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발동전신壹髮動全身
마수저주魔獸咀呪
마수의 저주는
암연상신暗然傷神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을 해친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북부의 어느 황량한 언덕. 이파리를 다 떨궈 앙상한 나무 두 그루가 외로이 추위에 떠는 언덕에 갑자기 두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일 장하고도 육 촌(1.8m)이나 되는 드물게 큰 키였다. 자색 옷에 황금색 비늘 무늬 신발을 신었고 모자는 없었다.
먹을 듬뿍 찍어 그린듯한 눈썹 아래엔 깊이 침잠한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눈·코·입은 그대로나 얼굴선이 전보다 부드러워진 청년은 바로 오작이었다.
곁에는 키가 일 장에 조금 못 미치는 설영이 황금빛이 은은한 칼 두 자루를 들고 서 있었다. 키에 비해 얼굴도 작고 오관도 하나하나 작지만, 오밀조밀 모이지 않고 시원하게 퍼져 답답한 느낌은 없었다.
오작은 은은한 황금빛을 뿜는 창을 몇 번 휘두르고 바로 소매에 넣었다. 화첨창의 무게가 조금 변했지만, 최근의 성장으로 신체나 무기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설영 역시 타고난 재능으로 무기의 변화에 바로 적응했다. 그러나 기쁜 얼굴로 훨씬 강하고 단단해진 칼을 연신 휘두르며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작은 설영의 흥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칼을 원 없이 휘두른 설영은 하얀 입김을 길게 뿜으며 말했다.
"일단 요수촌으로 가는 거지?"
성판을 꺼내 위치를 확인한 둘은 남쪽으로 반나절 달리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전에 오작과 치우가 요수촌으로 가던 길로, 요괴만 많고 인간이 별로 없는 지역이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달린 둘은 바람이 적은 곳을 찾아 작게 모닥불을 피우고 휴식을 취했다.
"당신은 호위가 걱정되지 않습니까?"
오작의 질문에 설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단하고 세 번 싸우고도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야."
"그 정도로 강해 보이진 않았습니다."
"현무루를 마셨으나 공공이 되지 못했어. 대신 방어력은 정말 놀랍지. 원래는 칼과 방패를 들고 싸웠는데, 자단을 창으로 이기겠다고 수십 년째 이상한 무기를 고집해. 정 위험하면 칼이랑 방패를 꺼낼 거야."
오작은 창을 들었음에도 수비 성향이 강했던 호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오작의 머리 위에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조심!"
설영의 외침과 동시에 오작이 소매에서 창을 꺼내 허공을 찔렀다. 아무도 없던 허공에서 푸른 피가 확 뿜어졌다.
오작은 창을 털어 다람쥐 정도 크기의 요괴를 바닥에 떨궜다. 그리고 다시 창을 두 번 찔러 땅 밑으로 접근하는 요괴 두 마리를 해치웠다.
설영 역시 한칼에 요괴를 두 마리 죽였다. 오작의 조언에 따라 설영은 칼 한 자루로 싸웠다. 두 자루의 칼이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바람에 무기술 자체는 경지보다 조금 부족했다.
"이들은 뭐지?"
여덟 마리 요괴가 목숨을 잃은 후, 남은 놈들은 물러났다. 설영은 약해빠진 요괴들이 무리를 지어 덤벼든 게 이해 가지 않았다.
"예전에 요수촌으로 처음 갈 때 시비 거는 요괴들을 제압하고 재물을 뺏은 적 있습니다. 그 원한을 잊지 않고 이러는 것 같습니다."
오작의 대답에 설영은 입을 막고 깔깔 웃었다. 오작이 요괴를 점잖은 말투로 협박하여 재물을 뜯어내는 장면을 그만 상상하고 말았다.
오작은 창으로 요괴들 몸을 가르고 내단을 찾았다. 달랑 두 마리만 내단을 품었고, 남은 여섯은 빈털터리였다.
"방심하면 안 됩니다. 괴이한 법술을 타고난 요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전엔 치우한테 겁먹었는지 홍황개벽공을 익힌 오작에게 겁먹었는지 모르지만,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하고 재물도 순순히 내놓던 요괴였다.
그러나 다시 오작이 모습을 드러내자 요괴들은 옛 원한을 잊지 않고 힘을 합쳐 오작을 죽이려 했다.
'치우가 두려웠던 건가? 아니면 내 경지가 올라 기세를 잘 갈무리한 건가?'
이유는 끝내 밝히지 못했지만, 오작과 설영은 요수촌 근처에 가기까지 백 마리에 가까운 요괴를 죽여야 했다.
실력 차이가 확연한데도 요괴들은 온갖 이상한 법술로 둘을 해치려 했고, 오작의 해박한 법술 지식과 설영의 빙령도로 일일이 파훼했다.
"근데, 너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지?"
설영의 걱정 어린 질문에 오작은 고개를 세게 털었다.
