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귀일해佰川歸壹海
기고화번技高化繁
재주가 높으면 복잡하게 하고
역강화간力强化簡
힘이 강하면 간단히 하라
"제길. 끈질긴 놈들."
치우는 이미 금계산과 백 리도 더 떨어진 곳까지 도망쳤다. 그런데도 스물이 넘은 요괴와 인간이 들러붙었다.
중간에 열 명 정도로 줄었다가 다시 는 걸 생각하면 더 많아질 가능성도 충분하다.
"누가 할 소릴."
봉래도 외문제자들은 이틀에 걸쳐 열이 넘은 고수와 싸우면서 백 리나 도망친 치우한테 질렸다. 이들한테 다행인 점은 치우가 은신술이 뛰어나도 경공은 평범했다. 아니었으면 벌써 열 번도 놓쳤을 것이다.
뱀 요괴가 창으로 찔렀다. 봉래도의 창술을 익힌 자가 아니어서 막는 게 쉽지 않았다. 치우가 재능이 뛰어나긴 하지만, 경험이 부족하여 처음 보는 창술도 척척 막고 피할 수준은 아니다.
치우가 마환도의 옆면으로 창을 막자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자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퍼부었다.
허리와 허벅지에 힘을 꾹 준 치우는 마환도를 강하고 빠르게 휘둘렀다. 한 번의 휘두름에 열 개가 넘은 공격이 무산됐다.
"뿌려."
인간 하나가 은빛 가루를 허공에 뿌렸다. 은신술로 모습을 숨기고 도망치려던 치우의 시도는 허망하게 끝났다.
법술을 증폭하는 금속과 물체도 많지만, 법술에 강하게 저항하는 물체도 많다. 은빛 가루가 바로 그중 하나다.
치우가 은신술로 몸을 숨겨도 법술에 저항하는 은빛 가루는 숨겨지지 않는다. 법력이 넉넉하다면야 치우의 재능으로 은빛 가루까지 숨길 수 있겠지만, 그건 귀기가 충만할 때의 법력 양으로도 불가능하다.
치우의 도주를 막은 봉래도 제자들이 소나기 같은 공격을 쏟아냈다. 치우는 약점인 목 부위 위주로 보호하며 공격을 묵묵히 견뎠다.
방금 열이 넘은 공격을 한꺼번에 막아내느라 꽤 지친 상태기에 그냥 맞아주는 게 훨씬 나은 대처다.
어느 정도 법력과 체력을 회복한 치우는 웅크렸던 몸을 펴고 칼을 휘둘렀다. 봉래도 제자가 또 은빛 가루를 허공에 던졌다.
'역법전이 때문에 그냥 싸워도 법력이 사라지는데.'
역법전이는 힘을 법력으로 바꾸고 법력을 힘으로 바꾼다. 덕분에 치우는 그냥 싸워도 법력이 소모된다. 힘 조절을 오작처럼 세밀하게 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치우는 작은 힘은 세밀하게 움직여도 큰 힘은 그러지 못했다.
진목액을 먹으면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타고난 부분이 아니어서 고된 수련으로 극복해야 한다.
치우는 내단의 기운을 흡수하며 쉽게 법력을 쌓았고 태극보인 덕분에 법력 수련도 등한시했다. 태극보인이 사라진 후엔 법력 부족으로 몇 번 고생하긴 했으나, 그땐 오작이나 공공 등이 곁에 있었다.
혼자서 강한 적을 상대하며 고생한 건 처음이나 다름없다.
'힘을 아껴야 한다는 말인데.'
앞에서 세 개의 공격이 들어오고 뒤에서도 두 개의 무기가 찔러왔다. 게다가 호시탐탐 틈을 노리는 놈도 열이 넘는다.
치우는 칼을 잡은 손에서 힘을 조금 빼고 휘둘렀다. 칼에 실린 힘은 전보다 못하지만, 속도는 빨라졌다.
다섯 개의 공격을 하나씩 물리친 치우는 추가로 들어오지 않는 공격에 만족했다. 전에 힘으로 상대 공격을 튕겨낼 때는 늘 후속 공격이 이어졌다.
