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적천용壹騎敵仟勇
일장지용壹將之勇
한 장수의 용맹이
가감거산可撼巨山
큰 산을 흔들 수도 있다
"어딜!"
청제는 구려국의 왕 앞을 막으며 호통쳤다. 마준이라는 자는 뇌공이 맞섰고 구망은 풍백이 견제하기로 했다.
구망이 법력이 많아졌다곤 하지만, 공격용 법술을 아는 게 적어 풍백 정도면 넉넉하다고 여겼다.
쾅 소리와 함께 마준이 뒷걸음쳤다. 동해의 집채만 한 파도도 부수던 뇌공의 벼락은 방패로만 막을 수 없었다. 다행히 갑옷 덕분에 큰 상해는 입지 않았으나 강한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저만해도 대단한 거다. 웬만한 자는 뇌공의 벼락 하나에 타서 재밖에 안 남았다.
"영위앙 많이 컸다."
구려국 왕이 참마도를 휘둘렀다. 청제는 나무 방패를 소환해 왕의 공격을 막았다.
"너 이름이 뭐였지?"
청제는 아까 어마어마한 법술을 펼쳤다. 요괴의 피를 마시고 자라는 붉은 꽃의 꽃잎을 먹고 법력을 회복했지만, 최대한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너무 무리하면 내상은 물론이고 주화입마의 위험도 있다.
"나? 진짜 이름은 알려주기 곤란하고, 아명은 살청殺靑이다."
죽간을 만들 때 푸른 대나무를 불로 굽는다. 그렇게 푸른색을 없애는 걸 살청이라고 한다. 살청을 한 대나무는 좀이 먹지 않으며 훨씬 오래 보전할 수 있다.
"불길한 이름이구나."
청제는 예사롭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작은 불덩이가 왕을 노렸다.
왕은 참마도를 휘둘러 불덩이 두 개를 터뜨리고 그 충격으로 허공을 날았다.
'무인 주제에 법술을 너무 잘 안단 말이야.'
불덩이가 왕의 몸에 닿았다면 한동안 꺼지지 않는 불로 무척 괴롭혔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방심하지 않고 바로 불덩이를 터뜨려 더 큰 피해를 미리 막았다.
"어디 아파? 노환이야?"
왕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달렸다. 청제는 왕의 앞을 막고 다시 법술로 공격했다.
아까 무리하여 법술을 펼친 탓에 청제는 위력이 약한 법술만 펼쳤다. 왕이 노환이냐고 묻는 이유였다.
"널 생포하려고."
청제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이들은 천 명 정예를 미끼로 보급품을 노리는 듯한데, 중군의 삼백 명 정예 병사와 신하들 그리고 백 명이 넘은 술사들만 해도 이천 정도로 보이는 적을 섬멸할 수 있다.
그때까지 왕을 잡아두고 승리한 후군이 빙 돌아서 포위하면 이번 전쟁은 끝난다.
"난 널 죽일 건데."
오작이 봤으면 치우가 할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다고 할 모습이었다.
'여전히 멍청하구나.'
구려국의 국력에 왕의 용맹이라면 청제가 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왕이 너무 나대는 바람에 청고국이나 삼묘국 등이 불안을 느끼고 영위앙을 밀어줬다.
거기에 적표노와 공공의 도움까지 있어 영위앙은 왕이 아닌 최초의 제가 되었다.
청제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철없어 보이는 왕을 보며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난 형천이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뇌공이 마준 상대로 우위를 차지했고 풍백도 구망과 비슷하게 대적했다. 왕 역시 당장 죽이는 건 어려워도 병사들끼리 뒤섞인 전장에 합류하지 못하게 잡아두는 건 간단하다.
아무리 구려국의 정예여도 정예 이천에 힘과 덩치가 괜찮은 천 명 병사 상대로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상대도 노림수가 있고 작은 변수가 있겠지만,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딱 봐도 어마어마한 기운을 품은 거한이 나타나서 전장을 종횡무진으로 누볐다. 갑옷을 입지 않았고 투구도 쓰지 않았지만, 방패 하나로 거의 모든 공격을 막아냈고 도끼는 같은 사람을 두 번 찾아가는 법이 없었다.
"왕세손이다!"
"난 형천이다. 치우 의형제라니까."
형천이 뜬금없이 외친 건 아군이나 적이나 형천을 치우로 불렀기 때문이다.
"난 형천이다. 치우보다 형이라고."
형천은 치우라는 누명을 벗으려고 열심히 항변했다.
"저놈을 믿은 거였어?"
청제는 뇌공에게 신호를 보냈다. 뇌공은 물러나서 형천을 쫓았고 청제는 마준과 왕을 동시에 상대했다. 어차피 뇌공이 물러나자 마준이 왕을 지키러 헐레벌떡 달려왔기에 굳이 둘을 한곳으로 모는 수고는 덜었다.
"네놈은 누구냐!"
쾅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뇌공이 호통쳤다. 벼락을 막을 때마다 바닥을 뒹굴던 마준과 달리 형천은 방패로 벼락을 막고는 꿈쩍도 안 했다.
