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개천부盤古開天斧
연탄구과連呑玖果
불사과 아홉 개를 연신 삼켜
형천득연刑天得蓮
형천은 연꽃을 얻었다
고기를 우물우물 대충 씹은 형천은 국을 후루룩 마셨다. 갓 비워진 입엔 또 새로운 고기로 채워졌다. 굶주린 소가 여물 씹듯 빠르게 우물거린 형천은 이번에 술로 고기를 넘겼다.
고기 덕분인지 술 덕분인지 초췌하던 형천의 얼굴이 활짝 폈다.
거기에 치우가 거들기까지 하니 송아지만 한 대형 멧돼지 한 마리가 순식간에 뼈만 남기고 사라졌다.
"할 일이 많으니 그만 일어나자. 이따 저녁에 허리띠 풀고 제대로 먹어보자."
치우의 말에 형천은 손가락의 기름을 쪽 빨면서 아쉬운 얼굴로 궁둥이를 의자에서 뗐다. 그리고 오작은 학을 뗐다.
"어떻게 된 일이야?"
조용한 곳을 찾은 오작이 형천을 다그쳤다. 이천 근이 넘은 황금은 가난한 나라 하나 살 만한 큰돈이다. 운만 맞으면 그 돈으로 요마화보 등급의 법보도 얻는다.
"암시장暗市場이라고 환수에 속하는 요괴들이 운영하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불사과를 전문 파는 원숭이 환수가 있습니다."
사실 마수나 환수는 요괴와 다르다. 그러나 인간은 이들도 모두 요괴라고 불렀다. 평범한 인간은 마수인지 환수인지 아니면 그저 요괴인지 구분할 안목도 지식도 없다.
형천은 우연한 기회에 암시장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불사과를 발견했다. 남부에서 차기 축융이 될 인재라는 소문이 자자한 형천은 불사과를 먹을 결심을 내렸고, 황금을 얻으러 요수촌에 갔다.
운 좋게 치우와 오작을 만나 소원대로 황금을 얻었고 다시 암시장을 찾았다.
"법술로 벼락을 내리면 비석이 드러나고, 비석을 뽑으면 암시장으로 통합니다."
오작과 치우는 눈빛으로 대화하여 풍령비와 비슷한 이동형 영지 입구가 분명하다는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렸다.
"황금 이백 근을 주고 불사과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바로 복용했는데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형천은 반나절이나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으나 그저 처음에 배가 조금 불렀던 걸 빼면 아무 효과도 없었다. 비록 쉽게 얻은 황금이지만, 거기에 담긴 오작과 치우의 마음을 생각하니 치솟는 화를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
다행히 원숭이 환수도 양심이 없지 않았다. 형천이 확실히 불사과를 먹었고, 불사과가 사라졌음에도 효과를 보지 못했음을 확인하고 새 불사과 하나를 더 줬다.
"근데 여전히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체질을 검사한다고 난리를 피웠는데, 순수한 불의 아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원숭이 환수는 형천의 문제도 아니라는 걸 확인한 후 큰 결심을 내렸다. 하나에 황금 이백 근을 하는 불사과를 형천한테 백 근에 팔기로 했다.
그렇게 형천은 무려 불사과를 아홉 개나 먹었다.
"아니. 그럼 황금 천삼백 근이 남아야 하잖아. 왜 거지가 됐는데?"
치우가 다그치자 형천이 또 눈물을 글썽였다.
아홉 개의 불사과를 먹은 후 드디어 반응이 왔다. 뱃속이 마치 화룡火龍 몇 마리가 기어 다니는 듯 들끓었다.
손발이 뜨겁고 사지와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숨을 내쉴 때마다 코와 입에서 불이 뿜어지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형천의 몸은 열기로 충만했다.
"갑자기 몸에 불이 붙었어. 머리카락이나 솜털은 물론 옷까지 그대로인데 남은 황금이 녹아서 사라졌어."
