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추여일일參秋如壹日
오작파용烏鵲破蛹
오작이 번데기를 벗으니
세류신적歲流信積
세월이 흘러 편지만 쌓였다
커다란 번데기가 쩍 갈라지며 준수한 모습의 청년이 나왔다.
축융봉에 갇힌 오작이었다.
"이제 겨우 일 단계구나."
갑갑한 나머지 오작은 소리 내어 말했다.
천잠지용공은 총 아홉 단계가 있다. 현재 오작은 첫 단계를 겨우 완성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최소 칠 단계 이상은 되어야 영예주의 저주를 완전히 벗을 수 있다.
'편지구나.'
오작은 한쪽에 수북이 쌓인 가죽들을 수습해 가장 밑의 것부터 살폈다. 오작하고 상의하러 왔던 형천이 불러도 대답 없는 번데기에 지쳐 남긴 편지였다.
- 강제명한테 군사 백 명을 받아 적표노와 싸웠습니다. 적표노의 팔대천왕으로 불린다는 장군 중 세 명을 죽였습니다. 강제명과 구천현녀는 남부 절반 이상 병력을 이끌고 헌원황제를 토벌하러 출발했습니다.
헌원황제는 다름 아닌 희운이었다.
- 내막을 알아보니 강제명은 소소를 빼앗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소소를 빼앗으면 백제가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 듯합니다.
첫 편지는 내용이 많지 않았다. 금계동에 갇혀 있어야 하는 소소가 희운과 혼인한다는 정보를 받고 부랴부랴 오작과 상의하러 왔다가 짧게 남기고 떠난 것이었다.
- 강제명이 패배했습니다. 희운은 백제와 청제 그리고 묵제의 지원을 받았고, 대별산의 칠요괴도 희운의 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눈으로 소소를 직접 확인했습니다. 금계동에 들려야겠습니다.
두 번째 편지는 훨씬 짧았으나 담긴 내용은 어마어마했다.
- 금계동에 들러 탁일계를 만났습니다. 소소와 오행마는 여전히 금계동에 있다고 합니다. 형님이 축융봉에 갇혔다고 하니 탁일계가 기뻐하더군요. 사상의 기운 중 불만 약해서 걱정이었는데 해결되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물으니 대답하지 않더군요.
오작은 자신의 가설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물과 쇠의 기운을 타고난 오작이기에 현무루와 백호정은 잘 소화했다. 그러나 청룡주와 주작란은 아니었다.
천일도에 구 년이나 갇힌 건 청룡주의 소화가 끝나지 않은 탓이었고, 현재 축융봉에 잡혀있는 것도 청룡주보다 먼저 삼킨 주작란의 소화 때문이다.
- 강제명이 적표노를 친다고 합니다. 저를 선봉에 세웠는데 어떻게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적표노는 치우의 적인 청제와 같은 편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잠재적인 적으로 보이는 헌원황제와 적입니다. 강제명도 헌원황제 편으로 돌아선 듯한데 복수를 끝내는 게 맞는지 아니면 적표노를 살려둬야 하는지 고민입니다.
오작은 다음 편지를 읽었다. 네 번째 편지는 좋은 소식이 있었다.
- 적표노를 죽였습니다. 정면 대결로는 제가 조금 밀렸습니다. 든든한 갑옷이 있다면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텐데, 수비를 왼손의 방패에 의지하다 보니 도끼를 휘두르는 데 지장이 조금 있습니다. 비록 통쾌하진 않지만, 지장술로 숨어 적표노가 함정에 걸려들길 기다려서 기습으로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리고 열흘 동안 쫓아 끝내 동부의 땅에서 적표노 목을 벴습니다.
다섯 번째 편지에는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함께 적혔다.
- 공공이 패배했습니다. 고인충이라는 멧돼지 요괴가 북부에서 빙령도를 제외한 세력을 취합하여 공공을 무너뜨렸습니다. 고인충은 백제와 황제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치우는 원래 공공을 도우려 했지만, 청제와 황제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백제는 예상 못 했는데.'
공공은 북부에서 가장 강한 자이고 세력도 가장 크다. 그러나 이는 공공의 발목만 잡았을 뿐, 별 도움이 되진 않았다.
작은 세력들이 공공을 견제하려고 나름대로 뭉쳤고, 공공의 강함은 소용이 없었다. 공공은 자신의 강함을 경쟁자들한테 써먹지 못했다.
공공의 가장 강한 법술은 천격홍류天激洪流다. 홍수를 소환하는 이 법술은 아주 넓은 범위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천격홍류를 사용하는 즉시 북부 전체가 공공의 적으로 돌아선다. 그저 죽여야 할 상대라면 부담 없이 펼칠 수 있지만, 공공은 북부대통합이 목적이다.
물론, 이 부분은 오작도 예상했다. 그리고 희운이 고인충을 지원할 것도 어느 정도 예상했다. 요수촌을 잃은 희운은 어떻게든 계약을 맺은 요괴들을 써먹어야 하고, 그나마 손잡을 만한 상대는 요괴인 고인충이다.