'간단하게 움직일수록 힘이 실리고 복잡하게 움직일수록 허점이 적어진다.'
공격은 강하고 간단하게. 수비는 빠르고 신중하게.
치우는 이들을 뿌리치려는 생각을 잠시 접고 공격과 수비에 집중했다. 어차피 도망치다가 법력 회복조차 어려울 정도로 지치면 이들 손에 잡히거나 죽는다.
어떻게든 지치지 않는 싸움 방법을 알아내고서 다시 도망치기로 했다.
'제길. 형이 예전에 해줬던 얘기잖아.'
기교를 너무 부리면 힘을 싣기 힘들다. 힘을 너무 실으면 변화가 어렵다. 둘 사이에서 타협점을 잘 찾아야 한다고 오작이 여러 번 말했다.
'형이 또 무슨 말을 했더라?'
한편.
치우를 상대하는 봉래도 제자들도 죽을 맛이었다.
'뭐 이런 새끼 다 있지?'
덩치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이 세다. 그런 주제에 법력이 많고 순수하다. 봉래도 제자 중 치우보다 법력이 적은 자는 드물지만, 회복력까지 따지면 일대일로 싸울 시 누구도 치우보다 오래 버틸 자신이 없다.
더 골치 아픈 건 무공 실력이다. 어떨 때 보면 한없이 초보 같은데 어떨 때는 또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고수다.
골 때리는 건, 일행과 싸우며 타고난 재능으로 점점 발전하는 양상이 아니라 아주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갑자기 형편없는 대처를 하기도 했다.
술사라고 여기자니 힘이 너무 세고, 무사라고 여기려니 법력이 너무 많고 순수하다. 초보라고 생각하자니 공방의 수준이 높고, 고수라고 인정하려면 가끔 정말 실망케 하는 대처가 보인다.
고수로 여기고 신중히 대처하면 불필요한 틈을 보이게 되고, 초보로 여겨 몰아붙이면 상대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응에 손해를 본다.
술사를 상대할 때처럼 근접으로 몰아붙여도 소용없고, 무사라고 여겨 법술로 묶으려고 해도 대처를 기막히게 잘했다.
어마어마한 존재라고 인정하자니 상대는 보이는 모습과 달리 스무 살을 안 넘은 순수한 인간이다. 태어날 때부터 강할 수 있는 요괴와 달리, 인간은 아무리 타고나도 한계가 명확하다.
"그냥 죽일까?"
답답한 나머지 요괴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치우의 대응이 확 바뀌었다.
자신을 죽일 결심이 서지 않았다는 걸 이용해 수비에서 힘을 조금 빼고 공격은 더 과감하게 펼쳤다.
그때. 귀두도를 든 사내가 싸움터에 나타났다.
"애송이 하나 두고 뭐 하자는 거야? 다들 비켜."
귀두도를 든 사내는 외문제자 중에서도 무공으로는 손에 꼽히는 포정庖丁이다. 칼 다루는 솜씨도 좋고 힘이 장사여서 지금껏 몇 번 패배를 경험하지 못했다.
"목숨은 살려둬."
"걱정하지 마. 그냥 팔다리 뜯어내고 등가죽만 벗길게."
포정은 아주 느긋하게 귀두도를 휘둘러 치우의 팔을 노렸다. 치우가 몸을 살짝 움직이자 귀두도의 궤적이 바뀌었다.
'고수다.'
치우가 자세를 다섯 번 바꿔 대응했으나 포정의 귀두도도 다섯 번 변화하며 끝까지 치우의 어깨를 노렸다. 치우는 어쩔 수 없이 마환도를 휘둘러 귀두도와 부딪쳤다.
깡 소리와 함께 치우와 포정 모두 옆걸음쳤다.
포정은 치우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고, 치우는 포정의 기술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칼끝이 가장 두껍고 무거운 귀두도를 정확한 기술로 휘두르니 힘이 몇 배로 증폭되었다.
"부러운 새끼. 힘이 세니까 이렇게 어설퍼도 멀쩡하지."
