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천일도東海天壹島
원유동해遠遊東海
동해로 먼 길 떠나니
소구둔각小駒臀角
엉덩이에 뿔 난 망아지만 신났구나
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산이 빨갛게 타오르는 계절. 쌓이는 곳간에 웃음을 짓다가도 곧 다가올 엄동의 시련에 얼굴을 찌푸리는 절기.
월동 준비로 모두가 분주한 시기에도 느긋하게 세상을 활보하는 이들이 있었다.
"오작아. 너 때문에 자꾸 지체되는구나."
내용과 달리 전혀 책망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오작 역시 숙부가 일부러 자신을 골리려는 속셈인 걸 알기에 침착하게 대응했다.
"급하시면 바꿔서 타는 건 어떨까요?"
"오행마는 영물이라 주인 외의 사람은 쉽게 안 태운다."
자신은 괜찮다고 항변하려는 순간, 오작을 태운 망아지가 오른쪽 뒷다리로 허공을 차며 엉덩이를 세게 흔들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어서 사전에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숙부와 대화하는 데 정신이 팔린 오작은 망아지의 급습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말 등에서 떨어졌다. 오작을 떨궈낸 망아지는 엉덩이를 실룩이며 성공적인 털기를 자축했다.
첫날부터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망아지는 여행 내내 오작을 백 번도 넘게 패대기쳤다. 그리고 오작을 떨구려 하거나 느리게 걷는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말들도 하는 재주인지 모르지만, 심술이 심한 날엔 뒷걸음질도 쳤다.
덕분에 늦가을이 되었는데도 자단과 오작은 대륙 중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망아지로 바꾸자는 오작의 거듭된 요청에도 자단은 요지부동이었다. 말을 구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를 핑계로 대는데, 오작이 보기엔 얌전한 말로 바꾸면 망아지가 부린 말썽으로 늦어진 여정을 만회하고도 남았다.
"하필 왜 이놈을 골랐을까요."
마적들의 말을 처분한 돈으로 산 망아지다. 보자마자 마음에 든 오작이 고민 없이 쉽게 선택했고.
"부족한 네 안목을 탓하거라. 딱 봐도 말썽 잘 부리게 생겼던데."
"숙부는 왜 그때 말리지 않으셨어요?"
자단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사실 운 좋게 오행마를 만나서 그렇지, 자단의 기마술이나 말 고르는 안목 역시 별로다.
"그렇게 각만 세우지 말고 마음을 열어 대하여라. 네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상대도 열어준다."
오작도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숙부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예의가 넘치는 것과 달리, 망아지만 마주하면 욱해서 애들처럼 굴기 일쑤다.
오작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자단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또래 친구랑 어울린 적 없는 오작에게 말썽꾸러기 망아지는 첫 친구인 셈이다.
그래서 자꾸 티격태격 마찰을 빚으며 서로에게 골내는 거다. 싸우며 친해지는 개구쟁이들처럼.
푸르르.
오행마의 투레질에 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작아. 저기 말들이 좋아하는 갈근이 있다. 우린 잠시 쉬자꾸나."
자단이 등에서 내리자 오행마는 엉덩이를 씰룩이며 달려갔다. 오작의 망아지 역시 오행마를 따라 신나게 달렸다.
"숙부. 말들이 좋아하는 갈근 아니라 오행마가 좋아하는 갈근입니다. 다른 말은 갈근을 안 좋아해요."
오작의 불퉁한 말에 자단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지난 수련 때 자신이 너무 무심했음을 반성한 자단은 좀 더 조카에게 마음을 썼고, 그때부터 어른스럽던 조카가 조금씩 투정이 늘었다.
아까 망아지한테 마음을 열라고 했던 충고는 사실 자단 자신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보호하고 저주를 해결하는 것만으로 형의 빈자리를 채우기엔 한없이 부족하단 걸 깨달았지만, 타고난 성정 때문에 조카한테 늘 살갑게 대하진 못했다.
"곧 겨울인데 저리 입이 짧아서야."
갈근을 가득 물고 우걱우걱 씹어대는 오행마와 달리, 망아지는 풀을 가려가며 뜯었다. 아직 덜 자란 데다가 큰 덩치에 살까지 피둥피둥 찐 오행마 곁에 있어서 훨씬 왜소해 보였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오작이 볼멘소리를 한다.
'망아지한테 정이 많이 들었구나.'
자단의 짐작대로 오작은 입으로만 툴툴댔지 속으론 망아지한테 많은 정을 쏟았다.
'복수를 포기해야 하나?'
산은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 깊은 강물은 낚시꾼한테 큰 기쁨이지만, 강을 건너려는 나그네에겐 한낱 방해물일 뿐이다.
자단 역시 진짜 아비 노릇을 하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조카가 자신을 돌볼 정도만 되면 혼자서 형의 원수와 조카에게 저주를 내린 흉수를 찾아 복수하려고 했지만, 지난 원한은 이대로 가슴에 묻고 조카가 훌륭하게 커가는 걸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단 생각이 요즘 따라 자주 들었다.