그러나 백제까지 고인충을 지지할 것은 예상치 못했다.
'소소가 금계동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방심했다.'
희운과 소소의 혼인은 불가능하다고 여겼기에 많은 걸 놓쳤다. 희운과 소소가 혼인한다는 가정하에 벌어질 일들을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다.
- 현재 저와 공공 모두 구려국에 있습니다. 치우는 짧은 기간 몰라보게 성장했습니다. 예전엔 아이 같은 면이 많았는데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청제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고 동부를 차근차근 통일하고 있습니다. 왕은 제의 신하라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 항복하는 국가의 혈통을 인정합니다. 왕은 제에게 해마다 조공을 바쳐야 하고, 제가 부르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야 합니다. 왕이 바뀔 때 제의 인가를 받아야 합니다.
치우는 생각보다 잘하고 있었다. 그간 오작이 늘 곁에 있어 머리를 안 썼던 것뿐이라고 주장하듯이 구려국의 왕세손으로서 모든 면에서 훌륭하게 해냈다.
일곱 번째 편지는 필체가 달랐다.
- 직접 대화하고 싶었지만, 현재 축융봉은 순수한 불의 기운을 지닌 자만 출입할 수 있다네. 축융도 출입하지 못하고 태상노군으로 불리는 나 역시 마찬가지네. 내가 아는 범위에서 축융봉을 출입할 수 있는 존재는 둘밖에 없네. 형천이라는 아이와 강제명이라는 아이지.
놀랍게도 태상노군이 보낸 편지였다.
- 그래도 그간 수련이 헛되지 않아 편지 정도는 들여보낼 수 있었다네. 여기에 당부의 말과 부탁 하나 남기겠네. 당부는 그냥 노파심에 하는 건데, 천잠지용공의 수련에 집착하지 말게. 자네의 법력과 경지 그리고 깨달음이 받쳐줘야 천잠지용공으로 영예주를 벗을 수 있다네.
'일부러 나한테 들려준 거구나.'
오작은 자신의 몸을 감쌌던 흑수해의 기운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아마 즙무혼과 강제명의 대화가 들린 건 즙선기가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이 크다. 흑수해의 공격적인 성향을 볼 때 몰래 엿듣게 하는 능력을 갖췄다고 보긴 어렵다.
- 부탁하기 전에 미리 알려줄 게 있다네. 자네한테 영예주를 건 사람은 나야.
오작은 머리가 멍해지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영예주를 건 사람은 서왕모일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태상노군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 자네가 입은 팔괘자수선의는 봉신책으로 만들었네. 그간 자네의 법력이 고갈된 상황에서도 팔괘자수선의는 힘을 다 잃지 않았을 걸세. 그건 봉신책의 힘이었지. 자네가 아는지 모르지만, 팔괘자수선의를 벗으려면 황룡신을 뺀 남은 넷을 완전히 소화해야 하네. 그리고 팔괘자수선의를 벗는 건 자네한테도 좋은 일이네.
오작은 편지를 빠르게 훑었다. 왜 태상노군이 자신한테 영예주를 걸었는지 어서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 자네 어머니는 자의선녀네. 천을 짜고 옷을 짓는 재주가 뛰어나 직선녀로도 불렸지. 그러나 자네는 직선녀와 흑제의 혼인에 방해가 되는 존재네. 그래서 태어나는 즉시 서왕모 손에 죽거나 해도 달도 없는 깊은 동굴에 평생 갇혀 지낼 운명이었지. 그래서 직선녀는 꾹 참고 사십 개월이나 버텼다네.
제멋대로인 서왕모도 감히 태아를 죽이는 악행은 저지르지 못했다. 자의선녀는 오작을 낳지 않고 버티며 태상노군에게 몰래 도움을 청했다.
- 반도연이 크게 열리면서 서부가 혼란한 틈을 타 자의선녀가 자네를 낳았네. 몰래 훔친 봉신책 책장으로 팔괘자수선의를 만들어 자네한테 입힌 다음, 내게 영예주를 부탁했네. 봉신책이 목적인 서왕모는 영예주를 네 번 풀 때까지 자네를 해칠 수 없게 되었다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내가 부탁을 받고 자네를 북부의 왕씨 가문으로 보냈네.
오작의 눈에 눈물이 맺혀 방울방울 떨어졌다.
- 현무루는 내가 아는 사람들한테 부탁해서 겨우 구했다네. 자네가 네 살 되던 해에 현무루를 마시고 첫 저주를 풀었을 때, 난 더는 관여해선 안 된다는 걸 알았네. 자네의 운명은 너무 거대하여 나까지 휩쓸릴 것 같았네.
'내가 약속의 아이인가?'
- 나는 만 년 이상 영예주 때문에 아이 모습으로 살았네. 지금도 법력이 계속 늘고 있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고 무위자연이라는 말이 있네. 이젠 강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이에 맞는 모습을 찾을 때가 된 것 같네. 아마 최소 천 년은 천잠지용공 수련에 몰두해야 할 걸세. 그래서 부탁 하나 함세.
