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암불괴신砧巖不壞身
천망회회天網恢恢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소이불루疏而不漏
성기나 절대 새지 않는다
즙무혼은 왼손으로 창을 막았다. 지난번에 수정 막대기로 변화한 오른팔이 오작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깨졌던 걸 생각해서다.
가냘픈 충돌음과 동시에 오작이 창을 회수했다. 즙무혼은 예상외로 미미한 충격에 가짜 공격이었음을 알아채고 화가 치솟았다.
얼음에 갇혀 흑수해에 잠긴 사이 즙무혼도 그저 놀지 않았다. 흑수해의 힘을 느리게 흡수하는 동시에 법술과 무공을 결합하여 침암불괴신을 얻었다.
침암불괴신 덕분에 최소 이십 년으로 생각했던 흑수해의 완전 흡수를 반 각도 안 되어 끝내고도 멀쩡했다.
격대전이로 생긴 약점인 오른쪽 가슴을 제외하면 웬만한 공격은 그저 맞아줘도 괜찮은 상황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팔 하나 잃었다.
왼손으로 공격하면 오른쪽 가슴이 노출된다. 오른팔로 수비하다간 지난번처럼 팔이 박살 나고 오른쪽 가슴이 적중당할지 모른다.
왼손으로 보호하고 오른손으로 공격하는 건 별 의미 없다. 지난번 공격에 당하고도 멀쩡한 걸 보면 법보를 변화해 만든 오른손 공격으론 작은 피해도 줄 수 없다.
오작이 깨달음을 얻으며 상처를 빨리 치유한 것인데 즙무혼은 오작의 수비가 강하다고 크게 오해했다. 오작이 부린 여러 수작으로 기세가 위축된 상황이어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한 탓이다.
오작이 다시 창으로 찔렀다. 힘이 실린 진짜 공격인지 아니면 방금처럼 맞아줘도 무방한 공격인지 판단이 어려웠다. 처음엔 힘이 안 실려도 틈이 나는 순간 강한 공격으로 전환할 수도 있어 즙무혼은 다시 왼손으로 막았다.
이번엔 충돌하기도 전에 오작이 창을 회수했다. 창을 거둬들이는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힘이 하나도 안 실린 공격으로 보였다.
"똥 마려운 개 보는 것 같군."
오작의 비아냥거림에 즙무혼의 인내는 점점 한계에 다다랐다.
슉 소리와 함께 창이 경쾌하게 찔러왔다. 즙무혼은 왼손을 가슴 중간에 두고 지켜봤다. 오작의 공격에 끝까지 힘이 안 실리면 창을 거둬들일 때 반격하기로 했다.
우웅 소리와 함께 오작의 창이 갑자기 강한 힘으로 더 빠르게 찔러왔다. 즙무혼은 황급히 왼손을 움직여 오작의 창을 막았다.
탁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오작의 창이 회수되었다. 엄청난 기세의 찌르기 역시 힘이 전혀 안 실린 가짜 공격이었다.
반각의 창법을 흉내 내어 기세만 키운 것인데 즙무혼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미처 즙무혼이 화난 마음을 다스릴 겨를도 없이 오작의 창이 다시 찔러왔다. 즙무혼은 창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왼손을 내밀어 미리 차단하려 했다.
오작의 창이 뱀처럼 유연하게 몸을 틀어 즙무혼의 손을 피하고 계속 찔러왔다. 즙무혼은 황급히 왼손을 거둬들이며 오른손으로 약점을 보호했다.
텅 소리와 함께 즙무혼은 두 걸음 물러났다. 이번 공격은 마지막 순간에 천지일선의 초식까지 동원하여 제대로 펼친 거였다.
처음부터 노린 게 아니라 찌르는 도중에 급하게 펼친 거여서 큰 피해는 없었지만, 즙무혼은 오작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냥 법술을 쓸까?'
즙무혼은 흑수해로 들어가기 전에 축융한테 편익조를 날려 육십 년 뒤에 꺼내 달라고 부탁했다. 즙무혼의 계산으로 오십 년에서 육십 년 사이면 흑수해의 힘을 다 흡수할 것 같았다.
