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력혼원수霹靂混元手
춘뢰신첩春雷迅捷
봄 우레는 무엇보다 빨라
불급엄이不及掩耳
귀 막을 겨를도 없구나
악명이 자자한 동해답게 자단을 태운 배가 떠나고 반 시진 정도 지나고부터 파도가 기승을 부렸다. 파도가 거세짐에 따라 홍영창을 휘두르며 들떴던 오작의 마음은 점점 가라앉았다.
"아이야. 파도도 물길은 피하니 아무 문제 없을 거다."
험상궂은 얼굴에 안 어울리게 주막 주인이 오작을 따뜻이 위로했다.
"강한 분이니 안위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파도에 휩쓸려 엉뚱한 곳에 가지 않을까 우려될 뿐입니다."
자단은 벽유궁碧遊宮 통천通天교주의 막내 제자다. 그리고 벽유궁은 동해 봉래도蓬萊島에 있다.
문제는 두 가지다.
우선. 자단은 통천교주의 제자로서 사형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았다. 자질이 부족한데 사부의 총애가 떠나질 않았고 홍영창이라는 어마어마한 무기의 점지도 받았다.
사부가 없는 자리라면 자단의 목숨을 노릴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다음은 봉래도가 부유섬浮遊島이라는 거다. 동해에 제멋대로 떠다녀서 어디서 맞닥뜨릴지 모르는 곳이다.
홍영창도 두고 간 자단이 봉래도의 사형들을 만나면 목숨이 위태할지도 모른다. 지닌 재주가 있어 목숨은 보전한다고 쳐도 사지까지 멀쩡하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도망칠 성격도 아니고.'
보자마자 도망을 치면 안위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오작이 지금까지 봐 온 자단이라면 당당하게 맞서서 이기려고 할 것이다. 죽도록 싫은 사형들 앞에서 등 보일 자단이 절대 아니다.
"옆에 창과 저기 말 모두 네 것이더냐?"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오작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곁에서 위로의 말을 건네던 주막 주인은 어느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말을 건 남자는 눈이 물소 눈알만큼 컸고 붉은 이마가 불룩 튀어나왔다. 그래서 머리숱이 엄청 많은데도 대머리처럼 보였다.
다소 무서운 외모와 달리 커다란 눈에 현기가 가득했고 표정 역시 차분했다.
"현재는 제가 지키고 있지만, 제 것은 아닙니다. 소생이 감히 대인의 존성대명을 먼저 여쭤도 될는지요?"
오작이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국궁鞠躬의 예를 올리며 대답하자 사내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이름 알려주는 건 좀 그렇고, 다들 날 뇌공雷公 혹은 재상이라고 부른다. 너도 그리 부르거라."
그냥 큰 소리는 처음에 귀가 아파도 계속 듣다 보면 괜찮다. 그러나 뇌공의 목소리는 도무지 적응할 기미를 안 보였다.
"소생은 오작이라고 합니다. 청제의 곁을 지키는 재상을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사내의 정체는 청제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만 앉을 수 있다는 재상의 자리를 십여 년째 꿰차고 있는 뇌공이었다.
벽유궁의 사정에서 알 수 있다시피, 사형제끼리도 호오好惡(좋고 싫음)에 따라 죽이는 세상이다. 탐내는 사람이 많은 재상 자리를 지키려면 자기 안위를 돌볼 만한 재주는 필수다. 최소 동부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가 틀림없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오작은 조금 긴장됐다. 홍영창을 믿고 오행마도 믿지만, 영위앙의 재상이라면 자단도 쉽게 장담할 상대가 아니다.
"안타깝구나. 네 것이라면 둘 중 하나를 내 벽력혼원수와 바꾸려고 했는데."
벽력혼원수를 모르는 오작은 괜찮았지만, 주막을 운영하며 귀동냥을 꽤 한 주인은 놀란 나머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혹시 나랑 거래할 생각은 없는 거니?"
뇌공은 오행마와 홍영창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오행마를 보는 기간이 훨씬 긴 거로 봐선, 홍영창보단 오행마가 더 탐나는 듯했다.
"제 것이 아닌 물건으로 거래하는 건 의義를 거스르는 그릇된 행동입니다. 맡긴 사람의 믿음을 저버려 신信에도 위배되는 일이지요. 사내가 신의를 잃으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뇌공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불룩 튀어나온 이마와 유난히 큰 눈 때문에 무척 사나운 얼굴이 되었다.
"그래. 내가 참 부끄러운 생각을 했구나. 내가 득得하면 누군가는 실失하는 법이거늘. 이 나이를 먹도록 그 쉬운 것을 가슴에 못 새겼구나. 잘못을 뉘우치는 의미로 벌주罰酒를 해야겠다."
주막 주인이 황급히 몸을 일으켜 주막 옆 술을 보관한 움으로 들어갔다. 한참이나 지나서 흙으로 빚은 두꺼운 항아리를 들고 낑낑거리며 올라왔다.
"대인, 본 주막에서 가장 귀한 술입니다."
"그래. 내가 큰 잘못을 했으니 이 항아리를 다 마셔 속죄해야겠다."
