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룡득풍익角龍得風翼
오백생각伍佰生角
오백 년이면 뿔이 자라고
천년득익仟年得翼
천 년이면 날개가 생긴다
요괴의 영지는 대부분 결계로 보호된다. 결계의 기본 기능은 은폐다. 그리고 귀령성모처럼 오래된 요괴는 출입을 제한하는 기능도 추가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대망사는 채 오백 년도 안 된 요괴다. 그것도 용이 되겠다고 힘을 키우기보단 정신 수양에 더 공을 들여 수련 기간에 비해 약한 편이다.
그래서 흑석림의 결계는 은폐 기능밖에 없다.
풍백은 흑석림의 결계 앞에서 망설였다. 손만 내밀면 결계가 만져질 거리에 멈춘 건, 암유를 걸고 한 맹세 때문이었다.
그냥 거짓말하는 건 괜찮다. 거짓말을 자주 하면 수련에 지장을 주는 건 맞지만, 마음 수양을 하면 그 영향을 쉽게 지울 수 있다.
그러나 맹세를 어기는 건 다르다. 평소엔 큰 지장을 못 느끼더라도 경지를 높이거나 깨달음을 수습하는 과정에 방해할 가능성이 무척 크다.
한참 고민하던 풍백은 뒷걸음질로 거리를 벌렸다. 맹세를 어기고 흑석림에 들어간다고 해도 대망사를 꼭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확실히 오작과 치우를 해치우고 결승법을 빼앗을 수 있다면 맹세를 어기는 것 따위는 감수할 수 있지만, 괜히 물고기도 못 잡고 그물이 찢기는 불행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적당한 거리까지 물러난 풍백은 소매에서 부적을 하나 꺼냈다.
"소환술, 풍익대구조風翼袋口鳥."
대구조는 날개가 안 달린 새다. 보통 물가에 살며 물고기를 비롯해 개구리나 쥐 등을 잡아먹는데, 부리가 크고 단단하여 웬만한 맹수도 대구조를 보면 피한다.
날개가 없는 대신 법력을 타고나는데, 대부분은 요괴가 되지 않고 그대로 살다가 만다. 다른 짐승은 법력을 타고나면 요괴가 되려고 아득바득 애쓰는 것과 크게 대조되어 사람들은 대구조를 군자조君子鳥라고 부른다.
"아, 뭐야. 한창 식사하는 중에."
바람으로 된 날개를 등에 단 대구조가 풍백을 큰소리로 책망했다. 사냥을 끝내고 배부르게 식사하려는 찰나에 소환술로 수백 리 밖으로 불려왔으니 기분 좋을 리 없다.
"열흘 안에 이 편지를 전하고 물건을 받아서 내게 가져와. 그럼 너와 나의 계약은 끝이다."
풍백의 말에 대구조가 반색했다. 새끼를 구해주는 대가로 풍백의 소환에 응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아직 계약을 완수하려면 시일이 꽤 남았는데 풍백이 알아서 계약을 해지한다니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그래. 후딱 끝낼 테니 빨리 편지나 줘."
부리 안의 주머니에 편지를 넣은 대구조는 바람으로 된 날개를 휘저으며 허공을 날았다. 점점 작아지는 대구조의 모습을 보며 풍백은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
'벽력문에서 외상으로 얻은 풍화석으로 벽력문의 가장 훌륭한 제자를 죽인다. 내가 생각해도 난 참 악독한 놈이야.'
한편.
풍백이 커다란 음모를 꾸미는 것도 모르고 오작과 치우는 대망사의 허물을 신나게 벗겼다. 안전하게 숨겨주는 대가라곤 하지만, 남을 돕는 건 꽤 즐거웠다.
게다가 질긴 허물이 북북 찢길 때 오는 쾌감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무공이나 법술을 수련하다가 깨달음이 오는 상황보다 훨씬 강렬했다.
"근데 우리 망형이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야."
치우는 넉살 좋게 대망사를 망형이라고 불렀다.
"법력의 순도가 높아져서 그런 거야. 너도 안전해진 후엔 당분간 양을 키우기보단 질을 높이는 데 공들여야 해."
허물이 거의 벗겨지자 대망사는 참지 못하고 꼬리를 털었다. 얼마 안 남은 허물이 쑥 벗겨졌다.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노래진 비늘이 흑석림을 사선으로 비추는 햇빛을 받고 은은하게 빛났다.
"너희 덕분이다."
대망사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내가 너무 큰 은혜를 받았구나. 평생 갚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린 목숨을 구원받았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작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따로 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수련하며 지내거라."
말을 마친 대망사는 배배 똬리를 꽜다. 오작이나 치우가 전력을 다해 두드려도 흠집 하나 안 날 것 같이 단단하던 노란 비늘들이 흐물흐물 녹아 붙었다.
녹은 비늘들이 흐르다 굳기를 반복하며 불과 반 각도 안 되어 대망사는 누런 알이 되었다.
"둔각처럼 태변하려나 봐."
치우의 말에 오작은 내내 잊고 지냈던 둔각을 떠올렸다.
