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계기구왕詭計欺玖王
지고천장智高仟丈
지혜가 하늘같이 높아도
난승탐념難勝貪念
욕심을 이기지 못한다
구구방의 우두머리는 구왕이다. 그러나 일반 요괴들과 달리, 구구방의 개 요괴들은 우두머리의 영지에서 함께 살지 않았다.
구왕을 비롯한 구구방의 아홉 요괴는 각자 영지 하나씩 만들고 평소엔 왕래도 별로 없었다.
이들은 구구방의 운영보다 금맥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황금은 법보를 만들 때 꼭 필요한 재료다. 넉넉한 황금으로 모산파茅山派의 황금충黃金蟲들에게 법보 제작을 의뢰하는 건 힘 안 들이고 실력을 키우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구구방으로 얻는 수익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어서 아예 팽개치진 않았다. 구구방에서 가장 강한 아홉 요괴는 매달 한 번씩 모여 중요한 일들을 처리했다.
장부를 확인하고 수하들을 꾸짖고, 수하들 실력으론 감당이 힘든 일들을 처리하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요수촌에 자리를 잡은 지 십오 년이 넘은 지금, 구구방과 시비 붙으려는 자가 적어서 처리할 일이 많지 않았다.
회의를 마친 구왕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석 달 동안 누구도 금맥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타나지 않는 시간이 길수록 굵은 금맥이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내 집에선 무려 일 년 반이나 금맥이 안 나왔어. 아무래도 이번엔 내 차례인 것 같단 말이야.'
구왕은 천구天狗의 후손이다. 해와 달을 삼키려다가 천계의 신선들한테 몰매를 맞고 쫓겨난 천구가 땅에 뿌린 씨 중의 한 갈래다. 대에 대를 이어 구왕에 와서는 피가 많이 희석됐지만, 강한 예감은 대체로 들어맞는다.
곧 자기 집에 금맥이 나타날 거라는 예감에 최근따라 기분이 한결 좋았다.
"대왕. 밖에 손님이 왔습니다."
구왕은 집에 시종 둘을 뒀다. 요괴는 아니고 법술은커녕 무공도 모르는 평범한 인간이다. 이들은 힘이 약해 도둑질해도 기껏해야 황금 몇 근을 훔칠 수 있고, 도망쳐봤자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잡힌다. 설사 마을을 벗어난다고 쳐도 냄새로 쫓으면 바로 잡아들일 수 있다.
"중요한 손님이야?"
요수촌의 요괴들은 웬만해서 집에 손님을 들이지 않는다. 금맥은 이제까지 밤에만 나타났지만, 그렇다고 낮에 나타나면 안 된다는 법도 없다.
굵은 금맥은 가끔 친구도 원수로 바꿀 수 있기에 요수촌은 서로 방문하지 않는 원칙이 암묵적으로 생겼다.
"황금 오십 근짜리를 의뢰했는데 오쟁꾼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선수금 떼먹은 게 아니냐고 항의하러 왔습니다."
구왕은 황급히 법술을 펼쳐 자기 수하들을 점검했다. 직속 수하 모두 그대로 있는 걸 확인한 구왕은 웃는 얼굴로 시종에게 지시했다.
"정중히 모셔라."
황금 오십 근이면 선수금이 열 근이다. 선수금 떼먹고 사라진 게 자기 수하가 아님을 확인한 구왕은 바로 손님을 안으로 들였다.
황금 열 근을 선수금으로 선뜻 내놓을 정도면 두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하나는 돈이 넘쳐나는 부자, 하나는 사람을 쉽게 믿는 멍청이.
"당신이 구구방 방주입니까?"
"그렇다. 의뢰 때문에 찾아왔다고?"
찾아온 손님은 셋이었다. 하나는 덩치가 크고 웬만한 요괴보다 힘이 세 보이는 인간이고, 둘은 가면을 써서 인간인지 요괸지 헷갈렸다. 만약 인간이라면 둘도 보기 드물게 큰 덩치다.
"당신의 수하가 선수금을 떼먹고 사라졌습니다. 선수금을 돌려주든지 빨리 의뢰를 마무리하든지 하시죠."
