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상노소군太上老少君
오작구금烏鵲拘禁
오작은 갇히고
축융기궁祝融棄宮
축융은 노양궁을 버리다
오작은 그날 즙무혼을 죽여 가문의 복수를 마쳤다. 형천은 흑제의 죽음을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인 머리를 들고 구려국으로 달렸고, 오작은 축융을 피해 무작정 도망쳤다.
오작의 경공이 빠르긴 하지만, 법력이나 경지나 월등한 축융이 법술을 펼친다면 못 따라잡을 리 없다.
그러나 축융은 오작과 비슷한 속도로 꽤 먼 거리를 두고 쫓았다. 오작의 회신창 초식이 자단의 반만 되어도 축융은 부상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그저 부상이 두려워 거리를 둔 건 아니었다. 축융은 오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심이 서지 않아 시야에 두고 따르기만 했다.
그때. 갑자기 오작의 몸이 사라졌다. 축융조차 어려운 공간계 법술로 이동한 건 아닐 테니 방조자가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축융의 예상과 달리 오작이 갑자기 사라진 건 노양궁으로 소환된 탓이었다. 청룡주를 삼키고 천일도에 갇혔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작란을 먹은 탓에 노양궁에서 일정 거리에 떨어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노양궁에 소환된 오작은 황급히 밖으로 나와 다급한 손길로 소매에서 부적 수십 장을 꺼내 일일이 피를 묻혀 발동했다.
수십 장의 부적은 법술과 진법으로 오작의 몸을 숨겼다. 노양궁의 주인인 축융이어도 발견하기 쉽지 않을 것이고, 설사 발견한다고 쳐도 오작을 감싼 진법을 파훼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맑고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흑수해에서 강제명과 즙무혼의 대화가 들리던 때와 같았다.
[알고 있었구나.]
축융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작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축융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태상노군을 보고 오작에 대한 미련을 떨쳤다. 태상노군이 두둔한다면 축융의 능력으로 오작을 어떻게 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격대전이가 예상보다 훨씬 훌륭하게 된 걸 몰랐습니까?"
"운이 좋았나 싶었는데, 네가 손 썼니?"
"내 도주를 도운 보답이라고 하죠."
축융은 만 년도 더 전과 똑같은 모습의 태상노군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들이 영생하려고 격대전이 법술을 만들었고, 격대전이에 쓸 육신을 만들었다. 계속 육신을 바꿔가며 영생을 누리려고 했는데, 정작 자신들이 만든 아이가 열두 살의 나이로 영생을 누리고 있었다.
"내가 좋은 마음으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너도 이젠 알 텐데."
당시 미무골은 태상노군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주장했고 염무백은 자신의 피를 재료로 썼기에 우선권은 자신한테 있다고 우겼다.
비록 태상노군을 만드는 과정에 염무백의 피가 쓰이긴 했으나, 완벽한 인간으로 태어난 태상노군은 누가 몸을 옮겨도 아무 부작용이 없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자신과 피가 가까우니 본인이 저 몸으로 옮겨야 한다고 우기기엔 근거가 너무 얄팍했고, 세력도 미무골이 훨씬 강했다.
어차피 태상노군의 몸으로 격대전이를 한다고 쳐도 미무골이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을 안 염무백은 전략을 바꿨다.
태상노군의 몸으로 격대전이하는 것보다 저 몸을 연구하자고 주장했다. 내가 못 차지할 바엔 너도 안 된다는 심통으로 염무백을 지지하는 자들이 점점 늘었다.
덕분에 태상노군은 몸을 빼앗기지 않고 버틸 수 있었으며, 수많은 실험 과정을 겪으면서 법술도 배우고 법력도 키웠다.
"결과가 중요합니다. 과정이 어떠했고 당신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염무백은 태상노군의 몸을 연구하는 과정에 큰 발견을 했다. 계속 다른 자들과 함께 연구하다간 조만간 들킬 것을 염려한 염무백은 태상노군을 몰래 빼돌려 자신이 발견한 것이 확실한지 검증하려고 마음먹었다.
아예 훔치는 게 아니고 잠깐 빼돌려서 자신의 가설을 검증하려는 것이기에 어렵게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 태상노군이 도주했고, 켕기는 게 있는 염무백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흔적을 지우고 창녕산 사람들이 태상노군을 잡는 걸 몰래 방해했다.
"문득 드는 생각인데, 설마 네가 정신계 법술로 날 홀린 것이냐?"
축융은 지금껏 한 번도 떠올린 적 없었던 생각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옳다고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태상노군의 아리송한 대답에 축융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내 욕심이 제일 컸나 보구나."
태상노군은 자유를 갈망했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는 따로 있지만, 완벽하게 태어난 태상노군은 자신이 누군가의 피로 만들어진 존재임을 일찍 자각했다.
출생마저 타인의 안배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태어난 날부터 태상노군을 괴롭혔다.
수많은 실험을 거치고 이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태상노군은 법술을 깨우치고 법력을 몸에 쌓았다.
