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대회전萬人大會戰
청제일만靑帝壹萬
청제 편은 만 명이고
구려삼천玖黎參仟
구려 편은 삼천이다
청제는 뇌공과 풍백 그리고 백 명에 이르는 술사를 거느리고 중군을 자처했다. 중군은 청제를 오래 모신 유능한 신하와 정예 병사들로 이뤄졌다.
선봉은 천 명으로 키가 크고 힘이 강한 병사가 대부분이었다. 전원 갑옷과 투구를 착용했고 등에 방패를 멨으며 무기도 모두 청동으로 만든 칼이나 도끼였다.
좌군은 이천 명으로 오장국에서 양성한 병사들이다. 이들은 중군과 더불어 완전한 청제의 사람이다. 선봉은 지휘관만 청제의 사람이고 남은 자들은 여러 연맹국에서 보낸 병사다.
우군 역시 연맹국에서 차출한 병사로 숫자가 삼천 명이 되었다. 이백 규모의 기마병도 있지만, 함께 훈련한 시일이 짧아 척후로나 겨우 쓸 정도다.
숫자는 많지만, 좌군이나 선봉보다 전투력이 떨어질 거로 예상했다.
후군은 사천 명으로 규모가 가장 크지만, 보급을 책임진 부대의 특성상 전투력은 기대할 바가 못 된다.
쌀과 무기와 방패와 갑옷 등을 운송하고, 휴식할 때 천막을 치고 음식을 만드는 역할이다. 이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병사 이백 명이 있긴 하지만, 승리 후 전장을 수습할 때나 써먹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보급부대를 따로 움직이면 구려국에 며칠 일찍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청제는 굳이 보급부대와 함께 움직이며 세를 과시했다.
"구려국 상황은 어떤가?"
"구려국 자체 병력이 이천 조금 넘고, 연맹국들이 보낸 병사가 천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구려국 편을 든 국가 대부분은 구려국을 좋아해서라기보단 청제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상황이다. 즉 청제의 적이 구려국의 전우가 된 것이다.
눈치를 보며 체면치레로 지원을 보낸 청제의 연맹국들과 달리 이들은 지면 국가가 사라질지도 모르기에 확실한 정예만 보냈다.
고작 삼천이라고 얕볼 상대가 아니다. 게다가 단단하지는 않아도 형양의 성벽이 이들을 지켜준다.
'공공 때문에 망했다.'
청제는 공공과 적제와 예전부터 한통속이었다. 영위앙이 구려국을 제치고 청제가 될 수 있었던 건 적표노와 공공의 도움도 컸다.
그러나 신농을 죽이는 일에서 청제는 변심했고, 결국 신농이 죽은 후에 적표노를 황으로 추대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함추뉴와 백초거가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청제도 모르쇠를 놓은 탓에 적제는 황이 되지 못했고 공공은 흑제가 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공공이 우사와 운사를 빌려달라고 하자 청제는 거절할 수 없었다. 끊어질 듯 말 듯 하던 공공과 적제와의 연결이 완전히 단절될 수도 있어 어떤 핑계도 대지 못했다.
그런데 운사와 우사가 단기간에 회복하기 어려운 부상으로 돌아왔고 공공이 변심하여 구려국과 손을 잡았다.
'어차피 안 될 거 적표노를 그때 적극적으로 밀어줬어야 했는데.'
자신이 황이 될 욕심에 백초거와 함추뉴와도 사이 나쁘게 지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소극적으로 적표노 편을 들었다.
결국엔 싸움으로 황의 자리가 결정 날 걸 알았으면 그때 확실하게 적표노 편에 섰으면 어땠을까 늘 후회되었다.
"싸움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지?"
"술사가 백 명이나 되는 우리 압승이지 않겠습니까?"
구려국엔 구망뿐이다. 비록 구려국의 왕과 마준이라는 자가 걱정되긴 하지만, 둘을 합쳐봤자 겨우 셋이다.
구려국의 왕과 마준이라는 자는 무인이지만, 웬만한 법술은 다 막아내는 갑옷이 있어 술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청제 쪽은 청제 자신 외에도 뇌공과 풍백이 있다. 셋이 가장 강한 상대 셋을 잡아두기만 하면 술사 백 명의 힘을 빌려 압승할 수 있다.
"놈들이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우리 병력 구성을 저들이 아예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알고도 못 막는 게 있습니다. 태풍이나 홍수 그리고 산사태처럼 말이죠."
사실 청제 자신이 누구보다 자신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신중한 척하는 건 부하들까지 긴장이 너무 풀릴까 봐 일부러 겉으로만 그러는 거였다.
"청제께 아룁니다. 형양에서 삼십 리 되는 곳입니다. 오늘은 우선 여기서 쉬는 게 좋습니다."
"북을 울려라."
청제의 명에 따라 북이 울리자 행진이 멈췄다. 보급부대 소속들이 땅을 파고 천막을 세우고 부뚜막을 쌓았다.
