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화미교주南華芈敎主
혈농어수血濃于水
피는 물보다 진하여
적혈인친滴血認親
한 방울로도 친인을 찾는다
둔각이 발굽도 제대로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달렸지만, 위에 탄 오작과 치우는 조금의 흔들림도 느끼지 못했다.
"형. 근데 그냥 아까 그 여자한테 피 달라고 하면 되잖아."
무료해서 이것저것 떠올리던 치우가 갑자기 질문했다.
"첫째. 모계의 피만 된다. 구천현녀가 강제명의 외할머니라면 가능하지. 둘째. 강제명은 신농의 아들이고, 구천현녀는 신농의 계모다. 둘은 피로 이어지지 않았어."
고개를 끄덕이던 치우는 질문을 이어갔다.
"그런데 피를 어떻게 얻을 건데? 그냥 달라고 하면 주나?"
"남화교는 달마다 제사를 지낸다. 제단에 바치는 교주 피를 훔쳐야지."
"형은 언제나 계획이 있구나."
달리다 숲이 나오자 둔각은 속도를 늦췄다. 빠르게 지나는 풍경을 보며 무료함이 덜했는데, 느리게 움직이자 치우는 또 심심했다.
"근데 피로 강제명을 찾는 법술을 형이 알아?"
"형천이 불사과를 샀던 곳에 있을 거야. 정 방법이 없으면 영리귀를 불러 일회용 법보를 만들면 되고."
남화교는 교도가 삼천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교도를 받을 때 엄격하게 선별하기에 삼천 명이지, 실제로 남화교도가 되고 싶은 사람은 십만도 넘었다.
"왜 남부에만 남화교가 있을까?"
"서부는 서왕모도 있고 천교나 서방교에 벽력문 같은 강한 문파도 많아. 그래서 남화교와 같은 곳이 생겨날 수 없지. 북부는 땅이 넓고 사람이 적어. 북부의 땅 절반은 아무도 안 살거나 요괴만 산다. 이런 큰 무리가 형성될 수 없어. 동부는 청제와 여러 강국이 인재를 귀하게 모셔가니까 역시 이런 무리가 만들어질 겨를이 없어."
"중부는?"
"중부는 국가가 백 개 넘어. 이들 모두 조금이라도 강해지고 한 치라도 땅을 더 차지하려고 해. 남화교처럼 국가가 아닌 돈 많은 곳이 있다면 이미 백 번도 털렸을 거야."
왕이 생기고 제가 생기고 황이 생긴 후.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곳들은 끊임없는 수탈에 고생했다.
역목이 어떻게든 나라로 인정받고 왕이 되려 했던 이유다. 강한 부족이어서 국가들이 함부로 업신여기진 못하지만, 자기 나라 땅을 지날 때 여러 명목으로 재물을 뜯어냈다.
"남부는 왜 가능한데?"
"여긴 먹을 게 넉넉해. 그래서 사람들이 여유가 있지. 그리고 서부와 마찬가지로 여자가 많아. 나이가 들어서도 시집 못 간 여자들은 부모를 모시고 살거나 남화교에 가입하려고 해. 남화교 교도가 되면 시집 못 갔다고 괄시받지 않거든."
먹을 게 풍부한 남부는 국가가 보유한 인구에 비해 필요한 땅이 적다. 굳이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다들 먹고 살기에 빈 땅이 많다.
가끔 중부나 동부 혹은 서부에서 건너와 정착하려는 무리가 있지만, 그런 자들은 남부 국가들이 합심해 죽이거나 쫓아낸다.
불의 기운이 아닌 자들이 대규모로 와서 살면 남부가 약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세상이 너무 복잡한데 형한테는 왜 그렇게 간단해?"
"책 많이 읽고 생각 많이 해."
치우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고개를 털었다. 오작의 멸천칠절공이 탐나서 이천 개가 넘은 글자를 공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배운 글자를 까먹고, 글자 뜻을 까먹고, 글자 모양을 까먹고. 그렇게 자꾸 까먹다 보니 장장 사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대화로 심심함을 달래며 말을 달리니 불과 하루 만에 남화교의 성지인 혈지血池에 도착했다.