"선수금을 내고 받은 증명을 꺼내 보게. 내가 누군지 확인하고 반드시 엄벌하지."
상대는 서로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예상대로군. 잘 구슬려 황금이나 톡톡히 뽑아야겠다.'
구왕은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애써 숨겼다.
"혹시 구구방의 이름을 도용한 자에게 사기당한 건 아닌가?"
"개 요괴가 분명했고, 자기가 구구방의 오쟁꾼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세상에 개 요괴가 얼마나 많은데. 그 많은 개 요괴가 전부 구구방 소속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가면을 쓴 둘은 표정을 알 수 없지만, 얼굴을 드러낸 인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구구방에서 자체로 조사하겠네. 그러나 상대가 사칭한 거라면 우리도 방법이 없어. 혹시 중요한 의뢰라면 내게 직접 맡겨."
"그럼 선수금을 또 내야 합니까?"
"걱정하지 말게. 난 선수금을 받았다는 증명을 자네들한테 떼 줄 거야. 정해진 기한에 의뢰를 완수하지 못하면 증명을 들고 찾아와서 선수금을 돌려받으면 되네. 선수금을 일 할이 아닌 이 할을 낸다면, 의뢰 실패 시 보상금도 있다네."
"보상금은 금시초문입니다."
"그러니까 꼭 해결해달라는 의미로 선수금을 많이 내면 실패했을 때 선수금을 두 배로 돌려주는 방식이야. 오쟁꾼들은 그 정도 권한이 없고, 나처럼 지위가 높은 요괴만 가능한 일이야."
"이미 낸 선수금까지 인정하면 황금 스무 근을 내놓겠습니다. 의뢰를 완수하지 못하면 육십 근을 돌려줘야 합니다."
구왕은 잠깐 고민했다. 여기서 덥석 받으면 상대가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잡아떼면 의뢰를 접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지. 내가 사람을 시켜 자네들 선수금 떼먹은 자가 누군지 알아보겠네. 구구방 소속이라면 다른 왕의 수하여도 내가 책임지지. 그러나 구구방을 사칭한 거라면 그 황금 열 근은 나랑 관계없는 일이네."
상대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자 구왕은 바로 법술을 펼쳤다. 법술로 구구방의 모든 장부를 살펴 황금 열 근짜리 선수금은 없었음을 확인했다.
"자네들 아무래도 사기를 당한 것 같구먼."
"선수금으로 황금 서른 근을 드리겠습니다. 우리한테 사기 친 놈을 잡아줄 수 있습니까?"
구왕은 타고난 성정이 음흉하다. 상대의 상식적이지 않은 반응에 뭔가 있음을 짐작하고 코를 벌름거렸다.
"그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보게."
오작은 앞잡이와 오쟁꾼의 외모에 표두의 모습을 섞어서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요괴를 꾸며냈다.
구왕은 오작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꼬리로 법술을 펼쳐 자기 자식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채 일각도 안 되어 가장 총애하는 손자한테서 정보가 돌아왔다.
'금맥 지도?'
구왕은 놀란 나머지 당황한 마음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다.
손자가 보내온 정보는 이랬다.
얼마 전에 나타난 인간들이 몇몇 요괴와 접촉하여 영지 양도에 관해 협상했다고 한다. 중개인으로는 구구방의 오쟁꾼이라는 개 요괴가 나섰다.
금맥을 기다리다 지쳐서 영지를 팔고 떠나는 요괴가 가끔 있기에 누구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그래서 이유를 몰랐는데, 조사해보니 금맥 지도를 보유한 인간들이 특정 영지의 구매에 열을 올린다는 소문이 은밀히 퍼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원래 의뢰는 포기하고, 그 사기꾼을 잡아달라는 말인가? 선수금 삼십 근이나 주고?"
"그렇습니다. 그 도둑놈을 꼭 잡아주십시오."
구왕은 꼬리로 지시를 내리려다 멈칫했다.
'믿을 놈이 없네.'