"괜찮습니다. 최근 경지가 빠르게 올라 마음이 조금 어지러울 뿐입니다."
"몸 숨기자. 누군가 오고 있어."
마음이 들끓으며 오작의 절대감도 제대로 작용하지 못했다. 다행히 설영도 기척을 느끼는 재주가 뛰어나 은신술을 펼치고 움직이는 사람을 놓치지 않았다.
은신술로 어설프게 몸을 숨기고 달리는 자를 확인한 오작이 소매에서 창을 꺼냈다.
- 왜? 요괴 아닌 거 같은데.
- 죽여야 해.
손으로 대답한 오작은 천리추흉의 법술로 화첨창을 던졌다. 액체금에 담그면서 내구는 물론 공격력도 훨씬 강해진 화첨창이 기척 없이 날아가 사내의 심장을 꿰뚫었다.
같은 시각.
희운은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백제의 여동생이자 양녀와 혼인한다는 말이지.'
희운은 물론 이 혼인을 추진한 소전마저 소의선녀가 바로 소소라는 사실을, 소소가 이미 도망쳐서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서화국이 도우면 황제가 되는 게 문제 아니다. 서부와 가까운 나라 열 개 정도 떼주는 조건으로 도움받아 중부를 통일하여 제국을 세우는 것도 가능하다.'
함추뉴를 비롯한 제들이 다스리는 나라도 왕국으로 불린다. 그러나 희운의 야심대로 중부의 국가들을 통일하고 황제가 된 희운이 직접 다스린다면, 왕국이 아닌 제국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그때, 소매가 강하게 펄럭였다. 희운은 황급히 헌원검을 소매에서 꺼냈다.
헌원검이 밝은 빛을 뿜으며 희운의 의지를 물었다. 희운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머리가 멍해졌다.
"왕자. 왕이 죽은 것 같다."
요괴의 말에 희운의 멈췄던 머리가 다시 돌아갔다. 황급히 헌원검과 계약을 마친 희운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장군. 병사를 수습해 내 뒤를 따르시오. 왕이 위험하오."
유웅국의 백성들은 소전을 아주 좋아한다. 그리고 장수와 병사들도 전장에서 늘 앞장서는 소전을 흠모하며 따른다.
왕이 위험하다는 말에 장수와 병사들이 순식간에 갑옷을 차려입고 무기를 갖춘 채 희운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그러나 희운도 병사들도 멀리 가지 못했다. 죽은 흑호를 부활 시켜 탄 조공명이 봉래도의 외문제자 수십 명을 거느리고 일행 앞을 막았다.
"난 통천교주의 제자 조공명이다."
조공명은 아미산 출신으로서 천하에 위명이 자자했으나 최근 수십 년을 봉래도에서 지내며 명성이 잦아들었다. 그러나 통천교주의 제자라는 감투 하나만으로도 거스를 자가 몇 없다.
"넌 우리가 쫓는 자와 같이 도망가던 놈이구나. 너한테는 용건이 없으니 남은 둘이 어디 있는지 어서 실토해라."
희운은 소전의 안위가 걱정되어 속이 타서 재가 될 심정이지만, 감히 조공명을 거스르지 못했다.
비록 조공명의 무서움을 모르지만, 요수촌에서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요괴들 모두 위축시켰던 걸 생각하면 함부로 대할 상대는 절대 아니다.
"송구하지만, 저는 그들과 계약 관계일 뿐입니다. 헤어진 지 꽤 오래되어 행방을 전혀 모릅니다."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지 못하면 넌 죽는다. 그리고 너와 관련된 자들도 성치 못할 것이다."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동행하며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희운의 말에 조공명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수촌에서 마지막으로 봤다고 말하면 나만 귀찮다.'
요수촌의 일을 실토하면 오작을 어딘가로 보내버린 반각을 언급해야 한다. 반각이 어디로 갔는지 알면 조공명에게 말해 떠넘길 수 있으나, 희운은 반각의 행방을 전혀 모른다.
희운은 자신이 빠져나갈 만한 구멍을 열심히 찾았다.
'그걸 말할까?'
"뭔가 떠올렸구나. 어설프게 머리 굴리지 말고 어서 말해라."
흠칫 놀란 희운은 더는 고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금계산 금계동. 거기에 이들이 찾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고, 확실한 정보인지도 모릅니다."
조공명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며 너털웃음을 크게 웃었다.
"좋구나. 정말 좋구나. 저놈 얼굴 기억해두고, 이후 마주치면 목숨 한 번씩 살려줘라."
조공명은 무공으로 천하에 위명을 떨치다가 통천교주의 제자가 되고서야 법술에 입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술의 경지만큼은 낮지 않아 희운이 말한 금계산 금계동에 자단이 있음을 듣는 순간 확신했다.
"금계산으로 간다."
부활하며 성질이 고분고분해진 흑호를 필두로 수십 마리 탈것이 주인을 싣고 남쪽으로 달렸다.
