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대마왕蚩尤大魔王
만귀전신萬鬼纏身
온갖 귀신이 몸에 깃드니
치우혼몽蚩尤昏夢
흐리멍덩히 잠든다
대부분 귀신은 상령과 태광의 부족으로 이성적인 사고가 어렵다. 치우는 비록 어렵게 삼혼의 균형을 아슬아슬 맞추긴 했지만, 유정이 남은 둘보다 훨씬 많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치우 본연의 힘과 의지, 그리고 태극구와 귀왕 구묘의 도움으로 별 탈이 없었지만, 서왕모의 서슬에 대항하려고 몸을 귀기에 맡기는 순간 균형이 깨졌다.
단전을 차지한 귀기가 태극구를 무시하고 태극보인을 돌리며 외부의 귀기를 흡수했는데, 대부분 귀기가 유정이었다.
도망칠 곳이 한정된 귀옥과 달리, 바깥의 귀신들은 치우한테 먹히기 싫어 멀리멀리 도망갔다. 치우한테 흡수당한 귀신은 유정밖에 없는 멍청한 놈들뿐이었다.
"흐아아."
도망가던 치우는 백 명 규모의 무리와 맞닥뜨렸다.
평생 숙원을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에 백초거가 평소와 달리 크게 들떠 꼬박 이틀이 지나서야 소소가 도망갔음을 알아챘다. 그것도 벌써 왔어야 할 서왕모가 도착하지 않아 고민하다가 소소에 생각이 미쳐 확인한 것이었다.
사실 백초거는 유웅국과의 연합에 별 관심이 없다. 유웅국은 중부에서 광산이 많기로 유명하지만, 쇠의 기운이 강한 서부엔 크게 매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서왕모가 소전의 제안에 꽤 흥미를 보이는 터여서 소소의 도망을 그저 좌시하지 못하고 세 무리의 병력을 내보내 추격했다.
치우가 조우한 무리는 거령신巨靈神이 이끄는 백제의 정규군이었다. 우두머리인 거령신은 게 요괴고 남은 자들은 개나 말 같은 추적과 추격에 능한 요괴가 대부분이다.
치우는 거령신이 자신의 게딱지를 단련하여 만든 갑옷이 너무 욕심났다. 그리고 집게발을 단련하여 만든 한 쌍의 도끼도 탐났다.
욕심이 순식간에 서왕모에 대한 두려움을 밀어내고 치우의 마음을 가득 차지했다.
"수상한 자다. 생포하여 심문한다."
거령신의 명령에 가재 요괴들이 나섰다. 민물 가재인 이들은 바다의 가재 요괴들보다 덩치는 작지만, 힘은 오히려 더 세다.
그러나, 치우는 황소 오십 마리를 데리고 놀던 괴력의 소유자다. 게다가 지금은 서왕모도 결과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귀기를 몸에 품었고, 역법전이로 언제든 힘으로 전환할 수 있다.
"비켜. 내가 나선다."
기세등등하게 나섰던 가재 요괴들은 순식간에 치우의 손에 잡혀 여러 토막으로 찢겼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혼이 삼계윤회환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치우의 단전에 빨려갔다.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확인한 거령신은 졸개들 대신 직접 나서기로 했다.
게는 옆걸음밖에 못 걷는다. 그러나 요괴는 종족의 한계를 어느 정도 벗을 수 있다. 거령신은 옆으로 걷는 게 훨씬 편하고 빠르지만, 앞뒤로도 꽤 훌륭하게 걷는다.
치우는 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거령신을 가만히 지켜봤다. 가까이 접근한 거령신이 탐나는 도끼를 휘두르자 그제야 손을 내밀었다.
치우는 상대의 공격을 막으려는 게 아니라 도끼를 뺏으려는 목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너무 노골적이어서 거령신은 당하지 않았다. 치우의 손을 피한 거령신의 두 도끼가 머리와 어깨에 적중했다.