정확한 자세로 휘두른 완벽한 공격을 상대가 불편한 자세에서 힘으로 막아내자 포정은 열불이 일었다.
사문의 대력환大力丸을 먹고 힘이 강해지긴 했으나, 그전까지는 실력에 비해 부족한 힘 때문에 꽤 고생했다.
포정은 귀두도를 번쩍 쳐들고 내려치기를 펼쳤다. 치우가 제대로 못 막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강한 공격이다. 빙 둘러싸고 구경하는 봉래도 제자 중 대부분은 포정의 이 공격을 피하지도 막지도 못하고 몸이 두 동강 날 것이다.
'간단하고 강하고 확실하게.'
치우는 직감으로 피할 수 없는 공격임을 알고 마환도를 휘둘렀다. 깡 소리와 함께 치우의 무릎이 굽혀졌고, 포정은 뒷걸음질 쳤다.
능숙한 기술로 내리치면서 무기의 무게까지 실은 공격이고 치우는 불편한 자세로 칼을 위로 휘둘렀다. 그런데도 대등한 결과를 보이자 포정은 짜증이나 질투보다 공포를 느꼈다.
"주둥이만 살아서는."
너무 수준 높은 공격에 살짝 위축됐던 치우가 두 번의 수비에 성공하며 기세등등해졌다. 그 기세를 타 포정의 공격을 안 기다리고 반격에 나섰다.
치우가 자신의 팔을 노리자 포정은 귀두도를 왼쪽 팔에 대는 거로 가볍게 막았다. 다시 치우가 내리치기를 펼치자 귀두도를 세워 마환도를 비껴냈다.
치우가 꽤 강한 힘을 실어 빠르게 내려친 마환도는 허망하게 포정의 어깨 옆으로 흘렀다.
두 번의 공격을 펼친 치우의 기세가 주춤해지자 포정이 공격했다. 베기밖에 안 될 것 같은 크고 무거운 귀두도로 찌르기를 펼쳤다.
포정이 한 공격은 정확하게 말하면 귀두도의 칼끝으로 저며내는 방식이다.
요리하기 전에 피를 빼야 하는 대부분 짐승과 달리 일부는 피를 그대로 둬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칼로 심장을 저며내는 거로 출혈을 최소화할 수 있다.
치우는 들어본 적도 없는 공격에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의 힘이 훨씬 강하다는 걸 알고 동주철갑을 믿기 때문이었다.
'변화가 끝나고 힘이 실리는 순간을 노려라.'
힘이 강한 치우 상대로 오작이 늘 쓰던 수법이다. 그럼에도 힘의 차이가 커서 치우가 이기는 일도 종종 있었다.
치우는 포정이 어디를 노리는지 확실히 판단한 후, 상대가 귀두도를 비틀어 살을 저미려는 순간에 마환도를 휘둘렀다.
귀두도를 비트느라 악력이 약해진 틈을 타 마환도가 어마어마한 힘으로 두드리자 포정은 그만 귀두도를 놓치고 말았다.
억지로 버텨도 되지만, 그러다간 호구가 찢기고 손목도 접질렸을 것이다.
치우는 바닥에 떨어진 귀두도를 발로 밟았다. 마환도로 내리쳐서 파괴할 속셈이었는데 포정이 주문으로 귀구도를 불러갔다.
'법력으로 밟았어야 했는데.'
경험 부족으로 치우는 상대가 무기를 소환할 수도 있다는 점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후회는 후회고 싸움은 싸움이다. 치우는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포정의 목을 향해 저며내기 수법을 펼쳤다. 한 번만 보고 따라 하는 것이기에 꽤 어설펐지만, 치우의 힘을 생각하면 마냥 무시할 공격이 절대 아니었다.
포정은 고민할 겨를도 없이 귀두도를 들어 치우의 마환도를 옭았다. 창이나 검 따위로 펼치는 옭아매기 수법을 포정은 귀두도로 해냈다.
포정이 귀두도로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마환도를 옭았지만, 힘의 차이가 커서 칼을 치우의 손에서 날리지 못했다.