조공명 일행이 떠나자 희운과 병사들은 다시 달렸다. 그리고 채 일각도 안 되어 소전의 시체를 발견했다.
왼쪽 가슴의 관통상으로 심장 자체가 사라진 소전이 눈을 부릅뜬 채 엎어져 있었고, 주변엔 요괴 주검이 여럿 있었다.
"요괴는 왕이 해치운 게 아닙니다. 요괴를 죽인 놈이 흉수가 틀림없습니다."
장군의 말에 희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요괴를 해치운 자는 칼을 썼소. 칼로 이런 상처를 내긴 힘드오. 아무래도 요수촌의 잔당이 부친을 해쳤고, 누군가가 구하려 했는데 실패한 것 같소."
한편. 오작과 설영은 요수촌에 몰래 잠입했다가 빠져나왔다.
"근데 너 갑자기 멀쩡해졌어."
설영의 말에 오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수의 저주였던 것 같습니다."
"누구? 그 양대가리?"
"일전에 명화접을 죽인 적 있습니다. 마지막 일격을 내가 가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놈이 줄곧 자신과 싸운 나한테 저주를 퍼부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 일격을 치우가 했다곤 하지만, 화접검의 죽음엔 오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게다가 요수촌으로 향할 때 오작의 창에 천 마리 정도 명화접이 죽었다.
당연히 화접검이 죽으며 쏟은 저주는 오작에게 향했다.
"마수의 저주라고 하기엔 너무 시시한데?"
"저자를 죽여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라면 좀 더 고민했을 것이고, 당장 손쓰지 않았을 겁니다."
머리가 맑아지니 너무 급히 소전을 죽인 게 후회되었다.
"저자를 죽여서 너한테 안 좋은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야?"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오작의 추측은 정확했다. 만약 소전의 죽음을 감지한 희운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일의 진행이 달라졌을 것이다.
요수촌에서 도망친 요괴한테서 치우가 복희한테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확인하러 오던 조공명이었다. 만약 희운을 만나지 않았다면 미천망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희운과 먼저 마주치고 캐묻는 바람에 자단이 있는 금계산을 알아내고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자단의 행방을 아는 소전을 죽여 입막음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더 빨리 노출했다. 마수의 저주는 실로 교묘하기 짝이 없었다.
"근데 아까 요괴 말을 믿을 수 있어?"
"나는 상대가 거짓말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늘 정확한 건 아니지만."
오작과 설영은 쇠사슬에 견갑골이 뚫린 요괴 한 마리를 구했다. 내단을 뽑히고 사슬에 묶여 노예로 부려지던 요괴는 구원받은 보답으로 치우가 복희의 미천망에 잡혔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설영의 질문에 오작은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놀랍게도 난 복희가 어디 사는지 압니다."
오작은 그제야 왜 삼십 년 전에 귀곡자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았다. 그때 네 살을 갓 넘긴 오작은 세상과 연결이 적었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들어도 괜찮았다.
그때 들려줬던 얘기를 지금 한다면 지난번처럼 필요한 정보를 모두 전달하지 못하게 방해받았을 것이다.
'그토록 운명에 휘둘리는 걸 싫어했지만, 지금까지 꼭두각시처럼 남의 안배대로 살았구나.'
"이만 헤어지는 게 어떻습니까?"
"갑자기 왜?"
"보다시피 난 운명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당신까지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군요."
설영은 손으로 허리를 짚고 킬킬 웃었다. 외모와 전혀 안 어울리는 행동과 웃음소리에 오작은 준비했던 말을 멈췄다.
"난 운명 따위를 안 믿어."
웃음을 멈춘 설영의 눈이 이글이글 불탔다.
"아버지가 그랬어. 나는 왕이 되면 나라를 전란에 밀어 넣을 운명이라고. 천을 짜고 옷을 짓고 수 놓는 거나 배웠으면 집안에 작은 도움이라도 됐을 거라고."
"예전엔 여자가 권력을 잡고 나라와 부족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다가 무력의 차이로 그 권력이 서서히 남자한테 넘어가고 있죠. 그런 상황에 무공마저 강한 당신이 큰 부담이었을 겁니다."
설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작을 쳐다봤다.
"당신이 싫어서가 아닐 겁니다. 그러나 자기 가족뿐 아니라 백성도 살펴야 하는 왕이어서 당신의 존재가 걱정이었을 겁니다. 아마 무력이 강하며 여자인 당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리가 있을 것이고, 당신 아버지는 당신을 핑계로 그런 자들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게 싫었을 겁니다."
"그럼?"
"가장 믿음직한 호위를 붙여 밖으로 내보낸 다음 계승을 끝내고 반대파를 숙청하려고 했던 게 아닌지 추측합니다."
설영의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 작가의말
견일발이동전신牽一髮而動全身
머리카락 하나 당기면 온몸이 움직인다. 모든 사물은 긴밀히 연결되어 하나를 건드려도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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