사람의 몸을 때려서 난 소리라곤 믿기지 않는 굉음이 터졌다. 예상보다 훨씬 훌륭하게 공격을 성공시킨 거령신이지만,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저림과 전혀 고통을 못 느끼는 듯한 상대의 표정에 손해 본 느낌을 받았다.
치우는 다시 손을 내밀어 도끼를 뺏으려 했다. 거령신은 옆걸음으로 빠르게 움직여 치우의 손을 피한 후, 팔을 뻗느라 무방비로 드러난 치우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치우는 여전히 가렵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거령신의 도끼를 노렸다. 상대가 몸에 품은 힘에 비해 멍청하다는 걸 간파한 거령신은 도끼를 미끼로 번번이 공격에 성공했다.
그런데 상대를 때리면 때릴수록 왠지 본인이 손해인 기분이었다.
상대의 공격을 무시하고 도끼만 노리던 치우가 갑자기 변했다. 빼앗기 힘든 도끼보다 갑옷을 먼저 노리기로 한 것이다. 익숙함에 젖어있던 거령신은 갑자기 바뀐 치우의 대응에 반응하지 못하고 그만 덜미를 잡혔다.
다행히 치우는 상대를 죽이려는 살욕보다 갑옷에 대한 탐욕이 컸다. 그래서 거령신의 목을 부러뜨리는 대신 갑옷을 강제로 뜯어내 자기 몸에 갖다 댔다.
"해갑획蟹匣獲."
거령신은 엎드린 김에 절이라고 갑옷을 소환하는 대신 치우를 옥죄게 했다. 단단함에 더불어 탄성까지 강한 거령신의 게딱지는 치우의 몸을 강하게 옭았다.
"흡吸!"
치우는 자신의 소유도 아닌 거령신의 갑옷을 강제로 흡수했다. 제정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미친 짓으로, 적의 법보를 자기 몸에 들이는 멍청한 시도다.
몸에 들어간 적의 법보가 반항하면 큰 피해를 볼지도 모른다.
치우의 상상을 초월한 대응에 거령신은 잠깐 머뭇거렸다. 얼른 게딱지를 소환하여 돌려받을 건지 아니면 치우의 몸에 들어가길 기다린 후 무기로 쓸지 갈등했다.
그 잠깐의 갈등이 화를 불렀다. 다른 법보를 파괴하는 거로 상대적으로 성장이 쉬운 무기와 달리, 갑옷을 비롯한 수호계 법보는 제물을 바치거나 법력을 집적하여 성장하는 방법밖에 없다.
전자에 비해 성공 가능성이 훨씬 낮아서 훌륭한 수호계 법보는 무기보다 귀한 취급을 받는다.
동주철갑은 법보가 되고 나서 단 한 번도 성장한 적 없었다. 그러나 귀기가 치우의 몸을 침식하며 동주철갑에도 영향을 끼쳤다. 수호계 법보로서 갖추기 힘든 공격성을 귀기로부터 부여받았다.
철갑에 수십 개 입이 생기더니 치우의 몸으로 들어가려는 게딱지를 와작와작 씹어 삼켰다. 거령신의 게딱지 역시 대단한 등급의 법보지만, 치우가 체화한 동주철갑에겐 저항도 못 하고 그대로 삼켜졌다.
잠깐의 고민으로 반려 법보를 잃은 거령신은 몸이 굳어버렸다. 치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의 도끼를 잡아 힘으로 당겼다.
중부에 사는 거인 부족의 전사들보다 힘이 세다고 자랑하던 거령신이건만, 치우는 닭 모가지 비틀 듯이 쉽게 해냈다.
그때, 철갑의 포식이 아니꼬웠는지 동주도 움직였다. 철갑과 달리 입 대신 모기 주둥이를 연상케 하는 침을 뽑아 도끼에 꽂은 후 사정없이 빨았다.
치우가 미처 자세히 감상할 사이도 없이 도끼는 동주한테 빨려 홀쭉해졌다.
동주철갑은 치우한테 체화된 법보다. 쉽게 말하면 치우와 하나 되었다. 치우의 몸을 차지한 귀기는 동주철갑이 강해지자 자신이 강해진 것처럼 기뻤다.