"형천이라니까. 몇 번이나 말해!"
다행히 종횡무진으로 돌아다니던 형천을 뇌공이 잡아둔 덕분에 청제의 군대는 안정을 되찾았다. 이젠 전신무장한 병사들로 시간을 벌어 구려국 군대의 광분 상태가 끝날 때까지 버티면 된다.
"슬슬 기별이 올 때가 됐는데."
방패로 불덩이를 막고 허공을 나는 마준을 보며 왕이 중얼거렸다.
"또 준비한 거 있어?"
청제는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며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간 수집한 구려국의 정보를 열심히 떠올렸지만, 최근 정보의 양도 줄고 질도 낮아져서 추리할 근거가 턱없이 부족했다.
"으악!"
미처 왕이 대답하기도 전에 커다란 비명이 터졌다.
"상황 보고하라."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청제는 급히 자신을 보좌하는 대신한테 편익조를 날렸다. 짧은 거리여서 대답도 빨랐다.
"후군이 붕괴했습니다. 술사 전부 죽었고 정예병들도 다 미쳤습니다."
'이번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가늠쇠가 저기에 있군.'
청제가 물러나려고 하자 왕과 마준이 물고 늘어졌다. 참마도와 큰 칼의 공격도 마냥 무시할 수 없어서 잠깐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둘을 떨쳐 낸 청제는 허공을 날아 후군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다행히 여기에 본영을 지으려고 했기에 행군할 때보다 부대 간격이 좁았다.
얼마 안 걸려 청제는 후군에 도착했다.
"간략하게 보고해."
"놈들이 와서 화살을 날렸습니다. 보급부대에 방패와 무기를 들려서 방진을 짰습니다. 정예 병사와 술사들이 보급부대 뒤에 숨어서 공격 기회만 노리는데 갑자기 덩치 큰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청제는 질문을 꾹 참으며 계속 보고를 들었다.
"그 자식이 칼을 휘두르자 술사들 몸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허공에서 깃발 하나 꺼냈는데, 그자와 가까이 있던 병사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미쳐버렸습니다."
치우가 귀곡멸살로 술사들을 전부 죽인 다음 초혼번으로 귀신들을 불러서 병사들 몸에 깃들게 한 거였다.
청제한테 다행이라면 약 한 달 전에 치우가 금계산에서 초혼번을 한 번 쓴 관계로 이번에 불러온 귀신은 많지 않았다.
치우가 귀화를 품은 태극보인을 뽑아내는 바람에 초혼번은 치우의 법력을 못 쓰고 자신이 품은 법력으로 귀신을 불러와야 한다.
청제는 귀신에 들려 같은 편을 열심히 죽이는 정예 병사들을 보며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설마.'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억누른 청제는 우선 법술을 펼쳐 귀신 들린 자들을 넝쿨로 묶었다. 무리하여 대규모 법술을 펼치는 바람에 작은 내상을 입긴 했지만, 어차피 대부분 술사는 내상을 늘 달고 살다시피 한다. 작은 내상을 입었다고 전투력에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다.
"오장국에 편익조를 보내라. 경석이 왕궁에 있는지 확인해서 알려라."
상대의 대응을 보니 하루 이틀 준비한 게 절대 아니다. 더구나 공격과 후퇴의 시간이 절묘하게 맞물렸다.
내부에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첩자가 없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청제는 가장 먼저 경석을 떠올렸다. 얼마 전에 만성독 해약을 바치면서 목숨 걸고 충성하겠다고 눈물 콧물 흘리며 맹세까지 하는 바람에 용서해 주기로 했다.
청제는 칠봉과 풍수를 비롯해 다섯 개 국가를 병합한 구려국의 왕이 되려는 목적이기에 딱히 경석을 죽여 오장국 왕위를 빼앗을 생각이 없었다.
'경석을 따르는 놈이 내 군대 안에 있다는 말인데. 너무 방심했구나.'
첩자가 있다는 사실은 청제도 모르진 않았다. 예전처럼 많은 정보가 오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구려국의 소문을 청제한테 전하는 자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청제의 밑에도 구려국의 첩자가 있기 마련이다.
알면서도 일만이나 되는 큰 규모여서 첩자가 별 쓸모가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첫 전투에서 어마어마하게 활약해 버렸다.
"피해 상황은?"
"술사들이 다 죽었습니다. 정예 병사 삼백과 보급부대 병사 백 정도가 미쳐서 자기들끼리 죽이기도 하고 멀쩡한 아군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놈들은 쌀에 이상한 물을 뿌리고 가축들을 끌고 도망쳤습니다."
청제가 비명을 듣고부터 후군이 있는 곳에 도착하기까지 채 반 각도 안 되는 기간이다. 이리도 신속한 걸 보면 분명히 미리 이렇게 될 것을 알고 계획대로 움직인 거다.
'똥 냄새 때문에 가축을 바깥에 둔 게 실책이구나.'
"청제께 아룁니다. 놈들이 물러갑니다. 추격할까요?"
