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왕적무혈槍王赤無血
창왕투식槍王偸式
창왕은 초식을 훔치고
노조탐혼老祖貪魂
노조는 혼을 탐내다
북망산의 공기는 퀴퀴하고 텁텁하다. 해골들에겐 기세 따귀가 없는데 뭔가 사방에서 꾹 눌러오는 느낌이 든다. 하늘엔 해도 달도 아닌 흐릿한 빛을 뿌리는 뭔가가 있다.
"오작이라고 합니다. 그대는 누굽니까."
오작의 대답에 하얀 해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에 무게가 있구나. 그 정도면 내 창을 더럽히진 않겠지. 난 창왕 적무혈이라고 한다."
생사를 도외시하고 오작에게 무작정 덤비던 썩은 해골들은 어느새 멀찍이 물러나 둘을 둥글게 감쌌다. 오작은 대화하면서도 절대감으로 주변의 바닥을 느꼈다.
돌이나 뼈들이 잔뜩 굴러다니고, 발이 빠질 만한 구덩이도 흔했다. 이 모든 게 대결의 변수가 될 수 있다.
"그럼 만병지왕萬兵之王(모든 병기의 왕)을 다루는 자들끼리 자존심을 건 대결 한 번 해보자꾸나."
적무혈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창을 내질렀다. 곧은 오작의 창과 달리, 적무혈의 창은 살짝 휘었다. 찌르기보단 휘둘러서 베는 게 더 나은 형태다.
"당신의 무기는 창이 아니라 호월도弧月刀 같습니다."
오작은 상대가 내지른 창을 회피하면서 말했다. 기세가 전혀 안 느껴지는 상대여서 실력을 추정할 수 없지만, 자신을 창왕이라고 칭하는 걸 보면 절대 약한 존재는 아니다.
그리고 약한 존재여도 대화로 흔들어 이득을 보면 좋은 거고, 대화 과정에 의외의 정보를 얻을지도 모른다.
"천하의 무기는 크게 넷으로 나뉜다. 창과 도, 방패와 투석."
'옛날 사람이구나.'
오작은 상대가 오래 전에 죽은 사람임을 알아챘다. 무기가 발달하지 않은 시절엔 병기의 세세한 분류가 이뤄지지 않았다.
길면 창, 짧으면 도, 넓으면 방패, 던지는 건 투석. 상대 무기는 굳이 따지면 장병기의 도에 속한다. 그러나 상대는 창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무기술도 지금처럼 세분되지 않았을 거야.'
결심을 내린 오작은 적무혈의 세 번째 찌르기를 피하는 동시에 회선창으로 첫 공격을 했다. 그러나 오작의 예상과 달리 적무혈도 몸을 움직여 오작의 공격을 피했다.
관일홍과 달리 관일회선창은 위력이 약해 보인다. 창을 회전하며 내지르기에 창끝이 흔들려서 허접한 공격으로 오해받기 일쑤다.
게다가 속도도 느려서 상대는 바로 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회선창을 얕본 상대는 마지막에 급가속하는 창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오작의 찌르기를 피한 적무혈이 다시 창을 찔러왔다. 오작은 번뜩 드는 생각에 회피 대신 흘리기를 시도했다.
오작은 적무혈의 창날이 몸에 닿으려는 순간 허리를 틀었다. 꽤 수준이 높은 흘리기와 팔괘자수선의의 방어력 덕분에 오작은 작은 피해도 입지 않고 상대의 무기를 흘렸다. 동시에 창으로 적무혈의 심장이 있어야 할 부위를 찔렀다.
오작의 예상대로 적무혈은 피하지 않고 흘리기를 시도했다. 오작의 창은 하얀 늑골에 살짝 닿았다가 그대로 허공을 찔렀다. 비록 직선 찌르기지만, 회전을 안 넣어 속도가 꽤 빨랐다. 오작 자신이라면 팔괘자수선의 없이 적무혈처럼 깔끔하게 피할 자신이 없었다.
