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접화검瞑火蝶化劍
화접실주火蝶失主
명화접은 주인을 잃고
화검복수化劍復讐
검이 되어 복수를 다짐하다
오작 일행이 떠나고 반나절 지나서야 흑호와 장치호는 주검이 굴러다니는 곳으로 접근했다. 죽은 요괴의 내단이나 얻을까 해서 주검을 발톱으로 헤집었지만, 치우의 공격이 하도 강해 내단은 전부 부서져 사라졌다.
"형님. 여기 주머니 있습니다."
괴력양의 주검을 찢으며 화풀이하던 흑호는 장치호의 부름에 발톱을 바닥에 쓱 닦고 몸을 돌렸다.
"열자."
흑호의 말에 장치호는 주머니를 동인 끈을 풀었다. 안에선 주머니보다 몇 배 큰 고치가 나왔다.
"형님,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요?"
흑호 역시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나 둘의 후각으로도 냄새의 진원지를 확정할 수 없었다.
"이거 꺼내고부터 갑자기 났어. 고치 안에 혹시 화보火寶라도 있는 게 아닐까?"
불의 기운이 강하게 뭉친 걸 화보라고 한다. 쇠의 기운이나 땅의 기운 그리고 나무의 기운은 쉽게 뭉친다. 그러나 불과 물의 기운은 뭉치는 게 어렵다.
만약 고치 안에 화보가 들었다면 흑호와 장치호는 횡재하는 거다. 비록 둘 다 불의 기운을 수련한 건 아니지만, 모산파의 황금충들에게 갖다주면 꽤 대단한 법보를 여럿 얻을 수 있다.
"이빨로 살짝 구멍을 내 봐. 화보 맞으면 우리 둘이 반씩 나누자."
장치호는 뿔처럼 뾰족한 이빨로 고치를 살짝 쑤셨다. 고치는 별로 질기지 않아 쉽게 찢겼다.
"형님. 제 이빨이 그을렸습니다."
고치에 흠을 낸 장치호의 이빨 끝이 시커멓게 그을렸다. 흑호와 장치호는 최상급 화보를 얻은 기쁨에 엉덩이가 절로 덩실거렸다.
그때 찢긴 틈에서 화기가 확 새어 나오더니 고치가 불탔다.
"제길. 이러면 어떻게 갖고 가지? 방금 그 주머니에 넣으면 될까?"
흑호의 걱정이 무색하게 고치가 타 사라지며 정체를 드러낸 불타는 검은 둘의 이마에 구멍 하나씩 뚫어줬다.
겉은 멀쩡해도 속은 완전히 타버린 흑호와 장치호의 삼혼은 바로 삼계윤회환으로 날아갔다.
주머니 안에서 공손부보의 죽음을 감지한 명화접들은 하나로 합쳐서 고치를 지었다. 실패하면 그냥 소멸하여 사라질지도 모를 모험이건만, 명화접들은 자신들을 마수로 만들고 먹이를 줘서 지금까지 키워준 공손부보의 복수를 위해 결단을 내렸다.
원래대로라면 고치를 찢고 주머니에서 나오기까지 반년은 족히 걸렸을 테지만, 흑호와 장치호 덕분에 하루도 안 되어 나왔다.
안타깝게도 복수심으로 불탄 화접검은 흑호와 장치호의 은혜를 원수로 갚아버렸다.
흑호와 장치호를 죽인 화접검의 검병劍柄(검자루)에 까만 눈이 하나 생겼다. 불에 타면서 눈이 멀어버린 명瞑화접들이 하나로 합치며 생긴 명안暝眼이었다.
명안으로 치우의 귀기를 발견한 화접검은 둥실 날아 일행의 뒤를 쫓았다. 다행히 오작 등은 조공명이 벽유궁으로 간 사실을 몰라 쉬지 않고 달렸기에 화접검에게 쉽게 따라잡히지 않았다.
"조금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넷 중에 가장 멀쩡한 사람은 희운이었다. 치우는 여전히 귀기가 들끓어 조금 제정신이 아니고, 강한 공격의 반동에 몸도 상했다.
