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복중동怪山腹中洞
승풍투도乘風偸盜
바람을 타고 도둑질하고
황연장안黃煙障眼
누런 연기로 눈을 가린다
"봤지. 강이 좁으니까 물살이 더 세지는 거."
치우는 오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살이 세지자 귀린어는 뗏목의 속도를 늦추려고 반대쪽으로 헤엄쳤다.
세찬 물살에 뗏목을 한 번 부숴 먹은 경험이 있기에 치우는 짜릿한 표류보다는 안정적인 이동을 원했다.
"이 강이 흘러서 동해까지 가."
오작의 말에 치우는 먼 동쪽을 바라봤다. 이 강물에 몸을 맡기면 할아버지가 있는 동해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구망의 몸은 청룡이 차지했다. 영리귀가 분명히 몸의 주인이 청룡이라고 하지 않았으면 치우도 헛된 환상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강신 법술은 일단 입문부터 어렵다. 타고나지 않으면 배우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입문했다고 쳐도 수련이 너무 위험하다. 자칫 강림한 신에게 몸을 빼앗기면 그대로 죽음이니까.
구망이 바로 청룡에게 몸을 빼앗긴 경우다. 그게 아니면 영리귀가 청룡을 주인이 아닌 손님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몸은 내주되 육체의 소유권은 철저히 지켜야 하는 건데, 구망은 아무래도 오작과 치우의 안전을 고려해 소유권까지 내주며 강신을 성공시킨 듯하다.
'꼭 청룡을 쫓아내는 방법을 찾아내 할아버지를 다시 만날 거야. 작별 인사를 안 한 건 잘한 일이야.'
"여기야. 여기서 내리면 내가 길을 알아."
한발이 호들갑을 떨었다. 백 살이 넘었다는 선입견만 버리면 외모 성격 모두 치우 또래의 소녀나 다름없었다.
치우는 귀린어에게 왼쪽 강변으로 뗏목을 붙이라고 지시했다. 잡귀에 속하는 귀린어는 치우가 내린 지시를 한 치 어긋남도 없이 이행했다.
뗏목에서 내린 치우는 맛없는 물고기 몇 개를 귀린어에게 보상으로 던져줬다. 보상을 받은 귀린어는 꼬리를 열심히 흔들며 물고기의 생기를 섭취했다.
"우리 배에서 내리기 잘한 거 같아."
강제명과 희운을 태운 배는 대별산까지만 갔다. 그다음으론 강이 좁아 큰 배가 다니기 불편하다.
그러나 귀린어가 끄는 뗏목은 대별산을 지나고도 며칠 더 달렸다.
"그럼. 대별산 요괴는 성질이 더럽다고 소문이 났어."
치우가 한발의 말을 받았다. 뗏목을 타고 이동하는 사이 치우는 한발과 꽤 친해졌다.
"길 안내 부탁드립니다."
오작의 말에 한발은 입을 삐죽이며 앞장섰다. 부쩍 친해진 치우와 달리 오작은 시종 한발에게 거리를 뒀다.
치우는 귀린어를 돌려보낸 후 그간 태워 준 뗏목을 손으로 쓸며 작별을 나눴다. 그러고 나서야 한발과 오작의 뒤를 따라 강변을 떠났다.
"홍영창을 가진 요괴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름이나 이런 건 몰라. 쥐 비슷하게 생긴 놈인데 덩치가 토끼만 해."
"서서 걷습니까? 아니면 네발로 걷습니까?"
"서서 걸어. 그건 왜?"
"서서 걷는 놈은 네발로 걷는 놈보다 머리를 잘 쓰거든요."
한발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작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을 인간이라고 주장하지만, 한발이 보기엔 요괴 같은 두 소년. 그중에서도 오작은 천년 묵은 떠돌이 요괴 같았다.
"조금 이상한 게 꼬리가 없어. 쥐든 그 친척이든 꼬리가 있어야 맞는 건데 말이야."