"둔각은 어디 갔지?"
둔각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작과 치우가 신나게 허물을 벗기느라 관심을 안 줘서 그렇지, 둔각은 둘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둔각은 대망사가 벗은 허물을 뜯고 있었다. 삼키진 않고 씹다가 뱉는 걸 보면, 그냥 잔류한 기운만 흡수하는 것 같았다.
아무 데나 대충 버린 허물을 커다랗게 모아 놓고 입으로 거칠게 뜯는 둔각을 보니 예전의 심술쟁이 망아지가 생각나서 오작은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치우야, 넌 법력 순도를 높이는 수련을 해."
기운이 클수록 순도를 높이는 일이 어렵다. 대부분 술사는 법력 순도를 높이는 방법이 없어서 그 어려움을 어쩔 수 없이 겪는다. 그러나 치우는 태극보인이 있기에 바로바로 순도를 높여 수련의 큰 장애물 하나를 미리 치울 수 있다.
"형은?"
옷이 날개라고, 푸른 허물로 만든 멋진 옷을 입은 치우는 철부지로 보이지 않았다. 타고난 위엄과 듬직한 덩치 때문에 실상을 모르는 사람은 따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길 것 같았다.
"난 결승법 수련해야지. 그래야 조금이라도 빨리 법술을 회복하지 않겠어?"
풍백은 분신을 폭발시켜 오작의 결승법을 파훼했다. 덕분에 풍백도 당분간 분신술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오작의 결승법 역시 지난번보다 훨씬 오래 묶이게 되었다.
오작과 치우가 근심·걱정을 잊고 수련에 매진하는 동안, 제때 풍백 곁으로 돌아온 대구조가 부리의 주머니에서 최상급의 풍화석을 뱉어냈다.
"계약 해지해 줘."
대구조의 말에 풍백은 쓴웃음을 지었다. 보통 요괴들은 높은 경지의 술사와 소환 계약을 맺는 걸 반긴다. 소환 계약으로 연결된 것만으로도 요괴의 정신 수양에 도움이 되고 법력 증가에도 작게나마 보탬이 있다.
"알았어. 그간 수고했다."
풍백은 소환 계약을 해지했다. 계약 해지와 함께 대구조는 불려오기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갔고, 한 쌍의 바람 날개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건 폐기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구나."
시간이 흐르면 흥분이 가라앉고 정신이 맑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화가 들끓으며 오작과 치우를 빨리 죽이고 싶었다.
"은폐술隱蔽術."
풍익을 법술로 감춘 풍백은 풍화석을 들고 흑석림에 접근했다. 현재 주화입마인지 심마가 생긴 건지 모르지만, 오작과 치우를 해치우면 해결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환술, 폭풍신."
소환석 등급도 훨씬 높고 법력도 그때보다 훨씬 강하다. 정신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그건 폭풍신을 소환하는 데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덕분에 풍백은 지금껏 소환했던 중에서 가장 비율이 좋고 덩치가 큰 폭풍신을 불러냈다.
"목표 흑석림, 목적 말살."
오작의 이름을 오운으로 알고 치우의 이름은 모른다. 그래서 풍백은 흑석림의 모든 살아있는 것을 말살하라고 지시했다.
목적을 주입받은 폭풍신은 쿠르릉 소리를 내며 흑석림의 결계를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풍백은 폭풍신이 오작과 치우를 죽이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지만, 맹세를 어기는 게 너무 께름칙하여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결계의 존재로 오작과 치우는 밖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노란 알로 변한 대망사와 대망사의 허물을 씹다가 또 알이 된 둔각을 살피느라 웬만한 기척은 무시할 정도였다.
"둔각의 정체는 뭘까? 점점 궁금하네?"
치우는 늘 호기심이 넘친다. 그러나 호기심을 풀려는 노력엔 인색한 편이다.
"나도 몰라. 태극구도 모르는 걸 보면 아는 사람이 없다고 봐야 해."
"영리귀를 부르면 알까?"
"어마어마한 대가를 준비해야 할 거야. 중요한 정보가 비싼 게 아니라 아는 사람이 적은 정보가 비싼 것 같으니까. 자단 숙부의 행방을 물으니 대답 못 했잖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거나 없다는 뜻이야."
오작의 추측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대가가 비싼 건 맞지만, 자단의 행방이 비싼 건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때, 쿠르릉 소리와 함께 바람으로 된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결계를 넘어 들어온 폭풍신이었다.
오작과 치우는 천일도에 시야가 막혀 폭풍신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외관과 풍기는 기세만으로도 폭풍신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풍백 이 미친놈이."
오작이 드물게 격한 말투로 욕설을 뱉었다. 불과 일 년도 안 된 사이에 폭풍신을 두 번이나 부르는 건 미친 짓이다. 당장은 큰 해가 없더라도, 짧은 기간에 신성을 두 번이나 접촉한 건 언제든 소환자에게 큰 해를 끼친다.
'대체 우리랑 무슨 원한이 있다고.'
