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합주기陰陽閤呪技
상년등산常年登山
산에 자주 오르면
종필우호終必遇虎
결국엔 범을 만난다
오작의 얼굴을 본 백초거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많이 닮았구나."
오작은 희운과 소전의 종적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고 거짓말하려 했다. 그러나 백초거가 자신을 아는 듯이 말하자 준비한 것들을 모두 폐기했다.
"이미 세 개를 복용한 모양이구나."
오작은 백초거가 자신의 신분을 알고 저주도 알며, 심지어 저주를 푸는 방법까지 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시 대단한 사내군. 네가 이런 모습으로 날 찾아올 날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혼자 왔느냐?"
오작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믿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신중을 기해야겠다."
말을 마친 백초거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오작이 능숙하게 펼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법술 중 하나인 탐색주였다. 주문이 끝나자 법력이 부드럽게 공간을 쓰다듬으며 숨은 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백호정이 나한테 있는 건 어찌 알았느냐?"
"몰랐습니다."
"서부에서 반도나 백호정을 비롯해 몇 가지 물건은 꺼내는 즉시 내 어머니한테 들킨다. 그래서 결계를 치려는데 반대하지 않겠지?"
"그러시죠."
오작은 백초거에게 들켰을 때부터 몰래 결승법을 외웠다. 이미 주문은 끝나고 시동어만 외치면 쓸 수 있는 상태로 준비해 뒀다.
상대가 수작을 부리기라도 하면 선수를 쓸 생각으로 감각을 곤두세웠다.
백초거는 결계 주문을 중얼중얼 외웠다. 오작으로선 시도조차 어려운 결계 법술이다. 그러나 펼치지 못한다고 주문마저 모르는 건 아니다. 오작은 상대가 외우는 게 결계 주문이 맞는지 확인했고, 주문이 길어지면서 경계심이 조금씩 옅어졌다.
"합!"
백초거의 외침에 따라 춘소궁을 바깥과 차단하는 결계가 펼쳐졌다. 동시에 금속 밧줄이 오작의 다리를 휘감았다.
오작이 급히 결승법을 펼치려 했지만, 다리를 묶은 밧줄이 법력을 묶어 법술을 못 펼치게 방해했다.
"걱정하지 마라. 난 너를 해치려는 게 아니다."
"어떻게 한 겁니까?"
"음양합주기. 동시에 주문 두 개를 외우는 기술이다. 들어본 적 없어?"
들어본 적 있다. 주문 하나는 소리를 내서 읊고 하나는 무성영창으로 읊어 두 개 법술을 동시에 펼치는 기술로, 익힌 술사가 손가락으로 꼽는다.
술사는 경지가 높고 자질이 출중할수록 주문을 짧게 생략할 수 있다. 이는 주문에 중첩되는 글자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법法자가 주문에서 총 여섯 번 등장한다고 가정할 때, 첫 법자를 강하게 읽는 거로 뒤의 다섯 번을 생략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중복되는 글자를 모조리 생략하면 주문이 짧아진다. 청제가 해봉주를 아주 짧게 외웠던 것도 이러한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
음양합주기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두 주문을 동시에 읊는다. 백 글자짜리 같은 계열의 주문이 두 개 있다고 가정하면, 실제로 약 육십 글자 정도만 읊어 두 주문을 함께 마칠 수 있다.
단, 순서가 한 글자라도 틀리거나 중복된 글자를 실수로 더 읊기라도 하면 주문이 실패한다. 심력과 정신력은 물론이고, 주문을 거꾸로도 줄줄 외울 정도로 능숙해야 펼칠 수 있다.
백초거는 분신술로 자신을 하나 더 만들어 침대에 눕힌 후, 꼼짝달싹 못 하는 오작을 주머니에 담았다. 컴컴한 주머니에 들어간 오작은 거듭 자책했다.
'아는 게 적다고 핑계가 되지 않는다. 난 너무 약하다.'
