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신귀곡자虛神鬼谷子
십이금선什貳金仙
곤륜엔 십이금선이 있고
기삼황룡其參黃龍
그 셋째가 황룡도인이다
알고 한 건 아니지만, 반고를 강신한 형천이 백초거의 법술을 파훼한 덕분에 오작을 묶은 밧줄이 사라졌다. 공교롭게 거령신을 따라 진일곡에 진입한 치우가 욕수를 잡아둬서 방해꾼도 사라졌다.
오작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도주를 선택했고, 운 좋게 마주 달리는 백초거와 스쳐 지나갔다. 백초거가 급한 마음에 어려운 축지법을 무리하여 쓰지 않고 진일곡과 가까운 곳에서 그냥 달렸다면 도망가는 오작을 발견했을 게 틀림없다.
우연과 우연이 절묘하게 겹쳤을 수도 있고, 명명 중에 하늘의 뜻이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오작은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태산에서 풍백을 피해 도망 다닐 때, 너무 많은 걸 생각하다가 낭패를 본 적 있다. 일을 무리 없이 진행하려면 넓고 멀리 봐야 하는 건 맞지만, 힘에 부칠 때는 눈앞의 목표에만 집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백호정 덕분인가?'
주작란이나 청룡주를 복용하고 급격히 성장하며 체형과 외모의 변화가 있었던 것과 달리, 백호정을 먹고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러나 외관은 변화가 없더라도 속은 달랐다. 지금 경공 수준은 소소를 비웃어도 좋을 정도고, 무극보인의 회전이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러워졌다.
거친 땅을 구르는 수레바퀴처럼 덜컥대던 법력이 콸콸은 아니어도 졸졸 끊이지 않고 흐르는 수준이 되었다.
채 이틀도 안 되어 오작은 형천이 숨었던 곳에 도착했다. 커다란 나무에서 성공했다는 표식을 본 오작은 후 안도의 숨을 쉬었다.
"꼬맹이 많이 컸네?"
오작은 놀란 가슴을 달래며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섰다.
노인치고는 큰 체구지만, 오작과 비교하면 왜소하다. 누런 도포는 삼십 년 전에 비해도 전혀 달라진 부분이 없고, 머리에 쓴 흰 모자는 새것으로 바뀌었다.
등에 교차하여 멘 쌍검의 검 자루 역시 기억 속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당신은 누굽니까?"
오작은 얼마 전까지 애타게 만나고 싶었던 황룡도인에게 진지하게 질문했다.
"이젠 뭔가 이상한 게 느껴져?"
"당신은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육체가 있습니까?"
"내가 예전에 허신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지?"
"허신은 귀신이라고 했던 적 있습니다."
"그래. 허신은 귀신이지만, 귀신은 허신이 아니다. 나는 허신 귀곡자라고 한다. 이 육체의 신분은 곤륜 십이금선 중에 셋째인 황룡도인이다."
"그럼 당신은 귀곡자와 황룡도인 중 누굽니까?"
"둘 다. 육신에도 의지는 있으니까. 이 몸은 내가 강제로 빼앗은 게 아니라 상대 동의를 얻고 차지한 거다."
"그럼 황룡도인은 어디로 갔습니까?"
오작은 평소 사람을 상대할 때 속내를 잘 안 비친다. 궁금한 게 있어도 꼭 필요하지 않으면 참는 편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글을 가르치고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계몽 선생 앞에선 호기심을 누르지 않았다.
귀곡자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로 갔다. 이놈도 천명이 있는데, 천명을 완성하기 전에 천계로 갈 기한이 됐다. 그냥 천계로 가면 천명을 완수하지 못한 벌을 받을 것이고, 안 가면 다신 천계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그 천명을 물려받기로 하고 대가로 몸을 받았다. 그게 오백 년 전이었지."
"설마, 그 몸의 주인이 천계로 가서 황룡이 된 겁니까?"