"도둑질입니까?"
한 번 보는 것으로 오작의 기술을 그대로 베꼈고, 심지어 오작보다 뛰어나다. 이대로 대결이 길어지면 상대는 오작의 모든 기술을 더 높은 수준으로 배워간다. 그렇게 되면 오작은 절대 이길 수 없다.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세월 동안 여기 갇혀 살았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지. 너만큼 내게 자극을 주는 상대는 오랜만이니 쉽게 안 죽이겠다. 그러니 목숨 걱정은 말고 네 실력을 마음껏 펼치거라."
적무혈은 말하는 중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무기가 달라 오작의 회선창을 똑같이 흉내 내지는 못했지만, 뭔가 깨달은 게 있고 그걸 시도하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오작은 피하기도 하고 흘리기도 하면서 관일홍 초식은 절대 펼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상대의 살짝 휜 무기는 관일홍 초식을 펼칠 때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어설픈 자라면 오히려 관일홍 초식에 휘둘리겠지만, 한 번 보고 훌륭하게 따라 하는 적무혈이라면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 싸우던 적무혈이 갑자기 뒤로 물러났다.
"흥. 무기술을 일부러 숨기려고? 그럴 수 있는지 한번 보자."
적무혈이 물러서는 대신 해골들이 잔뜩 몰려왔다. 오작은 최대한 찌르기로 모든 공격에 대비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전후좌우에서 몰려오는 해골들을 회선창으로만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일홍 초식은 끝내 안 펼쳤지만, 휘두르고 창대로 후려치는 등 수많은 초식을 보여야 했다. 게다가 여러 공격을 상대할 때 어쩔 수 없이 펼친 흘리기와 회피 방법을 적무혈이 빠르게 배워갔다.
"자, 다시 해보자꾸나."
해골들을 물리고 적무혈이 다시 등장했다. 베고 후려치고 휘두르고 찍는 다양한 공격을 적무혈이 펼쳤다. 그러면서 오작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자세히 살피고 오작이 반격할 때 써먹었다.
그렇게 한참 싸우다 적무혈이 물러나고 다시 해골들이 몰려왔다.
"비겁하게 뭡니까?"
"네가 숨기는 게 있으니까 이러는 거지. 싸우다 보면 명정酩酊 상태로 들어가서 네가 품은 무기술을 모두 드러낼 거야. 그때까지 서로 인내를 갖추고 버텨보자."
한편.
치우 역시 오작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수많은 해골이 몰려와 치우를 공격했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오작과 달랐다.
치우의 칼에 쓰러진 해골은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잘게 부수지 않고 그저 몇 토막만 내도 썩은 뼛가루를 흩날리며 바닥을 힘없이 뒹굴었다.
덕분에 치우는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꽤 빠른 속도로 전진했다. 안타까운 점은, 오작이 있는 방향이 아닌 반대로 걸었다.
쓰러뜨린 해골이 천을 넘은 후, 두려움을 잊고 덤비던 뼈다귀들이 물러났다. 치우는 칼을 들고 곧장 멀리 보이는 산으로 달렸다.
직감이 저곳에 살길이 있다고 알려왔을뿐더러, 오작이라면 자신보다 먼저 북망산에 도착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때문이었다.
"뭐야?"
황량한 주변과 달리 북망산은 생기가 넘쳤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곳곳에 푸른 나무가 가득했고, 드물지만 꽃을 피운 나무도 있었다.
오랜 기간 사람의 손길이 안 닿았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정비된 계단이 있었고, 산꼭대기엔 커다란 궁전도 보였다.
멀어서 확신하긴 어렵지만, 낡고 오래된 느낌은 아니었다.
차라리 바깥처럼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모습이었다면 경계심이 덜했을 것이다. 상식과 어긋나는 모습에 치우는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관찰했다.
