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묘불가언緣妙不可言
여요한발女妖旱魃
여자 요괴 한발이
적지천리赤地仟里
적지천리의 법술을 얻다
구왕의 몸이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억지로 버티던 형천이 가장 먼저 바닥에 주저앉았다.
천구가 공격 의사가 없음을 미리 밝혔지만,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일행에게 어마어마한 압박이었다.
"죽는 줄 알았잖아."
이어서 소소가 쓰러졌다. 억지로 버티던 여자 요괴 역시 흐느적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천구라. 반고 시기에 살았던 마수를 직접 보게 되다니."
치우는 살짝 흥분했다. 천구의 강대한 기세에 주눅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투쟁심이 꺼지진 않았다.
'운명 따위를 믿고 싶지도 않고, 끌려다니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왜 점점 운명이 옥죄는 느낌이 들지?'
오작은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싶지만, 구묘와 대화를 나눈 뒤 치우에게 천명이 있음을 확인했고 자신도 그 천명에 말려들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깨달았다.
"이젠 다시 자기는 글렀겠지?"
여자 요괴가 드물게 먼저 말을 꺼냈다.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
어차피 잠은 다 달아났기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마침 달도 요괴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지 검은 구름 뒤에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나는 나이가 차면 적당한 남자한테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채 초경을 치르기도 전에 요괴한테 납치됐다."
요괴는 법술을 얻은 게 기뻤는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난 처음에 요괴가 날 잡아먹으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날 납치한 토끼 요괴는 자질이 부족하여 법력을 모으는 속도가 느렸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음기가 강한 여자를 데려다가 수련하게 하고 법력을 빼앗는 거였다."
납치된 여자는 여러 가지 약을 먹고 요괴가 되었다. 그 과정이 괴롭긴 했지만, 영원히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 수 있다는 말에 억지로 버텼다.
"그리고 백 년 동안 법력을 모으고 빼앗기는 일을 반복했다. 법력을 빼앗길 때 고통은 정말 죽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요괴는 내게 죽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다행히 어느 하루 토끼 요괴가 죽어버렸다. 붉은 수술이 달린 창을 든 사내한테."
'그때 그 요괴였구나.'
오작은 그제야 자단의 손에 죽은 토끼 요괴의 시녀가 생각났다. 악행을 저지르면 몸에 살煞이 쌓인다. 자단은 시녀 몸에 살이 안 보인다며 목숨을 살려뒀다.
"난 토끼 요괴의 영지를 차지했다. 아쉽게도 법력만 있고 아는 법술이 없어서 결국 다른 요괴한테 빼앗기고 말았지. 게다가 그 악독한 놈은 날 다른 요괴한테 팔아버렸다. 거기서 난 토끼 요괴를 죽인 창을 만났다. 요괴는 날 홍영창의 제물로 바쳐 환심을 사려고 했지. 그런데 홍영창이 날 알아보고 살려줬다. 대신 나더러 북부에 가서 자색 옷을 입은 소년을 찾으라고 했다."
치우는 요괴가 말한 소년이 오작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홍영창은 소년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열 살 혹은 열여섯 살 정도 나이의 소년일 거라고 말했다. 나는 중부를 통해 북부로 넘어간 후 요수촌의 구구방을 찾아갔다. 자색 옷의 소년을 찾아달라고 의뢰하려고 했는데, 구왕이 내 몸에서 홍영창 냄새가 난다며 다짜고짜 날 물었다. 난 홍영창이 있는 곳 이름을 몰라서 안내한다고 했는데, 구왕은 내게 꿍꿍이가 있다고 하면서 날 감옥에 가뒀다."
"방금 송곳으로 적지천리 법술을 얻으면서 새 이름도 얻었다. 이제부터 내 이름은 한발이다. 대단한 법술을 내게 줘서 정말 고맙다. 네가 홍영창을 얻으려는 것 같은데, 내 모든 힘을 다해 널 도울게."
소소나 형천한테 요괴의 이야기는 그렇게 재밌거나 대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작과 치우가 받은 느낌은 달랐다.
오작과 치우는 사냥을 핑계로 숙영지를 떠났다.
"양부도 그렇고 홍영창도 그렇고. 형이 북부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 거 같은데?"
"숙부는 점괘술을 모른다. 법력은 넉넉하지만, 도행이 그 정도로 높지 않아."
자단은 부족한 자질로 통천교주의 제자가 되며 높은 경지보단 강한 힘을 추구하게 되었다. 실질적인 살해 위협을 느끼기도 했고, 자신을 업신여기는 사형들을 경지로 이기긴 힘들다고 판단해 힘을 키우는 데 전력을 다했다.
법력에 비해 도행이 낮아 점괘술을 펼치지 못한다. 풍백마저 정확하지는 못할망정 점괘술을 펼칠 수 있던 걸 생각하면 자단의 도행이 얼마나 낮은지 짐작할 수 있다.
