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주결승법暗呪結繩法
근능보졸勤能補拙
부지런함은 서투름을 메꾸고
숙능생교熟能生巧
익숙하면 기교가 생긴다
창처럼 뾰족한 검은 바위가 숲처럼 빼곡한 석림. 태산노도가 앞장서고 풍운십삼기가 바싹 뒤따랐다.
"네가 배첩拜帖을 보냈어?"
갑자기 누런 안개가 바위 사이를 메우며 시야를 가렸다. 풍운십삼기는 미리 당부받은 대로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그래. 난 태산노도다. 백이십 년 전에 잠깐 만난 적 있는데 기억이 나?"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풍운십삼기는 서로 등지고 눈을 부릅뜬 채 요괴의 행방을 찾으려고 애썼다.
"태산노도라. 기억이 나. 배첩을 보내고 정중히 방문한 걸 보면 트집 걸러 온 건 아니고. 무슨 일인지 말하고 어서 꺼져."
"키가 일 장과 십이 척의 두 사람이 여길 온 적 있어? 둘 중 소년은 얼굴이 하얗고 자색 옷을 입었어."
우연히 누런 안개 너머로 흑석림黑石林의 주인인 대망사大蟒蛇(구렁이)와 눈이 마주친 갈우는 터지려는 오줌을 억지로 참았다.
누렇고 길쭉한 눈동자 가운데 까만 점이 있는 대망사의 눈은 보기만 해도 사지가 떨리고 오금이 풀렸다. 게다가 그 눈이 갈우만큼 컸다.
"온 적이 없어."
"대답해 줘서 고맙다. 그럼 이만 떠나도록 하지."
요괴는 자기 영역으로 들어온 태산노도 일행을 순순히 보내줬다. 풍운십삼기는 흑석림을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마음껏 쉬었다.
"도사님. 여기도 없으면 이제 남은 건 혈편복뿐입니다."
풍운십삼기와 태산노도는 태산 주변의 요괴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치우와 오작의 행방을 확인했다.
그 과정에 작은 다툼도 있었으나 태산노도가 가볍게 해결했다.
상대의 영역에서 요괴를 가볍게 제압하는 모습에 풍운십삼기는 진심으로 탄복했고, 작은 재주라도 배워보려고 태산노도를 극진히 대접했다.
"혈편복은 나도 장담하기 어려운데. 최소 천 년은 묵은 요괴야."
그때 형제들의 눈치를 받은 녹구가 나섰다.
"도사님. 혹시 의뢰 내용을 바꿔도 되겠습니까? 모든 재산을 드릴 테니 저희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태산노도는 클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법술을 익히려면 근기根基가 좋아야 해. 너희 중 근기가 있는 사람은 없어."
"저희 모두 열심히 배울 자신 있습니다. 가르쳐만 주시면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공경하겠습니다. 못 익히면 저희가 미련한 탓이라 여기지 절대 도사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야. 근기는 대부분 타고나. 그리고 나처럼 영약을 먹어 우연히 얻는 사람도 드물게 있지. 너희는 근기가 아예 없어서 법술은 못 배운다. 우선 근기를 얻어야 법술에 입문이라도 할 수 있다."
"뭘 먹어야 합니까? 저희가 목숨을 걸고라도 구해보겠습니다."
태산노도는 크게 웃다가 급기야 기침이 터졌다.
"웃기는 놈들이군. 난 삼백 년 전에 천 년 묵은 삼을 먹었다. 덕분에 근기가 생겼지. 그리고 백 년 동안 결승법 하나만 익혔다. 무려 칠십 년을 익히고서야 겨우 법술을 펼칠 수 있었고, 백 년 되던 해에야 상대에게 안 들키고 몰래 쓰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고도 매일 최소 두 시진씩 수련해서 백 년 전에 드디어 주문을 생략했다."
풍운십삼기는 태산노도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졌다.