창녕산의 인간은 가만히 있어도 법력이 쌓이는 육체를 타고났다. 그래서 태상노군이 법력을 얻어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여긴 적 없었다.
덕분에 태상노군은 탈출 준비를 차근차근 마칠 수 있었다.
"난 적무혈이 걸려들 줄 알았습니다. 당신은 의외였습니다."
"그래. 그럼 왜 날 찾아온 것이냐?"
태상노군이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염무백이 삼혼으로 떠돌 때도 기회가 많았다. 굳이 격대전이를 돕고 축융이 되는 걸 방관한 걸 보면 다른 목적이 있다고 여겨졌다.
"영예주를 풀고 싶어서요."
노양궁 근처에 진법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법술로 종적을 숨긴 채 둘의 대화를 엿듣던 오작이 화들짝 놀랐다.
"너는 축복받은 몸으로 태어났다. 지금 몸으로 있으면 법력도 계속 쌓이고 좋은 게 아니냐?"
태상노군은 영예주로 받는 제약이 없고, 영예주를 풀지 않아도 손해가 없다.
"무위자연無爲自然 만법자성萬法自成."
무위자연을 이루면 모든 법술이 알아서 몸에 깃든다.
"벌써 그 경지에 이른 것인가?"
축융은 부러운 마음과 시샘하는 마음이 함께 솟았다.
"유일한 걸림돌이 내가 직접 건 영예주입니다. 그간 어렵게 네 개를 풀었지만, 마지막 하나는 아무리 애써도 방법을 못 찾았습니다."
"앞에 네 개를 풀었으면 마지막 토의 저주도 못 풀 게 없다고 보인다."
"황룡신이 사라졌습니다."
오작은 또 한 번 놀랐다. 이제 황룡신만 찾으면 영예주를 벗으리라고 크게 기대했는데, 황룡신이 사라졌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당분간 없더라도 언젠간 생겨나겠지."
"아닙니다. 천계의 황룡한테 확인했습니다. 황룡신은 이제 없다고 합니다. 현무루나 주작란 등도 이제부터 새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럼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
"천잠지용공天蠶地蛹功."
축융은 입을 꾹 다물고 고민했다.
"천잠지용공 구결을 나한테 알려주고 노양궁을 버리면 당신의 약점을 없애주겠습니다."
축융은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올라왔다.
"어, 어떻게?"
"격대전이의 약점은 원래 주인이었던 혼이 나간 자립니다. 사람에 따라 법술에 따라 위치가 달라지지만, 반드시 약점이 생깁니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법술이 완벽할 순 없지요. 나에 대해 연구한 것도 격대전이의 약점을 완전히 없앨 수 있을지 하는 기대로 벌인 거 아니었습니까."
"그 이유도 있었지."
"방법을 알려드리죠. 팔괘로에서 이레 동안 문무화文武火로 혼을 단련하면 약점이 사라집니다. 이 방법은 불의 기운이 강한 당신한테만 유용하고, 팔괘로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팔괘로의 주인은 태상노군이다.
"내가 격대전이를 성공하고 축융이 된 거 모두 네 안배였느냐?"
태상노군은 그저 해맑게 웃기만 했다.
"격대전이를 연구한답시고 수많은 인간을 장난감처럼 취급했던 벌을 이제야 받는 것인가?"
"즙선기의 혼을 몰래 강화하여 당신의 시도가 실패하게 한 것도 납니다. 미무골의 후손에게 신농과 혼인하고 나라를 염환국에 바치라고 알려준 것도 납니다."
태상노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게 하면 당신들을 향한 증오가 조금이나마 희석될까 싶었는데, 아니었습니다. 이제껏 당신을 찾지 않은 건 고마운 마음보다 미운 마음이 커서 만나는 즉시 죽여버릴까 봐 걱정되어서였습니다."
"방금 즙무혼이 죽었으니 복수심이 희석되어 날 찾았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적무혈의 삼혼을 잡아 태워 없앴을 때 일시적으로 당신들을 향한 미움이 희석되었습니다."
"좋다. 그럼 천잠지용공의 구결을 알려주마."
축융은 태상노군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제의를 수락했다. 그리고 바로 천잠지용공의 구결을 읊었다.
시간이 흘러 태상노군의 마음이 바뀔까 봐 아주 빠른 속도로 구결을 들려줬다.
"거꾸로 한 번 외워보세요."
축융은 태상노군의 말대로 거꾸로 외웠다. 구결에 장난을 안 쳤다는 확신이 든 태상노군은 축융에게 노양궁을 버릴 것을 종용했다.
"노양궁은 왜 버려야 하느냐?"
"문무화 중에서 무화가 힘이 조금 부족합니다."
숯을 태우는 불처럼 세찬 불길은 없지만, 강한 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을 문화라고 한다. 무화는 마른 장작에 기름을 뿌린 것처럼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을 말한다.
열로 변형을 일으키는 문화와 달리 무화는 태워 없애는 성향이 강하다.
축융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주문을 외워 노양궁을 포기했다.