"누군가가 개입한 거 같지?"
치우의 말에 오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망 어르신은 아니야. 화신이어서 점괘술을 못 펼쳐. 청제의 의뢰와 관련이 있는지 제삼자가 끼어들었는지 알아봐야 해."
"어떻게?"
치우의 말에 오작도 말문이 막혔다. 청제가 구망을 향해 칼을 뽑은 상황에 오작과 치우가 동부로 가는 건 죽여달라고 목을 빼 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점괘술로 내가 북부로 갈 걸 알고 자단 숙부한테 얘기했어. 자단 숙부는 우마왕에게 구마소를 찾아 날 구하라고 시켰어. 그러니까 점괘술을 펼친 사람은 구마소가 우릴 구할 거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는 거야."
"그걸 알고 양부한테 알려준 걸 보면 우리 편이 아닐까?"
오작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그날 우마왕의 개입이 없었다면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위기를 벗어났을지도 몰라. 그 상황이 발생하는 게 싫어서 자단 숙부한테 귀띔했을 수도 있어."
오작은 구묘의 존재를 떠올리며 말했다. 비록 격은 풍신이 더 높지만, 힘은 귀왕인 구묘가 더 강하다. 치우가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 오면 구묘가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부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건 상대를 신임한다는 뜻이잖아."
치우의 말에 오작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천구와 나눈 대화로 머리도 마음도 복잡한 바람에 치우조차 알아차린 사실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숙부가 가문의 일은 전혀 말해주지 않아서 유추할 수 없구나.'
오작이 아는 범위에서 자단 지인 중에 점괘술을 높은 경지로 펼칠 사람은 없다. 우마왕처럼 오작이 모르는 가신이라면 백날 고민해봤자 헛수고다.
"일단 이 일은 누군가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 어쩌면 자단 숙부를 찾는 과정에 그자가 나타날지도 몰라."
"알았어."
"그리고 또 하나 문제가 있어. 구왕이 너무 쉽게 우리한테 속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오작의 말에 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쟁꾼과 앞잡이가 중요한 정보를 술술 불었던 것도 기억나지? 그때 우린 네가 강해져서 요괴들이 압박을 받아 그렇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너보다 법력도 많고 경지도 높은 구왕이라면 네 압박이 안 먹혔을 거야."
"형은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응. 내가 그 이유라고 생각해. 우마왕의 영지에서 내가 홍황개벽공洪荒開闢功을 얻었잖아."
칠절진을 벗어나려고 딱 한 번 펼쳐본 무공. 칠절진을 벗어난 후 오작이 아무리 애써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맞아. 형이 이상한 소리도 듣고 그랬지."
"홍황개벽공을 얻으며 내게 변화가 생긴 거 같아.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요괴들이 내 말을 더 잘 믿는 거 같아. 움직임이 소리로 들리기도 하고."
오작과 치우는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사냥에 집중했다. 요괴인 한발은 음식을 안 먹어도 괜찮지만, 대신 치우와 형천이 여러 몫을 하기에 두 손 가득 사냥감을 들고 돌아갔다.
돌아가니 어느새 몸을 추스른 형천이 장작을 주워다 모닥불을 지폈다. 사냥감을 깔끔하게 손질해 모닥불 위에 얹으니 새벽이 어렴풋이 밝아왔다.
그 뒤의 여로는 평탄했다. 이미 확인된 안전한 길로 움직인 것도 있지만, 법술을 얻으며 한발의 기세가 엄청나게 강해져서 웬만한 요괴나 마수는 알아서 일행을 피했다.
진령산맥을 넘어 중부로 간 일행은 유웅국有熊國에서 흩어지기로 했다.
"형천. 불사과만 믿기엔 세상에 강자가 너무 많다. 이걸로 든든한 수호계 법보 하나 사라."
오작은 소매에서 황금이 가득 찬 주머니 세 개를 꺼내 형천에게 건넸다.
"이거론 네 덩치에 맞는 무기 하나 사서 들고 다녀. 이 치우의 형제가 무기 때문에 얕보이면 되겠어?"
치우도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주머니 네 개를 꺼내 형천에게 건넸다. 그러나 가면으로 가려지지 않은 붉게 충혈된 눈과 시뻘건 코 때문에 몰래 울었던 게 다 들켰다.
"형님, 그간 주신 가르침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치우야, 복수를 끝내면 곧 찾아갈게. 그때 내 모든 힘을 다해 너와 형님을 도울 거다."
형천은 의젓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받아 소매에 넣은 후 치우와 오작을 번갈아 안아주고 떠났다. 고개 한 번 안 돌리고 곧게 걸었지만, 커다란 어깨가 애처롭게 들썩였다.
"이건 당신 몫입니다."
오작은 주머니 세 개를 꺼내 소소에게 넘겼다.