"그래. 그때부터 삼계에 황룡신이 생기기 시작했고, 후토가 나타났지."
우주 만물은 탄생에서 성장, 성장에서 완성, 완성에서 쇠락, 쇠락에서 소멸로 간다. 소멸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탄생의 거름과 바탕이 된다.
세상은 이런 수많은 탄생에서 소멸의 과정이 뒤섞여 얽힌 채 자체의 탄생부터 소멸로 가는 길을 걷는다.
청룡과 백호, 주작과 현무가 천계로 가면서부터 세상엔 청룡주와 백호정 그리고 주작란과 현무루가 나타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룡이 천계로 가면서 황룡신이 등장했고, 그걸 복용한 자들이 화신이 되며 오방신으로 불렸다.
진짜 오방신이 천계로 떠난 자리를 화신이 차지한 것이다.
"중요한 이야기부터 하자. 내가 네 편인 건 확실히 알겠지?"
"당신도 천명이 있으니까 누구 편이라고 하기 그렇지 않습니까? 천명을 완수하지 못하면 큰 벌을 받을 테니깐요."
"아직 천기를 읽을 정도는 아니구나. 내가 너한테 너무 큰 기대를 했어."
한숨을 푹 쉰 귀곡자가 말을 이었다.
"나는 허신이다. 힘은 귀왕이나 이지를 갖춘 귀신들보다 못하지만, 신통함은 영리귀가 모두 몰려와도 내 발끝에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난 허신임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입었다. 그래서 다른 허신들처럼 알아듣기 힘든 허무맹랑한 소리를 뱉지 않는다."
오작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첫째. 어서 치우를 찾은 후 천일도로 가라. 청룡을 빨리 천계로 돌려보내야 한다. 청룡의 부재로 천계의 균형이 무너지면 우리가 사는 삼계에 어떤 재난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우리가 청룡을 돌려보낼 수 있을까요?"
오작은 의심 가득한 얼굴로 반문했다.
"청룡은 천계의 최고신 중 하나다. 힘으로 돌려보내는 건 불가능하고, 청룡이 삼계에 남은 미련을 해소해야 한다. 그 정도는 너희도 할 수 있다."
"둘째. 천하를 통일해라. 꼭 네가 하라는 건 아니고, 누구든 통일할 수 있게 도와라."
"왜 그래야 합니까?"
"반고의 개천부가 뽑혀 세상의 기운이 서로 통하기 시작했다. 더는 오행으로 사람을 나누는 게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억지로 물의 기운이 강한 사람들은 북쪽에 두고 불의 기운이 강한 사람은 남쪽에 두면 어떻게 되겠냐?"
오작은 귀곡자의 말을 이해했다.
"인간은 쇠락하고 요괴와 마수가 번성하겠군요."
오행 중의 기운 하나를 강하게 타고 태어나는 인간은 세상의 기운들이 섞이면 약해진다. 반대로 오행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대부분 요괴는 더 강해진다. 강해진 요괴들은 약해진 인간을 조금씩 몰아내며 영역을 넓힐 것이고, 예전처럼 요괴와 마수가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해결 방법은 서로 다른 기운을 타고나는 인간이 섞이는 거다. 하나의 기운을 다른 기운보다 강하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균형을 이루는 거로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혼돈은 탄생이고, 혼돈이 음양과 오행으로 갈라진 건 성장이다. 완성은 음양과 오행의 완벽한 균형인데, 그건 내가 생각해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완성에 이르지 않았다고 쇠락으로 넘어가지 않는 건 아니다. 더는 성장하지 못하면 완성되지 못하더라도 쇠락하게 된다."
"만물 중 음양과 오행의 균형을 가장 잘 이룬 게 인간이군요."
"그렇지. 인간이 번성해야 세상의 쇠락이 미뤄진다. 세상이 오래 번성해야 천계로 올라가는 존재가 늘 것이고, 그렇게 돼야 천계도 세상의 멸망을 막아낼 힘을 갖춘다."