형천이 거지가 된 이유다. 요수촌으로 갈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노잣돈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귀하게 자란 형천은 돈이 없는 삶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사냥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 줄 처음 알았다."
오작과 치우가 쉽게 사냥하는 걸 봐온 형천에겐 큰 충격이었다. 쥐 한 마리 잡으려고 반 시진씩 웅크리고 있어야 했고, 새들은 형천이 미처 다가가기도 전에 홰를 치며 도망갔다.
그 과정에 넘어지고 구르며 옷이 해졌다. 몇 끼씩 먹지 못해 물로 배를 채운 적도 자주 있었다. 게다가 길을 헷갈려 모산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가기까지 했다.
천신만고 끝에 모산까지 오긴 했지만, 수중에 한 푼도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산파의 황금충과 행상진의 장사치들은 철저히 돈으로만 움직였다.
"우리가 올 줄 알고 기다린 거야?"
"아니. 갈 데가 너무 없어서. 원래부터 모산으로 오기로 했기에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도착하니 다음에 뭘 할지 모르겠더라."
"내가 좀 살펴도 될까?"
"네, 형님. 도대체 무슨 문젠지 좀 알아봐 주십시오."
오작은 오른손을 형천의 왼손 맥에 대고, 왼손으론 형천의 목을 감쌌다. 목은 가장 많은 기운이 움직이는 통로여서 일반적이지 않은 걸 찾아내려면 반드시 살펴야 하는 곳이다.
형천의 기운을 살피는 오작은 물론, 구경하는 치우마저 숨을 멈췄다.
"구엽금련玖葉金蓮이다."
숨죽이고 오작이 입을 열기만 기다리던 치우와 형천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구엽금련이 뭔지 들어본 적 없는 듯했다.
"천삼백 근 황금은 녹아 사라진 게 아니라 네 몸이 흡수했다. 그 황금으로 아홉 개 불사과를 감싸서 잎이 아홉 개인 연꽃이 되었다."
오작이 말한 엽은 잎이 아닌 꽃잎이었다. 정확히는 판瓣이라고 불러야겠지만, 큰 꽃은 그냥 엽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좋은 겁니까?"
형천은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 아는 게 꽤 많다. 그러나 형천의 지식은 주로 상식적인 부분에 집중되었다.
"좋은 거지. 불사과는 불의 힘을 품었다. 불은 오행에서 쇠를 녹이는 힘으로, 쇠를 이긴다. 그런데 황금이 불사과를 감싼 걸 보면 불의 기운이 쇠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형. 결론부터 말해."
치우의 다그침에 오작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기로 했다.
"아홉 불사과가 합치려는 거 같아. 전설이 진짜라면, 불사과不死果가 영생과永生果로 변할지도 몰라."
"형님. 불사랑 영생은 뭐가 다릅니까?"
형천의 질문에 치우도 눈을 반짝였다.
"불사는 쉽게 죽지 않는 걸 말해. 그러나 불사과를 뛰어넘은 수준과 크기의 힘 앞에서 무력하지. 어쨌든 이름처럼 불사가 되는 건 아니야. 영생 역시 불사와 마찬가지로 죽을 수 있다. 차이라면, 영생을 얻은 자는 죽어도 쉽게 부활해.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죽기 전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게 가능해."
형천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형천이 불사과를 원하는 건 쉽게 안 죽으려는 것보다 힘이 필요해서였다.
"영생과도 불사과와 마찬가지로 복용자에게 큰 힘을 줘. 어떤 힘을 주는지는 나도 잘 몰라. 사실 네가 구엽금련을 품기 전까지는 나도 전설 취급했거든. 실제로 있는 게 아니라 상상으로 나온 물건이 아닌지 의심했어."
"형님은 이런 얘긴 다 어디서 들은 겁니까?"
