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범인양계天凡人兩界
천인하범天人下凡
하늘 사람이 범계로 내려와
자칭신왕自稱神王
자신들을 신왕이라 칭하였다
'여기가 시작이구나.'
오작은 자신이라면 벽부터 시작했을 것 같았다. 천장이나 바닥은 물론이고, 시체를 보관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관에 먼저 글자를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벽을 살피다가 서두로 추정되는 문장을 찾았다.
"반고가 도끼로 하늘과 땅을 가르니 인간은 천계와 범계로 나뉘어 살았다."
"천계의 인간은 수명이 늘었으나 생육 능력을 잃었다. 반면 범계에 남은 인간은 수명이 준 대신 자식을 여럿 낳을 수 있게 되었다."
"천계의 인간은 후손을 보지 못하는 대신 긴 수명을 얻었으나 무한하지 않았다."
몇 구절 다음 글씨체가 바뀌었다.
"범계의 인간은 수련을 통해 천계의 인간처럼 되려 했다. 무공과 법술로 범계의 인간은 조금씩 강해졌고 수명도 늘었다."
"천계의 인간은 범계의 인간을 질투했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간 범계의 인간들도 긴 수명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천계의 인간은 자식을 볼 수 없었다."
오작은 천천히 곱씹어 읽었다. 옛날 글자에 문장도 옛날 방식이다. 틀리게 해석하면 문장의 뜻을 반대로 이해할 수도 있어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범계의 인간을 납치하여 생육의 비밀을 연구했다. 그 과정에 격대전이의 법술을 발견했다. 부모와 자식의 연결 중 가장 중요한 건 피물림이었다."
"거듭 시도하여 피가 비슷한 존재한테 삼혼을 옮기는 안정적인 방법을 발견했다. 이로 격대전이의 법술을 보완하여 생명이 위태한 자들이 새롭게 태어났다."
글씨체가 또 바뀌었다.
"우리는 기뻤다. 그러나 곧 더 큰 절망이 우릴 덮쳤다. 부모와 자식의 연결은 피물림뿐이 아니었다. 새로운 몸에 정착한 자들이 서서히 미쳐갔다."
"다행이다. 해결책을 찾았다. 그러나 너무 어렵다."
그 뒤로는 약간 두서가 없었다. 오작은 글에 논리가 일정하고 내용이 이어지는 걸 보며 여럿이 상의하여 적은 거라고 추측했다.
두서가 없는 건 아마 본인들도 헷갈려서 그런 게 아닐까 가정했다.
"범계의 인간을 사육했다. 더 나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우리와 뿌리가 같은 자들인데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좋은 징조다. 성과가 생기니 죄책감이 옅어졌다."
"멍청한 놈이 범계의 인간과 사랑에 빠졌다. 도망치는 놈을 잡아서 책문했다. 놈은 오히려 우릴 질책했다."
오작은 연결이 어지러운 부분을 빠르게 지났다.
"완벽한 아이를 탄생시켰다. 이 아이의 육체라면 누가 혼을 옮겨도 부작용이 없을 것이다."
"다툼이 벌어졌다. 똑같은 방식을 사용했음에도 완벽한 아이는 더 생기지 않았다. 서로 그 아이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아이가 도망쳤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린 불신에 차서 서로 의심하고 미워했다."
"지휘부가 드디어 결심을 내렸다."
"범계를 셋으로 나눠 비트는 거로 창녕산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만들었다. 그러나 한곳에 오래 머물면 공간이 파괴된다. 정기적으로 위치를 옮겨야 창녕산이 계속 존재할 수 있다."
오작은 어지러움을 못 이기고 바닥에 쓰러졌다. 익숙지 않은 글자와 문장을 해석하는 건 강한 적과 싸우는 것 못지않게 힘겨웠다.
오작은 눈을 감고 느린 호흡으로 어지러움을 지운 후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 아이가 나타났다. 어떻게 했는지 창녕산의 공간 이동을 방해했다."
"천계에 남은 자들한테 도움을 요청했다."
"우린 버림받았다. 놈들은 아예 우리가 천계로 돌아가는 길을 끊어버렸다."
"다행이다. 모두가 합심한 덕분에 창녕산을 지켰다."
"여파로 세상의 반 이상이 파멸했다."
"우리 모두 죽었다. 법술로 칠백을 육신에 묶은 후 삼혼들만 모여서 회의했다."
"귀옥을 만들었다. 우리가 사육하던 자들의 혼을 담았다. 우리 혼은 안전한 곳으로 숨겼다."
어느 정도 갈피를 잡으니 문장 해석이 쉬웠다. 이들은 삼혼을 숨기고 칠백을 묶은 육신은 관에 넣어 보호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나 뼈밖에 안 남았는데도 부활에 성공한 자가 없었다. 누구든 부활에 성공하면 돌아와서 창녕산을 수습하기로 했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더 기다리다간 뼈까지 삭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들 중 일부는 관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환혼노조로 불린 귀골, 살았을 때 이름 미무골이 우두머리가 되었다. 비록 법술 재능을 품은 혼은 없으나, 공간 관련 법술에 어찌나 재능이 뛰어났는지 칠백만 남은 몸으로도 창녕산을 이동시켰다.
