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마급화보妖魔級化寶
심곡유담深谷有潭
깊은 골짜기에 못 하나 있었으니
유독유질有毒有蛭
독도 있고 거머리도 있었다
멀고 먼 옛날, 어느 이름 없는 산골짜기에 못 하나 있었다. 좁은 골짜기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이 청명하게 비치는 맑은 못이지만, 극독을 품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짐승들은 멋도 모르고 못의 물을 마셨고, 마시는 즉시 칠공으로 피를 쏟으며 죽음에 이르렀다.
그렇게 아무도 안 살 것 같은 못에도 주민이 있었으니, 바로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거머리였다. 이들은 못의 물을 마시다 쓰러진 짐승의 피를 마시며 연명했고, 피가 마른 짐승의 사체를 연못 안으로 끌어들여 숨겼다.
이들 중에 특별히 혈탐血貪이 심한 거머리가 있었다. 가끔 독을 버티며 꽤 먼 거리를 도망가는 짐승도 있는데, 다른 거머리는 포기할 때 이 거머리만큼은 햇볕에 말라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연못을 벗어나 마른 땅을 기어 피 빨러 갔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피를 빤 덕분에 이 거머리는 다른 거머리보다 덩치가 월등했다. 덩치가 커질수록 피를 더 먹고 싶고, 그러다 보니 같이 피를 나눠 먹는 동족이 눈엣가시처럼 걸리적거렸다.
덩치 큰 거머리는 몰래 작은 거머리부터 물어 죽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덩치 차이가 벌어졌고, 마지막엔 대놓고 다른 거머리를 공격했다.
뒤늦게 거머리들이 힘을 합쳐 대항했지만, 결국엔 큰 거머리의 승리가 되었다.
그렇게 못을 독점한 거머리는 매일같이 포식했고 덩치를 지속하여 불렸다.
그러나 곧 문제가 발생했다. 작은 못은 덩치가 커진 거머리를 숨기지 못했다. 물 마시러 왔던 짐승은 커다란 거머리를 보고 두려움에 도망쳤다. 점점 식사가 줄고 급기야 열흘을 굶은 거머리는 큰 결심을 내렸다.
거머리는 연못의 독 품은 물을 모두 마셔버렸다. 그리고 용감하게 골짜기를 기었다. 몸의 수분이 다 증발하면 말라죽을 운명이지만, 거머리는 굶는 삶이 더 싫었고 피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거머리는 밤에 낮을 이어 골짜기를 기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골짜기는 끝이 없었고 몸을 적실 작은 웅덩이도 없었다.
까딱할 힘도 안 남은 거머리가 절망할 때, 다리 네 개가 난 뱀을 닮은 짐승이 나타났다. 머리에 뿔이 있고 멋진 수염도 기른 짐승은 입김으로 거머리를 훌쩍 들어 엄청나게 큰물로 데려갔다.
그곳이 용연담龍淵潭이라는 깊은 호수고, 자신을 구한 건 용이라는 사실을 거머리는 훨씬 후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목숨을 구원받은 거머리는 처음엔 감격의 마음으로 은혜를 갚으려 했다. 그러나 상대는 거머리한테 원하는 바가 없었다. 단 하나, 다른 생명을 해치지 말라고 당부했다.
거머리는 처음에 큰 짐승의 피를 조금만 마시는 거로 용의 부탁을 들어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피를 향한 갈증이 커져서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커다란 소 한 마리를 피 빨아 죽인 거머리에게 용은 벌을 내렸다. 깊이를 짐작기 어려운 호수 중간에 있는 금속 기둥에 거머리를 백 일 동안 묶어뒀다.
기둥은 탁한 기운을 깨끗하게 바꿔주는 정화주淨化柱다. 정화주 덕분에 거머리는 덩치도 줄고 몸의 기운도 많이 순수해졌다.