오작은 소소를 등에 업고 달려야 했고, 달리면서도 구마소를 불어 치우가 귀기를 누르는 걸 도와야 했다. 그 탓에 겨우 안정을 이룬 법력이 다시 온몸을 들쑤시고 다녔다.
"서부로 넘어가서 쉽시다. 뭐든 확실한 게 좋죠."
이미 법력에 여유가 없는 오작은 순수한 육체의 힘으로 달렸다. 치우 역시 들끓는 귀기 때문에 경공을 못 펼치고 순수 힘으로 뛴 지 하루 넘는다.
가장 멀쩡한 희운 역시 연이은 전투와 도주로 회복 능력이 바닥나 아주 적은 법력만 남겨두고 있다.
콜록콜록.
갑자기 오작 등에 업힌 소소가 기침했다.
"정신 차렸습니까?"
"어엉. 나 악독한 여자한테 들켰어."
정신을 차린 소소는 울기에 바빴다.
"이젠 괜찮습니다. 그니까 울지 마세요."
"불나비 수천 마리가 깜빡깜빡하더니 정신을 잃었어. 그리고 너희가 요수촌으로 간다는 걸 말해버렸어. 미안해. 흑흑."
"말하지 마세요. 달리는 데 방해됩니다."
"아니. 이 말은 꼭 해야 해. 그 불나비들이 고치를 짓고 검으로 변했어. 그리고 지금 우릴 쫓고 있어."
화멸진에 당한 소소는 불타는 검이 고치를 뚫고 나온 순간 잠에서 깼다. 그리고 화접검이 지금 자신들을 쫓고 있음도 느꼈다.
"직접 달릴 수 있습니까?"
"아니. 놈들이 나한테 금제를 가했어. 이 금제를 깰 사람은 아마 욕수밖에 없을 거야. 거기까지만 신세 질게."
소소가 깨고 반나절을 더 달린 일행은 지쳐서 쓰러졌다.
"망을 좀 봐주십시오. 우린 법력을 좀 회복해야겠습니다."
상자를 담은 광주리에 기댄 소소한테 보초를 부탁하고 셋은 법력회복 수련에 몰두했다. 그러나 육체의 피로가 극에 달하여 법력 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이만 출발합시다. 더 쉬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소소는 치우가 업기로 했다. 오작은 조금 회복한 법력을 불씨 삼아 무극보인을 돌리며 구마소를 연주했다.
"응? 얼음으로 집을 지어?"
동부와 북부의 변경은 태산이고, 북부와 서부의 변경은 기련산이다. 힘겹게 도착한 기련산 북부 수비군의 영지는 얼음으로 지은 집이 가득했다.
"거기 멈추시오."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키 작은 군관이 일행을 멈춰 세웠다.
"서부로 넘어갈 예정이시오?"
"그렇습니다."
그나마 상태가 가장 나은 희운이 나섰다.
"북부 출신은 공공이 발급한 허가서 없으면 서부로 갈 수 없소."
"중부 출신입니다."
희운의 대답에 구레나룻이 눈살을 찌푸렸다.
"중부라면 바로 서부로 건너가면 되는데, 굳이 천 리가 넘은 황무지를 건너 여기까지 올 필요 있소?"
"북부에 먼저 들러야 할 사정이 있어서요. 북부 출신도 아닌데 구구절절 해석해야 합니까?"
군관은 일행의 행색을 살피며 고민에 잠겼다. 치우는 갑옷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황금비늘 옷을 입었고, 오작의 옷은 최하급 법보긴 해도 매우 멋졌다.
소소의 옷 역시 주인 마음에 따라 모양을 바꿀 수 있는 대단한 법보고, 희운도 일국의 왕자답게 꽤 차려입었다.
"서부의 첩자들이 자주 드나들어서 어쩔 수 없소. 당신들이 북부나 서부 출신이 아니면 그냥 보내주겠소."
말을 마친 군관이 수비대의 술사를 호출했다.
