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몽고흉길托夢告兇吉
제노봉망帝露鋒芒
청제가 서슬을 드러내고
휘도천일揮刀天壹
천일도로 칼을 휘두르다
사람은 아름다운 꽃을 보면 기쁘고, 그 아름다움이 시들면 슬프다. 서산을 붉게 태우는 석양을 아름답다고 칭송하다가도 황혼이 지면 상실감을 느낀다.
맑은소리에 기분이 좋고 싫은 소리에 귀를 닫는다. 향기로운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고 역한 냄새엔 숨을 멈춘다.
부드러운 것을 만지기 좋아하고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은 싫어한다.
이렇듯, 사람은 오감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래서 청제는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고요하고 어두운 밀실을 선호했다. 눈치를 덜 보고 자기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는 점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지금, 청제와 네 신하가 오랜만에 모인 캄캄한 방엔 거친 숨소리와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만 들렸다. 차 마시는 소리나 옷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청제의 통보와 함께 사라졌다.
기대와 흥분과 걱정을 비롯한 온갖 감정이 난잡하게 섞인 가운데, 청제가 입을 열어 자신이 만든 정적을 깼다.
"하기로 했으니 이제부터 시간과 싸우는 거다. 눈치채기 전에 손쓴다."
"근데 왜 하필 구망입니까? 저는 이제껏 구려국으로 생각하고 준비했습니다."
성격 급하고 생각의 깊이가 부족한 우사는 끝내 질문을 참지 못했다. 다른 셋처럼 청제의 속셈을 아는 척해보려고 했지만, 결국엔 작은 자존심을 지키기보단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을 해결하기로 했다.
"살계경후殺鷄儆猴."
청제의 대답에도 우사는 눈만 껌뻑였다.
"원숭이는 인간과 가장 닮았다는 걸 알고 다른 짐승을 깔본다."
우사와 가장 친한 운사가 청제 대신 설명했다. 서로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우사가 청제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전 재산을 걸 자신이 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기고만장해서 인간한테도 함부로 하지. 그래서 원숭이 보는 앞에서 닭을 잡는 거로 경고하는 거야. 원숭이는 나무도 잘 타고 몸도 날렵해서 잡기 힘드니까. 닭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주며 너보다 세다고 과시하는 거지."
"그 닭이 구려국이 아닌 구망인 것이 궁금한 거야."
"토사호비兎死狐悲라는 말이 있어."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한다. 같은 네발짐승이어서 동병상련을 느낀다는 말이다.
"얼핏 생각하면 토끼는 토끼고 여우는 여우잖아. 토끼가 죽는다고 여우랑 무슨 상관일까 싶지만, 토끼 다음엔 여우인 나일까 봐 걱정되어서 슬픈 거야. 우리가 구려국을 치면 다른 국가들은 어떻겠어? 다음엔 날 치는 게 아닌지 걱정이 태산일 거야."
태산은 동부와 북부 경계선에 있는 커다란 산이다. 주변이 모두 평야라 실제보다 훨씬 커 보여 큰 산이라는 뜻으로 많이 거론된다.
"그러나 구망은 아니야. 이번 구망은 어느 국가의 왕족도 아니고 법력도 전대 구망들보다 약해. 결정적으로 구망의 죽음으로 손해 보는 국가가 없어."
"구려국은 손해 보잖아."
"구려국만 손해 보는 거지. 그것도 왕자가 구망의 딸과 혼인하면서 얻었던 이득만 사라져. 결국엔 십여 년 전에 구망과 전혀 관련이 없었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야."
운사와 우사의 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청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면서도 우리가 입는 피해를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상대야. 동시에 구려국 옆에 서고 뒤에 숨은 국가들에 보내는 경고장이자 회유의 신호이기도 하고."
우사는 생각의 깊이가 부족할 뿐이지 멍청이는 아니다. 구망을 침으로써 구려국을 중심으로 뭉친 국가 연합을 흔들 수 있다. 구려국이 연합의 중심이 된 데는 자체의 강함뿐 아니라 치우로 이어진 구망과의 관계가 분명히 작용했으니까.
반면. 구려국을 직접 공격하면 이해관계에 있는 국가들이 더 똘똘 뭉칠 뿐만 아니라 구려국을 싫어하거나 청제와 사이가 좋은 국가들마저 딴생각을 품을 수 있다.
'청제는 급하지 않구나.'
마음이 급한 우사는 구려국 공략을 시작으로 하여 하루빨리 동부 칠십여 개 국가를 하나로 뭉치고 싶었다. 그러나 청제는 구망을 쳐서 아군의 결집력을 높이고 최대 적수인 구려국과 그 연합을 흔드는 거로 일단 만족했다.
'너무 밖으로 돌았어.'
우사가 다른 셋보다 생각이 깊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봄부터 초가을까지 비 내려주러 동부의 수십 개 국가를 돌아다니느라 청제와 함께 보낸 시간이 적은 이유도 있었다.