첫 욕수는 서왕모의 핍박에 자신이 살던 진일산을 포기하고 화병으로 죽었다. 두 번째 욕수는 어쩔 수 없이 진일곡을 만들어야 했다. 구망의 천일도 역시 자리를 두 번 옮겼다.
노양궁을 새로 지으려면 꽤 많은 법력과 시간이 소모되겠지만, 죽어도 못 버릴 정도로 소중한 건 아니었다.
"아까워할 것도 없습니다. 소양궁도 얼마 전에 무너졌습니다. 반고의 개천부가 뽑혔기에 사상궁肆象宮도 이젠 의미 없으니 새로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소양궁과 소음궁 그리고 노양궁과 노음궁은 음양에서 갈라져 나온 사상을 상징한다. 천하를 다섯으로 나뉠 때 이 네 궁전은 큰 의미가 있다. 반고부는 그저 소통을 막은 것이고, 오행 중 자신이 담당하는 기운을 강하게 뭉쳐두는 건 사상궁이 했다.
이젠 오행의 기운이 섞이기 시작하여 이 넷도 존재 의미가 사라졌다.
태상노군이 손을 휘젓자 주인을 잃은 노양궁에서 강렬한 기운이 뽑혀 나왔다. 아무한테도 굴복할 것 같지 않은 맹수를 닮은 기운은 태상노군 앞에 오자 양처럼 순해졌다.
[이만 갑시다. 팔괘로에서 약점을 지운 다음 염무백이 아닌 완전한 축융이 되길 바랍니다.]
한참 기다려도 더는 대화가 들려오지 않았다.
'흑수해의 능력인가? 아니면 태상노군이 일부러 나한테 들려준 건가?'
오작은 자신을 가둔 진법을 하나씩 파훼하며 고민에 잠겼다. 머리만 빼고 몸을 빼곡히 감싼 흑수해의 능력으로 엿들은 건지 태상노군이 일부러 들려준 건지 판단이 어려웠다.
태상노군이 일부러 들려줬다면 뭔가 의도가 있을 텐데, 오작은 태상노군과 아무런 접점도 없어 추측할 근거가 부족했다.
'즙무혼을 죽여줘서 고맙다고? 그렇다고 하기엔 일부러 원수를 돕고 살려둘 정도로 냉정해 보였는데.'
진법을 다 해체한 오작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관련 부적을 마련하느라 소모한 재물이 아까웠다.
눈이 세 개인 원숭이 덕분에 싸게 마련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 오작은 이제 빈털터리다.
아쉬움을 털어버린 오작은 축융봉을 내려 금계산 방향으로 달렸다. 즙무혼의 공격에 납작해졌던 오른팔은 어느새 멀쩡하게 회복되었다.
오작이 한 게 없으니 반도원에서 먹은 지혜과 덕분이 분명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어느 정도 달린 오작은 노양궁으로 또 소환되었다.
첫 욕수의 거처였던 도산이 지금도 가을이 길고 남은 세 계절이 짧은 걸 생각하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되는 건 이해되는 거고, 축융봉에 갇힌 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진일곡에선 괜찮았는데.'
복숭아를 먹은 덕분인지 오작의 어머니가 서부 출신이어서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편익조도 날릴 수 없고.'
오작이 날린 편익조 역시 축융봉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급한 마음을 어렵게 다잡은 오작은 창을 꺼내 새로 깨달은 창법을 수련하고 법술도 수련하고 법력 수련도 했다.
즙무혼과 싸우며 느꼈던 점을 통해 무공과 법술을 결합한 멸천칠절공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고, 악불산의 창법을 조금 견식한 덕분에 새로운 깨달음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형천이 좋은 소식을 들고 찾아왔다. 축융이 자신을 해코지하려고 할 경우를 대비하여 도움을 받고자 형천을 불렀던 것인데, 태상노군의 개입으로 쓸데없는 일이 되었다.
"자주 들러서 소식을 전하거라."
밤을 새워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형천을 떠나보내고 축융봉에 홀로 남은 오작은 천잠지용공의 구결을 해석하며 창법과 무공 그리고 법술을 수련했다.
자단이 사라지고도 천일도에서 구 년이나 차분하게 수련했듯이, 오작은 조급한 마음을 꾹 누르고 강해지는 데 몰두했다.
비록 제약이 많아 끝까지 진짜 실력을 모두 펼쳐 보이진 못했지만, 공공보다도 강한 즙무혼을 여러 차례 상대한 경험은 소중한 거름이 되어 오작의 성장을 도왔다.
'숙부를 구하고, 치우가 천황이 되는 걸 돕고. 내게 저주를 건 자를 찾아내 죽이면 된다.'
- 작가의말
이름은 태상노군인데 외형은 어린 소년입니다. 그래서 태상노소군이라고 했습니다. 천잠지용공에서 잠은 누에고 용은 고치입니다. 애벌레가 나비 되듯, 천잠지용공으로 새롭게 태어나면 영예주를 벗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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