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빙령도北海氷靈島
부해빙도浮海氷島
바다에 뜬 얼음섬은
외강중공外强中空
바깥은 단단하고 속은 비었다
여름이 깊어가는 계절이건만, 북해와 가까울수록 황폐한 땅만 보였다.
"여기 풀을 보면 무척 작지? 뿌리는 열 배도 더 길어. 물 많은 곳에선 넓게 퍼지고 그렇지 않은 곳에선 깊이 파고들어. 봄의 끝과 가을의 시작까지만 따뜻하기에 잎을 크게 키우지 않는다. 추위가 오면 잎은 시들고 뿌리는 견디지. 다시 따뜻해지면 다시 이파리를 피우려고."
치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예전엔 대충 귓등으로 흘리거나 마지못해 이해한 척하던 것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의 모습이었다.
보유한 힘과 얻은 깨달음에 비교해 너무 높은 경지의 자극 때문이었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찾듯, 치우는 자신의 경지에 어울리는 수준이 되려고 아무 지식이나 닥치는 대로 흡수했다.
청자가 집중하여 열심히 들으니 화자도 신난다. 오작은 경청하는 치우에게 자신이 아는 바를 쉬지 않고 얘기했다.
"형. 그럼 저 나무는 엄청나게 오래 살았겠네?"
추위 때문에 나무나 풀의 성장이 더디다는 말을 들은 치우가 먼 곳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자란 나무들을 가리켰다.
"베면 더 확실하겠지만, 이백 살 정도인 거 같아."
"나이테 말하는 거지? 그건 어떻게 생기는 건데?"
"여름은 따뜻하니까 빨리 자라. 겨울이 되면 추우니까 안 자라지. 빨리 자랄 때랑 느리게 자랄 때 흔적이 남거든. 그 흔적이 몇 개 있는지 살피면 나무가 몇 살인지 아는 거야."
오작은 일부러 음양이나 오행 혹은 무극을 언급하지 않았다. 지식은 전수할 수 있지만, 지혜는 본인이 터득해야 한다. 예전에야 빨리 강해져야 한다는 압박에 꽤 많은 얘기를 해줬으나 이젠 자기 목숨 지킬 정도는 되었기에 여유를 조금 갖춰도 괜찮다.
"근데 축융이 진짜 공공을 끌어낼까?"
"가능성이 커. 그리고 축융이 실패한다고 우리가 그만둘 건 아니잖아."
치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렇게 멀리 떨어졌는데도 원수가 될 수 있구나."
남부와 북부는 중부를 사이에 뒀다. 중부의 남북 거리가 만 리는 넘으니 축융과 공공의 거리는 당연히 만 리 이상이다.
그런데 축융과 공공은 원수 사이다.
공공은 적제 적표노와 친하게 지냈고 축융은 흑제 즙선기와 친하다. 적표노와 즙선기가 원수지간이어서 일면식도 없는 공공과 축융도 원수가 되었다.
"그런데 오방신은 자기 지역을 떠나면 약해진다고 했잖아. 축융이 괜찮을까?"
"형천이 반고부를 뽑았잖아. 구망 어르신은 그 사실을 모르니까 동부를 떠나기 싫은 거야."
지금이야 청제 부럽지 않지만, 예전엔 구망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법력이 일천했다. 그래서 구망은 동부를 떠나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다.
동부를 통일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 청제를 누군가가 견제해야 하기에 오작도 굳이 얘기하지 않고 구망이 구려국에 남도록 했다.
"강제명만 찾아내면 숙부 구할 수 있겠지?"
"그러길 바라야지."
귀곡자도 복희도 오작에게 천하의 통일을 주문했다. 오작 자신이야 기반도 별로 없으니 치우가 적합하다. 그러니 어서 숙부를 찾고 소소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치우가 청제가 되고 천황이 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바라는 것과 치우가 갈 길이 상충하지 않아서.'
둔각은 사흘 내내 쉬지 않고 달려서 북해 바닷가에 도착했다.