이들의 목적은 천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천계의 배신자들한테 무릎을 꿇으며 빌어서라도 삼혼을 소환해 칠백과 결합하려 했다.
그러나 천계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거듭 실패했고, 시간이 흐르며 의견이 갈렸다.
적무혈은 초혼번을 자신한테 달라고 요구했다. 초혼번을 들고 밖으로 나가 숨긴 혼들을 찾아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미무골은 적무혈을 믿지 않았다. 다툼 끝에 적무혈이 창녕산 밖으로 추방당했다.
'아무래도 완벽한 아이로 불린 사람은 태상노군이겠지?'
오작은 벽에 적힌 글을 빠르게 훑었다. 중요한 내용이 끝난 뒤부터 이야기가 난잡했다.
"이건 창법이구나."
창법에 관련한 글을 본 오작은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말했다.
그냥 봤으면 별로 깨우치지 못했을 테지만, 오작은 적무혈의 창법을 자세히 견식했다. 덕분에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한 문장을 보고도 쉽게 이해했다.
'오행뿐 아니라 벼락이나 얼음이나 바람에 관한 내용도 많아. 음양에 대해서도 특이하게 해석했구나.'
오작은 어느새 벽의 내용을 다 읽고 바닥과 천장을 살폈다. 그리고 관에 쓴 글자까지 다 읽었다.
적힌 내용 중 틀린 부분이 꽤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논리적으로 추리한 거여서 큰 도움이 되었다.
'태극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고?'
흥미로운 가설도 무척이나 많았다. 음양태극이든 삼태극이든 혼자서는 태극의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분석이 꽤 재밌었다.
'그럼 두 태극을 묶어서 하나의 태극으로 봐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두 태극을 묶은 태극 역시 홀로 존재할 수 없으니 넷이 되어야겠네. 그럼 여덟에 열여섯에. 끝이 없구나.'
"무극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이 극이라는 한계를 만들었기에 무극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어떤 한계를 극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다면 무극이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극을 만들지 않았다면 세상 모든 게 무극이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극은 존재한다."
"결국 극이 생기며 무극이 생겼다. 그러니 무극은 상대적이다. 우리가 인지하고 규정할 수 없는 범위의 모든 것이 무극이다."
"우리가 전지전능하면 무극이 사라진다. 무극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가늠하는 하나의 기준일 뿐이다."
무극보인이 돌아가며 외부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기운들은 형편없이 다친 오작의 몸을 빠르게 치유했다.
"그러니까 한계를 넓히라는 거구나."
오작이 총기가 사라진 흐릿한 눈으로 어디도 아닌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무극엔 하나의 뜻만 있는 게 아니다. 앞에서 보는 모습과 뒤에서 보는 모습이 다를 것이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과 밑에서 올려다보는 느낌 역시 다르다. 최대한 많은 면을 보아야 무극을 알 수 있다."
다시 총기를 회복한 오작이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오작의 눈길이 닿는 족족 벽에 쓴 글자들이 지워졌다.
약 반 시진의 시간을 걸쳐 오작이 지하궁전으로 추측한 커다란 방의 글자가 모조리 지워졌다.
'어떻게 한 거지?'
예전에 소리에 방향을 줬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떻게 눈으로 글자를 지웠는지 알 수 없었다.
'우선 육신에 묶여 고통받는 칠백들부터 풀어주자.'
오작은 아직 닫혀 있는 관 뚜껑을 열고 안에 있는 뼈를 멸천창으로 부쉈다. 뼈에 묶였던 칠백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모든 관을 열어 뼈를 부순 오작은 멸천창을 소매에 넣었다.
음기와 양기가 각각 용천혈과 백회혈을 통해 오작의 몸으로 들어왔다. 오작의 몸에 있던 기운이 오행이 되어 순환했다.
[야. 하지 마.]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오작은 화들짝 놀랐다.
"누굽니까?"
[여길 부술 거면 먼저 나랑 계약해.]
"법보입니까?"
[응. 천장에 있어.]
오작은 절대감으로 천장을 살폈다. 한쪽 구석에서 천장에 붙어있는 금속 팔찌를 찾아냈다. 사실 글자를 살필 때부터 발견하긴 했는데, 양각陽刻한 조각인 줄 알았다.
"원래 주인과 맺은 계약은 확실히 끊어졌습니까?"
[그럼. 적무혈의 삼혼은 태상노군이 팔괘청동로捌卦靑銅爐에 넣어 완전히 녹였어. 그리고 몸뚱이는 네가 부쉈잖아.]
"어떻게 그런 걸 다 압니까?"
[계약자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니까. 난 건곤일기환乾坤壹氣環이라고 해. 저장계 법보이고 조화성보 등급이야.]
"제가 알기론 조화성보 등급은 말을 못 하는데요?"