황금 몇십 근의 작은 일이라면 믿을 수 있다. 피로 이어진 자식들이니까. 물론, 그 자식들이 싸지른 손주들까지 믿는 건 조금 어려운 일이긴 하다.
그러나 금맥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구왕 자신이라도 자기 아비를 배신할 수 있다.
'이놈들 입도 막아야 하고.'
금맥 지도에 관한 이야기가 은밀히 퍼지는 걸 보면 입이 굳은 놈들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상황을 보면 멍청하게 오쟁꾼을 자처한 사기꾼에게 금맥 지도를 도둑맞은 꼴이 아닌가.
이대로 돌려보내면 며칠 안에 금맥 지도의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수 있다. 요수촌에서 가장 강한 여섯 세력 중 하나지만, 무력은 조금 부족한 구구방이다.
더구나 구왕은 금맥 지도를 다른 여덟과 공유할 생각이 없다.
'죽이면 간단하겠지만, 도둑놈을 잡을 때까진 살려둬야지.'
눈알을 복잡하게 굴리던 구왕이 끝내 결심을 마쳤다.
"의뢰받기 전에 확인할 부분이 있네. 자네들이 진짜 의뢰를 맡긴 적이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사실이 아니라면 자네들은 사기당한 적도 없고, 있지도 않은 사기꾼을 내가 만들어 잡을 수 없잖은가. 의뢰 실패했다고 나한테 황금 삼십 근 뜯는 게 아닌지 걱정이네."
"그렇게 믿지 못하겠다면 다른 요괴 찾겠습니다. 요수촌에 사람 잘 찾는 게 구구방뿐인 것도 아니고요. 저희는 오쟁꾼이 구구방 소속이라고 해서 여길 가장 먼저 찾아왔을 뿐입니다."
구왕의 귀엔 '가장 먼저' 네 글자만 계속 맴돌았다.
"의심하는 게 아니네."
구왕은 다급히 오작의 말을 받았다.
"그래도 이런 절차가 꼭 필요하네. 아니면 내가 선수금을 안 받지. 그리고 자네들은 내 영지에서 지내게. 사기꾼이 자네들이 날 찾아왔단 사실을 알면 죽여서 입막음하려고 할지도 모르네."
"그렇게 큰 폐를 끼쳐도 되겠습니까?"
"아무렴. 혹여나 그놈이 구구방 오쟁꾼이 맞는다면 내가 큰 죄인일세. 그러니 그놈을 잡아서 신분을 확실히 하기 전까지 안전한 내 영지에서 지내게."
"마음 써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건 그 도둑놈이 흘리고 간 물건입니다. 그놈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요?"
구왕으로선 처음 보는 형태의 모자였다. 코로 냄새를 기억한 구왕은 두 시종에게 손님을 잘 접대하라고 명령하고 바로 영지를 나섰다.
요수촌 안에서 모자의 냄새를 찾은 구왕은 한참 고민했다. 새 냄새를 따라 사기꾼을 잡는 게 먼저인지, 낡은 냄새를 따라 의뢰인들의 동선을 확인하는 게 먼저인지 고르기 너무 힘들었다.
사기꾼을 잡아 금맥 지도를 얻는다면 횡재다. 확실히 금맥이 나타난다는 보장이 있다면 다른 요괴의 영지를 공격해 점령하면 된다.
금맥이 어디에 확실하게 나온다는 보장이 없으니 함부로 원한을 사지 않는 거지, 확신만 있다면 누구라도 다른 요괴를 죽이고 영지를 빼앗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금맥 지도가 어떤 건지 모르니 문제다. 금맥의 형태를 계속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다음에 나타날 금맥의 위치만 표기한 지도라면 시간제한이 있다. 금맥이 나타났다 사라진 후에 사기꾼을 잡아 지도를 얻어봤자 대나무 광주리로 물 긷는 셈이다.
낡은 냄새를 따라 의뢰인들의 동선을 확인하면 어떤 요괴들 영지에서 금맥이 나올지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사이에 사기꾼이 금맥 지도를 팔아버리거나 하면 낭패다.