"형. 여기 좀 으스스한데?"
귀신들이 무서워 도망가게 하는 장본인인 치우가 짐짓 양팔을 그러안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작은 하나로 합친 둔각한테 잘 숨어있으라고 당부한 후 고개를 돌려 혈지를 살폈다.
혈지에는 동부 최대의 도시인 형양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살았다. 오작은 절대감으로 십만까지 세고 포기했다.
"요괴나 마수가 느껴져?"
오작의 질문에 치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네. 이게 순수한 인간의 광기라고?"
혈지 주민들은 눈도 못 뜨고 털도 제대로 안 난 새끼 양을 작은 제단에 제물로 바쳤다.
제사가 끝나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서 양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자기 얼굴과 몸에 발랐다.
커다란 혈지에서 동시에 제사를 올리는 곳이 어림잡아 서른이 넘었다.
다시 도시 곳곳에 눈길을 돌리니 나무로 대충 지은 집마다 벽이나 문에 피로 그린 특이한 문양이 있었고, 심지어 길에도 있었다.
"형. 도시 전체가 뭔가 규칙이 있는데?"
집 하나하나 떼 놓고 보면 조잡하기 그지없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나름대로 규칙을 따랐다. 그러나 아는 게 많은 오작도 뭔지 알아보지 못했다.
"저기가 교주전이겠지?"
유일하게 돌로 지은 건물을 치우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근데 제사를 교주전에서 지내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일단 가서 탐문 좀 할까?"
남화교의 교도들은 통일된 복장을 하였고 모자를 쓰고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나 교도가 되지 못한 자들은 하얀색 혹은 노란색 천으로 몸을 두르고 검은색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근데 우리 키 너무 큰 거 아니야?"
옷을 훔쳐 입고 일반 주민 행세를 하려던 오작은 치우의 말에 계획을 바꿨다.
"제사 언제 지내는지도 모르니까 괜히 주의 끌지 말고 은신술로 엿듣기나 하자."
둘은 은신술을 펼쳐 도시에 접근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일반 주민들이 다니는 길로만 걸었다.
- 제정신 아니야.
제사가 끝나고 새끼 양은 길이가 십 장이 넘는 대나무에 걸어 높이 매달았다. 그러면 독수리와 같은 맹금들이 와서 살점을 먹어 치웠다.
독수리들이 남긴 사체는 썩기를 기다려 까마귀들이 포식했다. 영역 의식이 강한 독수리들이 웬만한 경쟁자는 싸워 쫓아내는 바람에 먹이가 넉넉하여 까마귀들도 원 없이 배를 불릴 수 있었다.
오작과 치우는 반나절 돌아다니고 나서야 제사 날짜를 알아냈다. 사흘 뒤 자정이었다. 그러나 제사를 어디서 지내는지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누구나 당연히 아는 사항이어서 언급하는 자가 없는 듯했다.
비린내와 형언하기 힘든 역한 냄새가 가득한 도시를 떠난 오작과 치우는 일단 근처에서 쉬기로 했다.
"형. 도둑질이나 강도질이나 같은 거잖아. 굳이 제사 때까지 기다릴 필요 있을까?"
치우는 기다리기 지루했는지 교주전에 잠입하여 강제로 피를 뽑자고 말했다.
"도둑질과 강도질의 차이가 아니라 들키냐 안 들키냐의 차이야. 어디다 막 갖다 붙여."
너무 심심해하는 치우를 위해 오작은 나뭇가지 두 개를 꺾어 가볍게 대련했다. 치우는 오작의 긴 막대기에 연신 얼굴과 가슴을 얻어맞으며 히죽히죽 웃었다.
"너 미친놈 같아."
"형의 공격에서 예전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여."
"뭐가 보이는데?"
