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예주반서永蘂呪反噬
해주유시解呪有時
저주를 푸는 데는 시한이 있어
과기반서過期反噬
기한이 지나면 물어뜯는다
달이 크게 휘어 어두운 밤이지만, 희운은 오작의 작은 동작 하나 안 놓치고 똑똑히 눈에 새겼다.
'대단한 고수다.'
상대의 법술 능력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공과 평소 언행만 봐도 평범한 수준은 아니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호흡을 멈춘 희운은 오작의 창에 정신을 완전히 빼앗긴 세 늑대의 뒷다리를 베었다. 그냥 검을 휘두르면 되는 게 아니라 법력을 소모해야 하기에 무한정으로 써먹을 수 있는 법보가 아니다.
차라리 요마화보라면 법보로 변한 요괴나 마수의 법력을 그대로 갖춘 상태고, 주인과 교감하여 능력을 키울 수도 있다. 그러나 헌원검은 조화성보 등급으로 쓸모는 크지만 여러 면에서 아쉬움이 많다.
희운의 공격에 세 마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뒷다리 둘씩 잘린 뒤였다. 오작은 찌르기 대신 창을 휘둘러 늑대들 앞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건드리는 시점時点(타이밍)과 부위 그리고 힘까지 완벽에 가까워 세 늑대는 회피 능력을 거의 잃다시피 했다.
억지로 법력을 끌어올려 늑대들의 몸통을 토막 내고 머리를 자른 희운은 창백한 얼굴로 가쁜 숨을 헐떡였다.
수십 번의 심호흡으로 겨우 법력을 안정시킨 희운은 세 늑대 머리에 부적을 세 장씩 붙이고 주문을 외웠다.
부적은 법술에 필요한 법력을 자체로 보유했거나 주변으로부터 끌어오기에 시술자施術者(법술 사용자)의 법력을 조금밖에 안 쓴다.
덕분에 희운은 법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에도 세 마수의 머리를 순조롭게 봉인했다.
"조금 쉴까요?"
머리와 몸통 조각을 사방으로 아무렇게나 던진 희운은 그제야 팔다리를 부들부들 떠는 오작의 모습을 알아챘다.
"아닙니다. 상자를 당신이 지고 저는 동생한테 업히면 됩니다."
오작은 떨리는 몸을 억지로 돌리려 했지만, 몸이 말을 안 들어 휘청했다. 희운은 헌원검을 검집에 넣고 오작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탈진이 아닌데?'
희운은 오작이 마수 세 마리를 상대하느라 자신처럼 법력이 탈진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법술이 아닌 무공만 펼쳤지만, 상대의 창이 헌원검과 마찬가지로 법력을 꽤 잡아먹는 법보라고 여겼다.
그러나 잡은 팔에서 번갈아 전해 오는 차가움과 뜨거움은 법력 탈진으로 보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받아."
어느새 나타난 치우가 광주리를 희운에게 넘겼다. 희운이 광주리를 받자 치우는 오작을 등에 업고 달렸다. 희운 역시 광주리를 메고 치우 뒤를 묵묵히 따랐다.
궁금이 잔뜩 도지긴 했지만, 괜한 질문으로 가장 큰 조력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정도로 희운은 멍청하지 않았다.
오작의 경련은 아침놀이 옅어져서 사라질 즈음 멈췄다.
"쉬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희운의 걱정에 오작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지만, 이유를 알았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지친 희운 대신 치우가 상자를 다시 메니 꽤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셋은 점심도 거르고 저녁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근데 말이 안 보입니다."
희운이 말한 말은 오행마였다. 얼마나 긴장하고 정신이 없었으면 사라진 지 이틀이 되어서야 희운은 오행마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안전한 곳으로 보냈습니다."
희운은 모르는 것 같지만, 오행마가 자단의 말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일이다. 괜히 도주 과정에 자단의 원수와 만나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기에 오작은 오행마를 소오와 현작 그리고 형천이 있는 풍령으로 보냈다.
편익조를 받은 현작이 길 안내를 맡을 것이기에 엉뚱한 곳으로 샐 걱정은 없었다.
둘이 대화하는 중에 치우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다. 돌아온 치우가 사냥감을 손질하는 사이, 희운이 장작 주우러 떠났다.
서로 대화한 바는 없지만, 희운과 치우는 동시에 오작 곁을 비우지 않았다.
"형, 무슨 일이야?"
희운이 사라지자 치우는 꾹 눌렀던 질문을 뱉어냈다.
"저주 때문이야. 태극구가 저주를 제때 풀지 않으면 큰일이라고 했잖아."
영예주는 육체의 성장을 방해한다. 그냥 사람이나 짐승을 밧줄로 묶어도 반항이 심하다.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성장을 강제로 멈추는 저주에 대한 육체의 반항은 더 심하면 심했지, 절대 가볍지 않다.
그 심한 반항을 누를 정도로 강한 영예주이며, 육체의 반항이 약해지면 오히려 몸에 해를 끼친다. 오작은 저주를 받은 지 삼십사 년이 넘었다.