흑빙을 깨거나 녹이는 건 자신이 할 수 없기에 유일한 아군이라고 여긴 축융한테 부탁한 거다.
그런데 축융이 강제명의 소재를 공공한테 누설하여 자신을 일찍 흑수해에서 끌어냈다. 공공의 밑에 심어둔 믿음직한 수하한테서 얻은 확실한 정보이고, 점괘술에 능한 요괴를 찾아 확인도 했다.
축융이 의심스러운 상황에도 즙무혼이 형산 축융봉으로 피신한 건, 오작의 공격으로 당분간 법술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몸이 된 탓이다.
억지로 법술을 펼친다면 내상이 더 깊어진다. 그렇게 되면 공공이나 다른 놈이 북부를 통일하여 흑제가 될지도 모른다.
공공의 추격을 막으려고 후계자 운운했지만, 부상을 빠르게 회복하고 혼란한 북부를 직접 수습할 꿍꿍이였다.
'고작 이런 놈 때문에 내 계획을 망쳐야 하는가?'
오작은 즙무혼의 망설임을 없애주겠다는 듯이 쉬지 않고 공격했다. 창끝이 늘 요해를 노려 즙무혼은 반격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약점이라고 하여 적중당하는 즉시 죽는 건 아니지만, 다른 부위보다 죽음의 위험이 큰 건 사실이다. 이번 죽음이 영원한 소멸인 즙무혼은 감히 모험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네가 착각하는 게 있어."
갑자기 오작의 창이 변했다. 꾸준히 노리던 오른쪽 가슴 대신 즙무혼의 목을 노렸다. 즙무혼은 오작이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하다고 여기며 계속 오른쪽 가슴만 지켰다.
"컥!"
마지막 순간에 급가속한 오작의 창이 즙무혼의 목을 힘껏 찔렀다. 즙무혼은 황급히 수호계 법술을 펼쳐 머리를 포함한 상체를 보호하며 뒤로 물러났다.
"약점이 분명한 넌 나한테 못 이겨."
즙무혼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기 목을 연신 만졌다. 오작의 창에 찔린 부위에 작은 흠이 생겼다. 침암불괴신은 오작이 마음먹고 펼친 공격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
"네놈을 적수로 인정해야겠군."
즙무혼의 기세가 바뀌었다.
"자존심 상하지만, 넌 내 천적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까다로운 상대다."
즙무혼의 몸이 시커먼 액체로 덮였다.
"널 죽이려면 작은 피해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겠구나."
즙무혼의 몸을 덮은 액체는 갑옷이 되고 방패가 되고 몽둥이가 되었다. 머리와 목 그리고 가슴을 비롯한 부위는 특별히 두꺼웠고 방패는 알아서 즙무혼의 몸 주변을 날아다녔다.
시커먼 기운을 풀풀 날리는 몽둥이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즙무혼이 훌쩍 앞으로 뛰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오작은 저홍패로 몽둥이를 막으며 멸천창으로 오른쪽 가슴을 노렸다.
쾅 소리와 함께 저홍패가 박살 났고, 멸천창은 검은 방패에 막혔다. 검은 방패 다음으로 즙무혼의 오른팔이 있고, 오른팔 다음엔 갑옷까지 있다.
웬만한 공격으론 세 겹의 보호를 절대 뚫을 수 없다.
오작은 황급히 창을 거두며 창대 끝으로 즙무혼의 몽둥이를 막았다. 저홍패가 잠깐 저지한 덕분에 몽둥이가 늦게 도착했고, 오작은 제때 공격을 막아냈다.
몽둥이에 실린 위력이 어마어마했지만, 멸천창 역시 단단함에선 둘째 소리가 서러울 정도여서 오작도 별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강한 공격이 안 먹히자 즙무혼은 몽둥이를 짧게 휘둘렀다. 오작은 멸천창을 세 번 찔러 몽둥이를 제지했다. 세 번의 찌르기가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연이어 몽둥이와 충돌하며 즙무혼의 공격은 또 막혔다.