그때, 검은 장포로 온몸을 감싸고 모자에서 드리운 면사로 얼굴까지 가린 여자가 나타났다. 겉으로 살결 하나 안 드러냈지만, 체형과 걸음걸이로 치우는 여자가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무슨 목적으로 창녕궁蒼寧宮을 방문하셨는지요."
치우의 추측대로 목청이 청아했다. 손에 든 칼을 소매로 넣은 치우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제법 점잖게 대답했다.
"목적은 내 일행이 아는데, 어디 있는지 찾아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저희는 창녕산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밖엔 온갖 부정한 것들이 넘쳐나거든요."
"나보다 먼저 여기 도착한 사람이 없어?"
"그렇습니다. 근 삼 년 동안 당신이 첫 방문자입니다."
치우는 잠깐 고민하다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자신과 달리 바깥의 해골들은 오작에게 꽤 위협적인 듯했다. 무공에 대한 이해나 초식의 정교함은 오작이 월등히 뛰어나지만, 힘과 체력 그리고 법력 등은 치우보다 훨씬 못하다.
그러나 밖으로 아무리 걸어도 해골이 가득하던 그 황량한 벌판은 나오지 않았다.
"들어오면 자력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사람을 내보낼 수 있는 건 환혼노조뿐이죠. 원하시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치우는 검은 장포의 말을 믿지 않았다. 풍괴는 분명히 북망산에서 홍영창을 훔쳤다고 했다. 귀한 법보를 훔친 도둑놈을 순순히 내보낼 리는 없으니 당연히 나가는 길이 따로 있다.
"내 일행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어."
검은 장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계단을 타고 산을 올랐다. 치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직감은 여전히 북망산으로 가라고 속삭였다.
'이번엔 내가 북망산의 비밀을 풀고 형을 구해야 하나 보다.'
뒤늦게 결심을 내린 치우는 검은 장포가 걷던 계단을 따라 창녕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산을 오를수록 숨이 가빴다. 평소라면 이보다 훨씬 높은 산을 무거운 짐을 들고 올라도 땀 한 방울 안 흘렸을 것이다.
치우는 멈춰서 한참 기다렸으나 직감은 여전히 창녕궁으로 가라고 종용했다. 치우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계단을 올랐다.
"잘 왔다. 나는 환혼노조라고 한다. 네 이름을 말하거라."
창녕궁 대전의 커다란 의자에는 흰 장포를 입은 노인이 있었다. 검은 장포와 마찬가지로 손발도 안 드러나게 몸을 꼭꼭 싸맸고, 얼굴도 면사로 가렸다.
검은 장포와 다른 점은, 흰 면사 밑으로 길게 기른 흰색 수염이 보였다.
"난 치우야. 어서 날 내보내 줘."
치우의 말에 환혼노조가 껄껄 크게 웃었다.
"그럼 넌 나한테 뭘 줄 건데? 여기서 사람 하나 밖으로 내보내는 거 얼마나 힘든지 넌 모르지?"
"뭘 원하는데? 어깨라도 주물러 줄까?"
"좀 데리고 놀려고 했는데 너무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노기 가득한 소리로 치우를 꾸짖은 환혼노조는 소매에서 긴 장대를 꺼냈다. 창과 같은 무기로 예측했던 치우는 소매에서 나온 물건이 깃발임을 확인하고 멍해졌다.
"초혼번招魂幡! 삼혼출규參魂出竅!"
초혼번은 선천영보보다 한 등급 낮은 조화성보造化成寶다. 조화성보는 요마화보와 마찬가지로 특이한 능력을 갖춘 법보가 많다.
순수 강함으론 조화성보와 요마화보의 우열을 가리긴 힘들다. 그러나 대부분 조화성보는 요마화보보다 쓸모가 훨씬 크다. 그래서 요마화보는 조화성보 다음으로 세 번째 등급이 되었다.