그리고 그저 남의 것을 빼앗아 소유하는 즐거움 말고 남의 것을 빼앗아 먹어 치우는 즐거움을 알아버렸다.
하찮아서 눈에 안 차던 다른 요괴들의 법보도 갑자기 욕심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갑옷과 도끼를 잃고 멍해 서 있는 거령신을 무시하고 다른 요괴들을 덮쳤다.
거령신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죽을 놈은 죽고 도망칠 놈은 도망친 후였다. 요괴의 혼도 꽤 큰 힘이 된다는 걸 발견한 귀기는 도망치는 요괴들보다 훨씬 강한 거령신을 노렸다.
'백제보다 강하다.'
충성심이 강한 거령신은 이대로 능소궁으로 돌아가면 큰일이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다. 서왕모가 있는 천주봉으로 가면 좋은데, 거긴 너무 멀다.
백제한테 강한 적을 끌고 갈 수 없다는 생각에 거령신은 진일곡으로 달렸다. 비록 법술 능력은 부족해도 무공만큼은 천교가 있는 서부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드는 욕수다.
거령신은 게 다리를 단련하여 만든 법보를 이용해 빠르게 도망쳤다. 원체 옆걸음이 빠른 데다 법보의 도움까지 받으니 전력으로 달리는 치우와 비슷한 속도를 냈다.
중간중간 귀기가 딴눈을 팔거나 우연히 마주친 요괴의 법보를 노리지 않았다면 거령신이 잡혔을 테지만, 다행히 귀기는 변덕이 많았다.
"도망쳐. 엄청난 놈이 온다."
욕수한테서 의술을 배우는 제자들은 법술도 무공도 평범하다. 그나마 안력은 괜찮았으나, 갑옷도 도끼도 잃은 거령신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다행히 드물게 까랑까랑한 목소리 덕분에 알아차렸고, 뒤에서 시커먼 연기를 풀풀 피우며 달려오는 치우가 좋은 마음으로 방문한 게 아님을 판단하여 대피했다.
치우는 평범한 인간들을 무시하고 곧장 거령신을 따라 진일곡으로 들어갔다.
끝에 금테를 두른 몽둥이가 치우 머리를 노렸다. 치우는 수비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줬다.
욕수는 자신이 전력을 다한 기습이 먹히지 않은 것에 놀라 거리를 벌리며 상대를 관찰했고, 치우는 어지러운 머리를 털며 거령신을 찾던 눈을 욕수한테 고정했다.
'그 아이를 구하러 온 건가?'
동굴에 가둔 오작을 떠올린 욕수는 치우의 방문 목적을 오해했다.
'무슨 영문으로 갑자기 이렇게 강해졌는지 모르지만, 절대 동굴까지 보내선 안 된다.'
원래는 피할 수 있는 싸움이었지만, 욕수의 오판으로 정면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무공에 대한 이해나 경지 등은 욕수가 훨씬 높으나 귀기에 잠식되어 본능으로 움직이는 치우의 위력 역시 대단했다.
특히 동주철갑이 요괴들의 법보를 먹어 치우며 강해진 덕분에 방어력이 훌쩍 늘어 욕수의 어마어마한 공격에도 잘 버텼다.
경지나 경험이나 월등한 욕수는 거의 모든 공격을 예상대로 성공했다. 그러나 치우는 몸에 쌓이는 타격을 무시하고 무작정 공격만 했다.
'힘들다.'
치우의 몸에서 발산하는 귀기가 주변 기운을 흔들었다. 평소라면 빠른 회복 능력으로 이런 일방적인 공격 상황에 쉽게 지치지 않으련만, 귀기가 음양과 오행의 기운을 흩트리는 바람에 욕수는 소모한 법력을 쉽게 보충하지 못했다.
경지와 힘을 믿고 무식하게 싸우는 서왕모와 달리, 욕수는 강한 공격에 더불어 회피 능력도 출중하다. 굳이 치우를 막아서지 않고 도망 다니면서 법력을 회복한다면 욕수가 질 일은 없다.