"네 법력이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아까와 반대 양상이 되었다. 즙무혼은 오작이 쉴 틈을 안 주고 몽둥이를 휘두르고 오작은 낭패한 얼굴로 수비에만 열중했다.
"너도 다급해 보여."
몽둥이를 어렵게 수비하면서도 오작은 입으로 반격했다.
즙무혼이 다급한 건 사실이다. 법술을 펼치는 것보단 낫지만, 흑수해의 힘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 역시 꽤 부담되는 일이다.
'아까 괜히 밑천을 드러냈다.'
즙무혼에게 오작은 걱정거리도 아니다.
싸움이 길어지며 자신이 너무 약해지면 축융이 해코지할까 봐 두려울 뿐이다.
여러 방법으로 축융의 속내를 알아보려고 했는데 성과가 전혀 없어 다급한 나머지 상대 약점을 안다는 사실을 밝히고 말았다. 그게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을지 그땐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을 오작은 미처 몰랐지만, 이렇게 확실한 방법을 즙무혼이 처음부터 꺼내 들지 않은 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다급해 하지 않고 착실하게 수비하며 반격 기회만 노렸다.
꽝꽝거리는 소리가 점점 짧은 간격으로 터졌다. 즙무혼의 공격은 빨라질수록 위력이 강했다. 보통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제대로 한 공격에 힘이 더 실리는데, 흑수해의 기운으로 만든 몽둥이는 아니었다.
오작은 바닥에 뚜렷한 자국을 남기며 조금씩 뒤로 물러서야 했다. 제자리에서 버티기엔 반탄력이 너무 강했다.
"쉽게 죽이지 않을 거야."
즙무혼은 오작을 강한 공격으로 몰며 이를 갈았다. 이대로 오작을 죽인 다음 즙무혼은 축융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 오랜 친분을 생각하면 자신을 해코지할 것 같진 않지만, 즙선기의 혼을 멀쩡하게 놔둔 점이나 이번에 미리 꺼낸 점을 생각하면 무턱대고 방심할 수도 없었다.
"난 쉽게 죽일 건데."
오작은 치우 말투를 흉내 내며 즙무혼의 기를 채웠다.
화가 치민 즙무혼이 더 빠르게 공격했고, 오작이 물러나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미처 막지 못한 공격에 어깨를 스치기도 했는데, 팔괘자수선의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여 오작의 어깨가 부어올랐다.
다행히 멸천창의 수비로 몽둥이가 빗나갔으니 망정이지,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다면 목숨까지 위험했을 공격이었다.
어깨는 물론 오른팔까지 마비되자 오작은 막기보다 회피를 더 많이 하며 점점 물러났다. 승기를 잡은 즙무혼은 이번에 반드시 죽인다고 다짐하며 바싹 따라붙었다.
둘은 어느새 축융봉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죽어!"
물러나기만 하던 오작이 갑자기 반격했다. 거의 모든 힘을 끌어모은 것 같은 공격에 즙무혼은 수비를 선택했다. 함께 공격하면 오작을 반드시 죽일 수 있지만, 자신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어차피 이번 공격만 막으면 기진맥진한 오작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신중하게 수비하기로 했다.
작고 경쾌한 소리가 검은 방패에서 울렸다. 오작이 펼친 필살의 공격은 가짜였다.
화가 치민 즙무혼은 몽둥이를 힘껏 휘둘렀다. 오작은 마비되어 감각이 없는 팔을 억지로 올려 즙무혼의 몽둥이를 막으며 멸천창으로 즙무혼의 오른쪽 가슴을 노렸다.
방패가 움직여 오작의 창을 막았고 오른손이 그 뒤에서 대기했다. 둘 다 뚫리더라도 갑옷이 있으니 걱정할 게 전혀 없다.
즙무혼은 자신의 몽둥이가 오작의 오른팔을 부수고 몸통까지 으깰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때.
아주 평범하게 보이는 도끼가 즙무혼의 시야에 나타났다. 이미 목에 가까워서 반응하기엔 늦었다.
