도 편익조를 보내 사정을 설명하고 대충 시늉만 하라고 지시했다.
오작은 청제의 내밀한 사정을 아주 쉽게 추측했다.
'난 청룡주를 얻어냈다고 우쭐댔지. 청제 역시 자신이 얻을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낸 거니 내가 청제 상대로 머리싸움을 이긴 건 아니구나.'
곡식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오작은 자단의 등에 업혀 다니면서 눈으로 보고 들었던 걸 최근 직접 체험하며 많이 성숙했다.
덕분에 좀 더 객관적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자신의 실제 위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었다.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축융도 도왔고 공공이 직접 못 온 바람에 전력도 비등했다. 그러나 결국 내 아들은 놈들의 흉계에 목숨을 잃었고 자단 협객은 중태에 빠졌다. 중태에 빠진 자단 협객을 살리려고 내가 직접 금계동에 데려갔고, 금계동을 닫아달라고 부탁했다."
"다시 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손자 제명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제명은 염환국에 없다."
"언제 돌아옵니까?"
"가출이다."
오작과 치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마주쳤다. 한 나라의 왕이, 그것도 꽤 성실해 보이던 강제명이 가출이라니.
"혼인을 반대했다고 가출했다. 다행히 축융 어르신이 찾아온다고 했는데, 며칠 전 날아온 편익조의 내용을 보면 신통치 않구나. 북부에서 연일 비가 내려 동굴에 갇혔다고 한다."
"축융 어르신이 그냥 비가 두려워서 갇힌다고요?"
"그러니까 그냥 비가 아닌 거지. 당연히 누군가가 제명을 못 찾게 방해하는 거 아니겠니? 아무리 북부라지만, 축융 어르신을 두렵게 하는 걸 보면 공공이 분명하다."
"왕 빼고 다른 대책이 없습니까?"
"없다. 순수한 삼매화參昧火를 얻은 건 남부에서 제명이 유일하다. 혹시 삼매화를 얻은 자를 알면 불러서 금계동 문을 열어도 된다."
"단서를 주십시오. 저희가 왕을 찾아오겠습니다."
"축융 어르신은 춘우산春雨山의 동굴에 갇혔다고 한다. 어르신을 찾으면 뭔가 단서가 있을 거다."
오작과 치우는 구천현녀한테 작별 인사를 하고 바로 왕궁을 떠났다.
"형, 어쩔 생각이야?"
"서두르면 안 돼. 어차피 이미 늦었어."
조공명 정도 되는 자가 함정에 빠진다고 목숨을 잃을 것 같지 않았다. 천교와 절교가 서로 이를 갈아도 표면상으론 두 교주가 사형제다.
천일도처럼 궁벽한 곳이면 몰라도, 천하의 이목이 쏠릴지도 모르는 진일곡에서 끝장을 보진 않을 것이다.
북부에 가서 강제명을 찾아냈을 땐 조공명이 금계산으로 복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 어쩌려고?"
"일단 남화교로 간다. 그곳에서 필요한 걸 얻고 조공명이 금계산에 돌아와 어쩌는지 지켜본 다음 북부로 간다."
오작과 치우는 둔각을 끌고 천천히 걸어서 염환국의 수도 강척姜脊을 떠났다. 둘의 겉모습과 둔각의 풍채로 이목을 끌긴 했지만, 그래도 말을 달리는 것보단 덜 주목받았다.
"남화교는 왜?"
밖으로 나온 둘은 둔각을 타고 서남쪽으로 질주했다.
"남화교 교주가 강제명 어머니와 먼 친척이야."
"근데?"
"둘은 혈연으로 이어졌어. 교주 피로 강제명을 쉽게 찾을 수 있어."
- 작가의말
우선 강제명의 모계 DNA를 확보해야 해. 그리고 경찰서에 등록된 DNA와 대조해서 강제명의 현재 위치 그리고 생활 반경을 알아내는 거지. 이게 과학수사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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