'낡은 냄새는 확실하나 한 번으로 그치고, 새 냄새는 전부 아니면 전무다.'
구왕은 구구방을 만든 아홉 요괴 중 막내다. 그럼에도 방주가 된 걸 보면 힘만 센 게 아니라 머리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큰 욕심과 작은 욕심 사이에서 갈등은 깊어만 갔다. 큰 걸 노리다가 모두 놓칠까 봐 걱정이고, 작은 걸 노리자니 싯누런 황금산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둘 다 놓치지 않겠다.'
결심을 내린 구왕은 멀리 보이는 앞잡이를 불렀다. 방주의 부름에 앞잡이는 꼬리를 맹렬하게 흔들며 달려왔다.
"이 냄새를 기억해라."
구왕은 사기꾼의 냄새를 기억하는 앞잡이의 냄새를 기억해뒀다.
"이쪽으로 가면서 이놈을 찾아라. 구구방을 사칭하고 사기를 친 놈이라고 하는데, 이놈을 꼭 산 채로 잡아야겠다. 성공하면 널 오쟁꾼으로 올려줄 테니 절대 놓치지 말아라."
앞잡이는 연신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잡이한테 사기꾼의 추적을 맡긴 구왕은 낡은 냄새를 따라 요수촌 안을 어슬렁거렸다.
'녹사綠蛇의 영지 앞에서 일각을 머물렀어. 여기도 기억해 두자.'
낡은 냄새는 일곱 마리 요괴의 영지 앞에서 머문 흔적이 있었다. 구왕은 꼼꼼하게 의뢰인들의 냄새까지 확인했다.
'사흘 안에 사기꾼을 못 잡으면 이놈들을 친다.'
그때, 강한 벼락이 구왕의 뇌리를 쳤다.
'그냥 한 번으로 끝나는 지도라면 저놈들은 굳이 사기꾼을 찾을 필요가 없다. 이미 금맥이 나타날 요괴를 전부 아니까. 분명히 금맥이 나타나기 전에 늘 알려주는 지도여서 저놈들이 애타게 찾는 거다.'
자신의 추론이 정확한지 거듭 검토한 구왕은 방금 내린 결심을 바꿨다.
'괜히 이놈들을 쳐서 타초경사打艸驚蛇하지 말자. 어떻게든 사기꾼을 찾아내고 금맥 지도를 확보해야 한다.'
구왕은 자식을 포함한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기로 결심을 단단히 굳혔다.
'일단 앞잡이부터 해결하자.'
구왕은 냄새로 자신의 지시를 받은 앞잡이를 금세 찾아냈다.
"너 잠깐 따라와."
방주의 신임을 얻어 오쟁꾼이 될 생각에 신난 앞잡이는 의심도 없이 구왕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이리 가까이 오거라."
중요한 얘긴 줄 알고 구왕 입으로 귀를 가까이 대던 앞잡이는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구왕에게 통째로 삼켜졌다.
해와 달을 삼키려던 천구의 후손답게, 자신과 비슷한 덩치의 앞잡이를 삼키는 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좋아. 이제 이 일을 아는 자는 나밖에 없다. 영지는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잠갔으니 시름 놓고 사기꾼만 찾으면 되겠구나.'
구왕은 재빨리 사기꾼의 냄새를 찾아 추적했다. 뒷산으로 갔다가 요수촌으로 오기를 여러 번 반복한 후, 끝내 의뢰인의 냄새는 없고 사기꾼의 냄새만 남았다.
'그래. 구왕玖王이 아닌 진정한 구왕狗王이 되는 거야.'
진짜 사기꾼을 영지에 들인 줄도 모르고 구왕은 꼬리를 신나게 저으며 가짜 사기꾼을 쫓았다.
- 작가의말
궤계기구왕 - 간교한 계책으로 구왕을 속이다.
구구방은 대충 흥신소에 다단계에 사이비에 조폭의 느낌을 한 숟갈씩 넣어 비볐습니다. 방주라는 놈이 왜 이리 멍청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 예전부터 멍청한 사람보다 욕심이 과한 사람이 사기 잘 당한다는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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