'반고?'
갑자기 나타난 반고의 도끼에 놀란 즙무혼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반고의 개천부는 아까 오작이 흠을 냈던 곳을 정확히 노렸다.
퍽 소리와 함께 오작의 오른팔이 납작해졌다. 팔괘자수선의 덕분에 조각나 허공에 날리진 않았지만, 회복하여 제구실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심하게 망가졌다.
그리고 오른쪽 가슴을 노렸던 공격 역시 방패에 아주 쉽게 막혔다. 마찬가지로 힘이 전혀 실리지 않은 가짜 공격이었다.
"뭐야?"
즙무혼은 갑자기 멀리서 보이는 자신의 몸통에 기겁해 소리쳤다.
"뭐긴. 네놈 대가리가 몸이랑 작별한 거지."
개천부로 즙무혼의 목을 벤 형천은 오작이 당부했던 대로 즙무혼의 목을 들고 도망쳤다.
"안돼!"
즙무혼은 오작이 멸천창으로 머리를 잃고 갈팡질팡하는 자신의 몸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오른쪽 가슴을 힘껏 찌르는 걸 보고 소리 질렀다.
즙무혼의 외침이 정신을 하나로 모은 오작의 귀에 닿았는지는 모르지만, 닿아도 소용이 전혀 없었다는 건 즙무혼 본인도 알 것이다.
모든 정신을 창에 모은 오작은 천지일선의 초식으로 즙무혼의 오른쪽 가슴을 힘껏 찔렀다.
"컥."
약점을 제대로 공격당한 즙무혼의 머리는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즙무혼의 눈에서도 시커먼 피가 흘렀다. 존재의 말살을 눈앞에 둔 자의 심정은 한두 번 죽어본 자는 감히 짐작조차 어려울 정도로 처참하다.
"혼자 못 죽는다."
말을 마친 즙무혼의 머리가 굳어버렸다. 그리고 즙무혼의 몸에서 시커먼 기운이 나와 오작을 덮쳤다.
"형님."
형천이 달리던 걸 멈추고 오작을 돌아봤다.
"빨리 가서 내가 시킨 대로 해."
오작은 시커먼 기운에 잠식되면서도 태연한 기색이었다.
형천은 잠깐 망설이다가 즙무혼의 머리를 들고 다시 달렸다. 어차피 돌아가도 자기 능력과 지식으론 오작한테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차라리 오작이 마음이 편하도록 시킨 일이나 제대로 하는 게 돕는 거다.
즙무혼의 저주를 담은 흑수해의 기운은 오작의 목까지 잠식했다. 즙무혼의 머리가 잘리며 그만큼 기운이 사라진 탓이었다.
오작은 즙무혼의 오른쪽 가슴에서 창을 뽑은 후 정중하게 말했다.
"흑제께 불경을 저지른 점 미리 사과합니다."
미리 즙선기한테 사과한 오작은 다시 천지일선 초식으로 오른쪽 가슴을 두 번 찔렀다. 이미 죽은 즙무혼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가문의 원수를 내 손으로 갚았다.'
아직 저주를 내린 자는 밝히지 못했지만, 아버지와 큰 숙부를 죽이고 가문을 멸문에 이르게 한 흉수는 직접 죽였다.
지장술로 숨은 형천의 도움을 받았지만, 목이 잘리도록 흠을 낸 것도 오작이 했고 목숨을 앗아가는 일격도 오작이 펼쳤다.
"허허. 이것 참."
즙무혼이 죽은 건 축융한테도 기쁜 일이다. 그러나 실력 차이가 명확한데도 약한 오작이 승리한 걸 보니 마음 어딘가 불편했다.
오작은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돌려 도망쳤다.
- 작가의말
오작은 ‘꼭 내 손으로 복수해야 한다.’ 이런 거 없습니다. 매력적인 성격이라고 여겼는데 최근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반성했습니다. 주인공은 치우처럼 무모한 놈이 해야 하고, 오작의 성격은 악당이나 조연에 더 어울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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