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백초거白帝白招拒
요조숙녀窈窕淑女
마음과 품행이 아름다운 여자는
군자호구君子好逑
군자의 배필로 훌륭하다
나무 위에 며칠 숨어 지낸 일행은 두꺼비의 신호를 받고 모습을 드러냈다. 신호를 보낸 두꺼비는 바로 유황천 밑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울타리 구멍을 지키는 새우 요괴는 여전히 즐겁게 춤추고 있었다. 황금 이백 근이나 받은 바람에 환락귀는 여전히 돌아가지 못했다.
'능소궁에 가야 하나?'
오작은 작은 일도 쉽게 결정하는 법이 없다. 결정이 빠른 건 평소 생각이 확고하여 흔들림이 적은 탓이지, 고민을 남들보다 덜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고민이 많아도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이번엔 머리도 복잡하고 마음도 혼란했다.
'절대감을 의심하면 안 된다.'
오작의 절대감은 욕수한테서 호의를 느꼈다. 그러나 경지가 높고 심계가 깊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상대가 헷갈릴 정도로 자기 마음을 감출 수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나이에 비해 지식도 경험도 많은 오작이건만, 이건 상대적 우위다. 수백 년 심지어 수천 년을 살고 정신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은 존재를 만나면 통합절대감도 소용없다.
그래도 드물게 이름에 절대가 붙은 재주인데 본인이 의심해버리면 감각이 흔들린다. 흔들린 절대감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오작도 자신의 감을 믿어야 함을 알지만, 욕수의 진짜 의도를 몰라 심란했다. 욕수한테 이유를 캐묻지 않은 것도 입을 열어 질문하는 순간 통합절대감이 무너질 것 같은 걱정 때문이었다.
'또 도졌구나.'
오작은 최대한 모든 상황을 통제하에 두려고 한다. 미지에서 오는 불확실성을 즐기는 치우나 소소와 달리, 오작은 미지에 불안을 느낀다.
예전에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적 있지만, 마음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지 않는다.
평소라면 안 풀리는 고민은 깔끔하게 한쪽에 치우고 여유가 생길 때 다시 꺼내 봤겠지만, 지금은 마음마저 혼란하여 머리에서 여러 생각이 두서없이 돌아다녔다.
오작이 정신을 못 차리니 치우와 소소는 서로 안 보여 대화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행은 매우 심심하게 도산을 벗어났다.
"형, 괜찮아?"
치우의 걱정 어린 말에 오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평소 생각이 확고하여 심마가 생기거나 주화입마로 가진 않았다. 그러나 안색이 초췌하여 고민이 깊음을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었다.
"우리 먼저 형천 보러 가지 않을래?"
소소가 오작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왜. 나 쓸모 많잖아. 그리고 철도 많이 들었고."
오작은 입가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평소라면 내색을 안 했겠지만, 마음도 복잡하고 그간 소소에 대한 신뢰도 쌓여서 굳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럴 때가 더 위험합니다. 조금 들었는데 철이 다 들었다고 자만하죠. 그러면서 고집이 더 세집니다."
오작의 말에 소소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진담을 조금 섞은 농담이라고 여겼겠지만, 오작이 말하니 그저 진담 같았다.
"당신은 저주를 얼른 뽑아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 나비로 변할지도 모릅니다."
이 역시 오작이 말하니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하자. 아주 급한 게 아니라면 날 사흘만 기다려. 저주를 해결하고 여길 올게."
오작은 얼핏 스친 치우의 눈에서 간절함을 읽었다. 예전이라면 냉철하게 판단하여 무시했겠지만, 최근 들어 오작은 성격이 조금 무르게 변했다. 게다가 머리도 마음도 복잡하여 소소의 부탁을 거절하는 게 괴롭게 느껴졌다.
"좋습니다. 사흘 후 이 시각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우린 출발합니다."
치우와 소소의 얼굴에 떠오른 환한 웃음을 확인하니 마음이 따뜻해지며 고민이 조금 사라졌다. 왠지 세상을 조금 배운 느낌이 들며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다.
치우와 오작과 작별한 소소는 경공을 최대로 발휘하여 능소궁으로 달렸다. 능소궁이 있는 등천봉登天峰은 도산 바로 곁에 있는 천산天山의 주봉이다.
결계 때문에 멀리서는 안 보이고 여러 진법으로 보호받아 길을 헤매기 일쑤지만, 소소에겐 해당하는 게 전혀 없었다.
도산에서 오랜 기간 느리게 걸었던 갑갑함을 털어내려는 듯, 소소는 엄청 빠른 속도로 뛰었다. 능소궁과 가까워지고 나서야 속도를 줄이며 은신술을 펼쳤다.
능소궁엔 결계가 없고 진법만 있다. 진법은 결계와 달리 법력이 많이 필요치 않은 대신, 조금만 흐트러져도 효과를 잃는다.
그래서 오히려 술사가 펼치는 결계보다 훨씬 희귀하다.