초혼번은 조화성보 중에서도 꽤 특이한 법보로, 산 사람의 혼을 뽑아내는 능력이 있다.
"뭐야? 시작한 거 맞지?"
치우는 어느새 소매에서 꺼낸 칼을 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무런 공격도 없었다.
"넌 인간이 아니구나."
환혼노조가 놀란 어조로 말했다.
"인간이 아닌 건 너겠지. 귀골."
치우는 풍괴한테서 환혼노조의 진짜 정체가 귀골이라는 걸 들어서 안다. 그러나 환혼노조는 풍괴가 몰래 들어와 홍영창을 훔쳐 도망친 사실조차 모르기에, 초면인 치우가 자신의 정체를 아는 데 매우 놀랐다.
'인간이 어떻게 초혼번을 버틸 수 있지? 내 정체까지 아는 걸 보면 그쪽이 분명하다.'
오작이라면 못 버티고 혼을 빼앗겼을 것이다. 제아무리 나이에 비해 뛰어나다고 해도 경지가 낮아 조화성보 등급의 법보를 버틸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치우는 귀왕의 보호도 있고 목숨이 아홉 개나 된다. 게다가 단전에 이룬 삼태극의 태극보인 중에 귀갑어 내단의 힘도 있어 초혼번에 저항했다.
"뭐야? 진짜 이게 다야? 그럼 나 반격해도 돼?"
치우는 환혼노조를 공격하려니 뭔가 찝찝했다. 그래서 말로 상대를 자극해 반응을 보려 했다.
"우리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구나. 아까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했지? 바로 주문을 외워 네 요구를 들어줄게."
표정 변화는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만으로도 환혼노조가 위축된 게 느껴졌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참 고맙지."
"내 주문에 저항하지 마. 그래야 널 밖으로 보낼 수 있어."
치우는 환혼노조의 뻔히 보이는 수작에 걸려들지 않았다. 믿을 상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치우는 마음에 남은 망설임을 지우고 환혼노조를 향해 달렸다.
"아이야. 달릴 때 늘 발밑을 조심해. 넘어지면 아프거든."
환혼노조의 말은 벌떼가 내는 소리처럼 윙윙 울렸다. 치우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숙여 발밑을 살폈다. 그러자 멀쩡하던 바닥이 구덩이로 변하면서 치우를 쑥 빨아갔다.
이번 함정은 오작이라면 안 속았을 것이다. 그러나 치우는 정신 수양이 실력보다 꽤 부족한 편이어서 환혼노조의 구혼송勾魂誦을 버티지 못했다.
치우의 모습이 사라지자 환혼노조는 쿨럭쿨럭 기침을 세게 깆었다. 초혼번의 삼혼출규에 이어 무저갱의 입구를 열고 구혼송으로 치우를 홀리기까지 했다.
멀쩡한 몸이어도 꽤 부담이 컸을 텐데, 의자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지금은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사부, 괜찮으십니까?"
이제껏 보이지 않던 검은 장포가 홀연히 나타났다.
"이미 죽은 몸이 또 죽기야 하겠느냐. 저놈이 태상노군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알아보아라. 혹시 인도人道의 그놈들이 또 쳐들어올 계획이라면 방비를 단단히 해야겠다."
제자에게 분부한 환혼노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통을 참았다. 몸에 뼈밖에 남지 않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게 정상이건만, 제자와 부하들과 달리 환혼노조는 조금만 무리하면 큰 고통이 덮쳤다.
'안타깝구나. 저놈의 혼이라면 수십 년은 버틸 수 있었을 텐데. 혹시라도 무저갱에서 살아남으면 그때 다시 혼을 빼앗아 보자.'
- 작가의말
오래전에 창왕으로 불렸던 사나이 등장. 환혼노조로 불리는 의문의 노인 등장.
뼈밖에 없는 이들은 두 주인공이 성장하는 거름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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