"있어. 허풍쟁이 도사라고. 삼계에선 모르는 게 없다고 큰소리치는 영감인데, 나한테 글도 가르치고 천문을 보는 법도 가르쳤어. 내가 아는 신기한 이야기들 다 그 도사가 해준 거야."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오작은 속으로 무척 놀라고 있었다. 왠지 그 도사가 언젠간 써먹을 줄 알고 미리 이런 얘기를 해준 게 아닌지 문득 의심이 들어서였다.
대화를 마친 일행은 법보 처분하러 갔다. 치우 소매에서 주렁주렁 나오는 법보에 딱정벌레로 추정하는 황금충도 꽤 놀랐다.
"너희 도둑놈 소굴 털었어?"
이만큼 많은 법보를 보유한 자라면 평범할 리 없다. 그런 자가 황금이 필요해서 법보를 판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덤비는 요괴 처리하고 영지 털었지. 다음에도 여길 찾을 거니까 가격 좀 넉넉하게 쳐 줘. 괜히 덤터기 씌우려고 하면 흥정 없이 다른 데로 갈 테니까 알아서 잘해."
오작의 말에 황금충이 피식 웃었다.
"여긴 모든 가게가 똑같은 가격을 받아. 우린 황금을 다루는 자. 작은 것을 탐내 큰 것을 잃지 않는다."
그때 형천이 불쑥 끼어들었다.
"형님. 저 방패 제게 주시면 안 될까요?"
"둘이 어울리긴 하네."
방패와 형천을 번갈아 살피던 황금충이 말했다. 오작은 법보 더미에서 방패를 뽑아 형천에게 건네줬다.
"법보 많이 팔아준 데 감사하다는 의미로 조언 하나 하지. 그 방패는 주인의 기운으로 다스리면 더 강해질 수 있어. 예전 주인이 법보의 격에 한참 못 미치는 얼간이었는지 방패의 기운이 정갈하지 않아."
"법보 가격에서 도하주 두 척 가격은 빼고 줘. 도하주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이틀이면 돼."
"그럼 우리 둘이 쓸 도하주를 부탁해."
"형님, 저도 돕겠습니다."
형천이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넌 조용한 곳에 가서 열매가 맺힐 때까지 기다려."
구엽금련은 꽃이다. 꽃은 열매를 맺으려고 피는 거다. 괜히 오작과 치우의 일에 끼어들다가 구엽금련이 영생과를 맺지 못하고 시들면 형천에겐 큰 손해다.
"이제껏 받기만 해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런 게 인연이겠지.'
형천을 보면 자꾸 친근한 감정이 생기고 돕고 싶은 마음이 든다.
"기왕 받은 김에 더 받아라. 남은 돈으로 얘 무기 하나 맞춰줘."
황금충은 더듬이를 쑥 뻗어 형천의 손을 더듬거렸다. 한참 지나고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 너 나이가 얼마야? 왜 성장 잠재력이 아직도 이렇게 많이 남았지?"
"그게 무슨 소리야?"
치우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질문했다.
"덩치를 보면 이미 성장을 마친 상태인데,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았다고 해."
"그럼 나도 봐줘."
황금충은 더듬이로 치우의 손도 쓰다듬었다.
"네놈도 이상하군. 성장이 끝났는데 더 성장할 수 있다니. 너희 진짜 순수한 인간 맞아?"
"헛소리 말고 빨리 얘한테 맞는 무기가 뭔지나 말해."
오작의 다그침에 황금충은 의문을 접고 주문을 중얼중얼 외웠다. 한참 지나서 주문을 멈춘 황금충이 더듬이로 자기 머리와 목을 연신 긁었다.
"제기랄. 주문 틀리게 안 외웠는데. 인간, 너 혹시 반고의 후손이냐?"
"뭔 소리야?"
이번에도 치우가 끼어들었다.
"너희 반고가 하늘과 땅을 분리하려고 첫 도끼질을 한 게 우리 모산인 건 알아?"
황금충은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태산이라고 하던데?"
오작이 말했다.
"저는 화산이라고 들었습니다."
