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통일전東部統壹戰
병국구려兵國玖黎
구려국은 무기가 강하고
엽국칠봉獵國柒峰
칠봉국은 사냥을 잘한다
조각달이 서쪽 하늘에 애처롭게 걸렸다. 진용산을 떠나고부터 쉬지 않고 달린 오작은 동부에 진입하기 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치우는 멍한 얼굴로 풍령비를 만지작거렸다. 수련으로 오른 건 아니지만, 귀기가 귀화로 변하며 치우의 법술 경지는 큰 폭으로 상승했다. 덕분에 주문을 안 읊고도 영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걱정하지 마. 다들 무사할 거야."
오작 역시 서부에서 헤어진 일행이 걱정되지만, 현재는 구망에게 강신한 청룡을 만나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에 근심을 꾹 눌렀다.
"무릉산에도 없고."
치우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무릉산에 갔을지 몰라서 편익조를 그쪽으로 날렸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다.
"풍령도 아니고 무릉산도 아니라면, 거기밖에 없어."
오작의 말에 치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양부가 있는 거기?"
"그래."
치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설영에게 금계산의 방향과 거리를 물었다. 설영은 성판으로 확인하고 대답했다.
"이쪽이야. 거리는 오천육백 리 정도 되겠어."
치우는 바로 편익조 네 마리를 날렸다. 넷 중 누구라도 그곳에 있다면 편익조가 찾아낼 것이다.
"형. 편익조는 얼마나 빠르게 날지?"
"삼천 리는 이틀 정도. 오천 리는 닷새. 오천육백 리니까 엿새 정도 걸리겠네."
날개가 하나뿐인 편익조는 날아서 이동하지 않는다. 거리에 따라 도착 시각이 달라질 뿐, 순간이동으로 목적지에 나타난다.
거리가 오천 리 넘은 관계로 엿새가 지나야 네 마리 편익조가 금계산에 나타날 수 있다. 금계산에 도착한 네 마리 편익조는 각자 목표로 한 사람이 있는지 찾아내 치우의 말을 전할 것이다.
"여와는 일각도 안 걸렸잖아."
"뭔가 방법이 있었겠지."
법술은 사용자에 따라 부가적인 효과를 보이기도 하고 완전히 다른 위력을 보이기도 한다. 복희나 여와는 술사로서 그렇게 높이 평가받지 않았는데, 편익조를 날리는 법술 하나만 봐도 그 경지가 절대 얕지 않았다.
치우는 여전히 시름을 내려놓지 못하고 풍령비를 만지작거렸지만, 오는 내내 찌푸렸던 얼굴은 조금 풀어졌다.
그리고 사흘이 지났다.
"형. 저기 크게 싸우려나 봐."
한쪽은 천 명이 넘었다. 갑옷과 투구는 물론 방패까지 든 정예로 보였고, 활을 멘 자가 어림짐작으로 삼백이 넘었다. 그러나 무기는 갑옷이나 방패에 비해 부실해 보였다.
더구나 맞은편에 선 삼백 명 규모의 군대가 전부 청동 무기로 무장하여 크게 비교되었다.
"숫자 적은 쪽이 구려국이잖아."
오작은 강 건너 불처럼 구경하는 치우를 타박했다.
"응? 우리 할아버지네 나라라고?"
구려국 병사는 삼백 명 정도로 가죽 갑옷을 입고 청동 무기를 들었다. 그러나 투구도 방패도 없고 숫자도 적어 초라해 보였다.
셋은 은신술을 펼친 채 구려국 진영에 접근했다.
"장군. 그만 퇴각하라는 국왕의 명령입니다."
장군은 부장의 말에 이를 꽉 악물었다.
"안돼. 우리가 철수하면 천이 넘은 백성이 저들에게 죽거나 끌려가 노예가 된다."
"삼백 명 병사가 더 귀합니다."
구려국은 동부 최강국이다. 청제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오장국이 근래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여전히 구려국에 미치지 못한다.