"자기 꼬리를 뜯어 법보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군요. 자기 신체 일부로 법보를 만들면 반항도 배신도 안 하거든요."
"그럼 그놈이 맨날 짚고 다니는 지팡이가 꼬리인 걸까? 몸이 엄청 날렵한데도 지팡이를 늘 짚고 있어서 이상하다고 느꼈어."
"어떤 기운을 수련했는지와 어떤 법보가 있는지는 모릅니까?"
"그런 거 어떻게 알아.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거고."
"형은 그냥 보면 알아. 법보까지는 아니지만."
치우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요괴가 자기 자랑하는 거 들은 적 있는데, 법보가 수십 개 있고 대부분 훔친 거랬어.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봉래도에 가서 통천교주의 청평검도 훔칠 수 있다고 자랑했고."
'그럼 놈을 생포해서 홍영창을 어디서 얻었는지 알아내면 숙부도 찾을 수 있다.'
중요한 정보는 없었지만, 자단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커졌다. 홍영창과 대화할 수 있다면 더 확실하겠지만, 홍영창은 자신의 주인인 자단과 의지로 대화하는 것만 가능하다.
마병이어서 위력은 웬만한 선천영보 부럽지 않지만, 이럴 땐 등급이 낮은 게 너무 아쉬웠다.
살짝 마음이 들뜬 오작은 한발이 홍영창과 대화한 적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곧 헤어질 사람이라고 늘 거리를 둔 탓이었다.
'등급이 더 높았다면 숙부랑 계약하지도 않았겠지만.'
도행이 형편없는 자단이 홍영창과 계약한 건 정말 기적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다. 그 어려운 걸 해내서 원래부터 밉상으로 찍힌 자단이 사형들에게 더 밉보인 거고.
"그놈이 법보마다 방 하나씩 만들어 모신다고요?"
빠르게 길을 재촉하면서 한발은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오작은 요괴가 법보마다 방 하나씩 만들어서 보관한다는 말에 의문을 품었다.
"의외로 법력이 별로인 놈일 수 있겠네요. 법력이 넉넉하다면야 법보를 길들여 몸에 지니고 다녀야죠."
"아니야. 법력은 나보다 많아. 내 생각엔 나처럼 도행이 낮은 게 아닐까 해. 난 법력만 모으고 뺏기고를 반복해서 도행이 형편없거든. 그래서 간단한 법술도 못 익히고 지금까지 고생했어."
요괴 주제에 법술도 모르고 힘도 약해서 근간에 꽤 고생한 한발이다. 그래서 적지천리의 법술을 얻은 후 심경 변화가 엄청나게 컸던 거고.
"근데 그놈 영지를 어떻게 들어가는지 몰라. 들어갈 땐 팔리는 신세라 눈을 가리고 들어갔고, 나올 땐 갑자기 풍경이 변하더니 밖이었어."
"괜찮습니다. 얘가 그런 건 또 기가 막히게 찾습니다."
오작의 말에 치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타고난 직감으로 찾아도 되고, 정 어려우면 귀종술로 잡귀 수백 마리를 불러내면 된다. 요괴의 영지는 잡귀 따위가 얼씬할 수 없는데, 그걸 이용하여 영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일행은 목적지로 빠르게 움직였다.
"이 산이야."
산 중턱까지는 풀이 무성하다. 그러나 그 위로는 바위가 밖으로 드러난 바위산이다. 중턱까지 풀이 빼곡한 데 비해 나무가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를 없앤 걸 보니 천적이 있는 요괴가 틀림없어. 쥐를 닮았다고 했는데, 다람쥐는 아닐 거야. 아마 땅에 굴을 파고 사는 놈일 테지. 어쩌면 놈의 영지가 굴속에 있을 가능성이 커."
한발은 그저 쓱 둘러보고 뭔가 알아내는 오작이 너무 부러웠다. 그래선지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치우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도둑질을 잘한다는 걸 보면 쥐나 족제비일 가능성이 크겠지? 법보 수십 개를 훔치고도 안 들킨 걸 보면 족제비가 유력해. 족제비는 방귀로 흔적을 지울 수 있잖아."