며칠 시간을 들여 이곳에 작은 성채를 만들 예정이다. 보급부대를 비롯해 일부 병력은 여기에 두고 남은 병력을 데리고 구려국과 싸워야 한다.
"여기에 목책 세운다. 그리고 여기도."
상대가 기마병으로 급습하는 걸 대비하여 군데군데 저지선을 만들었다.
사천 명이나 되는 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뿌듯함이 느껴졌다. 전투력은 아직 구려국의 정예병에 못 미치지만, 서부의 정규군을 빼면 가장 훈련이 잘된 군대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공공 대신 다른 흑제를 세워야 하는데. 적제는 강제명이라는 자를 밀어주고. 희운이라는 놈은 왠지 믿음이 안 가니 최소 흑제는 내 편으로 해야 한다.'
아직 구려국과 전투를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청제는 벌써 승전 이후를 고민했다.
"청제께 아룁니다. 구려국 부대가 도발합니다."
"응? 여기까지 와서?"
무려 형양에서 삼십 리나 되는 곳이다. 편하게 성벽에 의지하면 사망자도 줄일 수 있는데 왜 굳이 먼 곳까지 나와 도발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숫자가 천 명입니다. 복장으로 봐선 구려국 정예병인 듯합니다."
청제는 신중하게 고민했다. 수비하는 자의 장점이라면 편하게 쉬면서 성벽에 의지하여 지친 침략자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형양처럼 큰 물줄기가 셋이나 성안을 관통하는 곳은 식수 걱정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들이 먼저 뛰쳐나와 도발할 이유가 없다.
"부대를 이끄는 자는 누구냐?"
"구려국의 왕의 깃발 그리고 마준이라는 자의 깃발도 보입니다."
"그럼 구망도 왔다고 봐야겠군."
모든 술사가 전장에서 역할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평범한 술사는 병사 열 명 죽이는 것도 힘들다. 상대가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정예라면 셋 죽여도 잘했다고 칭찬받는다.
그러나 술사는 상대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쉽고 빠르게 해낸다. 특별한 법술이 군대의 운용과 제대로 맞물리면 어마어마한 효과를 본다.
그리고 패전을 대비하여 술사가 중요한 자들의 도주를 돕기도 한다.
'운사랑 우사가 아쉽군.'
둘은 하는 일이나 받는 대접에 비해 약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상대가 뭘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법력이 많은 술사 둘은 꽤 아쉬운 전력이다.
"다들 의견 있으면 내 보아라."
청제는 웬만해선 먼저 말을 꺼내는 법이 없다.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도발을 무시하면 병사들 사기가 크게 꺾입니다."
"싸우는 건 당연한 일이고. 어떻게 싸울지와 뭘 대비해야 할지 고민하라고."
수하들이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청제가 북부를 통일한다고 해도 하나의 국가가 되는 건 아니다. 동부 전체를 하나의 왕이 관리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든 청제 눈에 들어 왕이 되려고 모두 침을 튀겨가며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그때. 전령이 달려왔다.
"놈들이 천천히 전진합니다."
청제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탕 내리쳤다.
"선봉과 좌군과 우군 모두 출동한다. 중군은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하여 후군을 지킨다. 재상과 태사는 나와 함께 구려국을 상대한다."
전투는 좌우군과 선봉한테 맡기고 중군에선 청제와 뇌공과 풍백만 참전하기로 했다. 청제는 상대가 천 명을 미끼로 군대를 끌어낸 다음 보급부대를 노릴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추측했다.
구망과 구려국의 왕 그리고 마준을 상대해야 하기에 중군에서 가장 강한 셋은 전투부대를 지원하기로 했다.
평소 역할 분담을 명확히 했기에 긴급 상황에도 허둥대는 자가 없었다. 청제는 뇌공과 풍백을 좌우로 거느리고 앞으로 나갔다.
'소문이 사실이었군.'
구망이 청룡의 가르침을 받아 엄청나게 강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청룡이 강신한 사실을 알기에 청제는 아예 헛소문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직접 느껴보니 소문이 오히려 모자란 느낌이었다. 예전에 법력이 부족하여 빌빌거리던 그 구망이 아니었다.
"풍백, 저게 뭔지 알아?"
뇌공은 구망의 몸에서 나온 법력이 천 명 병사한테 깃드는 걸 보고 질문했다.
"나도 아는 법술인데, 법력이 부족해 저렇게 못 해. 병사들 방어력을 높여주고 상처를 입어도 빨리 회복하게 하는 법술이야."
"설마, 진짜 전면전하러 온 건가?"
구망의 법력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진 건 사실이다. 청제도 감히 자신이 구망보다 법력이 많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저런 식으로 낭비하면 청제와 뇌공 그리고 풍백의 공격을 막아낼 법력이 남지 않을 것이다.
"설마."
풍백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뭔데?"