"얼음에 손을 대시오."
희고 굵은 수염을 기른 술사가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희운이 가장 먼저 손을 갖다 댔다.
"중부 출신이오."
희운의 뒤를 이어 치우가 손을 댔다.
"동부 출신이오."
오작과 소소가 가만히 있자 병사들이 창과 몽둥이를 세우며 다가왔다. 오작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손을 얼음에 갖다 댔다.
"음. 애매하군. 북부 출신이나 서부 출신이 아닌 건 맞는데, 어딘지는 모르겠소."
오작은 얼음에서 손을 떼며 가면 속에서 이마를 크게 찌푸렸다. 경계사도 그렇고 우마왕도 그렇고 자신을 북부 출신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얼음으로 만든 구는 이상한 판정을 내렸다.
'맞다. 가면이 출신을 숨겨준다고 했지.'
우마왕이 가면을 주며 했던 말을 떠올리며 오작은 복잡한 머리를 정리했다. 합리적인 해석을 얻었음에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엔 찜찜한 여운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손을 댄 건 소소였다.
"동부 출신이오. 이만 건너가도 괜찮소."
- 어떻게 한 거야?
희운이 귀한 장신구 하나를 주고 커다란 썰매를 구했다. 썰매 위에 광주리를 묶고 소소를 앉힌 후 세 남자가 끌었다.
채 북부 수비군의 영지를 못 벗어났기에 치우는 손으로 질문했다.
- 널 흉내 냈어.
한동안 치우에게 업힌 채 움직였기에 소소는 어렵지 않게 치우의 기운을 흉내 냈다. 다행히 소소의 예측대로 얼음구는 기운의 움직임으로 출신을 판단했다.
오작이 어디 출신인지 정확히 판별하지 못하는 걸 보고 과감히 시도한 건데 멋지게 성공했다.
- 그보다 얼음덩이는 어떻게 한 건데?
소소는 상대조차 헷갈리게 한 오작이 더 궁금했다.
-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이제 어떡하지?"
기련산은 평균 삼천 장(5100m)이나 되는 높은 산이다. 그리고 대부분 곳이 눈으로 두껍게 덮였다.
산세가 완만하지 않아 가뜩이나 지친 셋이 소소와 광주리를 태운 썰매를 끌고 넘기엔 너무 벅찼다.
"썰매는 버려야지. 소소는 내가 업을 테니 넌 나나 희운이 힘들어하면 도와줘."
"싫어. 난 치우 등에 업힐 거야. 넌 등이 작아서 불편하단 말이야."
오작은 소소의 반발에 화가 치밀었다.
'평소라면 그저 흘러 넘겼을 일인데, 지치니까 별게 다 거슬리는구나.'
자신의 정신 수양이 부족하단 생각을 하며 화를 누른 오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힘든 사람을 돕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덕분에 오작은 가장 홀가분하게 산을 탔다.
"밤에는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희운이 헉헉거리며 말했다. 다행히 추운 겨울에 눈으로 덮인 산을 타고 있지만, 추위를 타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저 지친 몸으로 가파른 산을 타서 숨이 차고 다리가 조금 후들거릴 뿐이었다.
"고생을 덜 한 제가 밤에 망을 서겠습니다."
희운은 물론 어려운 일에 늘 본인이 나서려던 치우도 오작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저기가 좋아."
소소가 가리킨 곳은 살짝 파여서 바람이 비껴가는 곳이었다. 바닥에 눈이 두껍게 깔려 푹신해 보이기도 했다. 어차피 추위를 안 타는 넷에겐 꽤 괜찮은 휴식지였다.
작은 분지에 도착한 넷은 바로 눈 위에 쓰러졌다. 한동안 헉헉대는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먹을 걸 구해오겠습니다."
조금 쉰 오작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 겨울에 열매 따위는 있을 리 만무하다. 다행히 기련산은 긴 풀이 자라 꽤 다양한 동물이 서식한다. 오작은 어렵지 않게 사슴인지 노루인지 헷갈리는 큼직한 짐승 하나를 잡아서 돌아갔다.