그러나 기둥은 기운만 깨끗하게 바꿔줄 뿐, 거머리의 더러운 마음마저 정화하지 못했다.
백 일을 채우고 풀려난 거머리는 겉으론 용의 말을 따르는 척하며 기회만 엿봤다. 그리고 만월의 밤 용이 여의주를 토하고 수련하는 틈을 타서 습격했다.
거머리는 용의 목을 물고 독을 주입했다. 거머리의 독은 생각보다 대단하여 용의 몸이 마비되었다. 거머리는 강한 힘을 품은 용의 여의주를 꿀꺽 삼켰다.
거머리는 비록 자신을 벌한 용에게 악심을 품었지만, 그저 여의주만 빼앗기로 했다.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여전히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의주가 뱃속에서 자신을 공격하자 생각이 달라졌다. 거머리는 여의주를 뱉어내거나 용의 피를 마셔 여의주를 굴복시키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여의주를 뱉으면 용이 다시 힘을 회복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거머리는 두 번째 길을 골랐다. 독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용의 목을 다시 물고 피를 사정없이 빨았다.
용의 피가 여의주를 감쌌다. 덕분에 여의주는 공격을 멈췄고, 거머리는 피를 통해 여의주에 담긴 힘을 조금씩 빨아들였다.
거머리의 이빨 하나만도 못한 작은 여의주건만, 안에 힘을 다 빨아들이는 데 천 일이 걸렸다. 거머리는 천 일 동안 정화주를 몸으로 칭칭 감고 여의주의 힘을 소화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여의주는 거머리에게 힘만 준 게 아니라 지식도 줬다. 새로운 지식은 자신이 죽인 게 용이고, 용은 신령한 동물이라는 걸 알려줬다.
그리고 자신도 용이 되었지만, 여의주를 망가뜨리는 바람에 영원히 승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승천하지 못한 용이 어떤 처벌을 받는지도 알았고, 자신은 이제 삼계윤회환에도 못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음도 알았다.
이제부터 맞이하는 죽음은 순환이 아닌 영원한 마침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네 명도 참 기구하구나."
거머리는 자신에게 말을 건 인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비록 자신보다 훨씬 작은 인간이지만, 여의주에서 얻은 지식 덕분에 자신보다 수백 배 강하다는 걸 알았다.
"청난화봉靑鸞火鳳이라는 새가 있다. 원래 봉황은 짝을 지어 태어나는데, 이놈만은 이상하게 혼자 태어났지. 시간은 야속하게 흐르는데 이놈의 짝은 늦게라도 태어날 생각이 없었다. 승천하지 못한 용과 마찬가지로 짝을 이루지 못한 봉황은 영원한 죽음을 맞이한다."
거머리는 멍하니 인간의 말을 들었다.
"내 사질 중에 태을진인太乙眞人이라는 아이가 있다. 근기는 평범한데 잔재주는 참 많은 아이지. 이 아이가 청난화봉에게 제안 하나 했다. 청난화봉을 법보로 만들어서 영생을 누리게 해준다고 약속했지. 대신 청난화봉이 변한 법보는 태을진인과 계약해야 한다."
거머리는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그렇게 나온 법보가 바로 풍화륜이다. 불과 바람으로 이뤄진 바퀴 한 쌍으로, 그 위에 서면 하루에 만 리도 달릴 수 있다. 그렇게 법보에는 요마급화보라는 등급이 생겼다. 요괴나 마수가 법보가 되는 길이 열렸고, 간단히 요마화보라고 부른다."
거머리는 작은 눈을 부릅뜨고 인간의 이어지는 말을 기대했다.
"난 통천교주다. 삼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지. 네가 법보가 되어 나와 계약한다면 너도 영생을 누릴 수 있다. 동의하느냐?"
그렇게 거머리는 홍영창이 되었다.