솔직히 오작은 청제가 천일도를 공격한 결정을 '이해'한다. 그리고 치우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는 천일도를 공격해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이해의 범주를 벗어났다. 치우와 오작을 죽여 얻는 이득에 비해 풍백이 치렀거나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 과했다.
"혹시 어르신이 너한테 뭐 맡긴 거 있어?"
오작의 질문에 치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놈이 지금 거의 목숨 절반을 내놓고 우릴 죽이려 해.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질투의 감정을 느끼긴 해도 바로바로 해소하는 오작이나, 악의를 동반한 질투를 느껴본 적도 없는 치우로선 풍백을 평생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둔각과 대망사의 알을 움직여 반대편으로 간다."
오작은 폭풍신이 바로 중심으로 오지 않고 외곽의 검은 바위부터 차근차근 무너뜨리는 걸 확인하고 결정을 내렸다.
그때, 노란 알이 쩍 갈라졌다.
"내가 처리하마."
알에서 나온 대망사는 모습이 크게 변했다. 허물을 벗을수록 누렇던 비늘이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났고, 가운데가 실하고 양쪽으로 갈수록 얇아지던 몸통이 균일하게 변했다.
누른 등과 달리 하얗던 배도 연한 누런색으로 변했고 다리가 여섯 자랐다. 네 개는 짐승의 뒷다리처럼 걷는 용도로 보이고, 앞에 두 개는 사람의 손처럼 뭔가를 잡아도 될 것 같았다.
대망사는 천천히 다가오는 폭풍신이 안중에도 없는지 자신이 깨고 나온 알껍데기를 씹어먹는 데 열중했다.
알껍데기가 줄어들면서 대망사의 이마에 하얀 뿔이 돋았다.
"안타깝게도 우리 인연이 여기서 끝나는구나."
황금각룡黃金角龍이 된 대망사가 한탄했다.
"너희 은혜에 꼭 보답하고 싶었는데, 더는 인연이 없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작은 보답이나 하나 하자."
황금각룡은 치우와 오작을 향해 입김을 후 불었다. 대망사의 첫 허물로 만든 푸른 옷을 비롯한 것들이 황금색으로 변했다.
"인연은 하늘도 모르는 겁니다.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합니다."
말을 마친 오작은 밧줄로 둔각이 변한 알을 단단히 묶은 후 치우의 등에 메 줬다.
"망형, 다시 보자."
치우와 오작은 뒤도 안 돌아보고 북쪽으로 달렸다.
몸을 부르르 떠는 거로 새로운 육체에 적응한 황금각룡은 뿔을 곧추세우고 기회를 노렸다. 수백 년 기간 가꿔 온 검은 바위 숲이 절반 정도 무너졌을 때, 엿보던 기회를 포착한 황금각룡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쏘아졌다.
폭풍신은 기운을 잘 갈무리한 황금각룡을 오판했다.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고 흑석림을 무너뜨리는 데 열중하다가 불의의 일격에 당해버렸다.
뿔의 끝에 걸린 풍화석이 박살이 나며 폭풍신의 몸을 이룬 바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흑석림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풍백은 폭풍신의 소환이 해제됨과 동시에 검은 피를 울컥울컥 뱉었다.
"승풍술乘風術."
승풍술을 펼친 풍백은 이번에 붉은 피를 울컥 토했다. 그리고 입가의 핏물을 닦지도 않고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폭풍신을 가볍게 무찌른 황금각룡은 후폭풍이 사라지자 결계 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풍백이 큰 부상을 감수하고 펼친 승풍술로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때, 황금각룡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폭풍신이 사라지면서 해방을 받아 사방으로 흩어지던 바람 중 일부가 한곳으로 몰려갔다.
황금각룡은 눈에 법력을 모았다. 풍백이 은폐술로 숨긴 풍익이 그제야 황금각룡의 눈에 들어왔다.
원래는 대구조의 덩치에 어울리게 길이가 육 척(1m) 정도던 바람의 날개가 무려 삼 장(5.1m)으로 자랐다.
토의 수련을 하는 구렁이는 오백 년에 뿔을 얻어야 하고 천 년이면 날개를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요괴가 되어 영원히 승천하지 못한다.
치우와 오작의 도움으로 늦지 않게 뿔을 얻었지만, 천 년이 되더라도 날개를 얻을지는 미지수다. 그런 황금각룡의 앞에 힘은 약해도 무척 아름다운 날개가 나타났다.
'저 날개를 얻어 오백 년 동안 키우면 승천은 어렵지 않다.'
대망사일 때는 무척이나 신중한 성격이었지만, 황금각룡이 되며 자신감이 넘친 탓인지 조심성이 옅어졌다.
황금각룡은 바람의 날개를 자신의 등에 붙였다.
- 작가의말
각룡득풍익 - 뿔 얻어 용이 된 대망사가 바람 날개를 얻다
용이 되어 승천하는 거 정말 어렵습니다. 저는 여의주 잘못 삼켜서 구급차에 실려 간 적도 있는데요. 그때 위세척을 해주던 의사가 탈진으로 세 명 실려 갔습니다.
- 두 달 가까이 집에 짱 박히느라 정신이 이상해진 글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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