형천도 자신이 아는 바를 솔직히 말했다.
"다 헛소리야. 우리 모산에서 첫 도끼질을 했고, 그래서 모산파에 반고개천부가 있는 거야. 근데 이놈에게 가장 적합한 무기가 그거라고 나왔어."
"가격은 얼만데?"
"산봉우리에 박힌 도끼를 뽑을 수 있다면 돈을 안 받아."
황금충은 더듬이로 산봉우리 하나를 가리켰다.
"저게 바로 반고가 첫 도끼질을 한 반고봉이야. 하늘과 땅을 분리한 후 돌아와서 도끼를 저 봉우리에 꽂고 사라졌어."
셋은 짧게 상의하고 우선 도끼를 뽑는 데 도전하기로 했다. 형천은 물론 힘에 자신 있는 치우 역시 의욕이 불탔다.
"당신도 도전할 겁니까? 도전자만 산봉우리를 오를 수 있습니다."
길을 안내하던 황금충의 말에 오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끼가 욕심나기보다는 형천과 치우의 도전을 지켜보려는 속셈이었다.
산봉우리를 올라가며 풀이 죽어 내려오는 사람과 요괴를 가득 봤다. 힘에 자신 있는 코끼리나 무소 그리고 하마 등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수천 년 동안 도끼를 뽑기는커녕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한 자조차 없습니다. 부디 인연이 닿아 여러분이 저 도끼를 뽑았으면 합니다."
"도끼를 꼭 뽑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오작이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맥이 있습니다. 그 맥의 혈을 저 도끼가 막고 있죠. 저걸 뽑으면 천하가 번창할 겁니다."
'난세가 도래할 수도 있고.'
영원한 번창은 없다. 살기 좋으면 인구가 확 늘 것이고, 그러다 수용 범위를 넘어서면 그때부터 전쟁이다. 왕을 비롯한 힘을 갖춘 자들이 부귀영화를 계속 누리려고 백성을 수탈할 거고, 강한 힘을 갖춘 나라는 옆 나라를 약탈하거나 점령할 것이다.
산봉우리로 올라가니 오작에겐 조금 크고 치우나 형천의 덩치에 어울리는 도끼가 하나 있었다.
저 작은 도끼가 하늘과 땅을 분리한 반고의 법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크기만 작을 뿐이 아니라 모양도 초라하고 겉으로 느껴지는 힘도 형편없었다.
그러나 힘이 장사인 요괴들도 뽑지 못하는 걸 보면 그저 평범한 법보는 절대 아니다.
저녁이 되어서야 오작 일행의 차례가 왔다. 몇 번 시도하고 바로 포기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집착을 못 버리고 일각 이상 시간을 허비하는 놈도 있었다.
"형님이 먼저 하시죠."
형천은 많이 떨리는지 손으로 가슴과 배를 연신 쓸며 말했다. 오작은 성큼 다가가서 한 손으로 도낏자루를 잡은 후 힘껏 위로 당겼다.
도끼는 꿈쩍도 안 했다.
"네가 먼저 해. 나 아까 먹은 거 체한 거 같아."
치우 역시 사양하지 않고 도낏자루를 잡았다. 끙 힘을 주자 자루가 부르르 떨렸다.
"좀 더 힘내십시오. 가망이 보입니다."
황금충들이 가득 몰려와 치우를 응원했다. 그러나 치우는 곧 자루를 놨다.
"나랑 인연이 아닌 거 같아."
뒤로 물러선 치우는 부들부들 떨며 주저하는 형천의 등을 떠밀었다. 심호흡으로 긴장을 다스린 형천이 도낏자루에 손을 댔다.
- 작가의말
선협에서도 피해갈 수 없는 원조 부심 - 우리가 최초여.
형천은 영생과를 얻은 게 아니라 구엽금련을 얻은 겁니다. 꽃잎이 9개인 연꽃을 품었죠. 이 구엽금련이 열매를 맺으면 그게 영생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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