치우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한발을 배신했다.
"그러고 보니 그놈이 족제비를 많이 닮긴 했어. 팔다리가 짧은 것도 그렇고. 지팡이가 만약 꼬리가 맞는다면, 쥐 꼬리보단 족제비 꼬리를 더 닮았어."
"확신은 금물. 어느 정도 염두에만 두자. 그리고 당신은 밖에서 기다리십시오."
"아니 왜?"
한발은 오작의 결정에 펄쩍 뛰었다.
"당신은 수호계 법보도 없고 방어 법술도 모릅니다. 안이 미로이고 우리가 흩어진다면 당신은 목숨이 위험합니다."
"밖에 혼자 있는 건 안전하고?"
한발의 예리한 지적에 오작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때,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와, 우리 진짜 인연이네. 다시 만나서 반갑다. 다들 그간 건강했지?"
갑자기 나타난 소소에 치우와 오작은 이마를 찌푸렸고 한발은 반갑게 다가갔다.
"여길 어떻게 왔는지 확실히 해명하지 않으면 좀 재미없을 겁니다."
오작은 평소랑 다름없는 말투로 소소에게 경고했다.
"음. 나도 한 고집 하지만, 널 이길 자신은 없었어. 그래서 곱게 물러났지. 그리고 호객꾼을 통해 너희가 대별산까지 간다는 말을 듣고 미리 달려서 대별산에서 기다렸어. 그런데 배에서 너희 말고 잘생긴 소년 둘이 내리는 거야."
소소는 일부러 일행과 만나려 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난 처음엔 너희가 가면을 벗고 변장한 건 줄 알았어. 호객꾼이 대별산까지 가는 건 셋밖에 없다고 했거든. 여기 한발은 무슨 사정이 있어 중간에 버리고 왔으려니 하며 멀리 따랐지. 그러다 여까지 와서 종적을 잃었고. 너흰 줄 알고 나오기만 기다리는데 너희가 온 거야."
오작은 귀령성모를 떠올리고 풍백을 떠올렸다. 만 년을 살아도 지혜가 부족할 수 있고, 청제의 지낭이라는 작자도 못난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재밌다는 이유로 구왕을 속이고 한발을 구출하는 일에 참여한 것만 봐도 소소의 말은 어긋나는 부분이 없다.
"좋습니다. 믿어드리죠."
오작의 말에 소소는 콧방귀를 뀌었다.
"안 믿어도 돼. 그 둘이 너희보다 더 재밌는 거 같으니까. 이젠 너희 말고 그 둘을 따라다닐 거야."
"다행입니다. 마음 붙일 곳을 찾았다니."
분명히 자신의 말을 긍정하는데 되게 기분 나빴다. 소소는 흥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원래 둘이 어디서 사라졌는지 알려주려고 했는데, 기분이 별로여서 그만둬야겠다."
그런 소소를 오작은 가볍게 무시했다.
"치우야. 입구를 찾아. 나랑 치우만 안으로 들어갈 거니까 두 분은 밖에 계십시오."
치우는 시동어마저 생략해 호기면귀好奇眄鬼를 불러 입구를 찾게 했다. 재주가 많다고 우쭐대는 소소한테 본때를 보이려는 속셈이었다.
아는 게 없어 그러려니 하는 한발과 달리 소소는 주문도 시동어도 없이 호기귀가 불려오자 속으로 엄청나게 놀랐다.
"찾았어."
오작은 품에서 강제명이 줬던 마노를 꺼내 치우에게 던졌다. 치우는 마노를 호기귀에게 보상으로 줬다. 호기귀는 호기심이 강해 뭔가를 찾아내고 비밀을 푸는 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다른 귀신보다 보상을 덜 받는 편이다.