"삼을 먹지 못했다면 난 근기가 없어 법술을 익히지도 못했다. 게다가 삼으로 수명이 늘지 않았다면 법술을 익히기도 전에 죽었다. 그러니 너희도 영약이 없으면 법술을 익힐 엄두도 내지 말아라."
"도사님. 제발 이 미련한 놈들을 거둬주십시오."
풍운십삼기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세게 박았다. 태산노도를 보고서야 왜 청제가 자신들을 내쳤는지 알았다. 태산노도 같은 자 하나면 풍운십삼기 백 명보다 훨씬 쓸모 있다.
지금까지 겨우 편익조나 날리는 술사만 봐왔기에 법술을 아주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문으로 떠도는 건 다 꾸며낸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최근 태산노도의 법술을 직접 보고 나서야 비로소 소문들이 마냥 허황한 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라도 법술을 배우고 싶은 욕구가 활화산처럼 솟았다.
'잘하면 이놈들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겠어.'
태산노도는 잘 구슬리면 공짜로 쓸 만한 손발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단호히 거절하지 않았다.
"내가 왜 너희 의뢰를 승낙했는지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나 정도가 되면 재물이나 준마 따위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난 그저 흥미가 생겼을 뿐이야. 얼마나 대단한 술사길래 말의 환각을 실제처럼 속일 수 있었을까."
태산노도의 말에 갈우는 놀란 나머지 바닥에 처박았던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도사님 말씀은 그 말이 가짜였다는 겁니까?"
"당연하지. 다만 대부분은 눈만 속이는데 넌 말을 만져봤다고 했잖아. 게다가 나이도 어린 청년과 소년이었다고. 그렇게 어린 나이에 그만한 법력과 법술을 갖췄다면 틀림없이 배경이 대단할 거야."
태산노도의 말투엔 숨길 수 없는 질투와 증오가 섞였다. 그러나 풍운십삼기는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던 준마가 환각이었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워 미처 유의하지 못했다.
"내가 네놈들 소문을 들은 적 있다. 한 달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지켜보니 소문만큼 나쁜 놈들은 아니구나. 최소 신의는 있고 솔직해 보여서 마음에 든다."
"좋게 봐주시다니 황송합니다. 저희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단서가 있다."
태산노도가 단칼에 거절하지 않자 풍운십삼기는 날듯이 기뻤다.
"놈들을 생포한 다음 고문해서 배경을 캐라. 그리고 놈들을 인질로 삼아 그들의 가문이나 문파를 협박해 영약을 얻어낸다. 영약을 먹어 근기를 얻은 자는 내가 제자로 받아들이겠다."
이쯤이면 태산노도가 처음부터 영약을 노리고 의뢰를 받았다는 걸 유추할 수 있을 법도 하련만, 풍운십삼기는 미처 그쪽으로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둔각을 애써 청제의 중용을 다시 받을 징조라고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일한 동아줄인 태산노도를 의심할 생각은 떠올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태산노도가 혈편복에게 배첩을 날린 지 사흘이 되었다.
"제가 술을 좋아하여 친구가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 소문을 듣는데, 개중에 믿기 힘든 소문도 있었습니다. 혈편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녹구의 말에 태산노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말해보아라. 헛소문이면 안 들은 셈 치면 되니까."
"태산 수비군의 대장이 혈편복과 친분이 있다고 합니다. 일정 기간마다 핑계를 대서 눈 밖에 난 병사를 혈편복에게 제물로 보낸다고 합니다. 원래 사고도 잦고 도망자도 많은 수비군이어서 뒷말이 조금 돌 뿐 정식으로 문제 된 적은 없습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뒷감당이 힘들구나."
"대장은 저희도 함부로 건드리기 두렵습니다. 대신 혈편복의 영역 근처에서 대장이 보내는 병사한테 편지 같은 걸 붙여서 들여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배첩을 보내도 반응이 없는 놈이 편지를 보낸다고 되겠느냐?"