"제겐 너무 큰 얘기군요."
오작은 그저 자단과 구망을 구하고, 힘을 키워 누군지 모르는 가문의 원수에게 복수하고 싶을 뿐이다. 세상이 어쩌고 천계가 저쩌고는 관심이 없었다.
"천명을 타고 태어난 자들이 각자의 목표를 위해 뭔가를 할 거고, 천명이 없는 사람들도 거기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싫다고 피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대비하고 나서는 게 바람직하다."
그때, 귀곡자의 몸이 아지랑이처럼 흐릿해지며 아물거렸다.
"제길. 더는 말을 못 하는구나. 난 이만 선행 쌓으러 가겠다. 그래야 필요한 천기를 너한테 누설할 수 있다. 할 말이 남긴 했지만, 너라면 잘하리라고 믿는다."
말을 마친 귀곡자의 몸이 사라졌다. 법술로 이동한 게 아니고, 그저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 거였다.
'약속의 아이가 누구고 어떤 존재인지 묻지 못했구나.'
오작은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성격이 아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 확실하기에 지체하지 않고 형천이 남긴 흔적을 따라 달렸다.
한편.
치우는 오작과 소소와 함께 오던 길을 되짚었다. 괜히 치우를 막으려던 기련산의 서부 수비대와 북부 수비대는 치우 손에 건물 태반이 무너졌다.
다행히 치우는 살려둘 사람을 귀찮다고 죽이지 말자던 약속을 잊지 않고 귀기에 통제력을 다 뺏긴 상황에서도 살인은 자제했다.
대신 법보는 물론 갑옷과 병장기를 모두 동주철갑으로 먹어 치워 두 수비대에 어마어마한 재산 피해를 줬다.
기련산을 넘은 치우는 황무지를 밟고 남쪽으로 달렸다. 원래는 조금만 쉬며 며칠이나 달렸던 거리를 고작 하루 만에 주파해 요수촌에 도착했다.
황무지를 달리는 내내 개미 한 마리 보지 못했던 치우는 요수촌의 수많은 요괴와 법력을 품은 영지를 보자 욕심이 끝없이 솟아났다.
금맥이 나타날 땐 몇에서 수십 명씩 목숨을 잃는 요수촌이지만, 평소엔 나름대로 질서가 잡혔고 무의미한 살육은 적다. 최근 공손부보와 조공명 그리고 오작 일행의 싸움으로 혈기도 가라앉았기에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런 분위기에 젖어 방비를 소홀히 한 요괴 한 마리가 치우의 주먹에 몸이 부서졌다. 원래 요괴는 몸이 열 토막 나도 바로 죽지 않고, 몸을 다시 붙이기만 하면 되살아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런데 치우의 주먹에 맞은 요괴는 비명도 못 지르고 즉사했다.
"놈들이 돌아왔다."
온몸에 귀기가 산불처럼 타오르는 치우를 누구도 오작과 함께 두 번이나 방문했던 먹보랑 연관시키지 못했다.
그저 공손부보의 팔을 빼앗은 후 갑자기 사라진 그놈들이 돌아온 거려니 생각하고 소리 질렀다.
"우리 마을을 지키자!"
강한 적과 합심하여 싸운 경험으로 요수촌의 단결력은 전에 없이 높았다. 몇몇이 외치자 인간이고 요괴고 할 것 없이 모조리 달려 나왔다.
그러나 치우의 주먹을 버티는 요괴가 없었고, 황금으로 산 법보든 어렵게 단련한 법보든 동주철갑에 무자비하게 먹혔다.
"비켜!"
거산파의 방주가 가누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육중한 몸을 날렵하게 움직여 치우를 덮쳤다.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치우의 몸에 닿자 요괴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치우는 멀쩡했고, 거대 마수는 치우의 주먹질 한 번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너무 강하다. 각자도생하라."