그러나 다소 제멋대로고 소환자의 요구를 잘 들어주지 않아 자주 부르지 않는 귀신이다. 치우는 귀왕을 등에 업었기에 귀신들이 고분고분하여 호기귀도 가끔 부르곤 했다.
"안전한 곳을 찾아 몸을 숨기십시오. 목적을 달성하면 감사의 의미로 당신께 법보 하나 드리겠습니다."
한발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재차 경고한 후 오작과 치우는 호기귀가 알려준 입구로 사라졌다.
"우리 따라가자."
오작과 치우가 사라지자 소소가 한발을 충동질했다.
"그건 아니지 싶은데."
한발은 가만히 있으면 법보를 준다는 오작의 말에 홀라당 넘어갔다.
"가장 싸구려 법보를 줄 거야.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직접 훔치자. 잘하면 홍영창과 같은 요마화보妖魔化寶 등급의 법보를 얻을지도 몰라. 요마화보부터는 상대 실력보다 인연을 더 봐. 너랑 운명의 짝이 될 법보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적지천리를 얻은 후부터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 한발은 소소의 말을 듣고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간단한 법술도 못 익히고 가는 곳마다 속임수에 당하다가 갑자기 강해졌기에, 더 강해질 기회가 있다고 하니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 홍영창은 저 둘에게 주고 난 다른 보물을 훔치면 돼. 아니면 차라리 홍영창을 훔쳐서 구왕한테서 날 구해준 보답도 하고.'
비록 오작이 대신 황금으로 값을 치렀지만, 자신을 구하려고 귀한 침을 소모했던 소소에 대한 고마움도 있어서 한발은 금세 마음을 바꿨다.
"그래. 저 둘이 실패할지도 모르니 우리 둘이 가서 보물을 훔치자. 홍영창을 훔치면 저들에게 주면 되잖아."
한편.
오작과 치우는 요괴의 영지로 들어서자마자 코를 꾹 막아야 했다. 꽤 참을성이 강하다고 자부하는 오작도 누린내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 두 번째야.
치우가 손으로 말했다. 들어오기 전에 몇 개 후보를 정했는데 두 번째는 족제비다.
- 무슨 요괸지보다 무슨 힘을 쓰는지가 중요해.
오작과 치우는 신중하게, 그러나 느리지 않은 걸음으로 중심부로 걸었다. 한참 가다 보니 승풍협도乘風俠盜라는 네 글자를 새긴 커다란 바위가 눈에 띄었다.
- 바람이야.
치우의 말에 오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귀찮게 됐어.
바람은 물과 불의 성질을 강하게 띠었다. 그러나 물보다 가두거나 흘리기 힘들고 불보다 제압하기 어렵다. 비록 풍백과 만났을 때보다 둘 다 강해지긴 했지만, 바람을 상대하는 건 여전히 귀찮은 일이다.
- 이거 방귀 같은데.
갑자기 나타난 누런 안개에 치우는 자기 엉덩이를 연속 가리켰다.
- 가면 아니면 우리 기절했을 거야.
우마왕이 준 가면은 단순히 얼굴을 가리는 용도가 아니었다. 인간인지 요괴인지 정체를 헷갈리게도 하고 독을 비롯한 유해한 것들을 막아주기도 한다.
덕분에 오작과 치우는 방귀가 분명한 누런 안개를 헤치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냄새까지 막지는 않아 헛구역질이 자꾸 나려고 했다.
- 조심하자. 집중하고 경계심을 잃지 마.
오작마저 방귀 냄새 때문에 집중이 어려웠다. 누런 안개 속에서 요괴가 불쑥 튀어나와 공격할 수도 있기에 마음을 거듭 다잡아야 했다.
- 여자는 방귀 얘기가 없었어. 안엔 방귀 없을 거야.
오작의 추측대로 시야를 가리던 누런 안개가 갑자기 사라지며 요괴의 모습이 드러났다.
- 작가의말
괴산복중동 - 이상한 산이 배에 품은 동굴.
생체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요괴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우마왕이 선견지명으로 방독면 기능을 갖춘 가면을 공급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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