"그럼 병사한테 독을 먹이는 건 어떻습니까? 독이 든 피를 마시면 혈편복이 알아서 기어 나오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둔한 놈도 자기 분야엔 머리가 잘 돌아간다.
그리고 며칠 뒤.
둔각의 울음소리에 달려간 오작과 치우는 시퍼런 얼굴로 기절한 병사를 발견했다.
"독이 있는 열매를 잘못 먹었을까?"
병사 입에서 비릿한 냄새를 맡은 치우가 중얼거렸다.
"아니야. 뭔가 이상해. 우리가 왔을 때 병사도 태산 수비군이라고 했잖아. 급히 전할 소식 있다고 요괴 영역을 지나려 했고."
"혈편복이 거짓말했을 수도 있잖아."
"아니, 진짜야. 이 병사도 마찬가지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치우가 무릎을 탁 쳤다.
"혈편복 죽이려고 독을 먹여 들여보낸 거 아닐까? 혈편복이 죽은 사실은 우리 둘밖에 모르잖아."
"혈편복이 독이 든 피를 마실 정도로 멍청할까?"
"그럼 구해서 물어보자."
치우는 왼손을 병사의 인당에 대고 오른손을 심장에 댔다. 그리고 흡력을 만들어 병사 몸에 있는 독기를 뽑았다.
뽑아낸 독기는 오작이 불덩이를 소환해 태워 없앴다. 불덩이가 자주 꺼지긴 했지만, 예전엔 소환 자체가 어렵던 것에 비하면 큰 발전이었다.
독기는 깨끗이 뽑았지만, 이미 독에 상한 몸까지 회복한 게 아니어서 병사는 바로 깨지 않았다.
"잠깐. 병사 몸에 부적이 있어."
치료를 마친 치우가 오른손에 만져지는 딱딱한 물건을 감지했고, 옷섶을 들춰 확인했다.
"제길. 훔쳐보는 부적이야. 누가 우릴 찾는 게 틀림없어."
여긴 혈편복의 영역이다. 굳이 혈편복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고 규탐부窺探符를 낭비할 리 없다.
"설마 말 거래한 멍청이?"
"누가 멍청이야? 양심 없는 도둑놈들아."
풍운십삼기가 등장했다. 갈우는 분기탱천하여 오작과 치우를 손가락질했고, 풍운십삼기는 다시 보는 둔각의 풍채에 정신이 반쯤 홀렸다.
독을 먹인 건 혈편복을 자극하려는 목적이었다. 정기적으로 오는 제물에 하자가 있다면 혈편복이 어떻게든 반응할 거고, 근래에 받은 배첩을 떠올리면 일행의 방문을 허락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규탐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넣었다. 만에 하나 오작과 치우가 혈편복과 같은 패거리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신중을 기하자는 의미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규탐부를 통해 혈편복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갈우가 오작과 치우의 얼굴도 확인했고. 그렇게 부랴부랴 달려서 미처 오작과 치우가 숨기 전에 덮친 것이었다.
"재물을 다 돌려줄게. 어차피 재물이 욕심났던 건 아니야. 거래 안 한다고 하면 네놈이 귀찮게 굴까 봐 그런 거지."
치우의 말에 갈우는 분노가 더 거세게 타올랐다.
"내가 그런 하찮은 놈으로 보였어?"
"응."
너무 자신만만한 치우의 대답에 갈우는 대꾸하지 못했다. 아니라고 딱 잡아떼자니 자부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옳다고 인정하는 건 꼴사나운 짓이다.
"합!"
그때 풍운십삼기 뒤에 몰래 숨었던 태산노도가 기합을 외쳤다. 그리고 오작과 치우는 뱀을 닮은 굵은 밧줄로 몸이 칭칭 감겼다.
"당신은 누굽니까?"
오작은 침착한 말투로 태산노도한테 질문했다.
"왜?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는 게냐?"