구려국은 넓은 평야와 더불어 동부 최강의 군대를 보유했다. 천 명에 달하는 정예 군대는 질긴 가죽 갑옷과 금속 무기로 무장했고, 농사철에도 전투 훈련만 한다.
삼백 명 군대면 웬만한 국가의 천 명 규모 군대와 싸워도 이길 수 있는데, 상대가 하필이면 칠봉국이다.
칠봉국은 경내에 산봉우리가 일곱 개 있어 칠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평야가 대부분인 구려국과 달리 농사지을 땅이 얼마 없지만, 산짐승이 매우 많다.
사냥으로 고기를 얻고, 짐승 가죽과 이빨 그리고 발톱으로 쌀을 바꿔 먹는 국가다.
육식을 주로 해선지 성질이 더럽기로 동부에 유명하며 산을 차지하려는 요괴도 죽이거나 쫓아낼 정도로 투쟁심이 강하다.
구려국과 거리도 가까워 신하국을 자처했는데, 몇 년 전부터 오장국의 지원을 받으며 적으로 돌아섰다.
칠봉국의 군대는 백 보 밖에서 떨어지는 나뭇잎도 맞추는 명궁이 여럿 있고 오장국의 지원으로 갑옷과 투구는 물론 방패까지 장만했다.
이쪽이 훨씬 정예여서 근접하여 싸우면 지지는 않겠지만, 병장기를 맞대기 전까지 저들이 쏟아붓는 화살에 얼마나 죽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멍청한 놈. 우리 병사 태반이 이 지역 출신이다. 이대로 버리고 가면 병사들의 사기는 어쩔 거냐?"
"장군. 놈들이 청제한테서 술사도 여럿 지원받았다고 합니다. 어서 퇴각해야 합니다. 게다가 왕명을 어긴 죄는 또 어찌할 겁니까."
"내가 도울게."
장군과 부장은 깜짝 놀라며 허리에 찬 칼을 뽑았다.
"누구야!"
키가 십이 척이나 되고 황금색 비늘갑옷을 입은 건장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는데도 주변 병사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너 마준이지?"
"아니요. 난 마준의 아들 마협이오."
"나 치우야."
"천일도로 갔던 왕손이란 말이오? 그럼 아직 열네 살이라는 건데."
마협이 치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설명하기 귀찮았던 치우는 귀종술로 수백 마리 귀신을 불렀다. 아기 치우가 귀신을 불러 시녀와 시종들을 골탕 먹인 이야기는 마협도 들어서 익히 알기에 상대의 말을 조금씩 믿기 시작했다.
"내 할아버지는 잘 있지?"
"정정하십니다."
"근데 어쩌다 칠봉국 같은 팔푼이가 구려국을 넘보게 됐지?"
그때 오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쪽은 술사가 다섯 있는데 수준이 낮아."
"마협. 우리가 먼저 친다. 나랑 형이 술사부터 해치울 거야. 그리고 화살도 막아줄게. 넌 지금부터 반 각 뒤에 적을 향해 돌격한다. 알았지?"
마협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장군이었으면 치우의 정체를 의심하며 좀 더 확인하려 했겠지만, 마협은 변경의 백성들을 지키려는 열망에 치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은신술로 모습을 감춘 치우와 오작은 칠봉국 군대가 진을 친 곳으로 달렸다.
"저 장군은 중용 받기 힘들겠다."
"왜? 백성을 지키려는 마음이 갸륵하잖아."
"청제 쪽에서 일부러 함정 판 거면 어쩌려고. 천 명 지키려고 귀한 병사 삼백 명을 죽이면 국가에 큰 손실인데."
"그래도 손실을 따지며 함부로 백성을 버리는 것보다는 나은 거 같아."
"백성을 쉽게 버리지 않은 건 잘한 일이야. 근데 좀 더 의심하고 확인해야 한다는 말이지. 차라리 장군 말고 백성을 다스리는 재상 하면 좋겠다."