- 미무골을 죽이게. 미무골을 죽이면 내 자네한테 큰 선물 하나 하겠네. 원래는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천잠지용공의 수련을 미룰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부탁하네.
태상노군의 편지가 끝났다. 오작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는 죽은 거겠지?'
소소는 형천과 치우하고 동갑이다. 그러나 칠선녀는 옛날부터 칠선녀였다. 그 이유가 직선녀로 불렸던 자의선녀가 죽고 서왕모가 소소를 낳아서였다.
소의선녀로 불리는 소소는 의술이 뛰어나 의선녀가 되었다.
'어머니의 원수는 누구한테 갚아야지? 서왕모?'
서왕모가 자신의 외할머니인 건 제치고, 원시천존이 있는 서부에서 왕 노릇을 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강할지 짐작 간다.
귀기에 잠식당한 치우가 과정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형천의 말을 들어보면 소소와 형천을 쫓아왔을 때 서왕모는 아주 멀쩡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혼자 요수촌을 절반이나 박살 낸 치우한테도 전혀 상처 입지 않을 정도로 강한 서왕모 상대로 복수가 가능할지 의문이 컸다.
'급해 하지 말자. 가문의 원수도 갚았고 노력하면 영예주도 완전히 풀 수 있다. 숙부를 구하고 가문을 재건하는 게 먼저다. 복수는 나중에 해도 된다.'
마음을 다잡은 오작은 다음 편지를 들었다. 형천의 필체였다.
- 북부가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공공이 사라지자 연맹이 와해하였고, 고인충을 돕던 요괴들 태반이 떠났습니다. 황제와 계약한 요괴들이 고인충의 수하들을 충동질하여 중부로 데려간 모양입니다.
- 서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자단 숙부를 찾아 헤매던 절교 제자들이 아미산으로 가서 국가를 선포했습니다. 조공명이 왕이 되어 세력을 넓히고 있는데, 예상외로 서왕모가 잠잠합니다.
- 남부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죽은 적표노의 아들이 수하들을 데리고 강제명 암살을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전부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남화교가 국가를 선포하고 미천이라는 자를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 중부는 연일 전쟁입니다. 황제가 된 희헌원은 치우와 달리 점령하여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고 있습니다. 길이 잘 닦이고 물길로 교통이 편한 중부여서 생각 밖으로 잡음이 적습니다.
오작은 다음 편지를 펼쳤다.
- 청제를 죽였습니다. 황제가 함추뉴와 요괴들이 맺은 계약을 수정했습니다. 오직 유웅국의 마차와 배만 요괴들의 보호를 받습니다. 힘이 약한 국가들이 다투어 유웅국에 통합되려고 했고, 덕분에 희헌원의 통합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습니다.
- 상황이 여의치 않아 치우는 청제를 죽이기로 했습니다. 공주보라는 자의 도움으로 청제의 위치를 알아내어 기습했습니다. 청제는 석 달 동안 도망 다니다가 결국 치우의 칼에 죽었습니다.
- 청제의 네 수하가 황제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뇌공이라는 자는 유웅국의 재상이 되었고 남은 셋은 태보의 관직을 받았습니다.
태보는 태사와 동급이라곤 하지만, 태사는 한 명뿐이고 태보는 여럿이다. 그래서 태사를 태보보다 높게 쳐준다.
운사와 우사는 사실상 승급한 셈이고 태사였던 풍백은 강등이다. 그러나 청제와는 위상이 다른 황제의 태보기에 사실상은 셋 다 승급이나 다름없다.
- 황제와 계약했던 요괴들이 대거 이탈했습니다. 중부의 반 이상을 차지한 황제는 쓸모가 없거나 적은 요괴와 재계약하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세력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했던 요괴들이 떠나면서 혼란한 틈을 타 중부를 침입했습니다. 치우는 자신을 복희와 여와의 정통을 이은 천황이라고 칭하며 제들을 소집했고, 누구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빌미로 치우는 중부를 징벌하기로 했습니다. 집안싸움으로 경황이 없는 북부나 강대한 적의 출현으로 움직일 수 없는 서부와 남부 사정까지 고려하면 지금이 최적깁니다.
- 대별산의 일곱 요괴가 진로를 방해했습니다. 저와 공공과 치우 그리고 구망 어르신이 나서서 놈들을 처리했습니다. 치우가 셋을 죽이고 제가 둘을 잡았습니다. 이 일이 천하를 경동하여 우리한테 귀순하려는 떠돌이들이 많습니다.
- 중부의 동쪽 부분을 거의 점령하고 유웅국의 수도 탁록에 도착했습니다. 수도 공략이 쉽지 않습니다. 저와 공공은 강제명을 설득하러 남부로 왔습니다. 먼저 여기에 들르고 강제명한테 갈 작정입니다. 다음에 또 들르겠습니다.
어느새 오작의 손엔 편지 한 장이 남았다.
- 작가의말
원래는 탁록대전도 간략하게 서술했습니다. 그러나 글의 마무리로 점지했기에 조금 상세하게 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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