'구망한테 묻고 결정하자. 나보다 백배 천배 현명한 친구니까.'
나란히 앉은 둘은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았다. 자단은 혼자만의 생각에 자주 빠졌고 오작은 망아지가 사고 치지 않나 지켜보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그러나 대화가 적어도 둘 사이엔 예전과 달리 끈끈한 감정의 교류가 있었다.
갈근을 배불리 먹은 오행마가 돌아오자 망아지도 풀을 그만 뜯고 함께 돌아왔다. 등에서 털어 낼 땐 언제고 몸을 살짝 낮춰 오작에게 어서 타라고 종용한다.
오작 역시 아까 낙마했던 걸 까맣게 잊은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 등에 올랐다.
그렇게 두 달이 더 흘러 일행은 끝내 동해에 도착했다.
"숙부. 이런 장관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푸르다. 가끔 산에도 푸른 물이 있긴 한데, 그건 물이끼나 개구리 똥 때문이다. 바다처럼 시원한 느낌의 푸름이 아니다.
깊다. 산이나 벌판에도 가끔 깊은 웅덩이가 있다. 그러나 어두워서 바닥이 안 보이는 웅덩이와 달리, 바다는 환한 햇빛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깊은지 짐작이 어려웠다.
넓다. 바다의 끝엔 하늘만 보였다. 사막도 초원도 가다 보면 다른 풍경이 보인다. 그러나 바다는 끝까지 가도 바다만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사방을 둘러도 모래뿐인 사막도 방향을 정하고 걷다 보면 끝이 보인다. 가도 가도 똑같을 것 같은 초원도 결국 산을 만나 끝난다."
오작은 처음 본 바다 때문에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바다가 사막이나 초원보다 만 배는 크다고 들었다. 그건 사막과 초원을 걸은 것의 만 배를 가면 끝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자단의 호기로운 말에 오작은 가슴이 벌렁였다.
"하늘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하늘의 끝을 봤다는 사람은 없지만, 하늘에도 끝이 있을 거다. 고난에 뜻이 꺾이지만 않는다면 하늘의 끝에 뭐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좋은 말씀 명기하겠습니다."
"끝을 볼 수 없다면 하늘을 없애라. 멸천공을 열심히 익히면 불가능하지 않다."
오작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단이 오행마를 재촉해 앞서자 그제야 얼굴에 어두운 기색을 비쳤다.
'원수가 아주 대단한 모양이구나. 하긴, 내게 걸린 저주만 봐도 쉬운 상대는 아니겠지. 근데 왜 그냥 죽이지 않고 저주를 걸었을까? 아기인 내게 무슨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해변을 따라 한참 가다 보니 작은 부두가 눈에 띄었다.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이 역력한 부두에는 배 몇 척이 정박했고, 널판자에 삐뚤삐뚤하게 주酒라고 쓴 허름한 주막도 있었다.
풀을 엮어 올린 지붕은 그나마 온전하지만, 벽은 반쯤 뜯기다시피 하여 안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보였다.
"가자."
주인의 재촉에 오행마는 빠른 속도로 달렸고 망아지 역시 처음 보는 바다에 신났는지 심술 안 부리고 오행마를 얌전히 따랐다.
오행마야 원래 하루에 천 리도 가는 준마고, 말썽꾸러기 망아지도 심술이 많아서 그렇지 발이 느리진 않았다. 두 필의 말과 두 기수는 순식간에 작은 부두의 허름한 주막에 도착했다.
"어디서 온 협객이시오?"
오행마는 북부에서도 덩치가 큰 편이다. 말보다는 나귀나 노새가 많은 다른 지역에선 평생 보기 힘든 준마다.
그래선지 험상궂은 얼굴의 주막 주인도 자단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어디서 왔는지가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 물었어야지. 천일도로 가는 물길을 아는 사람 있어?"
마중 나와서 자단과 대화하던 주막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말을 태울 만한 크기의 배가 없기도 하지만, 천일도는 암초가 많아서 큰 배는 못 갈 거요. 그렇다고 말을 두고 가면 당일로 도둑맞을 거요."
그제야 오행마에 생각이 미친 자단은 이마의 주름을 깊게 키웠다.
북해와 달리 동해의 배는 작다. 큰 배가 많은 북해에서도 오행마를 태울 크기의 배는 구하기 힘들다. 북해보다 훨씬 거칠어 배가 적은 동해에선 모래밭에서 바늘 찾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그리고 천일도는 아무나 들이지 않소. 천일도를 지키는 요괴들이 낯선 사람을 보면 다짜고짜 잡아먹을 거요."
"요괴? 천일도에 웬 요괴지?"
"구망 어르신이 외손주를 얻었소. 외손주를 해치려는 놈들이 있어 요괴들을 불러다 천일도 주변을 지키는 것이오."
잠깐 고민한 자단은 주막으로 다가가 은빛 조개껍데기를 꺼내 흔들었다.