소소는 은신술을 펼친 채 진법을 통과해 능소궁으로 들어갔다. 능소궁을 지키는 요괴들은 소소의 은신술을 간파할 능력이 없다. 소소는 아무런 제지도 안 받고 몰래 능소궁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이렇게 귀한 선물을 하시다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백초거가 평소에 기거하는 춘소궁春宵宮으로 가니 선객이 있었다. 그리고 백초거 앞엔 선물로 보이는 여러 색이 찬연한 돌멩이 하나 있었다.
법력도 없고 쓸모도 없는, 그저 보기 좋은 돌멩이일 뿐이다. 그러나 백초거는 이런 것들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우리 유웅국은 광산이 많아서 이런 신기한 돌이 넘칩니다."
백초거의 맞은편에 앉은 건 소전이었다. 비록 머리만 봤지만, 소소는 상대 목소리도 들어봤기에 헷갈리지 않았다.
'희운 그 재수 없는 놈은 어딨지?'
소소는 자신이 떠올린 의문을 알아서 해소했다. 공손부보와 다섯 아들이 죽은 유웅국을 빨리 수습해야 하니 아무래도 희운은 진일곡에서 바로 유웅국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어제 드린 제안은 많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소전의 말에 백초거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어서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백초거는 이름만 왕王과 제帝이고 실질적인 권력은 서왕모한테 있다는 걸 소전도 안다. 그러나 상대의 상황까지 고려하기엔 여유가 부족하다.
백성의 칭송이 자자한 황제 함추뉴의 자리를 뺏으려면 유웅국과 그 동맹국들의 힘으론 어림도 없다.
"흑제의 자리는 비워졌고 청제는 왕 출신이 아니어서 명분이 없습니다. 제가 황제 자리를 차지하고 신농의 아들이 적제 자리를 차지하면 다음 황皇 자리는 무조건 백제 몫입니다."
황의 자리는 힘이 세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신농이 습격을 받아 죽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백초거가 황이 되면 상황이 다르다. 복희와 여와가 다섯으로 갈라놓은 경계를 없애고 야금야금 탄식呑蝕하면 나라를 최소 지금의 세 배로 키울 수 있다.
"제 슬하엔 아들뿐이어서 마땅한 여속女屬이 없습니다."
소소는 백초거와 소전의 대화를 들으며 조금씩 불안감을 느꼈다.
"소의선녀素衣仙女의 나이가 제 아들과 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 백제께서 양녀로 들인 다음 혼인을 추진하면 체면이 상할 일도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제 자식이어서가 아니라, 희운은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아입니다."
"유웅국의 여섯째 왕자가 영민하다는 소문은 저도 익히 들어서 압니다. 그러나 소의선녀도 마찬가집니다. 천하에 짝을 찾기 힘들 정도로 훌륭한 아입니다."
소전도 결정권이 백초거가 아닌 서왕모한테 있음을 안다. 더 다그치면 상대 기분이 상할 수도 있기에 화제를 돌렸다.
백초거와 소전은 화제를 계속 바꿔가며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이제 그만 나오거라."
소전이 떠나자 백초거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딘지는 몰라도 소소가 가까이 있다는 건 알아챘다.
"오빠. 나 저주 걸렸어."
모습을 드러낸 소소는 세상 불쌍한 얼굴로 애교를 부렸다. 백초거의 찌푸린 이마가 펴지고 입가가 움찔했다. 다행히 자제력이 강해 가출했다 돌아온 괘씸한 여동생한테 흐뭇한 미소는 보여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만나뵜어?"
"응."
백초거 역시 오작과 마찬가지로 상대의 거짓말을 잘 간파한다. 소소의 말이 진실임을 알아챈 백초거는 내심 놀랐다.
'어머니가 웬일이지? 삼 년 정도 어디에 가둬둘 줄 알았는데.'
반도원에 들어가 반도를 훔치는 과정에 원치 않는 만남이 있었고, 그마저도 소소가 일방적으로 인지한 만남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
"어디 보자."
대부분 사람은 실제로 서화국西華國을 지배하는 서왕모의 대단함만 알고 백초거를 무시한다. 그러나 다섯 형제 중 막내인 백초거가 왕이 된 건 우연이 아니다.
"별거 아닌 저준데 변형하면서 골치 아프게 됐구나. 다행히 욕수가 저주의 뿌리를 흔들어서 어렵진 않겠다."
말을 마친 백초거는 소매에서 채찍을 꺼내 소소의 등을 후려쳤다. 소소의 몸을 때리고 떠날 때마다 채찍에서 시커먼 연기가 흩날렸다.
"다 됐어?"
백초거가 채찍을 소매에 넣자 소소가 질문했다.
"아니. 조금 남았어."
백초거는 주문까지 외우며 법술을 발동했다. 소소는 침술을 비롯한 의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지만, 저주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얌전히 있던 소소는 자신의 두 다리를 감은 밧줄에 깜짝 놀랐다.
"오빠. 장난치지 마."