말을 마친 뇌공은 커다란 항아리를 조약돌처럼 가볍게 들어 올렸다. 풀과 흙을 섞어서 햇볕에 말려 만든 조잡한 뚜껑을 가볍게 뜯어 던지고 안에 술을 커다란 입으로 콸콸 쏟았다.
중간중간 기쁨이 섞인 감탄이 종종 터져 나왔다.
'이게 뭔 속죄의 의미야. 속죄를 빌미로 술 마시는 거지.'
숙부 말대로 세상은 넓고 기인은 많았다. 뇌공은 생긴 것부터가 범상치 않은데 행실 역시 상식을 벗어났다.
"이 정도 벌로는 성차지 않는구나. 혹시 더 있느냐?"
"미천한 것들이 마시는 역한 술밖에 없습니다. 대인의 품위에 누가 될까 봐 감히 꺼내지 못하겠습니다."
주막 주인의 말에 뇌공은 뒷짐을 쥐고 주막 주변을 뚜벅뚜벅 거닐었다.
"방금 술은 혹시 네가 직접 빚은 것이냐?"
"그렇습니다."
"말투를 보아하니 좀 배운 것 같구나."
"부친이 배 세 척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몇 년 전 바다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계십니다."
뇌공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래. 내 재상의 권한으로 네게 주보酒保의 관직을 내린다. 이후 청제의 연회에 쓸 술은 모두 네가 책임지는 거다."
주막 주인은 뜻밖의 횡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니 혹시 숨겨둔 거 있으면 어서 꺼내거라."
이어지는 말에 주막 주인의 웃던 얼굴이 울상으로 바뀌었다.
"진짜 없습니다. 부친과 선생의 가르침으로 거짓을 멀리하고 살았습니다."
뇌공은 크게 실망한 얼굴로 입을 쩝쩝 다셨다.
"그래. 돌아가면 도와줄 관리官吏 몇 명 보내줄 테니 마음껏 부려 먹어라. 술을 다 빚으면 내 재상부에 기별을 넣는 걸 잊지 말고."
뇌려풍행雷厲風行이라는 말이 있다. 우레처럼 강하고 바람처럼 빠르게 순식간에 휩쓸고 사라지는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뇌공의 행사에 딱 알맞은 표현이다. 창과 말의 주인을 묻는 것으로 시작한 일이 어느새 주보 임명으로 치달았다.
"맞다. 이게 아니지. 술 한 항아리로는 벌이 부족한 게 요점이었는데 말이야."
까치집처럼 삐죽삐죽한 머리를 두 손으로 마구 헤집던 뇌공이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벽력혼원수를 네게 가르치면 되겠구나. 그럼 오히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절기를 가르치는 미담이 될 수 있어."
당사자인 오작은 물론 곁에서 쭉 지켜본 주막 주인도 커다랗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 세상이 원래 혼돈인 건 알지?"
미처 오작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뇌공은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래. 당연히 알겠지. 혼돈의 세상이 어떻게 음양으로 갈라졌는지는 알고?"
이번 역시 뇌공은 오작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것까진 몰랐을 거야. 우리 벽력문에만 전해지는 비밀이니까. 지금 그 비밀을 네게 말해주겠다."
"저기, 전 안 듣겠습니다."
급하게 끼어든 주막 주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황급히 몸을 돌려 술을 꺼내던 움으로 들어갔다. 술 마시던 어부들도 아까 떠났기에 뇌공과 오작만 남았다.
"우레와 벼락이야. 우레로 덩어리를 부수고 벼락으로 가루를 낸 거지. 그렇게 음과 양이 점차 갈라지게 되었고, 맑고 가벼운 양은 조금씩 위로 떠서 하늘이 되고 탁하고 무거운 음은 차츰 가라앉아 땅이 된 거야."
오작도 자단에게 들어서 아는 이야기라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까지도 아는 사람이 좀 있어. 진짜 비밀은 이거야. 사실 우레와 벼락은 하나야. 따로따로 아니고."
뇌공이 짐짓 목소리를 낮췄지만, 하도 쩌렁쩌렁하여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산에서도 들릴 것 같았다.
"우레와 벼락이 하나라는 발상에서 나온 게 벽력문의 벽력혼원수다. 우레 같기도 하고 벼락같기도 한 건 뭘까 고민하다가, 혼돈混沌을 이루는 핵심인 혼원混元이라고 이름 지었지."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벽력 두 글자 모두 벼락이잖습니까. 우레는 어디 간 겁니까?"
뇌공은 왼손을 들어 이마를 긁적였다. 사문의 누구도 가르치지 않은 거여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무척이나 난감했다.
"내가 사문에서 위치가 그렇게 높지 않아서 아직 그 비밀까진 듣지 못했다."
벽력문 다음 문주 내정자인 뇌공의 거짓말에 오작은 순순히 넘어갔다. 어차피 그저 궁금했을 뿐이지 꼭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벽력문의 내막에 관해 아는 게 전혀 없기에 거짓인지 판단할 근거도 없었다.
"그럼 먼저 벽력혼원수를 네게 보여주마."