"이번 일은 뇌공과 풍백에게 맡기겠다. 운사와 우사는 제국諸國(모든 나라)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니까 무력을 동원하는 일엔 여전히 나서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한다."
"그럼 경석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명목상으로 오장국의 왕은 여전히 경석이다. 그 외의 모든 자리는 청제의 사람으로 채워졌다.
"언제나 지금처럼 최선의 선택을 할 수는 없어."
청제는 아릿한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경석이 몰래 청제에게 먹인 만성독이다. 물론, '몰래'는 경석의 착각이고 청제는 일부러 당해줬다. 덕분에 경석은 청제가 하는 일을 전혀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힘을 실어줬다.
"오장국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미움을 사는 일을 할 때가 있겠지. 경석은 그때 죄를 짊어지고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며칠 흘렀다.
폭포 곁에서 수련을 마치고 눈을 뜬 오작은 바로 곁에 있는 구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법력이 전대 구망들에 비교해 부족할 뿐이지 법술 이해와 다루는 기술 자체는 역대 최고라더니. 과연 대단하구나.'
구망이 은신술을 비롯해 여러 법술로 정체를 감춘 거였다면 오작도 놀라지 않는다. 청제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구망이어도 애송이 오작에겐 어마어마한 술사니깐.
그러나 구망은 아무 법술도 펼치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자신의 법력은 물론 주변의 수많은 기운까지 얼마나 자연스럽게 통제했는지 수련으로 감각이 날카롭게 선 오작이 미처 접근을 몰랐다.
"간밤에 청룡께서 탁몽托夢했다. 치우가 태어났을 때를 빼면 처음이구나."
오작은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
"치우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괴한의 습격에 따님과 사위가 비명非命(제 명을 못 살고)에 가셨죠?"
"과연 영민하구나. 어리석은 난 그때 치우의 태몽인 줄 알고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
"제가 뭘 해야 합니까?"
"치우랑 함께 동부로 가서 상황을 살피거라."
구망의 말에 오작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넌 이제부터 천일도를 떠나도 된다. 청룡께서 입을 열어 말한 거니 틀림없을 거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치우를 데리고 떠나라는 말씀이죠?"
"그래. 난 구망이니 도망 다닐 수 없다. 그럼 세상 사람이 날 조롱할 거야. 게다가 넌 중부와 남부의 지리와 풍습에도 밝고."
"알겠습니다."
여타 사람이면 함께 도망가자는 둥, 남아서 함께 싸우겠다는 둥 한참 난리를 피웠을 거다.
그러나 오작은 그러지 않았다.
'천일도는 청제한테 가장 좋은 먹잇감이다. 구려국이나 삼묘국보다 훨씬 쉬우면서도 뒤탈이 거의 없다.'
천일도를 위협할 상대는 청제밖에 없고, 청제가 작심하고 칼을 휘두르면 천일도는 피하지 못한다.
"치우한텐 뭐라고 할까요?"
"치우도 안다. 청룡께서 치우한테도 탁몽했다."
'일이 어렵게 됐구나.'
구망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올린 오작은 경공을 펼쳐 치우가 있음 직한 곳으로 달렸다.
치우는 오작의 예상대로 둔각을 타고 평야를 달리는 중이었다. 사계절이 봄인 천일도에서 매일 배불리 먹고 마음껏 달린 둔각은 오행마와 비슷한 덩치로 자랐다.
어릴 때는 검붉던 털이 윤기가 생기며 완전한 검은빛이 되었고 자태 역시 오행마 못지않게 늠름했다.
오작이 나타나자 말은 투레질로, 기수는 큰 손짓으로 반겼다. 치우는 아직 흥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진지한 오작의 얼굴에 뭔가 중요한 얘기가 있음을 감지하고 말을 몰아 다가갔다.
"어제 탁몽했다며?"
"응. 청룡이 그러는데 곧 큰 싸움이 날 거래."
치우를 내려놓은 둔각은 오작 몸에 얼굴을 몇 번 비비고 물 마시러 샘으로 갔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염탐하러 가지 않을래?"
오작의 말에 치우는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십이 척이나 되는 덩치와 절대 어울리지 않는 미성에 오작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할아버지가 날 데리고 도망치래?"
"적과 싸울 때 중요한 두 가지가 뭐라고 했지?"
"나를 아는 것과 적을 아는 것."
"근데 우린 적을 모르잖아.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중 하나를 하러 가는 거야."
오작의 말에 치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 속아."
무공은 오랜 기간 수련한 오작이 훨씬 뛰어나다.
하지만 법력 혹은 내공으로 불리는 기운은 비슷한 수준이다. 오작의 수련 기간이 훨씬 길지만, 오작의 기운은 저주의 영향으로 상한선이 정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일정 수준을 절대 넘지 못했다. 힘은 당연히 키가 이 척이나 큰 치우가 강하다.