홍영창은 통천교주와 계약하고 수백 년 동안 많은 존재를 만났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자단을 만났고, 자단의 몸에서 피어나는 짙은 피 냄새에 끌려 두 번째 계약을 맺었다.
홍영창의 예상대로 자단은 봉래도를 떠난 후 수십 년 동안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다 십 년 전에 갑자기 홍영창을 오행마에 매달아 오작한테 보냈다. 오작이 있는 천일도로 향하는 과정에 여러 사건을 겪으며 홍영창은 풍괴의 손에 들어왔다.
풍괴와 홍영창은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다행히 한발을 만났다. 놀랍게도 피와 전혀 연관이 없는 한발은 홍영창의 말을 알아들었다.
풍괴는 홍영창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발을 놔줬다.
그러나 한발이 떠나고 홍영창의 생각이 바뀌었다. 십 년 동안 피를 못 마신 게 자단 탓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끊어버렸다.
원래부터 홍영창이 자단보다 더 강했고, 그간 수만 명의 피를 마시고 오장국의 독도 다 마신 덕분에 훨씬 강해졌다. 그래서 주종 관계가 명확함에도 둘의 연결이 끊어졌다.
오작은 홍영창이 자신을 거부하는 행동으로 자단과 홍영창의 계약이 끝났음을 알고 욕설을 퍼부은 것이다.
"출신 괜히 따지는 게 아니지. 출신으로 모든 게 정해지는 건 아니지만, 예외는 늘 드문 법이지."
소오 역시 상황을 어렵지 않게 알아채고 혀를 찼다.
홍영창이 웅웅 울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작과 치우는 물론이고 소오마저 홍영창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놈 지금 겁먹었어."
소오가 말했다.
홍영창 입장에선 겁먹을 만도 하다. 치우는 홍영창의 공격을 막은 적 있는 동주철갑을 입었다. 오작에게선 뭔지 모를 위험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혈편복을 한 줌 재로 만든 오뢰굉의 기운을 홍영창이 흐릿하게나마 감지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두려운 건 소오였다. 양화를 다루는 소오는 홍영창에게 매우 두려운 존재다.
"내가 네 진명을 알아. 독담혈룡毒潭血龍."
진명을 안다는 건 약점도 안다는 뜻이다. 오작의 협박에 굴한 홍영창은 결국 크기를 줄였다. 작아진 홍영창은 치우가 봉인술로 제압한 다음 소매에 넣었다.
"그래도 음흉한 놈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저놈이 순순히 네 손을 받아들이고 기회를 봐서 기습했다면 꽤 귀찮았을 거야."
소오의 말에 오작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래. 예전에도 오행마의 성질을 모르고 실수하는 바람에 독구가 죽고 오장국과 시비 붙은 적 있지. 난 무의식적으로 오행마나 홍영창을 좋게 그리고 쉽게 봤어.'
근본적으로 오행마는 요괴고 홍영창은 마수 출신이다. 그리고 지금껏 좋게 생각했던 우마왕 역시 의심할 여지가 많았다.
풍백이 나타나기 전에 치우와 오작을 발견하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사실이나, 은근슬쩍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점. 그리고 오작을 떠보는 듯한 모습도 종종 보여줬다.
'우리가 풍신과 한참 싸운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지. 우리 실력을 떠보려 했거나 위기 상황에 나타나서 자신의 공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일 거야.'
객관적으로 우마왕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건 맞지만, 그 기저에 깔린 의도가 어떤지는 의심해야 한다.
"여기 볼일은 끝났으니 이만 떠나자. 근데 현작과 오행마가 북망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소오의 말에 오작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을 멈췄다.
"홍영창을 도둑질한 요괴한테서 들었습니다. 홍영창을 거기서 얻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된 거구나. 난 북망산에 못 들어가거든. 현작은 들어갈 수 있고. 근데 이놈이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그냥 가버렸어. 난 그것도 모르고 돌아다니다가 홍영창이 이곳에 있는 걸 알고 여길 왔다."