오작이 공격을 멈추고 묻자 치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랄까. 예전엔 형이 여길 공격하겠구나 싶으면 다른 곳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형이 공격할 것 같은 곳이 셋 정도 보인달까? 그러다가 조금 전에 둘로 줄었어."
'말도 안 되는 천재.'
오작은 치우가 법술 재능만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무공 재능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 나도 좀 더 진지하게 해볼까?"
말을 마친 오작은 진심을 삼 할 정도 더 담아 공격했다. 치우는 오작이 노리는 곳이 다섯으로 늘자 미친놈처럼 히죽이며 기뻐했다.
오작이 어디를 노리는지 확실히 알아내면 자신의 무공 경지가 한 단계 상승할 것을 직감하고 주체하지 못하는 거였다.
그렇게 이틀 시간을 알차게 보내니 새벽이 밝기 무섭게 혈지의 십만이 넘은 주민이 전부 길에 나와 줄 섰다.
"우리도 가자."
오작과 치우는 도둑질한 천으로 몸과 머리를 감은 후 은신술을 펼쳤다. 혹시라도 은신술이 간파되면 몸을 움츠리고 일반 주민 사이에 숨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아무도 둘의 은신술을 알아채지 못했다.
- 이 사람들은 일도 안 하고 매일 제사나 지내며 노는데 뭘 먹고 살까?
치우가 손짓과 글자를 섞어 질문했다.
- 그게 왜 궁금해. 우리랑 상관없잖아.
- 형이 예전에 얘기했잖아. 절로 음식이 생기는 법보가 있다고. 여기 있으면 하나 훔치려고.
치우는 타인의 법보를 빼앗는 재주가 있다. 비록 귀기 덕분이라곤 하지만, 환혼노조한테서 초혼번이라는 조화성보 등급의 법보를 뺏은 적도 있다.
동부에서 금계산까지 쉬지 않고 달린 바람에 배가 무척 고팠다. 요 며칠 최대한 사냥과 채집으로 배를 불렸으나 허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허튼짓하지 마. 진짜 있으면 숙부 구한 다음 다시 오면 되잖아.
오작은 예전과 달리 반항적이고 충동적인 치우한테 단단히 일렀다.
- 명심할게.
그때 교주전 대문이 활짝 열리며 붉은 머리에 흰 수염을 기른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일반 주민들이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교주 만세를 연창했다.
- 왠지 익숙한데?
교주의 모습을 본 치우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 정신 집중하고. 일단 피를 훔치는 것만 생각한다.
남화교 교주 미천芈泉의 뒤를 삼천 명 정도의 정식 교도들이 따랐다. 십만이 훌쩍 넘은 일반 주민들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교도들 뒤에서 조심스럽게 걸었다.
먹이를 나르는 일개미보다 더 길게 늘어선 줄은 아침에 출발하여 해가 지는 저녁에야 멈췄다. 남화교의 무리는 혈지에서 육십 리 떨어진 필봉산筆鋒山에 도착했다.
산세도 험하고 날도 어두워 쉬는가 싶었는데, 잠깐 쉬며 냇물에서 물 몇 모금 마시고 다시 산을 올랐다. 미약한 빛에도 환하게 보는 오작과 치우는 괜찮지만, 정식 교도나 일반 주민 중에 넘어져서 팔다리가 까진 자가 속출했다.
- 저기 동굴.
치우가 발견한 건 보기만 해도 음침한 동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교주 미천은 아가리를 음침하게 벌린 동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정식 교도들도 교주의 뒤를 따랐고, 일반 주민은 감히 동굴에 못 들어가고 주변을 크게 에워쌌다.
치우와 오작은 경공으로 몸을 가볍게 하여 일반 주민들 머리 위를 넘어 동굴 앞에 갔다.
- 어때?
오작이 물었다.
- 별 느낌 없어.
크게 위험하거나 둘에게 크게 이득이 된다면 치우의 직감이 발동했을 거다. 별 느낌이 없다는 건 크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오작과 치우는 조심하며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은 꽤 가파른 경사로 아래로 향했다. 둘은 혹시 있을지 모를 감시자나 매복을 조심하며 느리게 걸었다.