결론만 말하자면, 치우가 고집을 부리면 오작은 강제할 수단이 없다. 심지어 법술 운용이 뛰어난 구망도 치우의 천재성 앞에선 무력하다. 타고난 재능은 수십 년의 노력과 아주 쉽게 맞먹었다.
'어르신이 나한테 부탁하는 덴 다 이유가 있지.'
오작은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성격이다. 유일한 친인인 자단이 실종으로 사라진 지 구 년이나 되었는데도 매일 흔들림 없이 수련했다.
천일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걸 알기에 걱정할 정성으로 수련하는 게 훨씬 낫다는 판단이었다.
치우의 고집을 꺾는 건 불가능한 일임을 바로 인정하고 타협안을 꺼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 한 발씩 양보하는 거야."
치우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오작을 바라봤다. 늘 상상을 뛰어넘는 오작의 신묘한 대처와 계책은 언제라도 질리지 않았다.
"배를 만들자. 둔각도 태울 수 있는 큰 배를."
오작은 치우가 거절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본론에 앞서 치우가 흥미를 느낄 만한 것들로 마음이 기울게 해야 한다.
"배를 타고 저기 양수도楊樹島에 숨는 거야."
양수도는 천일도에서 북쪽으로 삼 리 정도 떨어진 작은 섬으로, 특이하게도 버드나무가 가득하다.
"놈들이 천일도를 공격할 때 상황을 보고 임기응변臨機應變하는 거야."
배를 만들어 둔각을 태우고, 몰래 숨고, 임기응변하고. 모두 치우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다.
"임기응변? 어떻게 할 건데?"
"적의 전력이 적당하면 우린 양수도에서 출발해 놈들의 뒤를 치는 거야. 그렇게 앞뒤로 협공하면 비슷한 전력이어도 놈들은 쉽게 무너질 거야."
"적이 약하면 우린 양수도를 떠나 적의 본거지로 갈 거야. 적이 약하다는 건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천일도를 치는 척하면서 구려국이나 삼묘국을 공격할 수도 있거든. 우린 그 정보를 캐서 놈들을 방해하는 거지."
치우는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를 생각하면 귀여운 행동인데, 커다란 덩치 때문에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적이 너무 강하면 우린 대륙 중부로 가."
"왜?"
"가서 내 숙부이자 네 양부인, 통천교주의 관문제자이고 북부 제일의 고수며 천하제일 후보인 자단 협객을 찾는 거지. 숙부의 도움을 받아 놈들을 물리치고 어르신을 구하는 거야."
치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좀 전에 신났던 게 거짓이었다는 듯이 무거운 얼굴로 먼바다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할아버지가 죽으면?"
"복수해야지. 숙부 가르침을 받아 강한 사람이 되어서 우리 힘으로 복수해야지."
"형은 자단 양부가 반드시 죽을 지경에 놓였을 때 혼자 떠날 수 있어?"
오작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뒷짐을 지고 치우와 함께 먼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생각으론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남아서 같이 죽는 것보단 나라도 살아서 복수하는 게 맞는 일이니까."
오작의 빛나는 얼굴에 서글픈 웃음이 떠올랐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 세상 모든 일이 내 생각 같지 않으니까. 심지어 나조차도 내 생각대로 안 돼. 그러니까 직접 겪기 전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야."
평소엔 하나면 하나고 둘이면 둘인 오작이다. 치우는 이번에도 오작이 명쾌한 해답을 주길 바랐다. 그러나 오작도 정답을 모른다고 하자 혼란한 마음이 더욱 어지러웠다.
"뭐가 맞는지 모르지만, 해결책은 알지?"
"응. 양수도로 가는 거야. 만약 세 번째가 걸리면, 그땐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내 모든 걸 걸고 널 도울게."
"고마워. 형."
머리는 복잡하고 마음이 혼란하다. 이런 상황에선 뭔가에 열중하는 게 좋다. 되도록 수련과 같이 노력해야 하는 일이 아닌,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마침 둘은 둔각을 태우고 바다를 건널 만한 배를 만들어야 했다.
"귀종술."
치우는 귀종술로 배 만들 줄 아는 귀신을 불렀다. 그리고 일을 도울 귀신도 몇 마리 불렀다. 다행히 그간 바다 밑에서 건진 정체 모를 뼈가 많아서 귀신들의 몸을 해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 오작과 치우도 손을 보태니 둔각을 태우고 바다를 누빌 꽤 큰 배를 만드는 데 고작 두 시진밖에 걸리지 않았다.
- 작가의말
탁몽고흉길 - 꿈에 나타나 좋고 나쁨을 알리다.
약하다곤 해도 청룡의 화신인 구망. 풍백과 뇌공이 어떻게 상대할지 기대해 주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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