[시간이 흐르면 기준이 바뀌고 그러는 거지. 요즘은 선천영보랑 조화성보를 구분하는 기준이 달라졌나 봐. 내가 생겨날 때는 선천영보 등급으로 인정받기 정말 힘들었어.]
오작은 몸을 훌쩍 날려 건곤일기환을 천장에서 뜯어냈다.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내 법력을 네 것처럼 쓸 수 있다.]
"제약은 없습니까?"
[깐깐한 아이구나. 마음에 들어. 직접 법력을 모으지 못한다. 네가 수련할 때 내가 절반 기운을 얻는 거지. 용량은 무한이니까 평소 법력을 많이 쌓아두면 큰 도움 될 거야.]
태극구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적적하게 보냈을 텐데 건곤일기환은 꽤 멀쩡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조화성보랑 선천영보랑 외워야 하는 주문이 다르잖아요."
말을 마친 오작이 웅얼웅얼 주문을 외웠다. 주문을 끝낸 오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선천영보 등급이라고 합니다. 계약 주문을 읊겠습니다."
오작은 해납주海納呪를 읊어 건곤일기환과 계약했다. 건곤일기환이 눈이 부실 정도의 밝은 빛을 뿜었다.
[우리 인연이 정말 깊구나. 적무혈이랑 계약할 때도 이 정도로 밝은 빛이 아니었어.]
계약이 끝나자 일기환이 오작의 팔목에 채워졌다.
[어어. 이거 뭐야? 왜 기운이 이렇게 빠르게 쌓이지?]
오작의 몸은 이미 한계에 이르는 법력을 담았다. 그래서 무극보인이 모으는 기운은 오 할이 아닌 십 할이 일기환에 쌓였다.
무극보인이 법력을 모으는 속도가 원체 빠른 데다가 오 할이 아닌 전부가 쌓여서 일기환이 깜짝 놀랐다.
"나가는 방법을 압니까?"
[그럼. 주문을 알려줄게.]
"결계를 여는 방법은요?"
[밖으로 나가면 알려줄게.]
오작은 일기환이 알려 준 주문을 한 글자도 안 틀리고 그대로 읊었다. 주문을 마치자 일렁이는 문이 하나 생겼다. 오작은 손으로 문을 밀었다.
숨 두 번 쉴 정도 시간이 흐르고 오작의 몸이 문에 빨려갔다. 어지러운 느낌이 사라지고 눈을 떠 확인하니 텅 빈 창녕궁 대전이었다.
[아예 결계를 없애는 건 어때? 그럼 창녕산이 완전히 부서져 사라질 거야.]
"좋은 생각입니다."
창녕산과 미무골은 삼계의 법술 발전을 저해하는 존재다. 복희가 어떤 일이든 인간을 위해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안 잊은 오작은 북망산을 없애기로 했다.
[일단 산에서 내려가. 결계가 사라지면 산사태가 일 거야.]
오작은 결계 쪽을 살폈다. 치우와 공공이 한 무리 요괴를 쫓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인간과 요괴가 서른이 넘은 걸 보니 꽤 오래 싸운 듯했다.
"주문을 알려주십시오."
[해결주解結呪다. 웬만한 결계는 다 없앨 수 있다.]
오작은 바로 읊지 않고 해결주 구결을 거듭 곱씹었다. 주문이라는 게 글자 몇 개 바꾸는 거로 위력을 강화할 수도 있고 범위를 조절할 수도 있다.
빠르게 주문 이해를 높인 오작은 자신과 일기환의 법력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분계지결分界之結 기해역단技解力斷."
나누는 결계는 기술로 풀고 힘으로 끊는다.
결계가 비명을 질렀다. 만 년도 더 존재한 결계는 자신의 소멸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흉성이 터져 닥치는대로 죽이던 치우와 공공마저 적을 쫓던 발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볼 정도로 처참한 비명이었다.
해결주에 대항하여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던 결계가 갑자기 꼬리 밟힌 쥐처럼 찍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결계 여기저기가 찢겼다.
결계가 약 일 할 정도 찢겼을 때 북망산도 우르릉거리기 시작했다. 산의 일부가 무너지는 산사태와 달리 산 전체가 동시에 허물어졌기에 순식간에 끝났다.
같은 시각.
"불산이 일을 잘 처리한 것 같습니다."
도솔궁兜率宮에서 차를 마시던 도액진인度厄眞人이 말했다.
"불산이 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태상노군의 둘째 제자인 현도진인玄道眞人이 사형의 말을 부정했다.
"불산이 한 일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 불산을 북망산에 보내서 생긴 일이니라."
열두 살 정도 나이로 보이는 귀여운 어린 동자가 말했다. 도액과 현도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사부의 가르침에 고마움을 표했다.
"북망산이 무너졌으니 미무골을 찾는 일은 조금 미뤄도 되겠구나. 너희도 어서 공간계 법술을 연구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라."
- 작가의말
창법도 보여주고 대련도 해주고. 이젠 하다못해 법보까지 양도하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 적무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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