- 이쯤이면 올라온 것보다 더 내려간 거 같은데?
치우의 말대로 산을 절반 이상 올라온 게 억울할 정도로 깊이 내려갔다.
- 형. 요괴 있어.
갑자기 멈춘 치우가 오작의 팔을 잡았다. 오작 역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던 차여서 치우의 말에 놀라지 않았다.
- 좀 더 조심하자.
다행히 대모왕이나 대봉각처럼 결계를 안 치는 요괴인지 교주와 삼천 교도가 있는 공동에 이르기까지 별 방해를 받지 않았다.
교주는 특이하게 삼각형으로 쌓아 올린 제단 위에 서 있고 삼천 교도는 규칙적인 문양을 그리며 제단 사방에 배치되었다.
- 혈지 집 배치랑 비슷해.
교주가 선 제단을 교주전으로 보고 삼천 교도를 집이라고 여기면 혈지랑 정말 비슷했다.
"남화경을 읊어라."
교주가 까마귀 울부짖는 듯한 탁한 목소리로 외쳤다. 교주의 외침을 들은 교도들은 무릎을 꿇고 중얼중얼 남화경을 외웠다.
"천지유어天池有魚 기명혈곤其名血鯤."
천지에 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이 혈곤이다.
"혈곤지대血鯤之大 불지천리不止千里."
혈곤이 얼마나 큰지 천 리도 넘는다.
"화이위조化而爲鳥 기명혈붕其名血鵬."
새로 변하니 그 이름 혈붕이어라.
"혈붕지배血鵬之背 불지천리不止千里."
혈붕의 등은 얼마나 넓은지 천 리도 넘는다.
- 이거 가짠데?
오작은 남화경을 안다. 시작은 천지유어가 아니라 북명유어北冥有魚다. 천지는 북명이 아닌 남명南冥의 이름이다.
주문이 길어짐에 따라 제단에서 피가 뿜어졌다. 비릿한 피 냄새에 흥분한 교도들이 더 큰 목소리로 남화경을 읊었다. 목소리가 커질수록 더 굵은 핏줄기가 뿜어졌고, 점차 공동의 바닥이 피로 엎였다.
"천계를 지배하는 마수 혈곤이여, 그대의 힘을 이곳에 역사하라."
남화경이 끝나자 교주가 귀를 긁는 목소리로 한껏 외쳤다.
- 조심.
- 왔다.
오작과 치우는 거의 동시에 손으로 말했다.
귀갑어는 꽤 흉측한 편이다. 그러나 혈곤이라고 불리는 존재와 비교하면 귀여워 그러안고 자고 싶을 정도였다.
혈곤의 머리에는 아귀의 입을 방불케 하는 아가미가 여섯이나 있었다. 그리고 입에도 흉측한 이빨이 제멋대로 났다.
심지어 입 밖에 난 이빨도 있어 뿔로 오해할 지경이었다.
"자격이 되는 자의 피를 혈곤께서 취할 것이다. 피를 혈곤께 바친 자는 윤회환을 벗어나 영생하리다."
교도들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멍한 눈을 하고 교주의 말을 따라 외웠다. 처음엔 그래도 비슷한 속도로 함께 읊었는데,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제멋대로 변했다.
갈치처럼 긴 몸을 부드럽게 저으며 핏속을 헤엄치던 혈곤이 입을 커다랗게 벌려 교도 한 명의 목을 콱 물었다.
- 작가의말
장자를 남화진인이라고 부르며, 장자가 쓴
‘
장자
‘
라는 책을 남화경이라고도 부릅니다. 장자, 노자, 주역 세 책을 합쳐 삼현三玄이라고도 하는데요. 여기서 노자는 도덕경으로 많이 불리죠. 주역의 저자는 복희로 알려졌습니다.
주문은 장자의 소요유를 인용하여 각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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