'힘의 방향을 계속 바꿔서 제압할 틈을 안 주는구나.'
오작과 대련할 때는 긴장감이 부족했다. 게다가 자신이 새로 익힌 초식을 자랑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오작한테서 뭘 배우려는 생각보다 오작의 도움으로 자기 초식의 약점을 찾고 보완하려는 생각이 훨씬 컸다.
그런데 포정이라는 칼을 엄청나게 잘 쓰는 상대를 만나서 고전하다 보니 예전에 오작이 왜 그런 식으로 대처했는지 하나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공포와 질투 등이 분노로 변했다. 포정은 살려둬야 한다던 말을 까맣게 잊고 필살의 공격을 연신 펼쳤다. 치우는 그 초식들을 힘이나 몸으로 막으며 하나씩 훔쳐냈고, 훔친 초식을 그대로 포정한테 펼치며 어떻게 대응하는지 살폈다.
마치 예전에 적무혈이 오작과 싸우면서 창법을 훔치던 모습과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적무혈은 오작보다 훨씬 창술 재능이 높고 경험도 풍부하다. 그래서 빠르고 쉽게 훔쳐냈다.
그러나 치우는 칼을 쓰는 법을 정식으로 익힌 적도 없고 전투 경험 역시 부족하다.
귀기에 홀려 난장을 피우며 다니던 때의 전투 기억이라도 있으면 좀 나을 텐데, 치우는 자신이 요수촌을 반쯤 부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어설픔이 오히려 호재로 작용했다.
화가 잔뜩 치민 포정은 물론이고, 빙 둘러싸고 구경하는 스물이 넘은 봉래도 제자들도 치우가 포정의 도법을 훔친다는 생각을 못 했다.
깔끔하다 못해 군더더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포정의 공격과 치우의 어색한 초식이 너무나도 다르게 보였다.
"야. 너 그거 알아?"
치우가 갑자기 질문했다. 포정은 별 미친놈 다 본다는 얼굴로 치우를 쳐다봤다.
"백천귀일해라고."
수많은 강이 결국 한 바다에 흘러든다는 말이다. 포정은 공부와 담을 쌓고 살았기에 처음 듣는 말이고 뜻도 몰랐다.
"놀라지 마."
갑자기 치우의 무공이 변했다. 포정과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틈틈이 오작의 창법을 떠올렸고, 창과 칼의 다름을 고민하며 나름대로 변화했다.
봉래도에 뿌리를 두고 창녕산의 정수精髓를 흡수한 오작의 창법이 치우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도법이 되었다.
휘두르는 형태와 방식, 힘을 싣는 방식, 거두는 방식, 찌르는 방식 모두 다르지만, 뿌리는 같았다.
진즉에 바다로 흘러 들어간 오작의 창법 자취를 따라 치우의 도법도 해변에서 어슬렁거릴 수 있었다.
'저놈 뭐지?'
분명히 어설픔이 가득한 놈이었는데 갑자기 한 치 틈도 안 보이는 어마어마한 무공 고수로 탈바꿈했다.
구경하던 봉래도 제자들은 점점 살심이 커졌다.
처음엔 몰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행적이 의심스러웠다. 분명히 자신들이 찾는 자단과 연관이 있을 거로 생각해 일부는 금계산을 수색하는 일을 포기하고 치우를 잡으려 했다.
어떻게든 산 채로 잡으려는 생각이었는데, 치우가 보여주는 모습에 질투가 타올라 살심을 참기 힘들었다.
치우가 아무리 천재여도 포정의 도법을 바탕으로 깔지 않으면 오작의 창법을 도법에 접목하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도 치우가 포정의 도법을 훔쳤다는 생각을 안 했기에 어마어마한 오해를 낳고 만 것이다.
'그 뱀만 찾아내면 된다.'
포정을 몰아붙이며 치우는 은신술로 숨은 뱀의 종적을 감지하려 애썼다. 한칼에 여기 있는 놈들 전부 죽일 방법을 찾은 것이다.
- 작가의말
포정은 백정이라는 뜻입니다. 포정 덕분에 치우의 무공이 비약적으로 강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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