"무슨 배가 이리도 많아?"
"왜 그렇다고 생각해?"
오작의 질문에 치우는 잠깐 고민하고 대답했다.
"농사도 안되고 나무나 풀도 적으니까. 물고기 잡아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
"맞아. 그리고 진주나 귀한 조개껍데기를 얻어 일확천금의 꿈을 이루려는 자들도 많고."
구슬로 변한 둔각을 품에 넣은 오작은 적당히 큰 배로 다가갔다.
"빙령도로 가?"
오작의 질문에 사공은 고개를 들어 오작과 치우의 얼굴과 행색을 살폈다.
"어느 빙령도 말씀입니까?"
이는 오작도 미처 모르는 일이었다.
"빙령도가 몇 개 있지?"
"빙령도는 국가 이름이고, 실제 섬이 몇 개인지는 저희도 모릅니다. 북해에는 얼음섬이 떠다니는데 빙령도에서 섬을 파고 들어가서 마을로 만듭니다. 가끔 섬이 암초에 부딪혀 깨지기도 하고 해서 몇 개 있는지는 빙령도 사람들도 모를 겁니다."
"그럼 빙각은 뭐야? 그거 있으면 섬끼리 다닌다던데."
설영이 했던 말을 떠올린 오작이 질문했다.
"일부 빙령도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 빙령도끼리 교류하려면 배를 타야 하는데, 바다에 얼음이 하도 많아 배가 다니기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예전에 법술을 하나 펼쳤는데 그 뒤로 일정 기간에 얼음으로 된 다리가 나타나서 섬들끼리 이어준다고 합니다.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그럼 이 배도 가까운 빙령도밖에 못 가겠네?"
"그렇습니다. 여름이 더우면 먼 빙령도까지 갈 수 있는데 올해는 얼음이 잘 녹지 않아서 힘듭니다. 북해의 얼음은 바위처럼 단단하거든요."
"그럼 가장 가까운 빙령도로 일단 가자꾸나."
오작과 치우는 사공이 제시한 가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둘을 태운 사공은 싱글벙글 웃으며 노를 저었다.
동해에 비해 해류도 적고 물살도 약한 북해였다. 그래서 빠른 물길이 없는 대신, 노를 저을 때마다 배가 쭉쭉 전진했다.
"방향 알려줘. 노는 내가 저을게."
제대로 만든 배를 타는 건 유웅국에서 풍괴 영지로 갈 때 말고는 처음이다. 노 젓는 게 재밌어 보인 치우는 사공을 밀어내고 노를 잡았다.
그러자 사공은 뱃머리로 물러나서 조금 작은 노를 잡고 치우와 함께 저었다.
치우의 가세로 배는 들개한테 쫓기는 토끼처럼 빠르게 달렸다. 그러나 치우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비켜. 내가 다 할 거야. 연화분신蓮花分身."
치우 등에서 팔 두 개가 튀어나와 사공이 잡은 노를 빼앗았다. 갑자기 치우의 팔이 네 개가 되자 사공은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멈추지 못했다.
"어떻게 한 거야?"
"긴 막대기 든 대머리가 하는 걸 보고 배웠지."
한참 노를 젓던 치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 머리 아파."
"다다익선이란 말이 언제나 정확한 게 아니야. 사용할 수 없는 강한 힘은 오히려 약점이 돼."
"해결책 있어. 연화분신."
치우 어깨에서 머리 하나가 자랐다. 치우가 팔을 뽑을 때 놀랐던 마음을 겨우 진정시킨 사공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숨을 못 쉬었다.
오작은 기로 사공의 숨통을 틔워주며 치우를 타박했다.
"미리 얘기하지. 사람 놀래고 뭐 하는 짓이야."
"나도 될 줄은 몰랐지."
노를 몇 번 젓던 치우는 아직도 안색이 파리한 사공한테 말했다.
"나 이거 또 할 거야. 놀라지 마."