무력이 약하니까 머리를 써도 소용없다. 강한 무력이 있다면 정보가 적어도 이리 쉽게 생포되진 않았을 거다.
'해치지 않는다는 건 진심이다. 그렇다면 나한테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인데. 그게 뭔지 알아야 협상을 통해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채 일각도 안 되어 백초거는 오작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느냐?"
오작은 자기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가장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달려도 며칠은 걸릴 거리에 있는 진일곡이었다.
"축지법縮地法이라고 내가 만든 법술이다. 백 장의 거리를 한 걸음으로 줄인다."
그때. 욕수가 나타났다.
"협상이 잘 안 된 모양이군."
욕수의 말에 백초거가 고개를 저었다.
"등천봉의 결계가 무너지고 진법이 모두 사라졌어. 덕분에 이렇게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됐지 뭐야. 협상은 이제부터 시작해야지."
오작은 둘의 대화를 듣고도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욕수는 뜻밖이라는 듯 얼굴을 실룩였다.
"대단하구나. 난 한바탕 욕먹을 각오를 했는데."
"속은 놈이 병신이죠."
오작은 구왕이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겼다.
"별거 없다. 일단 난 네게 백호정을 먹일 거다."
백초거의 말에도 오작은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 대가로 난 너한테서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물건을 돌려받겠다. 그리고 널 자유롭게 풀어줄 것이다."
오작은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내 어머니, 그러니까 서왕모를 피해 다니고 네가 그 물건을 나한테 준 사실을 비밀로 해야 한다. 이건 뭐 꼭 지키라는 건 아니고, 최대한 그러는 게 좋겠다는 내 희망 사항이다."
상대 조건을 다 듣고도 오작은 입을 열지 않았다. 여전히 백초거와 욕수한테서 악의보다 호의가 더 느껴진다. 전혀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괜히 입을 열어 말실수했다간 통합절대감이 무너질 것 같아서 침묵을 고수했다.
"어차피 네겐 선택 여지가 없으니 동의한 거로 알고 진행하겠다."
말을 마친 백초거는 허공에서 오작이 두 번이나 본 상자를 꺼냈다. 현무루를 마실 땐 갓난아기 상태여서 기억에 없다.
해봉주를 읊어 상자를 연 백초거는 민들레 씨방처럼 생긴 작은 구를 오작의 입에 넣어줬다. 직접 삼켜야 했던 청룡주나 주작란과 달리, 백호정은 알아서 목구멍을 넘어갔다.
"왜 아무 변화도 없지?"
백초거의 질문에 욕수도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른다."
"외출한 게 들키기 전에 돌아가야겠다. 저주가 풀리면 편익조를 날려라. 형편이 되면 내가 여길 오고, 아니면 네가 주머니에 담아 능소궁으로 몰래 와라."
말을 마친 백초거는 몇 걸음 만에 사라졌다. 축지법이라는 법술은 참 대단한 것 같았다.
"변명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욕수는 오작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네가 날 찾아왔을 때 영예주의 반서가 이미 시작됐더구나. 빨리 백호정을 복용하지 않으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난 백초거가 백호정을 갖고 있음을 알고, 기꺼이 너한테 먹일 것도 알았다. 그래서 널 능소궁으로 보낸 거다."
"난 백초거의 속까진 모르지만, 최소한 널 해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은 있었다. 결국엔 너한테도 도움이 되고 백초거도 큰 것을 얻는 좋은 일이다."
"당신은요?"
"나? 난 네 선대에 진 빚도 조금 갚을 겸, 백초거한테 꽤 큰 빚을 지웠지. 내가 서왕모 눈 밖에 나더라도 백초거가 한 번쯤은 날 구해주지 않을까 싶어."
'나한테 뭐가 있지? 구마소라면 그냥 뺏어도 반항할 힘이 없는데.'