"장군.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치우의 기세에 눌렸던 부장은 오작과 치우가 사라지고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마협을 말렸다.
"보졸아. 이건 기회다."
"네?"
"지금 구려국 주변의 국가들 모두 오장국의 쌀을 지원받고 우리와 등을 돌렸다. 우린 천천히 마르는 연못 신세다. 그런데 칠봉국의 병사 천 명을 없애면 어떻게 될까?"
"왕께서 크게 칭찬하시겠죠."
"멍청이. 넌 늘 왕이 어떻게 생각할지만 생각하니까 부장인 거다. 어떻게 하는 게 백성과 국가에 도움이 될지 고민해 봐라."
그러나 사고의 한계로 보졸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협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저들을 확실히 이긴 후 칠봉국에 쳐들어간다. 칠봉국의 왕과 왕족 목을 모조리 베고 구려국의 땅으로 만든다."
마협의 기세에 눌린 보졸은 입을 열어 반론하지 못했다.
"보졸.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나눠준다."
보졸은 고분고분 마협의 지시를 따랐다. 병사들은 술이 반쯤 담긴 흙 사발 하나에 고기 몇 덩이씩 나눠 받았다.
"방금, 치우 왕손께서 다녀가셨다."
치우의 이름이 언급되자 병사들이 크게 환호했다. 비록 십여 년 전에 구려국을 떠났지만, 왕의 대대적인 선전으로 치우는 구려국 모든 백성의 흠모를 받았다.
"왕손은 키가 이만했고 용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으셨다. 우리 어려움을 알고 저기 배은망덕한 칠봉국의 무리를 응징할 것을 내게 알리셨다."
병사들이 양손을 번쩍 올리며 더 크게 환호했다.
"다들 잔을 들어라."
병사들은 자기 앞에 놓인 술이 담긴 흙 사발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이 술을 마시고 우린 적과 싸운다. 저 배은망덕한 새끼들을 처단한 후 칠봉국에 간다. 가서 지 어미랑 홀 붙어먹은 칠봉의 왕과 그 개자식이 싸지른 새끼들을 모조리 죽인다. 마셔라!"
술을 쭉 마신 병사들이 마협을 따라 흙 그릇을 바닥에 힘껏 던졌다. 그리고 자기 몫으로 배당된 고기를 품에 넣었다.
"치우 왕손과 함께 싸우자!"
사기가 충천한 병사들이 마협의 외침을 복창했다.
마협과 부장이 앞장서고 그 뒤엔 나무 방패라도 장만한 병사들이 따랐다. 방패가 없는 병사들은 조금 뒤에서 달렸다.
오작과 치우는 구려국 군대가 출발하는 걸 확인하고 바로 움직였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다섯 술사는 오작의 창에 심장이 터지고 치우의 주먹에 머리가 깨졌다.
"적이다!"
오작은 창을 휘둘러 고함을 지른 병사의 머리를 때렸다. 창에 맞은 병사가 그대로 혼절했다.
"치우야, 명경지수."
"명경지수!"
치우는 술사를 죽이며 솟아오른 살기를 어렵게 눌렀다. 추가로 살인할까 봐 걱정되어 칼도 안 꺼내고 맨손으로 덤비는 병사들을 상대했다.
대부분이 무공조차 익힌 적 없는 일반 병사여서 주먹질 한 번으로 쉽게 기절시켰다. 오작 역시 창을 휘둘러 병사들을 빠르게 눕혔다.
둘을 향해 화살 수십 개가 어마어마한 기세로 날아왔다. 요수촌에서 역목이 쐈던 것보다는 기세도 속도도 부족했지만, 웬만해선 피하기 어려운 공격이었다.
그러나 치우도 오작도 연신 날아드는 화살을 무시했다. 오작의 몸에 닿은 화살은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고, 치우의 몸에 맞은 화살은 오던 기세 그대로 튕겼다.
"놈!"
잘 만든 갑옷을 차려입은 장수가 창을 들고 치우한테 덤볐다. 어마어마한 창술을 보여주는 오작보다 덩치만 크고 맨손인 치우가 더 쉬워 보인 것이다.