뇌공은 더 길게 말하면 눈앞의 총명한 아이한테 꼬투리만 계속 잡힐 것 같아서 바로 절기 전수로 넘어갔다.
"잠시만요. 아직 배운다고 안 했습니다."
"괜찮아. 내가 가르치기로 했으니까 됐어."
말을 마친 뇌공은 왼손과 오른손을 오른쪽 옆구리에 모았다. 뇌공의 몸에서 꿈틀대는 굵고 강한 기운을 감지한 오작은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말을 억지로 잡아뒀다.
"합!"
뇌공은 오른쪽 옆구리에 모았던 두 손을 동시에 앞으로 내질렀다. 팔을 곧게 다 뻗었을 때 열 손가락을 활짝 폈다.
뇌공의 열 개 손가락에서 열 가닥 번개가 생겨 앞으로 쏘아졌다.
얼핏 가늘게 보이는 벼락은 해변으로 덮쳐오는 집채만 한 파도를 가볍게 부숴버렸다.
"우레의 진震으로 틈을 만들고 벼락의 섬閃으로 파고드는 거군요. 약점을 만들어 찌르는 대단한 무공입니다."
강대한 힘이 전혀 튀지 않고 고분고분 흐르는 걸 감지한 오작은 감동에 빠졌다. 자신은 얼마 안 되는 기운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쩔쩔매는데, 뇌공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벼락을 닮은 기운을 순한 강아지처럼 다뤘다.
"사실 그게 핵심이 아니다."
벽력혼원수 구결의 핵심을 오작이 단번에 짚어내자 뇌공은 당황하여 아무 말이나 막 뱉어냈다.
왠지 눈앞의 소년에겐 얕보이기 싫었다. 막 존경받고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뒷말을 이어가려니 말문이 턱 막혔다.
"그렇군요. 그저 벽력수가 아니고 벽력혼원수인데는 다 이유가 있겠죠. 먼저 흔들고 찌르는 것이 정도正道(바른 길)지만, 찌르고 흔드는 것도 훌륭할 것 같습니다."
오작이 총명하다곤 하지만, 구결도 안 듣고 그저 한 번 무공을 구경하는 거로 핵심까지 파악할 정도는 아니다.
저주로 기운의 움직임이 불편한 상황에서 멸천칠절공을 수련하며 많이 고민했고, 자단이 만든 오행과 음양의 기운을 가끔 상대하며 경험을 쌓았기에 운 좋게 핵심을 짚은 거였다.
그러나 오작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뇌공은 놀라서 팔짝 뛸 일이었다.
'이래서 사부가 자꾸 나보고 제자를 받으라고 한 거구나. 가르치려고 했는데 오히려 배우고 마는구나.'
속으론 오작의 말에 거듭 감탄하면서도 겉으론 침착을 유지했다. 평소에도 체면을 차리는 편이지만, 왠지 오작 앞에선 더 차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벽력혼원수의 구결과 운기 경로다. 반 각을 줄 테니 외울 수 있겠느냐?"
동물의 뼈를 갈아서 만든 전箋에는 작은 글자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지역마다 사용하는 글자가 다르긴 하지만, 다행히 전에는 오작이 모르는 글자가 없었다.
"다 외웠습니다."
눈으로 빠르게 두 번 훑기만 한 오작이 다 외웠다고 하자 뇌공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슬슬 욕심이 났다.
"너 사부 누구니?"
어떤 대가를 주더라도 사문을 바꿔 벽력문 문도로 만들고 싶은 아이였다.
"허락 없이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나를 따라 벽력문으로 갈 생각은 없니? 너라면 십 년 안에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이 될 거야."
"후의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정이 여의치 않음에 깊은 유감을 느낍니다."
뇌공은 일 처리가 충동적이긴 하지만,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행마에 대한 탐심이 옅어지고 오작에 대한 욕심도 누그러뜨리니 머리가 명석해졌다.
'이런 불세출의 천재를 지금까지 그대로 놔뒀을 리는 없겠지. 괜히 억지로 벽력문으로 끌어들이려다가는 큰 화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저 벽력혼원수를 전수하고 친분을 쌓는 것으로 만족하자.'
제자 하나를 두고 두 문파가 싸우다가 양패구상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구결에 벽력혼원수의 모든 게 있다. 열 번 봐도 새로운 게 안 보이면 열한 번 보아야 한다. 구결에 없는 것까지 보일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벽력혼원수를 익혀낸 셈이다."
사부가 아침 식사 때마다 하던 말이다. 지금도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이 영민한 소년은 어쩌면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과옥조金科玉條와 같은 말씀 항상 명기銘記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뇌공인雷公印이다. 귀찮은 일 생기면 이걸 꺼내 보여라."
검푸른 금속으로 만든 동그랗고 납작한 물체였다. 한쪽 면에는 뇌雷자를 새기고 다른 쪽에는 그림이 있었다.
밑의 절반은 구름인지 파도인지 모를 문양이고, 위엔 벼락으로 짐작되는 호쾌한 선이 하나 있었다.
- 작가의말
바람처럼 왔다가 우레처럼 요란하게 굴고 벼락처럼 사라지는 남자. 그대 이름은 바로 뇌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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