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경흑수해秘境黑水海
소녀방심少女芳心
소녀의 애틋한 마음은
여고함신茹苦含辛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다
멍하니 앉아있던 설영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사람은 보통 슬프거나 기쁘거나 감정이 격하면 눈물을 쏟는다. 그러나 가끔은 눈물을 쏟아서 슬픈 경우도 있다.
지금 설영이 그러했다.
'나쁜 자식.'
우마왕은 요괴치고 꽤 박식했다. 나이가 채 백 살도 안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런 우마왕의 도움 덕분에 설영은 치우가 천도시환술을 펼칠 때 불러온 기운으로 생긴 심마를 극복했고 경지도 조금 올랐다.
그러나 오작과 치우의 구체적인 행방을 몰라 우마왕의 영지에서 기다렸다. 그러다 오작의 편익조를 받았다.
오작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위험하고 중요한 일인데 상대가 강하여 숫자가 많을수록 불리하다. 빠른 이동이 필수이고 휴식을 최소화해야 하기에 갓 심마를 앓은 설영이 견디기 어렵다.
확실치는 않지만, 공공과 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북부의 일원인 빙령도의 공주가 연관되면 일이 커지고 복잡해진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행적도 탄로 하지 않아 설영으로선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심이 빙령도로 돌아가서 현무갑玄武鉀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비록 흑제 즙선기도 실패하고 현무의 화신인 공공도 실패했지만, 설영은 도전하기로 했다.
일생에 딱 한 번 도전할 수 있어서 확신이 생길 때까지 미뤄두려 했는데, 약해서 오작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왕궁에 돌아왔다. 오작의 말대로 큰오빠는 이미 왕이 되었고, 차갑게 대하던 가족들이 설영을 따뜻이 맞이했다.
왕의 자리를 아들한테 물려준 아버지는 설영을 그러안고 그간 홀대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여기까진 좋았다. 그러나 잠깐의 행복을 선물한 운명은 그때부터 설영에게 가혹한 얼굴만 보였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현무갑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그래도 왕이 된 큰오빠가 위로한답시고 괜찮은 갑옷 하나 챙겨줬다.
현무갑에는 못 미치지만, 지금 설영이 입은 옷보다는 나았다.
"설영아. 넌 빙령도를 떠날 수 없단다."
계획대로 현무갑을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간 오른 경지와 새로 얻은 갑옷으로도 오작한테 짐은 안 될 거라는 생각에 떠나려 했다. 그런데 큰오빠가 설영의 외출을 금지했다.
"네 혼처는 약 십 년 전에 정해졌다. 약속대로라면 올해나 다음 해에 널 데리러 올 것이다. 상대가 왔을 때 네가 없으면 그만한 결례가 어디 있겠느냐. 그러니 얌전히 방에 있거라."
늘 든든하게 설영의 뒤를 지키던 호위가 문을 막았다. 그저 싸워도 설영이 지고 수비만 하면 설영이 셋이 와도 못 뚫는다. 아무리 애써도 호위의 수비를 넘지 못한 설영은 반각의 법술에 당했을 때 먼 남부로 보내졌어야 했다고 몰래 호위를 저주했다.
"공주. 자꾸 울면 시집 못 갑니다."
호위는 왕의 명령에 따라 문을 지키는 게 너무 심심했다. 그래서 일부러 설영을 건드렸다. 과연, 화가 치민 설영이 빙령도를 꺼내 호위를 덮쳤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설영의 경지가 오르긴 했지만, 그렇게 확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기술이 큰 변화를 보였다. 게다가 설영이 손속에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아 호위한테 큰 도움이 되었다.
'슬픔을 잊게 도와주는 거야. 공주를 위해서라고.'
호위는 애써 자신을 합리화하며 대결에 집중했다. 설영을 아끼는 마음보다 대결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열망이 더 커서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늘 설영을 도발했다.
한바탕 싸워서 기운을 뺀 설영은 빙령도를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다시 드러누웠다. 대결의 흥분이 가라앉은 호위는 미안한 마음이 샘 솟듯 생겼다.
그러나 당장은 다신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갑자기 머리가 근질거리면 또 참지 못하고 설영을 도발할 것이다.
"공주. 시집가는 게 싫습니까?"
"아니. 그런데 누군지도 모르는 놈한테 시집가는 건 내키지 않아."
"내가 들어보니 남자가 굉장히 미남이라고 합니다."
호위의 예상과 달리 설영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잘생기면 뭐 해. 나보다 강해야 한다고."
"부부가 둘 다 강해서 뭐 합니까. 공주가 이렇게 강한데 남자까지 그럴 필욘 없죠."
설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또 싸우려는 줄 알고 긴장했던 호위는 설영이 다시 드러눕자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지금 경지가 오르려고 하는 중요한 시기여서 원할 때만 싸워야 한다. 싸움과 휴식으로 몸과 정신을 달궜다 식히기를 반복해야 흐릿하게 느껴지는 깨달음이 알맹이를 토해낸다.