욕수는 오작을 저택 뒤에 있는 동굴에 가뒀다. 법술이 아니라 무공이라도 펼칠 수 있다면 쉽게 빠져나갈 수 있지만, 법력이 완전히 묶인 상황에선 탈출할 방법이 아예 없었다.
한편.
서왕모는 꽁지 빳빳이 도망치는 치우를 허탈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서왕모와 이틀 동안 치열하게 싸운 치우의 귀기는 투쟁심이나 파괴 욕구보다 생존 욕구가 강해졌다. 큰 열세에 처한 것도 아니고 싸움의 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인데, 귀기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도망쳤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서왕모는 치우의 칼에 베인 모자를 불로 태웠다. 옷보다는 못해도 꽤 마음에 드는 법보였는데 이렇게 망가질 줄은 몰랐다.
"딸이나 구하러 가자."
소리를 내어 다짐한 서왕모는 치우를 쫓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남쪽으로 달렸다. 흔적이 너무 명확하여 헷갈릴 염려도 없었기에 채 하루가 안 되어 따라잡았다.
"놈!"
훌쩍 뛰어 헐떡이는 형천의 앞을 막은 서왕모는 고함과 함께 채찍을 휘둘렀다. 형천은 재빨리 소매에서 방패를 꺼내 서왕모의 채찍을 막았다.
서왕모의 예상과 달리 겉으론 보잘것없는 방패가 부서지거나 쪼개지지 않고 멀쩡했다.
"어서 내 딸을 내려놓지 못할까?"
"네 어머니 맞아?"
형천의 질문에 소소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다들 그렇다고 하는데, 한 번도 날 안아주고 웃어준 적 없어."
소유물의 반항에 서왕모는 화가 끝없이 치밀었다. 모자로 누르지 못해 사방으로 제멋대로 뻗은 머리카락까지 법력이 넘실댔다.
형천은 소매에서 도끼를 꺼내 서왕모를 견줬다.
'조상님들. 불민한 후손이 가문의 원수를 두고 먼저 찾아갑니다.'
"네놈은 뼈까지 빻아서 없앨 것이고, 네년은 두꺼비랑 같이 요지에 가둬둘 것이다."
말을 마친 서왕모는 채찍을 크게 휘둘렀다. 첫 공격은 소소가 다칠까 봐 힘을 꽤 뺐지만, 지금은 죽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강하게 휘둘렀다.
형천은 감히 피할 엄두도 못 내고 방패와 도끼를 들어서 막았다. 채찍에 맞은 방패는 흐물흐물한 진흙이라도 되는 듯 출렁였고, 미처 막지 못한 충격파에 황금충들이 준 갑옷이 형편없이 찢겼다.
쿨럭 피 한 모금 토한 형천은 커다란 눈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서왕모의 공격에 내장이 곤죽 됐고 몸 표면의 실핏줄들도 모조리 터졌다.
등에 업은 소소를 보호하려고 버티지 않았다면 피해가 이렇게 크지 않았을 텐데, 형천은 미련하게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으로 피를 쏟으면서도 거대한 산악처럼 버티고 선 형천의 기세에 서왕모도 멈칫했다. 이러한 기세는 육체의 강함이나 법술의 경지와 상관없이 인간 본연의 의지를 드러내는 거여서 안하무인인 서왕모마저 서슬이 조금 꺾였다.
게다가 도무지 이유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죽이기엔 아깝구나. 내 딸을 두고 이대로 떠나면 살려두겠다."
서왕모의 말에 형천은 콧방귀를 뀌었다.
"형천, 넌 할 만큼 했으니까 그만 돌아가. 네겐 꼭 해야 할 일이 있잖아."
형천의 등에서 떨어진 소소가 훌쩍이며 말했다.
"세상엔 산 같이 무거운 죽음도 있고 깃털처럼 가벼운 삶도 있다. 난 무겁게 죽으련다."