"결승법은 수인씨의 법술입니다. 당신은 주문도 안 외우고 시동어도 안 외쳤습니다. 그리고 우린 당신이 법술을 펼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요."
오작의 추리에 태산노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씨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수인씨 역시 결승법을 만들어냈을 뿐 타고난 건 아닙니다. 주문을 생략하는 거야 노력으로 되지만, 시동어까지 생략하려면 타고나야 합니다. 수인씨도 아닌 당신이 누군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난 수인씨의 제자 태산노도다. 이백 년 동안 결승법만 수련하여 암주暗呪의 경지에 이르렀지. 끈질긴 노력은 타고난 재능을 능가하고, 꾸준한 수련은 예기치 못한 성과를 얻는 법이다."
태산노도의 말에 풍운십삼기는 크게 감명받았다. 자신들도 영약을 먹고 근기를 얻어 열심히 노력하면 대단한 술사가 될 수 있다.
"난 너희 같은 놈들이 정말 싫다."
태산노도의 눈엔 앳되다 못해 새파란 치우와 오작이다. 그런 놈들이 몸에 법보를 걸쳤고 단전엔 법력이 넘쳐난다. 규탐부로 치우의 독 빼내는 재주를 확인했고, 오작이 불덩이를 소환하는 솜씨 역시 어설프나 대단했다.
"좋은 집안에서 대단한 재능을 타고나 세상을 참 쉽게 사는 놈들. 누군 재능이 없어서 목숨 걸고 영약을 먹어야 했고, 법술 하나를 이백 년이나 수련해서 경지에 겨우 이르렀는데. 너흰 가문의 보살핌으로 영약을 안전하게 복용하고 존장의 가르침으로 법술을 쉽게 익히겠지?"
태산노도는 수인씨의 제자가 아닌 하인이었다. 삼도 도둑질해 먹은 것이고 결승법도 훔쳐 배운 것이었다. 백여 년 동안 결승법을 수련하며 숨어 지냈고, 수인씨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도 수십 년 지나서야 세상에 나와 태산노도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당신의 추측이 꼭 들어맞는 것도 아니고. 설사 맞는다고 해도 우리가 뭐 당신한테 잘못한 거 있습니까?"
태산노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다채롭게 변했다.
"그런 오만함도 타고난 것이냐?"
"오만함이라뇨. 자신감이라는 좋은 표현도 있는데요."
"도사님. 한 놈만 있어도 되니까 저놈은 죽이는 게 어떻습니까."
갈우는 오작의 덕담에 감격하고 마을 밖까지 배웅했던 걸 생각하면 자기 배에 칼을 꽂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들 진짜 멍청하군요. 저 도사는 이 법술밖에 못 펼칩니다. 당신들은 우릴 죽일 수 없습니다."
오작의 말에 풍운십삼기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려 태산노도를 바라봤다.
태산노도는 얼굴을 푸들푸들 떨며 오작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이 결승법은 정말 대단한 법술입니다. 자신보다 열 배 정도 강한 자도 확실히 묶을 수 있습니다. 딱 잘라 말하긴 힘들지만, 도행이 오백 년 이하인 요괴는 대부분 묶을 수 있을 겁니다. 근처 요괴들을 잡아 죽인 다음 내단만 빼 먹어도 아마 법력이 넘쳐날 겁니다."
오작은 태산노도를 쏘아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묶을 수만 있고 죽일 수 없으니 법력이 고작 내 동생이랑 비슷한 겁니다."
- 작가의말
암주결승법에서 암주는 몰래 외우는 주문입니다. 무기 중에서 몰래 던지는 걸 암기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죠.
능숙하면 주문을 생략, 타고나면 시동어까지 생략할 수 있습니다. 태산노도는 생략한 게 아니라 주문도 시동어도 안 들킨 겁니다.
예약으로 글 올리는데, 현재 선작이 296분이네요. 300 넘으면 내일 2연참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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