"너도 다 들었잖아. 유웅국에서 혼맹婚盟 요청이 들어왔다. 어머니는 꽤 긍정적이야."
"그게 나랑 뭔 상관이야."
"칠선녀에서 백 살이 안 된 건 너밖에 없다. 아무리 그래도 열여섯 애송이한테 백 살이 넘은 네 언니들이 시집가야겠어?"
소소는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차라리 낳지나 말 거지. 이러려고 날 낳았어?"
"그거 이젠 안 통한다."
언제 신호를 보냈는지 사슴 요괴 둘이 방으로 들어왔다. 백초거의 눈짓을 받은 둘은 소소를 가마에 태워 추명궁秋明宮에 데려갔다.
'흥. 이젠 나도 동료가 있다고.'
소소는 요괴들이 방에서 나가자마자 부적을 찢어 편익조를 날렸다.
한편.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혼란한 머리를 정리하려고 조용히 명상하는 오작과 반대로, 치우는 소소가 떠난 다음부터 안절부절 진정을 못 했다.
"수련하지 마. 지금 상태로 수련하면 오히려 뒷걸음만 쳐."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한 오작은 눈을 뜨자마자 칼을 대충 휘두르는 치우를 보고 타박했다. 치우는 대꾸도 안 하고 칼을 감춘 후 멍하니 소소가 사라진 방향만 바라봤다.
"너 배고프지 않아?"
오작의 질문에 치우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오작은 반도원에서 말라서 살이 얼마 없는 복숭아를 먹은 뒤부터 배도 안 고프고 갈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먹고 마시기는 하는데, 필요해서라기보단 그저 습관에 따른 행동이었다.
"형. 사흘이 되면 그냥 갈 거야?"
치우의 담담한 말투에 오작은 가슴이 아팠다. 직접 겪어본 건 아니지만, 수많은 이야기가 이루지 못한 사랑이 얼마나 아픈지 서술했다.
"넌 어쨌으면 좋겠는데?"
그때. 날개가 하나밖에 없는 새가 날아서 치우 귀에 내려앉았다.
하나뿐인 날개로 치우의 귀를 감싼 새는, 머리를 날개 밑에 쿡 박은 후 재잘재잘 길게 말했다. 다시 머리를 뽑은 새는 하나뿐인 날개를 퍼덕이다가 피식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소소야?"
소오는 편익조를 오작한테 보낸다. 치우한테 편익조를 보낼 만한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소소밖에 없다.
"저주는 해결했는데 백초거한테 잡혔대."
"능소궁이 집이라고 하지 않았어?"
"백초거가 소소를 희운한테 시집 보내려고 한대."
치우는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문 채 하늘을 쳐다봤다.
"형. 난 소소를 구하고 싶어."
"우리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저들은 소소의 가족이고, 우린 그저 아는 사이야."
"구하고 나서 소소가 싫다면 그때 놔주면 돼. 그리고, 소소도 싫으니까 편익조를 보낸 거잖아."
'욕수는 나보고 능소궁에 가보라고 했다. 결국엔 백초거와 엮여야 한다는 뜻인데.'
서왕모는 능소궁이 아닌 곤륜산 천주봉天柱峰에 산다. 욕수가 능소궁에 가보라고 한 건 백초거를 만나라는 뜻이다.
'내가 소소와 치우를 걱정해 오판하고 있는 게 아닐까?'
거듭 고민한 오작은 어렵게 결론을 내렸다.
"형천하고 소오 그리고 현작을 불러."
치우는 허공에서 풍령비를 꺼낸 후 주문을 중얼중얼 외웠다. 마침 밖으로 나간 사람이 없어 셋 모두 소환되었다.
"뭐야? 큰 싸움이 있는 거야?"
현작이 꽁지를 빳빳이 세우고 두리번거렸다. 형천은 반가움에 오작과 치우를 함께 그러안고 눈물을 글썽였다.
"먼저 이거 먹어."
오작이 반도를 꺼내자 소오가 날개를 파드닥거렸다.
"멍청이. 이걸 함부로 꺼내면 어떡해."
"뭐가 문젭니까?"
"서왕모가 곧 여길 올 거야. 형천은 그거 빨리 먹어 치워."
형천은 자기 주먹보다 더 큰 반도를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무슨 일로 우릴 불렀는지 모르지만, 너희 셋은 일단 도망쳐. 서왕모는 나랑 현작이 상대할 거야. 적당히 잡아두다가 도망칠 거니까 괜히 돌아와 돕는다고 유난을 떨지 마."
"자꾸 폐만 끼치는군요. 상황이 어려우면 저희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도망가십시오."
소오는 처음에 놀랐던 것과 달리 담담한 표정이고, 현작은 싸울 생각에 신났는지 몸을 크게 들썩였다.
오작과 치우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형천을 잡고 은신술을 펼친 채 소소가 사라진 동북 방향으로 달렸다.
- 작가의말
주머니를 열 수 없어서 통째로 줬더니 환락미귀가 열심히 일하네요. 새우 요괴는 아마 탈진으로 죽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