"공공이 심해수를 지원한 게 아닐까요?"
질문은 뇌공이 했지만, 대답은 청제한테 돌아갔다.
"벌써 그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졌다고?"
"뭔가 거래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나도 밑천 하나 까야겠군."
말은 마친 청제 역시 법술 하나 펼쳤다. 갑옷의 방어력을 높여주는 효과는 없지만, 힘을 북돋워 주고 상처를 빨리 회복하게 하는 법술이었다.
'영영초榮榮艸 법술이 경지에 이르렀구나.'
구망의 법술이 효과가 더 많다고는 하지만, 육천 명에 육박하는 병사들한테 법술을 사용한 건 청제의 법력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경지가 부족하면 자칫 법술에 실패하여 법력만 날릴 일이다.
청제는 품에서 붉은 꽃잎을 꺼내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었다. 뇌공과 풍백은 청제의 법력이 빠르게 차오르는 걸 확인하고 속으로 세게 놀랐다.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괜찮아. 어차피 너희 둘이 있는데 뭔 걱정이야."
모든 싸움에 청제가 나서서 결정적 역할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첫 대결에 조금 무리하여 기세를 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조금 더 여유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장국에서 키운 이천 규모의 부대는 정연하게 도열한 채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청제의 법력을 받은 선봉과 우군은 흥분하여 자기들끼리 구려국의 부대를 향해 전진했다.
청제의 법술로 몸에 힘이 깃들며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어차피 저러라고 데려온 놈들이야. 이기더라도 지휘에 복종하지 않은 책임을 물어 책망할 수 있으니 나쁜 건 아니다."
연맹국들의 공적을 깎아내리면 청제의 위신이 더 선다. 지휘도 안 듣는 놈들을 데리고 이겼다는 건 청제가 유능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래도 너무 많이 죽으면 여론이 나빠질 수 있습니다."
"놈들 꿍꿍이를 알아채기 전까지 좌군은 일단 움직이지 마라."
전투 지휘는 선봉을 책임진 선봉장군이 맡았다. 자발적으로 싸우려고 나가는 병사를 괜히 말리면 사기가 말이 아니게 된다. 선봉장군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전군을 돌격시켰다.
좌군 역시 돌격 명령이 전해졌지만, 청제의 지시에 따라 좌군 지휘관이 묵살했다.
"영약을 얻어 젊어졌다더니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젊어진 모습으로 나타난 구려국의 왕이 참마도를 휘두르며 앞장섰다. 그 곁엔 방패와 긴 칼을 든 마준이 있었다.
왕과 왕국 최고의 전사가 앞장서자 구려국 정예들의 사기는 빠르게 정점을 찍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집단 광분에 진입했다.
눈이 밝아지고 숨이 깊어졌으며 팔다리에 힘이 깃들었다. 당분간은 쉽게 지치지도 않고 공격을 당해도 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좌군을 전진 시켜 놈들 측면을 두드린다. 우리도 참전한다."
첫 격돌에 연맹국들이 보낸 군대가 처참하게 밀렸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나았을 텐데, 청제의 법술로 목숨은 끈질기게 붙어있다.
구려국의 공격에 팔이 잘리거나 큰 부상을 당한 놈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군의 사기가 엉망이 되었고 상대 기세는 늦가을 갈대밭 태우듯 거세게 일었다.
그때. 청제의 예상대로 보급부대 위주의 후군에도 공격이 들어왔다. 접전이 생기기도 전에 화살이 비처럼 날아드는 걸 보니 칠봉국에서 투항한 병사들이 틀림없었다.
"보급부대에 무기를 분배해라. 그리고 중군에게 우리가 이기고 돌아갈 때까지 최대한 버티라고 전해라."
정면에선 천 명과 육천 명, 후방에선 사천 오백 명 정도와 이천 명이 붙는 전투가 되었다.
청제는 커다란 불덩이를 만들어 구려국 왕에게 던졌다. 이름은 같은 왕족밖에 모르고 아명이 뭐였는지는 청제도 잊어버렸다.
"전하."
불덩이를 발견한 마준이 크게 외치며 방패로 막아섰다. 쾅 소리와 함께 마준이 형편없이 밀려났다.
방패와 갑옷 덕분에 상처를 입진 않았지만, 청제가 전력으로 던진 불덩이를 정면으로 막으려다가 강한 충격을 받았다.
"흐압!"
구려국의 왕이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참마도로 불덩이를 때렸다. 쾅 소리와 함께 구려국의 왕이 하늘을 날았다.
대신, 청제의 불덩이도 왕이 있던 자리에서 폭발하며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벌떡 일어난 구려국의 왕과 마준이 다시 앞으로 달리자 구려국 정예들이 짐승 같은 소리를 질러댔다. 같은 편이면 무척 든든하겠으나, 적이면 오금이 저릴 울부짖음이었다.
- 작가의말
능력보다 욕심이 큰 자는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정치인들 보면 답 나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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