분지로 돌아가니 어느새 장작불이 훨훨 타올랐다. 희운이 진령을 넘을 때 장작을 잔뜩 소매에 넣어둔 게 이제야 유용하게 쓰였다.
오작은 능숙한 솜씨로 피를 뽑고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했다. 그리고 적당한 굵기의 생나무 하나를 뽑아서 껍질을 벗긴 후 짐승의 항문으로 넣어 입으로 나오게 했다.
나무에 꿴 짐승을 모닥불 위에 놓고 천천히 돌리니 기름이 뚝뚝 떨어지다 칙 소리를 내며 향긋한 냄새를 풍겼다.
며칠 굶은 채 열심히 달린 탓인지 넷은 큼직한 짐승을 뼈에 붙은 살점까지 알뜰하게 뜯어먹었다. 목이 메면 눈을 한 움큼 잡아 입에 넣어 해결하며 식사에 열중했다.
그나마 익히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식사는 한 시진이나 이어졌다. 순수하게 먹는 시간만 따지면 채 일각도 안 되었을 것이다.
꺽 트림을 한 소소는 빨개진 얼굴을 눈에 파묻었다. 치우는 기름이 잔뜩 묻은 손을 눈에 비벼 기름기를 씻었다. 희운은 잠깐 주저하다가 치우를 따라 눈으로 손을 닦았다.
"다들 먼저 쉬십시오. 제가 최대한 버티다 정 힘들면 소소를 깨우겠습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희운과 치우는 드러누웠다. 소소 역시 일찍 일어나 오작 대신 망을 볼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오작은 천근 바위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분지를 벗어났다. 퀭한 눈에 최대한 힘 줘 주변을 살폈다. 조금 전에 봤던 풍경과 별반 다름이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바람이 없는 분지로 내려갔다.
오작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 자정이 넘자 앉은 채 곯아떨어졌다. 그러다 화들짝 놀란 오작은 소소를 흔들어 깨웠다.
소소는 군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달리는 데는 무리가 있으나 기거나 구르는 건 지장이 없었다. 오작은 소소가 데굴데굴 굴러서 분지 가장자리로 가는 걸 보고 웃음 짓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형, 형. 어서 깨."
눕자마자 치우가 흔들어 깨우자 오작은 짜증이 확 치밀었다. 그러나 눈을 뜨자마자 강하게 비추는 태양을 보고 점심이 가까운 시각임을 알았다.
"불나비가 변한 검이 가까이 왔어."
소소는 화멸진의 최면에서 깨기 전까지 명화접들과 의식이 연결되어 있었다. 비록 깨면서 연결이 끊어졌지만, 상대가 가까이 접근하는 걸 누구보다 빨리 알아챘다.
"혹시 모르니까 상자를 지키는 걸 최우선으로 합니다."
오작의 말에 정신 차린 희운은 헌원검을 뽑아 들고 상자 곁으로 갔다. 공손부보가 죽었다는 생각에 상자를 지켜야 함을 미처 못 떠올렸는데, 오작 덕분에 수그러든 경각심을 다시 세웠다.
"형. 난 법력 못 쓸 거 같아."
치우의 법력은 치우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귀기도 제멋대로고, 귀기가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하려고 넣은 태극구도 치우의 뜻에 따르기보단 귀기에 저항하는 걸 우선으로 했다.
"평소에 열심히 수련하지 그랬어."
오작은 치우를 타박하는 거로 긴장을 풀었다. 사실 명화접만 해도 오작이나 치우에겐 골치 아픈 상대다. 첫 대면에도 멍청한 명화접들이 공손부보의 명에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면 큰 피해를 보았을 지도 모른다.
명화접이 태변하여 하나의 검으로 되었다면 훨씬 상대하기 어려울 거로 예상되었다.
화아아악.
불쑥 모습을 드러낸 화접검이 일행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다행히 마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 기분이 나빠지거나 하진 않았다.
- 작가의말
미친놈 가까이 가는 거 아닌데. 흑호와 장치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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