비록 오행보의 셋을 먹어 저주를 꽤 풀었지만, 사실 마지막 황룡신을 먹기 전엔 그저 몸의 성장을 이뤄냈을 뿐이지 저주는 절반도 풀린 게 아니다.
"방법이 있어?"
"마음이야. 내가 은근히 지금 상태에 만족했나 봐. 성장과 저주 해제에 더 큰 욕망을 품어야겠어."
오작은 무극을 깨달은 후 법술을 펼치는 게 조금씩 쉬워졌다. 비록 환수나 마수 그리고 사람에겐 큰 효과가 없지만, 요괴한테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이는 오뢰굉도 있다. 무공도 최근 들어 큰 경지의 상승을 이뤄냈다.
그래서 저주를 푸는 데 대한 갈망이 예전보다 옅어졌다. 더구나 자단을 찾아내는 걸 최우선에 두며 심경의 변화가 있었고, 최근 여러 호재가 겹치며 오히려 악재가 된 것이다.
"만약 안 되면?"
"돼."
오작은 단호한 말투로 치우의 불안감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한참 지나서 희운이 돌아와 소매에서 장작을 가득 꺼냈다.
"너무 많이 주운 거 아닙니까?"
"마른 장작이 많더군요. 소매에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이후엔 장작 줍는 시간도 아낄 수 있을 겁니다."
희운의 말에 오작은 얼굴을 굳히며 숨을 깊게 들이켰다. 치우 역시 눈을 감고 오작을 따라 했다.
"뭔가 이상하지?"
오작의 질문에 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기가 심해. 불의 기운과 관련한 요괴가 근처에 있나 봐."
그때, 셋의 주변 나무들에서 수천 개가 됨직한 빨간 눈이 생겨났다.
"명화접瞑火蝶이야."
치우는 적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봤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마수는 불을 덮쳐 이겨낸 나방이 변한 명화접이다.
이들은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지만, 날개로 일으킨 바람을 이용해 공간을 이해하기에 일반 나비들보다 더 표홀한 움직임을 보인다.
빨간 눈으로 오해한 건 이들이 접었던 날개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밤에 밝게 빛나는 불꽃무늬를 새긴 날개는 얼핏 맹수의 눈으로 오해하기 쉽다.
오작은 오뢰굉의 운기 경로를 따라 법력을 움직였다. 단전에 은은한 통증이 느껴지고 가슴이 갑갑했다. 그리고 뒤통수도 얇은 침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엔 약간 못 미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당분간 법술 사용은 자제해야겠구나.'
무공의 운기는 대부분 인체가 원래부터 보이던 흐름을 강하게 하는 데 있다.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던 경로를 강화하는 거로 큰 힘을 내는 게 무공의 요체다.
법술은 인간에겐 없던 경로를 새롭게 만드는 게 대부분이다. 그래서 무공과 달리 근기를 따져야 하고, 노력보다는 타고난 재능에 따라 성취가 갈린다.
오작이 법술을 펼치기 힘든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육체의 성장을 제한하는 영예주는 원래 흐름을 강화하는 무공은 그나마 받아들이지만, 몸에 새로운 운기 경로를 만들려는 법술은 성장으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대책은 있습니까?"
희운은 명화접을 처음 들어본다.
"저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 합니다. 알려진 것보단 숨겨진 게 더 많은 마수거든요."
대부분 마수는 태어날 때부터 마수다. 그러나 명화접은 평범한 나방이 세혼화洗魂火라는 이름의 요화妖火에 몸을 던진 후 이겨내며 재탄생한다.
세혼화의 정화淨化로 영혼 자체가 바뀌기에 새로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명화접은 마수로 분류된다.
호봉은 무리로만 존재하는 요괴지만, 명화접은 무리를 짓기 좋아할 뿐 군체群體 요괴가 아니다.
"형, 화멸진火滅陣 같아."
나무에 앉은 명화접들이 날개를 펼쳤다 거뒀다 함에 따라 빨간 눈들이 깜빡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정신이 멍해지고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딱딱한 바닥이 푹신한 짚더미처럼 느껴지고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나 혼자 상대할 겁니다. 확실한 기회 아니면 움직이지 마세요."
오작은 소매에서 창을 꺼낸 후 앞으로 나섰다.
희운의 헌원검에 의지하기엔 상대가 너무 많다. 그리고 치우의 직감은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에나 잘 발휘한다. 적의 힘과 공격방식 등을 탐색하기엔 오작이 가장 적합하다.
'명여추수明如秋水 정여동호靜如冬湖.'
가을의 물처럼 깨끗하고 겨울 호수처럼 조용하라. 정신 수양의 기본 중 기본이다.
'정여처녀靜如處女 동여탈토動如脫兎.'
조용할 땐 부끄럼 많은 처녀처럼, 움직일 땐 뛰쳐 나가는 토끼처럼.
'일식만식壹息萬式 식식상관息式相關.'
같은 호흡에 만 가지 초식을 펼쳐야 한다. 호흡과 초식은 하나다.
가만히 서서 오작이 뭘 하는지 지켜보던 치우와 희운은 놀란 눈으로 서로 쳐다봤다.