거산파의 방주가 치우의 주먹에 죽자 요괴들은 흩어져 도망쳤다. 요괴들이 펼친 법술은 동주철갑과 귀기가 다 막아냈고, 병장기나 신체로 가한 공격 역시 치우한테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다.
치우는 도망치는 요괴들을 굳이 쫓지 않았다. 요수촌에는 요괴보다 훨씬 탐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요괴들이 자신의 법력을 희생해 만든 영지다.
요수촌엔 대부분 몇 년 공만 들인 보잘것없는 영지로, 영지 자체가 품은 기운은 적다. 그러나 영지는 파괴될 때 주변 기운을 강하게 끌어들인다.
강에서 물고기 요괴의 영지를 한발이 파괴할 때 몸으로 느낀 적 있어 치우는 영지를 파괴하여 기운을 흡수하기로 했다.
비록 귀기로 이성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천지 분간 못 하는 멍청이가 된 건 아니다. 치우는 가장 만만한 영지를 골랐다.
치우는 땅을 쿵쿵 밟으며 달리다가 몸을 띄워 영지를 이룬 건물에 발차기를 날렸다. 치우의 발차기를 받은 영지는 쩌적 소리를 내더니 기운을 강하게 뿜어냈다.
사라지기 싫은 영지는 주변으로부터 기운을 보충해 존재를 이어가려 했고, 덕분에 영지가 품은 것보다 몇 배 강한 기운이 몰려왔다.
치우는 온몸을 활짝 열고 모이는 기운을 받아들였다. 대부분은 귀기가 가져다가 맛있게 먹어 치웠지만, 일부 알짜는 태극구와 치우 본연의 기운에 합류했다.
"우리 요수촌도 끝장이구나."
멀리서 바라보던 요괴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요수촌의 자리엔 금맥이 잘 나온다. 이를 탐낸 인간과 요괴들이 모여들어 백 년 가까이 싸웠다. 그러다가 어렵게 질서가 잡혔고, 아주 평화롭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어울려 살며 마을을 이뤘다.
치우가 난장판을 벌인다고 금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금맥을 욕심낸 요괴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자리싸움을 시작하면 언제 다시 지금처럼 어울려 사는 마을이 될지 의문이다.
게다가 요수촌의 무력을 경계하여 지금껏 지켜만 보던 공공이나 중부의 국가들이 몰려들면 어떤 난리가 벌어질지 장담이 어렵다.
영지를 파괴하며 귀기는 기운을 먹고 치우와 태극구 역시 기운을 조금씩 보충했다. 그리고 동주철갑은 영지의 잔해를 먹어 치웠다.
모두의 이익에 부합하는 일이어서 귀기는 요괴들을 쫓아다니며 죽이기보다 영지를 파괴하기로 했다.
그렇게 요수촌의 영지가 태반이나 무너졌을 때.
"허허. 예상을 뛰어넘은 성장이군."
너무 빨아 색이 바랜 옷을 입은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의 손엔 손때가 반질반질하게 묻은 밧줄이 하나 있었다.
사내가 접근하자 치우는 영지를 파괴하던 걸 멈췄다. 그러나 웬일인지 바로 공격하지 않고 흰자만 남은 눈을 껌뻑였다.
"이지를 완전히 잃진 않았군. 대단한 의지야."
사내는 치우를 칭찬하며 손에 든 밧줄을 허공에 던졌다. 보잘것없던 밧줄은 하늘에서 넓게 펴지며 그물이 되었다.
"미천망彌天網!"
멀리서 발을 구르며 치우의 파괴 행위가 멈추기만 바라던 요괴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사내는 그물에 감겨 버둥대는 치우를 질질 끌고 느릿느릿 요수촌을 떠났다.
- 작가의말
미쳐 날뛰는 치우를 떼찌하러 나타난 의문의 중년 사내. 과연 그는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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