말을 마친 치우 목에서 머리 하나가 더 자라고 어깨에서 팔 두 개가 더 생겼다. 머리가 셋 팔이 여섯 된 치우는 안타까움에 세 개의 입을 동시에 다셨다.
"이게 한계야. 더 많이 만드는 건 어려워."
그렇게 한참 노를 젓던 치우는 연화분신을 한 번 더 펼쳤다. 이번엔 머리와 팔 대신 다리가 생겼다.
"너 괴물 같아."
머리 셋에 팔 여섯에 다리 여덟.
"다리 두 개로 균형이 어려워."
준제처럼 타고났다면 괜찮으련만, 팔이 여섯 되고 머리가 셋 되니 앉아서도 균형 잡기 어려웠다. 그래서 치우는 다리를 여덟으로 늘렸다.
"장난 그만 치고 노 두 개나 열심히 저어."
연화분신 법술을 멈춘 치우는 노 두 개를 잡고 열심히 저었다. 그래서 사공이 예상했던 이틀이 아니라 반나절도 안 되어 빙령도에 도착했다.
"오오. 빙산의 일각이란 말이 이거였구나."
치우의 눈엔 바다에 잠긴 거대한 얼음이 똑똑히 보였다.
"그래. 눈에 잘 띄는 것만 보고 쉽게 판단하지 말라는 얘기야."
오작은 사공한테 뱃삯을 치른 다음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한 달 동안 우리 둘의 얘기를 누구한테도 하지 마."
"아닙니다. 평생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사공은 부랴부랴 빙령도를 떠났다.
둘은 빙령도 가장 꼭대기로 걸어갔다. 거기엔 꽤 커다란 구멍이 있었고, 병사 여덟이 지켰다.
"방문 목적을 밝히시오."
"구려국 왕세손 치우다. 빙령도의 왕을 만나러 왔다.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려달라."
"안에 들어가서 쉬시지요. 왕궁의 위치는 저희도 알아봐야 합니다."
왕궁이 있는 얼음섬은 고정되지 않고 떠다닌다. 정해진 궤적이 있는 게 아니라 제멋대로여서 예측도 어렵다.
가까운 빙령도들에 연락을 취해 왕궁이 있는 빙령도를 목격했는지 탐문해야 한다. 모르는 자들은 또 가까운 빙령도들에 연락을 취해 왕궁 위치를 아는지 탐문한다. 대답이 나올 때까지 반복하기에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다.
축융과 약속한 시각이 아직 이레나 남았고, 북해 크기가 대륙 중부보다 더 커서 무작정 찾아다닐 수도 없다. 오작과 치우는 급한 마음을 누르고 병사의 안내를 받아 밑으로 내려갔다.
빙령도는 얼음섬 꼭대기에 구멍을 뚫은 후 밑으로 굴을 팠다. 그렇게 얼음섬 안에 공간을 확보하여 입체적인 마을을 만들었다.
얼핏 개미굴과 비슷하나 층마다 구조가 비슷하고 상하의 구분이 분명하여 길을 헷갈릴 염려는 별로 없었다.
"와, 여기선 바다 안이 보여."
외곽 지역을 걸을 땐 얼음섬 밖의 바다가 보였다. 평범한 사람한텐 그저 어둡고 시커먼 바다겠지만, 오작과 치우의 눈엔 온갖 물고기가 들어왔다.
둘은 가장 밑의 층으로 안내받았다.
빙령도는 가끔 한쪽이 녹으며 기울어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꼭대기의 구멍에서 바닷물이 침투한다.
얼음섬의 얼음은 두껍고 단단하여 부수기 힘들기에 당연히 구멍과 가까울수록 목숨을 부지하기 쉽다.
빙령도는 지위가 높을수록 위험한 아래층에 산다. 일반 백성들을 상대적으로 안전한 높은 층에 살게 하고 지위가 높은 자들이 위험한 곳에서 생활하는 거로 지배력에 대한 당위성을 얻는다.
"어서 오세요. 구려국의 왕세손이라고 들었습니다."