"형."
치우는 맹렬한 기세로 자신을 덮치는 장수한테서 도망쳤다. 대신 오작이 치우 자리로 가서 창을 부드럽게 내질렀다.
장수는 목에서 피가 사방으로 뿜어질 때도 창에 찔린 사실을 몰랐고, 미처 눈을 감지 못했다.
"장군. 적이 몰려옵니다."
칠봉국의 장군은 부장의 부름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구려국 군대가 빠르게 접근했다.
"침입자 둘은 오장국에 맡기고 우린 구려국 군대를 상대한다."
오장국에서 파견한 청제의 수하 백 명이 오작과 치우를 둘러싸고 남은 병사들은 구려국을 상대하러 움직였다.
"너무 얕보이는 기분인데?"
상대를 죽일까 봐 조심하던 치우가 툴툴댔다.
"발사!"
칠봉국의 병사라고 전부 활이 있는 건 아니다. 만들기도 어렵고 쉽게 망가지는 거여서 가난한 자는 장만하기 힘들다.
반대로 생각하면 활을 보유한 자들 대부분은 돈깨나 만질 만큼 사냥에 능숙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삼백 명 정도가 날린 화살은 대부분 돌진해오는 구려국 병사들의 머리 위를 정확히 노렸다.
"달려!"
상대가 화살을 날리자 마협이 외쳤다. 치우가 화살을 막아준다고 했지만, 고작 둘이서 천백 명이나 되는 군대가 화살조차 못 날리게 견제해준다는 말을 마협은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그래서 적절한 빠르기로 달리다가 상대가 시위를 당기자 갑자기 속도를 높였다. 화살을 피하려면 방패 말고는 이 방법밖에 없다.
그때 시원한 기운이 전력으로 달리는 구려국 병사들의 볼을 스쳐 허공에 얼음 장벽을 소환했다. 너무 얇아서 반대편이 훤히 보이는 얼음이건만, 칠봉국의 능숙한 사냥꾼들이 쏜 화살을 모조리 막아냈다.
화살을 멈춰 세운 얼음 장벽은 사라지지 않고 구려국 병사들의 움직임에 맞춰 함께 이동했다.
"왕손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마협의 외침에 병사들이 악을 썼다. 전력으로 달리는 와중에 소리 지르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린 최강 구려국이다. 하나도 안 죽고 적을 모조리 처단한다."
흥분한 병사들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뜨거운 눈으로 칠봉국 병사들을 노려봤다. 빨리 가서 더러운 주둥이를 다신 못 열게 목과 심장에 칼을 박고 대가리를 깨서 뇌수를 쏟게 해주고 싶었다.
"방벽, 방벽을 쌓아라."
칠봉국의 장군은 오장국에서 배운 방어진을 지시했다. 전원 방패를 든 칠봉국 병사들은 훈련받은 대로 움직여 방패로 벽을 쌓았다.
그러나 훈련량이 적어 어설프게 쌓은 방패벽으로 구려국의 정예를 막지 못했다.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광분 상태에 들어간 구려국의 병사들은 칠봉국이 쌓은 방패벽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뛰어넘기도 했다.
'제길. 똥 됐다.'
앞에는 승냥이 같은 구려국의 정예 병사들이다. 게다가 정체 모를 술사가 이들을 돕고 있다.
뒤엔 용맹하기가 범 같은 두 사내다. 오장국에서 지원 온 병사들의 악다구니에 점점 공포가 짙게 배어나고 있으니 안 봐도 어떤 상황인지 뻔하다.
게다가 청제가 파견한 다섯 술사가 주검이 되었다. 싸움에 이기더라도 장군의 머리는 몸통과 분리되어 소금에 절여 청제한테 보내질 거다.
- 작가의말
형, 저기 호텔이 불타고 있어. 구경 가자.
너네 아버지 호텔 아니야?
시발, 수룡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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