그때, 황금충들이 떨던 난리와 달리 비범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던 반고의 개천부가 은은한 빛을 머금었다.
빛에 서린 위엄이 하도 늠름하여 서왕모도 채찍을 휘두르려던 팔을 내렸다.
도끼가 품은 빛이 점점 강해지며 형천의 발치에 뭉게구름이 생겼다. 여기저기 터져서 피를 줄줄 흘리던 형천의 몸이 어느새 아물었고 뻘겋게 충혈된 눈도 흑백이 분명한 순하고 커다란 눈이 되었다.
우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간치고는 정말 큰 형천의 몸이 조금씩 자랐다. 다행히도 얼마 안 남은 옷도 함께 커져서 흉측한 물건을 드러내진 않았다.
형천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가 번쩍 떠졌다. 소처럼 순하던 형천의 눈이 범처럼 위엄 가득하게 변했다.
십수 장으로 커진 몸으로도 기운을 다 담지 못하여 덤불 같은 기운이 불처럼 넘실거렸다.
"네가 곤륜왕모냐?"
"네. 그렇습니다."
소소는 턱을 살짝 내리고 고분고분 대답하는 서왕모의 모습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너는 내 후손이구나. 그런데 왜 도끼를 수습하지 않았느냐?"
"태어날 때부터 곤륜의 지맥에 묶였습니다."
"그래서 아직 아무도 날 구하지 않은 것이구나."
"구하다니요? 누가 감히 대선大仙을 해친단 말입니까?"
"천지를 가르다 몸이 허약해졌을 때 천계의 것들이 힘을 합쳐 날 봉인했다. 하늘과 땅을 완전히 갈라놓지 못하여 지금도 서로 왕래하고 있다. 이대로 두면 다시 혼돈이 덮쳐 만물이 개성과 아름다움을 잃을 것이다."
서왕모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약속의 아이가 태어났다. 누군지 모르지만, 이 둘 몸에서 냄새가 난다. 그러니 넌 이 둘하고 연관된 자 누구도 해치지 말아라."
"명심하겠습니다."
형천의 몸을 차지한 반고의 의지는 도끼를 들어 소소의 다리를 감은 밧줄을 힘껏 내리쳤다. 금속 밧줄은 도끼에 닿자마자 부스러기도 안 남기고 사라졌다.
"내 봉인을 푸는 걸 방해하는 자를 제거해라. 더 늦기 전에 완성하지 못한 내 천명을 끝내야 한다."
반고의 눈이 감겼다가 형천의 눈으로 떠졌다. 형천의 몸이 조금씩 줄었다. 줄어드는 형천의 몸은 물론, 도끼와 방패도 은은한 빛을 머금었다.
반고의 의지가 강림하며 평생 될지 의문이던 영생과가 맺혔다. 영생과는 형천의 몸뿐이 아니라 운명으로 연결된 방패와 도끼까지 강하게 변화했다.
"운 좋은 년."
서왕모는 차가운 눈으로 소소를 쏘아봤다.
"혹시 치우 죽였어? 죽였으면 반고한테 혼날걸."
"못 죽였다. 기쁘냐? 이 배은망덕한 년아."
소소를 마지막으로 째려본 서왕모는 몸을 돌려 천주봉으로 달렸다.
자신이 반고의 핏줄임을 알고 홍균노조 등에게 품었던 자격지심이 사라지며 반도원에 대한 관심도 옅어졌다. 마찬가지로 자식들을 능소궁에 가두고 지배하는 즐거움도 시시하게 느껴졌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할까?"
어느새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형천이 소소에게 질문했다.
"일단 서부를 떠나자. 서왕모가 저러다가 변덕을 부릴지도 몰라."
- 작가의말
산에 자주 가면 꼭 범을 만나고, 개울가를 걸으면 신발이 젖기 마련이죠. 자주 꾀를 부리면 자신이 당하기도 합니다. 오작이 오늘 그 꼴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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