"구려국 왕실에 확인해도 됩니다."
치우는 반말밖에 모르기에 이런 장소에선 입을 안 여는 게 상책이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의심하는 거나 의심받는 거나 기분 나쁘긴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수십 가지 요리가 나왔다. 종류는 무척 다양한데 대부분 그저 굽거나 삶아서 내온 것이었고, 심지어 싱싱한 물고기를 그대로 내온 것도 있었다.
물론, 조리 방식이 단순하다곤 해도 둘에겐 진수성찬이었다. 치우가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음식을 우걱우걱 삼키자 빙령도의 관리는 매우 기뻐했다. 오작 역시 적당히 맛을 보며 주인 체면을 살려줬다.
"그런데 크기에 비해 사는 사람이 적습니다."
식사를 마치자 얼음으로 된 잔에 술이 나왔다. 술은 주보가 만든 것보다 훨씬 못했다.
"여긴 따뜻하니까요. 얼음을 많이 파면 얼음섬이 솟습니다. 그러면 윗부분이 빨리 녹죠."
치우와 오작은 단번에 관리의 말을 이해했다. 속을 파면 얼음섬이 가벼워진다. 그럼 바다 위로 드러난 부분이 커지고 빨리 녹는다.
적당히 파고 적당한 사람이 살아야 얼음섬의 수명이 길어진다.
"얼음섬의 무게와 바다의 따뜻함 정도에 따라 얼음섬을 얼마나 파내고 주민을 얼마나 살게 할지 결정하는 게 제 일입니다. 다행히 여긴 고정된 얼음섬이어서 관리하기 쉽습니다. 떠다니는 얼음섬을 관리하는 분들은 참 고생이죠."
그때. 반짝이는 불들이 얼음섬에 접근했다. 개미굴에 전송됐을 때 설영이 법술로 불렀던 빙화등이다.
"오. 두 분이 귀인인가 봅니다."
"빙화등이 길조吉兆(길한 조짐)인가요?"
"빙화등은 얼음이 다 녹으면 알을 슬고 죽습니다. 한낱 미물이라도 죽는 게 왜 달갑겠습니까. 그래서 얼음섬을 보면 들러붙습니다. 그런데 나방이 불을 덮치는 것처럼 바다엔 불빛만 보면 몰려오는 고기들이 많습니다. 아마 며칠 동안 던지는 그물마다 꽉 차서 올라올 것 같습니다."
설영이 오작의 차가운 성정을 보고 빙령도 출신이냐고 농담했던 것과 달리, 빙령도의 관리는 무척 친절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천성이 그런지 가장 남쪽에 있어서 외부인과 자주 접촉해서 그런지는 본인이나 알 일이다.
그때, 병사 하나가 내려와서 관리한테 귓속말했다.
"공교롭군요. 최근에 왕궁을 찾은 사람이 있어 정보를 빨리 얻었습니다. 왕궁이 움직이는 속도가 그렇게 빠른 건 아니니 이 정보대로 움직여도 근처를 찾아갈 겁니다."
관리는 약 보름 전에 왕궁이 있던 곳을 오작과 치우한테 알려줬다. 그쪽으로 가서 근처의 빙령도에 물으면 왕궁 위치를 정확하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환대는 평생 못 잊을 것 같습니다. 다시 찾아올 땐 좋은 술을 들고 오겠습니다."
"육지의 술이라니. 어떤 맛일지 너무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관리는 멀리 배웅하지 않았다. 관리가 위로 올라오면 백성들이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빙령도의 관리는 웬만한 책임감과 희생정신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직책이었다.
"배 한 척 빌려드릴까요?"
병사의 친절한 제안에 오작은 고마움을 표하며 품에서 구슬을 꺼냈다. 작은 구슬이 말 두 필로 변해 둘을 태운 후 바다를 밟고 달렸다.
- 작가의말
도둑질한 법술이어서 한계가 있습니다. 머리 세 개에 팔 여섯 그리고 다리 여덟이 최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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