청제는 고개를 돌려 전방의 상황을 살폈다. 구려국은 왕의 지휘에 따라 천천히 뒷걸음질로 철수했다. 질질 끌려가던 피투성이들이 벌떡벌떡 일어나는 걸 보니 구망이 법술로 부상자들을 살리는 듯했다.
"아니다. 모두 본영으로 돌아오라고 해라."
점검해보니 짧은 기간 삼백 명이나 죽고 부상자는 천이 넘었다. 구려국은 죽은 자가 채 스무 명도 안 되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거기에 백 명의 술사와 미친 병사들 공격으로 죽은 이백 명까지 합치면 사망자만 육백이 넘었다.
"남은 가축을 모조리 잡고, 깨끗한 쌀을 찾아 모두 밥을 지어라."
청제의 명령에 수하들은 군소리 없이 따랐다. 평소랑 다르게 의견을 듣지도 않고 지시를 내린다는 건 결심이 확고하다는 뜻이다.
"어쩔 요량입니까."
"배불리 먹고 이대로 형양으로 간다. 내일 점심까지 성벽을 못 넘으면 우리가 진 거다."
공선전을 어떻게 펼칠지만 고민하다가 선제공격에 보란 듯이 당했다.
'계책 문제가 아니다. 구려국의 정예가 강하니까 당한 거다.'
전방에서 미끼로 쓰인 천 명 정예가 약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위명이 자자한 구려국의 정예가 아니라면 육천이나 동원할 일도 없었고 청제가 뇌공과 풍백까지 데리고 지원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렇다고 해도 은신술로 온 치우한테 당해 술사들이 죽고 병사 일부가 미치는 건 막지 못했겠지만, 서로 상처를 준 상황에선 병력이 일만이나 되는 청제가 이득이다.
그런데 구려국 정예의 말도 안 되는 전투력이 일방적인 손해를 청제한테 강요했다.
'저놈들을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하는데.'
정예라는 게 사람을 모아놓고 잘 먹이고 잘 재우고 훈련 열심히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다. 부대로서 자부심이 있어야 하고 전투 경험을 전수할 노련한 병사가 있어야 하며, 위기 상황에 소규모로 뭉쳐 대응하는 체계가 잡혀야 한다.
그래야 노련한 자들이 나이를 먹어 물러나더라도 전투력이 크게 하락하지 않고, 싸우기도 전에 상대 기세를 꺾을 수 있다.
'구천이 넘은 병력이다. 형양의 성벽도 높지 않고 상대는 구망뿐이니 세 곳에서 동시에 성벽을 공격하면 둘은 무너뜨릴 수 있다.'
"뇌공, 풍백."
"분부하십시오."
"내일 구망은 내가 견제하겠다. 너희는 어떻게든 왕을 빨리 찾아 죽여라. 그리고 치우인지 하는 놈도 가능하면 죽여라."
큰 손해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청제는 진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최정예와 술사를 잃은 손해를 보충하려고 구려국의 정예 병사를 욕심내며 구망을 비롯해 수뇌부만 제거하고 형양의 오만 명 백성을 인질로 삼아 구려국 병사들의 충성을 받아낼 계획을 세웠다.
"안전하게 차근차근 적 병사 숫자를 줄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뇌공이 드물게 청제의 말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제까지 뇌공은 청제가 하자는대로 했고, 주로 멍청한 우사나 조심성이 많은 풍백이 반대 의견을 냈다.
"왜? 뭐 걸리는 거 있어?"
뇌공처럼 제멋대로인데 일 처리가 깔끔한 자는 드물다. 실력도 있지만, 타고난 직감 덕분도 컸다. 게다가 뇌공은 차기 벽력문 문주 내정자이기에 청제도 체면을 줘야 했다.
"아까 그 형천이라는 놈. 쉽게 볼 놈이 아닙니다. 날 상대로 실력 일부를 숨겼습니다."
청제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이기는 거면 굳이 청제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다. 풍백이나 뇌공 혹은 아무나 멍청하지 않은 놈한테 일만 명을 딸려 보내면 된다.
청제가 직접 나선 건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것도 있고, 상황에 따라 최대한 구려국의 힘을 보전하여 흡수하기 위함이다.
"죽이기 어렵겠어?"
"도망 못 가게 잡아두는 건 무립니다."
그때 아까 명령을 받은 부하가 다가왔다.
"청제께 아룁니다. 경석이 종적을 감췄다고 합니다."
"놈이 첩자 노릇을 한 거군요."
"오장국 놈하고 원한을 맺으면 벽에 적어두라고 하더니. 헛말이 아니었습니다."
"청제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형양을 함락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백 명을 오장국 대신으로 임명한다. 공이 가장 큰 자는 오장국의 왕으로 추대한다."
짧은 기간 많은 사상자를 내며 침울하던 분위기가 가신 듯 사라지고 기세가 서서히 살아났다. 잘 익힌 밥과 신선한 고기를 넣은 국을 마신 병사들은 잠을 푹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났다.
목적지는 동부 최대의 도시 형양이었다.
- 작가의말
형천과 치우 정도면 혼자서 천 명 몫을 넉넉히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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