"누가 천일도에 가서 소식을 전하면 이걸 주겠다."
은빛 조개껍데기를 본 어부들 눈엔 탐욕이 한가득 서렸다. 그러나 눈으로만 욕심낼 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몇 년 뼈 빠지게 일해봐도 모을지 모르는 돈이다. 게다가 너흰 요괴랑 이미 안면을 튼 거 아닌가?"
"그렇긴 하오만, 우린 천일도 근처의 족참도足站島까지만 갈 수 있고 천일도에 오를 수는 없소."
족참도는 지름이 석 장밖에 안 되는 작은 바위섬이다. 외부에서 온 손님은 족참도에서 내린 다음 천일도의 배로 갈아타야 하는데, 여기 어부들은 천일도에 손님으로 갈 만한 신분이 되지 못한다.
'노리는 적이 강한 모양이구나. 방비를 이리도 신중히 하는 걸 보면.'
물길을 알면 천일도까지 가는 길은 안전하다. 짧게 편지를 적어 오작에게 쥐여 보내도 된다. 그러나 사람을 먹는 요괴가 있다면 다른 얘기다.
오작이 비록 타고난 재능으로 수련 기간에 비해 강한 편이지만, 저주의 영향과 작은 육체 탓에 한계가 있다.
구망이 섬을 지킬 목적으로 부른 요괴라면 오작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가는 것도 문제다.'
그냥 망아지도 군침을 흘리며 노릴 놈이 세상천지에 가득하다. 눈이 삐지만 않았다면 그 가치를 모를 리 없는 오행마는 더 말하면 입이 아프다.
웬만한 놈들이야 오행마와 오작의 힘으로 상대할 수 있지만, 영위앙의 수하 중 욕심이 많고 힘이 센 자가 적지 않다. 우연히라도 그런 자의 눈에 띄면 전후 사정 안 따지고 오작부터 죽이려고 할 작자가 넘친다.
"숙부. 제게 창을 주시면 한 몸 지킬 자신 있습니다."
깊은 고민에 빠졌던 자단은 오작의 말에 머리가 시원해졌다.
'사부 말대로 난 미련하기 짝이 없는 놈이구나.'
천하 마병의 수좌를 차지한 홍영창이라면 웬만한 적이 와도 두렵지 않다. 최악의 상황에 부닥친다고 해도 오작의 목숨을 살려서 도망칠 정도는 된다.
이렇게 쉽고도 간단한 해법을 떠올리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자단은 은빛 조개껍데기를 다시 흔들었다.
"좋다. 날 족참도까지 가장 빠르게 데려다줄 사람만 나서라. 족참도까지 제때 도착하면 이 은패銀貝를 준다."
어부들이 고함을 질러가며 나섰다. 자단은 가장 짧은 시간을 제시한 어부한테 으름장을 놓았다.
"네가 말한 시간을 어기면 요괴 먹이로 던져줄 거다."
"걱정할 거 없소. 저들이 모르는 나만 아는 물길이 있으니까."
일거리를 받은 어부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옷을 분주히 챙겨 입으면서도 다른 어부들을 토닥이는 걸 잊지 않았다.
"돌아오면 내가 멧돼지 한 마리 사서 잔치를 열 테니 다들 너무 낙심하지 말게나."
어부가 준비하는 사이, 자단은 소매에서 홍영창을 꺼냈다. 길이가 십이 척이나 되는 창이 소매에서 나오자 오작을 힐끔거리던 어부들이 눈을 내리깔았다.
"영위앙 정도가 오지 않으면 널 해칠 사람이 없다. 그러니 여기서 꼼짝도 말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
자단은 어부들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자단이 떠나면 오작을 해치고 말을 훔칠 생각을 했던 어부들이 제 발이 저린지 흠흠 거리며 고개를 술상에 파묻고 열심히 먹는 척했다.
자단 손에서 홍영창을 받아 든 오작은 창 중간을 손으로 잡고 힘껏 휘둘렀다. 자기 키의 두 배나 되는 무거운 창을 갈대처럼 가볍게 다루는 모습에 자단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고, 나쁜 마음을 먹었던 어부들은 점점 쭈그러들었다.
"자, 지금 출발하면 해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거요. 서두릅시다."
어부의 재촉에 자단은 조금 남은 걱정을 훨훨 털어버리고 배에 올랐다.
노를 열심히 저어 어느 정도 깊은 바다까지 나간 어부는 돛대를 세우고 작은 돛을 펼쳤다.
손가락에 침을 발라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가늠한 어부는 돛대에 달린 막대기를 틀어 방향을 조절했다. 풀과 나무 속껍질을 엮어서 만든 돛은 바람을 받아 배를 힘차게 밀었다. 바람을 타고 빠르게 가던 배가 원하던 물길에 들어섰고, 어부는 잽싸게 돛을 접고 돛대를 뽑았다.
해류는 두 불청객을 거절하지 않고 등에 실은 채 세차게 흘렀다.
- 작가의말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여 펼치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여러분도 즐거운 여행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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