"넌 상대가 누군지 알아?"
"저도 모릅니다. 그저 예전에 누군가가 그림 한 장 들고 찾아와서 혼약을 맺자고 청했고 태상왕太上王(왕위를 물려준 살아있는 전대 왕)이 흔쾌히 승낙했다고만 압니다. 그때 그림을 본 시종과 시녀들이 절세미남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만약 안 오면 어떻게 되는 거야? 올해나 다음 해에 오기로 했다면서?"
"그럼 혼약이 무효가 되죠. 그냥 혼약을 맺은 게 아니라 혼인 시기까지 정한 거잖습니까."
몸을 벌떡 일으킨 설영은 경건한 얼굴로 북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북을 주관하는 최고의 별이자 인연의 별인 북극성에게 기원하나이다. 강한 폭풍으로 아무도 못 오게 해주시옵소서. 가련한 소녀의 염원을 꼭 들어주시옵소서. 그리된다면 소녀가 잊지 않고 새벽마다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사를 짓겠나이다."
호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배에 힘을 꽉 줬다. 제단을 짓고 제물을 바치며 올리는 기도도 천계의 존재한테 닿을지 미지수다. 저렇게 무릎만 꿇고 격식도 안 지키는 기도는 중얼거림에 불과하다.
그런데 얼음벽에 비친 설영의 얼굴이 너무 간절하고 말투도 너무 애절하여 안 웃고 배기기 힘들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났다.
"왕께서 공주를 오라십니다."
"왜? 할 말 있대? 그럼 직접 오라고 해."
설영은 평소 말수가 적고 표정도 없었다. 타고난 아름다움에 강한 무력까지 겸비하여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그래서 시종과 시녀들 사이에서 설영이 사실 인간의 몸에 깃든 얼음의 정령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이번에 돌아온 이후 인간적인 면모를 너무 많이 그리고 여과 없이 보여줬다.
"왕명이라고 하옵니다."
설영은 더는 배짱을 부리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시녀 둘이 황급히 설영의 머리를 만졌다.
옷매무새가 단정해지자 두 시녀가 앞장섰다. 호위는 설영과 다섯 걸음 거리를 유지하며 따랐다.
"무슨 일인지 알아?"
"경하드리옵니다. 공주를 데리러 혼약자가 왔다고 합니다."
설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내가 너무 악독한 기도를 해서 북극성이 벌을 주는 건가?'
"본인이 직접 왔느냐?"
호위의 질문에 시녀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왕께서 이미 그림과 대조하여 본인임을 확인했나이다."
"공주. 솔직하게 원하는 바를 왕께 토로하십시오. 제가 돕겠습니다."
호위의 말에 가출했던 설영의 정신이 돌아왔다.
"진짜야?"
"그럼요. 저는 공주 편입니다."
"오빠가 내 청을 안 들어주면 도망가는 걸 돕겠다는 말이야?"
앞에서 걷던 시녀 둘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커다란 눈으로 서로 바라봤다. 이대로 모른척해야 할지 철부지 공주를 말려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른 왕자나 공주라면 그러지 말라고 충언을 건네겠지만, 지금까지 같은 인간이라기보단 뭔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고귀한 존재 취급을 했던 설영 공주여서 함부로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공주가 원한다면 말입니다."
호위의 말에 설영은 용기가 마구 솟았다.
"고맙다. 내 꼭 오빠를 설득해 네가 불충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겠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설영은 출발할 때와 달리 미적거리는 두 시녀를 재촉했다.
"뭘 꾸물대는 거야. 빨리 가자."
넷은 구불구불 긴 통로를 지나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에는 스무 명이 넘은 대신도 자리하고 있었다.
"전하. 설영 공주는 이 혼사를 반대한다고 합니다. 부디 왕명으로 혼약을 무효로 돌려주시옵소서."
정작 설영은 가만히 있고 호위가 나섰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대전에는 왕과 대신들 외에 두 사람이 더 있었다. 누구도 아닌 바로 얼마 전에 헤어진 치우와 오작이었다. 그리고 왕의 손에 들린 그림에 있는 열 살 남짓의 잘생긴 아이는 누가 봐도 어린 오작이었다.
"공주의 의지가 굳건하다면야 어쩌겠소. 그럼 이 혼약은 취소."
"아니야!"
"하지 않겠소."
대신들이 손으로 입을 막고 부들부들 떨었다. 호위는 한술 더 떠서 바닥에 드러누워 데굴데굴 굴렀다.
치우 역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오작은 뒷짐을 쥔 채 천장을 보며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뜨거운 기운이 설영의 단전에서 확 솟아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뭐야. 다들 짜고 날 놀린 거야?"
"아닙니다. 저도 어제야 그림을 봤습니다."
호위의 변명에 설영은 부끄럽고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맺혔다.