소오는 짐이랄 것도 없고 오작과 치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결정을 내리자마자 출발했다.
오작의 옷은 주변 환경과 날씨 그리고 밤낮에 따라 색과 모양이 계속 변했다. 그래서 슬슬 치우가 욕심내기 시작했다. 계약도 필요 없는 최하급 법보여서 입는 사람을 바꾼다고 귀찮을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오작도 자신의 원수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 팔괘자수선의를 함부로 노출할 수 없었다. 동주철갑처럼 체화할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이름을 안 것도 우마왕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렇게 둘이 최하급 법보를 두고 며칠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모산 근처에 도착했다.
"난 여기서 기다릴게. 일이 끝나면 이곳으로 와라."
"같이 안 갈 겁니까?"
"벌레 요괴들이 새 요괴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 내가 가면 저놈들이 모조리 숨어서 코빼기도 안 비칠 거야."
소오는 밖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오작과 치우만 모산 밑에 있는 행상촌行商村에 들어갔다. 채 삼백 명도 안 사는 마을인데 커다란 객잔이 세 개나 있었다.
법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묵는 곳인데, 법보 의뢰를 할 정도면 다들 돈깨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객잔의 수준이 마을 규모보다 훨씬 뛰어났다.
오작과 치우는 우선 법보를 처분하기로 했다. 그러나 법보 시세를 잘 모르기에 조급해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거래 가격을 탐문했다.
법보의 가격은 법보의 등급, 법보의 품질, 성능, 희귀성 등 복합적인 요소로 가격이 정해졌다. 오작은 직접 묻기도 하고 귀동냥도 하면서 법보의 가격을 책정하는 법을 빠르게 익혔다.
- 어쩔래? 다 팔까 아니면 필요한 돈만큼 팔까?
- 다 팔자. 그리고 남은 돈으로 형 무기 하나 사.
고수는 무기를 탓하지 않는다. 그러나 손에 안 맞는 무기는 수련자의 수준을 오히려 떨어뜨린다.
실전에서야 어떻게든 집중하여 실수를 최소화하지만, 몇 시진씩 되는 수련 동안에도 그렇게 몰입하는 건 힘들다. 좋지 않은 무기 때문에 수련이 어긋나면 오히려 실력이 줄어들 수도 있다.
그래서 오작은 적은 법력에도 늘 월영인으로 마음에 드는 창을 만들어 사용했다. 치우처럼 기교보다는 힘에 치중한 무사는 괜찮지만, 세밀한 초식 운용을 중시하는 오작은 무기 고를 때 꽤 까다롭다.
"그것도 괜찮겠다."
마음을 정한 둘은 가장 큰 객잔 바로 옆에 있는 법보 거래소로 갔다. 법보 거래소로 거의 도착했을 때,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둘의 발목을 잡았다.
"형님, 여기서 다시 뵙는군요. 치우야, 너도 반갑다."
목소리의 방향으로 몸을 돌린 오작과 치우는 놀란 나머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되는 형천이 거지꼴로 나타났다. 찢긴 옷도 하체를 겨우 가릴 정도였고, 얼마나 굶었는지 얼굴이 초췌하고 눈동자가 흐릿했다.
- 작가의말
시골에서 상경하여 쫄쫄 굶는 놈을 살려줬더니 감히 오야붕 물건에 손을 대고, 죽이지 않고 채찍 몇 대로 용서했더니 앙심을 품고 등에 칼을 꽂네요.
근데 오야붕 죽이고 자리를 뺏고 보니 왕좌가 아니라 가시방석이죠. 그래서 무서워 벌벌 떠는데 국회의원 양반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뒤로 깡패검찰의 칼이 되어 세상을 난도질하다가 깡패검찰이 끌려간 뒤로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는데 결국 행적을 들켰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행보.
누군가 정치·누아르 소재로 이런 글 하나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Comment ' 0