"뭐야? 먹고 떨어지라 이거야? 같이 다니고 싶을 정도로 욕심난다며? 그냥 그거 너 가져."
"당신은 목숨까지 걸고 우릴 도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오작의 말에 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도 맞아. 그럼 나도 이만 작별해야겠어. 다음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
소소는 주머니 세 개를 소매에 넣은 후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났다.
"떠날 때까지 밉상이야."
치우는 소소를 타박하는 거로 무안한 마음을 숨겼다. 사내끼리는 즐겁게 웃으며 호쾌하게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이별이 닥치니 그렇지 않았다.
"가서 배나 알아보자."
중부는 황제 함추뉴가 나서서 요괴들과 협약을 맺었다.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배를 이용한 이동이 발달했다. 섣불리 공격했다간 인간의 보복뿐 아니라 다른 요괴들의 공격도 받을 수 있기에 갓 요괴가 되어 귀가 어두운 놈이 아니라면 배에 탄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
오작과 치우는 가면을 썼고 한발은 보기 드문 미인이다. 그래서 일행은 어디에 가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다행히 치우의 덩치는 말할 것도 없고, 오작 역시 키가 큰 편이어서 시비가 걸리지는 않았다.
"이 배에 앉으면 대별산大別山까지 간다고?"
치우의 질문에 호객꾼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서른 명이나 태우는 이런 큰 배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배는 크고 무거울수록 안전하다는 건 잘 아시죠?"
나루터에 정박한 배는 오작과 치우가 본 배 중에서 가장 컸다.
"언제 출발하지?"
"내일 새벽에 출발합니다. 잘 곳이 없다면 제게 말씀하십시오. 이 나루터 근처에 사는 사람 중 절반이 저와 친척입니다. 세 분이 하루 정도 묵을 집을 구하는 건 일도 아닙니다."
일행은 호객꾼의 소개로 허름하지만 깨끗한 집에서 새벽까지 쉬다가 배에 탔다.
배에는 노가 여섯 개나 있는데, 두 개는 속도를 줄이는 용도였다. 물살이 너무 셀 때는 노 두 개를 세워서 배의 속도를 늦춰 사고를 방지해야 했다.
오작은 자단의 등에 업혀 중부와 남부를 이십 년이나 돌아다녔다. 배도 자주 타서 새로울 게 없었다. 그러나 동해 천일도 촌놈 치우와 백 년 이상 영지에 들어박혀 산 한발에겐 큰 배를 타는 게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형, 강에도 큰 물고기가 살아?"
오작은 가면을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일이 지나 이젠 성인인 치우건만, 십 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엉뚱했다. 그때도 달에 사는 토끼가 맛있냐고 질문했었다.
"응. 근데 뼈가 많아서 먹기 귀찮아."
오작은 치우가 맛있냐고 묻기 전에 미리 대답했다.
그때, 배가 속도를 늦췄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고 물살도 세지 않아 속도를 내야 하는 구간이었다.
뱃머리에 앉은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오작과 치우도 몸을 일으켰다. 키가 큰 덕분에 배의 뒤편에 있어도 시야가 가려지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구멍이 나서 곧 가라앉을 배가 있었다. 배 위에는 키가 오작과 비슷한 소년 둘이 보였다.
하나는 황금색 장포에 검은 모자를 썼고 하나는 붉은 장포에 풀을 엮어서 만든 모자를 썼다.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며 이목구비까지 보였다. 황금색 장포는 단정한 용모에 표정마저 흐트러짐 없었다. 단, 입술이 지나치게 얇아 사람이 매정해 보였다. 그럼에도 쉽게 보기 힘든 미소년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붉은 장포의 소년은 얼굴 윤곽이 무척 굵었다. 곧고 높은 코에 입매가 고집스러웠다. 가장 인상적인 건 불덩이를 품은 것 같은 눈동자였다.
무표정하게 있는데도 강인한 눈빛 덕분에 위엄이 철철 넘쳤다.
"도움이 필요하시오?"
"배가 좌초했소. 뱃삯은 넉넉하게 드릴 테니, 자리 두 개 남는지 알아봐 주시오."
황금색 장포를 입은 소년은 목소리가 무척 맑았다. 그때 노를 젓던 뱃사공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여섯째 왕자님 아닙니까? 몇 달 전에 왕궁 앞에서 본 거 같은데."
"그렇소. 내가 바로 희운姬雲이오."
배에 탄 자들이 환호했다. 희운이라는 자는 유웅국 백성들에게 꽤 환영받는 것 같았다.
"당신은 왜 환호합니까?"
오작은 희운을 향해 손을 흔드는 한발을 제지했다.
"잘 생겼잖아."
한발의 대답에 치우와 오작은 할 말을 잃었다.
- 작가의말
연묘불가언 - 인연은 너무 묘하여 말이 안 나온다.
영원한 건 없는 거야~
파티가 해체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홍영창을 얻는 여정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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