설영이 맨날 슬픔에 잠겨 의기소침해 있자 왕은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호위한테 그림을 보여주며 설영이 사모하는 남자랑 비교해 누가 나은지 물어봤다.
결국 둘이 같은 사람임을 확인한 왕은 바로 설영한테 알리려 했다. 그런데 근처 빙령도에서 손님 둘이 찾아온다는 소식이 왔고, 그 손님이 바로 오작임을 안 왕과 호위는 설영을 골려줄 계획을 짰다.
사실 호위가 오는 내내 웃음을 억지로 참았는데 설영은 자기 속만 태우느라 미처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
"대신들은 이만 물러가시오. 오늘 보고 들은 일은 왕명으로 소문을 금하오."
대신들이 웃음을 참느라 아픈 뱃가죽을 문지르며 인사하고 떠났다. 대전에는 어느새 왕과 설영과 호위 그리고 오작과 치우만 남았다.
"굳이 이러실 필요는 없었는데 말입니다."
오작의 말에 왕은 코를 살짝 실룩였고 설영은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기분이 언짢았다면 미안하오. 왕의 자리라는 게 정으로만 움직이지 않소."
호위야 순수하게 재미로 참여했지만, 왕은 일부러 설영의 철없는 모습을 대신들한테 보여주려는 속셈이었다.
설영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극성파들은 죽이거나 추방하는 거로 잘 정리했지만, 여전히 설영의 위신이 왕보다 높다.
지금까지 고고하게만 여겨지던 설영이 의외의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 생각이 바뀔 것이고, 왕의 자리는 더 단단해진다.
"날 찾은 이유가 따로 있다고 들었소."
왕은 설영이 자신한테 실망할까 봐 길게 얘기하기 싫었다. 다행히 오작 역시 지난 일을 계속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 아니어서 왕의 의도대로 화제를 바꿨다.
"흑수해로 갈 배를 주십시오."
북해에는 검은 바다가 있다. 얼음보다 차고 먹물보다 검은 흑수해는 빠지면 다시 떠오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저 손이나 발을 담그고 있어도 온몸이 썩는다.
나무로 된 배도 순식간에 썩어 사라진다. 지금까지 흑수해에서 무사히 돌아온 배는 빙령도에서 만든 얼음배밖에 없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특별한 곳은 반드시 그에 어울리는 특별함이 있다. 왕은 오작이 혹시 흑수해의 비밀을 푼 게 아닌지 기대되었다.
"신농의 아들이자 염환국의 국왕 강제명이 거기 있습니다. 공공한테 잡혀서 말이죠."
"공공이 흑수해에 있다고? 사실이오?"
공공은 얼음배를 빌린 적 없다.
"얼음배가 가장 확실할 뿐 유일한 대책은 아닙니다."
왕은 잠시 고민했다. 오작은 설영의 짝이다. 흑수해는 자칫 실수하면 목숨을 잃는 험한 곳이다. 게다가 그곳엔 공공이 있다.
생각 같으면 위험한 곳에 못 가게 막고 싶었다. 그러나 호위의 말을 들으면 오작의 무공은 호위와 설영이 힘을 합쳐도 상대가 아니었다.
"축융이 돕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약속 시각에 도착하지 못하면 축융의 분노가 여기까지 미칠지도 모릅니다."
오작이 축융을 들먹이고나서야 왕은 비로소 결심을 내렸다.
"얼음배를 준비하겠소."
왕은 시종을 불러 창고에 얼음배가 몇 척 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떠나기 전에 먼저 혼례을 올리는 건 어떻소?"
왕의 말에 설영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러나 두근거림도 잠시, 설영은 큰오빠가 자신이 오작과 함께 못 떠나게 하려고 수작을 부린다는 걸 알아챘다.
"나도 같이 갈래. 그래도 되지?"
설영은 왕이 아닌 오작한테 질문했다. 어차피 오작만 동의하면 큰오빠는 무시해도 된다.
"설영아. 네 부군이고 나이도 나랑 비슷한 분이다. 언행을 주의하거라."
왕의 꾸중에 설영의 눈이 커다래졌다.
"서른다섯입니다."
오작의 나이를 들은 설영은 너무 억울했다. 스무 살이어서 오작이 나이 많다고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까 봐 가슴 졸였던 걸 생각하면 화까지 났다.
"공주는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며칠 안에 데리러 오겠습니다."
화난 것도 잠시. 오작의 차분한 말투와 시원한 목소리를 들으니 그간 맺혔던 것들이 사르르 풀렸다. 그러면서 얼굴과 이마는 물론이고 귀와 목도 빨개졌다.
"그리고 이걸 맡아주십시오."
오작은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둔각이 변한 구슬을 설영한테 맡겼다.
- 작가의말
동생을 아끼지만 왕좌는 뺏기기 싫은 우리 빙령도의 귀요미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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