'저건 어떤 경지인가?'
치우의 눈에서 자신보다 못지않은 놀람을 발견한 희운은 다시 오작에게 집중했다. 눈에 빤히 보이는 데도 기척은커녕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오작을 어떻게든 감지하려 애썼다.
천천히 걸어간 오작은 무심하게 창을 뻗어 명화접 한 마리를 찔렀다. 창에 찔린 명화접은 날개를 파닥거리다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마수 명화접은 땅에 닿으면 죽는다. 대부분 시간은 하늘을 날고, 가끔 휴식할 때엔 최소 땅에서 일 장은 떨어진 나뭇가지에서 쉰다.
오작의 찌르기로 죽은 건지는 모르지만, 바닥에 떨어졌으니 죽은 건 확실하다.
오작은 거둔 창을 다시 무심하게 내질렀다.
"상자에 집중해."
치우의 목소리에 희운은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황급히 삼각정參脚鼎을 꺼내 명화접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삼각정은 무거운 힘으로 적을 누르는 용도지만, 위급할 땐 소전의 신체 토막들이 담긴 상자를 눌러 보호할 수도 있다.
오래 누르면 상자가 파괴되겠지만, 급할 때 임시방편으로 한 번 써먹을 정도는 된다.
'대단한 무공이다. 나도 모르게 빠져버렸다.'
희운은 여전히 놀라 두근대는 심장을 조금씩 안정시켰다. 오작의 찌르기에 깊이 빠진 상태에서 치우의 말에 깨며 놀란 가슴은 깊은 호흡과 함께 천천히 진정됐다.
오작은 여전히 눈에만 보이는 상태에서 창을 내질렀고, 시력을 잃은 명화접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동족이 계속 줄어드는 건 느껴지지만, 오작의 움직임을 전혀 느끼지 못해 이유를 몰랐다.
차라리 호봉이라면 숫자가 주는 걸 걱정해 도망이라도 치겠지만, 군체 요괴는 아닌 명화접들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수십 마리 명화접을 찌르기로 바닥에 떨군 오작은 갑자기 창대를 밭게 휘둘렀다. 짧게 휘둘러 궤적이 작은 탓에 고작 세 마리만 걸렸지만, 셋 다 바닥에 떨어지며 마수 생을 마감했다.
그 뒤로 오작은 후려치기도 하고 톡 찍기도 하고 내려치기도 하면서 수많은 창술을 펼쳤다. 북망산에서 적무혈을 상대로 찌르기만 깨달았는데, 경지가 오르며 뒤늦게 다른 기술도 성장한 것이다.
이는 영예주의 발작으로 오작이 법술을 최대한 배제하기로 한 것과 관계가 컸다. 무공과 법술을 결합한 멸천칠절공을 어려서부터 익혀 그 경계가 모호했는데, 이번 발작을 계기로 둘의 경계가 은연히 나뉘었다.
분구필합分久必閤 합구필분閤久必分.
법술과 무공은 같은 기운을 사용한다. 둘을 오래 구분하고 있으면 경지의 상승에 방해되기에 하나로 여길 필요가 있다. 반대로 둘을 하나처럼 느끼던 오작은 무공의 경지만 크게 상승한 상황에 둘을 구분하여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무공 경지가 급작스럽게 오르며 법술도 경지를 높이려는 시도에 영예주가 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새 천 마리가 넘은 명화접이 바닥에 떨어졌다. 화멸진으로 오작 일행을 재우려던 명화접들은 날개를 비벼 상의하다가 훌쩍 떠나버렸다.
"저들의 목표는 탈취인 것 같습니다."
명정 상태에서 깨어난 오작이 말했다.
"십중팔구 헌원검이 목적일 겁니다. 제혈祭血로 헌원검의 혈약血約을 깨려는 거겠죠."
희운이 축 처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헌원검은 구마소와 마찬가지로 부계 핏줄로 이어지는 법보다.
"피가 부족할 텐데요."
고작 희운과 소전의 피로는 혈약을 깰 수 없다.
"방법이 있으니까 이렇게 대놓고 움직일 겁니다. 어쩌면 제가 모르는 형제가 더 있을 수도 있고요."
소전이 밖에서 몰래 자식을 뒀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지금 우리의 행보가 저들의 예상을 한참 넘었겠죠?"
"아마 청동랑부터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을 겁니다."
"그럼 저쪽에선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희운은 이마를 찌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워낙 변덕이 심해 본인도 뭘 할지 모를 수 있습니다."
오작은 잠깐 고민하고 바로 결정을 내렸다.
"요수촌까지 최대한 빨리 갑시다. 거기서 당신 모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보를 알아내고 다음 행선지를 정합시다. 우리가 북부에서 바로 서부로 넘어갈 걸 예측했을지도 모르니 다시 중부로 갔다가 서부로 넘어가는 방법도 고민해야 합니다."
- 작가의말
나방이 왜 불만 보면 뛰어드는지 과학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유전자 레벨에서 이미 불을 보면 뛰어들게 설계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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