그러나 오해 때문에 치우가 오작을 가둔 동굴 쪽으로 못 가게 막으려고 버티는 바람에 싸운 지 채 반 시진도 안 되는데 벌써 숨을 헐떡였다.
'그냥 놔줘야 할까?'
정말 어렵게 잡은 기회다. 성공만 하면 백초거의 비호를 받을 수 있고, 운이 더 좋으면 꿈에도 바라마지 않던 소원을 이룰지도 모른다.
게다가 오작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어서 양심의 가책도 별로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대로 치우를 지나게 하여 오작을 놓치면, 오작한테만 좋은 일이 된다. 상황 자체는 욕수가 오작을 속인 셈이기에 상대한테 보답을 바라는 것도 도둑놈 심보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공격하면서도 암울한 앞날만 보이던 욕수한테 하늘이 한 줄기 빛을 내렸다.
"어찌 된 일이야?"
굳은 얼굴로 나타난 백초거가 욕수를 도와 치우를 상대했다. 둘이 번갈아 치우를 상대하니 회복할 시간이 넉넉해 지쳐가던 욕수는 빠르게 기운을 차렸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이놈은 그 아이 일행이야. 왜 갑자기 이렇게 강해져서 나타난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백초거는 채찍을 휘둘러 치우를 밀어냈다.
"아는 거 있음 빨리 말해. 그래야 대책을 세우지."
"오작 그 아이가 사라졌다."
오작이라는 말에 치우가 멈칫했다. 비록 귀기에 휩싸였지만, 일 할의 단전과 광명대를 필사적으로 수호했기에 이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어떻게? 법술로 묶기도 했고, 내가 지금껏 여기서 잡아두고 있었는데."
"소소도 사라진 걸 보면 성동격서에 걸린 것 같아. 잠시 전에 내 법술이 깨졌거든."
소소라는 말에 치우는 정신이 조금 더 돌아왔다. 따뜻한 기운이 마음에 생기며 귀기를 미세하게나마 밀어냈다.
형천에게 반고가 강신하며 소소의 다리를 감은 금속 밧줄을 파괴했다. 그 여파로 백초거의 법술이 묶여 당분간 펼칠 수 없게 되었고, 더불어 오작의 다리를 묶은 금속 밧줄도 사라졌다.
밧줄이 사라지자 오작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동굴을 나와 은신술을 펼친 채 능소궁으로 달렸다.
욕수는 치우의 공격으로 정신이 없어 오작이 진일곡을 나가는 걸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백초거는 자신의 법술이 깨지자 오작이 도망칠 것을 걱정해 축지법으로 달려오다 보니 그만 마주 달리는 오작을 발견하지 못했다.
치우는 욕수와 백초거를 조금 더 공격하다가 포기했다. 둘이 힘을 합치면 자신이 질 것 같아 겁도 났고, 오작과 소소의 이름을 들으며 정신을 조금 차린 덕분도 있었다.
치우는 오작과 소소의 이름을 계속 되뇌다가 남부의 무릉산에서 만나기로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릉산이 어디지?'
유명한 산이어서 길을 물어 갈 수 있기에 전혀 걱정하지 않았는데, 귀기에 휩싸여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치우한테는 큰 문제였다.
'아는 길로 간다.'
백초거와 욕수는 치우가 갑자기 몸을 돌려 도망가자 허망한 눈으로 서로 쳐다봤다.
"어떻게 하지?"
"난 능소궁을 오래 비울 수 없다."
서왕모의 심경에 큰 변화가 있었지만, 백초거는 미처 몰랐다. 그래서 능소궁을 오래 비우고 밖으로 나돌 생각을 감히 못 했다.
"나도 진일곡에 묶인 신세지."
욕수 역시 서왕모가 두려워 진일곡을 함부로 떠나지 못한다.
"사람을 보내 공공한테 알려. 그 아이가 저주를 풀었고 흑제의 자리를 노릴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돌아가는 즉시 심복들을 보내 그 아이를 찾게 할 거야."
- 작가의말
마인 부우보다 무서운 대마왕 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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